성당에서는 각동회에 공문을 보내 가장 어려운 사람들을 보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배급을 주는데
밀가루
옥수수 가루
식용유
우유
뻐터
치즈
과자
옷
들을 나누어 주지만 과자들은 청주에 오기전에 중간에서 다 없어집니다.
한국인들은 된장과 고추장에 익숙해 있는데
뻐터와 치즈가 맞을리가 없어 다 버리거나 빨레비누인줄로 알고 빨래도 하다가 빨래도 다 버립니다.
옷은 너무나 화려한 색깔들이고 옷감은 구경도 못하던 기가막히게 좋은 옷들인데
그것을 입고 나가면
"저사람 구호물자 입었다"
라고 흉을 봅니다.
그게 어디 흉을 볼 일인가?
각 가정마다 목화를 심어 실을 뽑아 만든 광목으로 옷을 입고 다니기에
모두 하얀 옷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아름답고 좋은 옷들을 까만 염색을 해서 입습니다.
나라고 한국 사람이 아닌가? 나도 염색을 하여 입습니다.
구호물자로 인하여 신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그러자 내덕동에 대성당이 세워지고 수동에도, 서운동에도, 세워 집니다.
나귀엘모 신부님은 주교가 되어 인천으로 가셨고
지학순 신부님도 주교가 되어 원주교구로 가셨고
청주에도 파디 신부님이 주교님이 되시어 내덕동 성당으로 가십니다.
북문로 3가의 성당은 폐쇄되고 나는 서운동 성당으로 갑니다.
나도 성운동 성당으로 가서 일을 하는데 성당이 커서 내가 할 일들이 더 많아집니다.
서운동 초대신부님은 유 Fred, Luhmann 신부님으로써 미국 메리놀 신학교를 갖 졸업하자마자
바로 한국으로 오신 신부님이신데
아주 젊고 너무 잘생기신 미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호감을 느낍니다.
유신부님은 사회사업에 관심이 있어서 사회학을 더 공부하려고 미국으로 가셨고
후임으로 길 James Gillgan 신부님이 오셨습니다.
그 무렵 성운동 성당에는 고안드레아 회장님이 계셨고
최로살리아 여회장님이 계셨고
임데레사 여회장님이 계셨는데
그녀는 북한에서 오신 분으로써 두 아들을 데리고 있는데
큰아이가 장 인산 이고 동생이 장인남입니다.
후에 둘 다 성직자가되어 동생은 주교님이 되어 외국에 나가시고 장인산은 신부가 되십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