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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며칠 째인가! 고치고 또 고치고 논리적으로도, 현장을 답사하여도, 자리는 오직 한 자리! '우이빌라 2동' 아! 이 자리를 왜 일찍 찾지 못하였는가?
겸재공 묘소 터를 찾다(요약)
2019년 7월 17일 여천(與天) 정철중(鄭喆重)
우리나라 최고의 화성(畵聖)이신 겸재공의 생애와 그림은 많이 알려졌지만 미지로 남아있는 겸재공의 묘소 소재지에 대하여도 끊임없는 세간의 관심과 주목을 끌고 있다.
2017.11.13일 ‘16세 정황공의 양주송추도와 겸재공 묘소’라는 글을 카페에 게재하였고, 이 장소가 쌍문동 우이빌라 인근으로 추정되어 현지 답사한 내용을 정리하여 2018.10.21일 ‘겸재 정선공 산소터를 찾아서’라는 글을 게재한 바 있다.
기존에 많은 연구 자료가 있겠지만 최근에 발표하거나 출판된 자료가 있어 다시 한 번 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7월 6일에 검색자료를 찾아보니, 2016.12.13일자로 한국산서회의 조장빈 이라는 분이 발표하신 ‘양주송추도(楊洲松楸圖)의 정선 묘소를 찾아서’란 연구 자료가 있었다.
또한 같은 한국산서회의 회원이신 심산이란 분도 2019.6.28일자로 「산과 역사가 만나는 인문여행」이란 책을 발간하였는데, 이 책에서 ‘비 오는 날에는 바위글씨를 보러가자 - 귀록의 도봉산행과 겸재의 묘소를 찾아서’라는 글을 수록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2019.7.6일자로 조선일보에 책자발간 소개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분들의 연구내용을 알지 못한 채, 혼자 답사하고 생각을 정리했었는데 그 분들도 겸재공 묘소의 추정지를 도봉구 쌍문동 우이빌라 일대로 추정했다는 점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장소 비정에 대한 의견이 접근되었다는 것은 상호 객관성을 높다는 의미가 있다.
ㅁ 묘소 추정지 비교
ㅇ 겸재공 묘소 : 양주목(楊州牧) 해등촌면(海等村面) 계성리(鷄聲里) 간좌(艮坐)
ㅇ 겸재공 묘소 추정지 : 서울시 도봉구 쌍문1동 우이빌라 또는 북쪽 일대
- 2016.12.13. 조장빈, ‘양주송추도(楊洲松楸圖)의 정선 묘소를 찾아서’ : 우이빌라
- 2018.10.21. 정철중, 카페 광주화이팅 : 해등로 인근 및 우이빌라 일대
- 2019.06.28. 심산, 「산과 역사가 만나는 인문산행」 중 : 토치카봉 아래
- 2019.07.17. 정철중, 카페 광주화이팅, 재수정 : 우이빌라
ㅁ 2019년 7월 6일자 조선일보 기사 :「산과 역사가 만나는 인문산행」 심산 지음
~~ 중략
'인문학적 관점'에서 산을 바라본다는 건 산의 높낮이나 유명세와 관계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과정이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의 묘소 자리는 그가 눈을 감은 지 250여 년 만인 최근에야 서울의 한 작은 능선에서 발견됐다. 겸재의 손자 손암 정황이 조부의 묘지를 그린 '양주송추도'를 본 저자가 그림 속 도봉산 일대를 뒤진 끝에 찾아낸 것. ~~ 이하 생략
16세 손암 정황공이 최근에 주목받으신 것은 조부이신 겸재공의 묘역을 그린 「양주송추(楊州松秋)」의 영향이 크다. 이 미심(未尋)의 묘소를 찾는 데는 이 그림이 열쇠를 쥐었기 때문이며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의 화풍 때문이기도 하다. 고미술계에서는 조부의 진경산수화를 모사함에 그쳤다 하였으나 재평가해야한다는 주장도 있다.
손암공은 세간은 물론 집안에서도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족보에서조차 별다른 언급도 없다. 이는 후손이 무후(无后)되고 집안이 영락(榮落)한 영향도 있다. 겸재공의 장남이신 만교(萬僑)공의 차남이시며, 묘소는 오포면 자작촌(自作村) 후록(後麓)이다. 아들 이경(履敬)을 두셨으나 형 합(柙)공에게 출후(出后)하고 무후(无后)가 되셨다.
< 손암 정황, 대구달성도(大邱達城圖) >
유복열(劉復烈) 선생은 겸재공의 진경산수화를 이어받은 화풍으로 “조부의 화법을 존숭하였으나 형사(形似)에 그치고 진수(眞髓)를 얻지 못했다”라 평한 바 있으나, 유존된 그림 가운데는 비교적 기량이나 화격 및 필력에는 비교가 되지 않으나 활달하고 거친 필치로 조부 보다 자유분방한 필선들로 간취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노적쉬취(露積倅翠)」, 대구달성도(大邱達城圖), 대은암(大隱岩), 청풍계(淸楓溪), 「동래태종대도(東萊太宗臺圖)」 등이 있다.
< 대표작 북한산 노적쉬취(露積倅翠) >
2. 양주송추(楊州松楸)와 네이버 지도 비교
□ 양주송추 상 산소의 위치
< 양주송추 1 >
도봉산의 정상인 자운봉(740m)과 만장대, 선인봉, 그리고 왼편의 오봉(660m)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중턱부분은 과감히 생략하였으며, 우이암 아래로 이어지는 주룡을 중심으로 아래 부분은 사실적으로 그렸다. 묘소로 향하는 길을 따라 올라가면 오른쪽에 산소 4기가 있다. 짧은 능선의 중턱 아래에 위치해 있는데 제법 경사가 급하다. 능선의 방향대로 선영이 조성된 것이 아니고, 능성 끝 봉우리에서 간좌(艮坐) 방향으로 계단식으로 가족묘가 조성된 것이다. 그림 상에도 석물과 비석은 보이지 않는다.
<양주송추>도를 다시 살펴보면, 묘소의 아래 전방은 전답이며 동쪽 산 밑에 몇 채의 민가와 기와집도 들어서 있다. 묘소로 향하는 제법 큰 길을 통해 산소와 산 아래 마을의 민가로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묘소가 위치한 짧은 능선의 위쪽은 제법 능선이 길게 뻗었는데, 이 능선이 현재의 지도상에 어느 줄기인지를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 <네이버 지도> 상 산소의 위치
도봉산의 주룡이 방학로를 넘어 남쪽으로 길게 뻗어있다. 정의공주 묘와 연산군 묘역의 도봉산 둘레길을 따라 고개 마루에서 남쪽으로 오르면 왕실묘역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 길이 주룡(主龍) 길이다. 주룡에서 서쪽으로 뻗는 지맥은 매우 짧다. 여러 고총(古冢)을 지나 남행하면 토오치카를 구축한 봉우리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동쪽으로 한 분지가 흘러 초당초등학교 방향으로 나가는데 이른바 ‘초당맥’이다. 토치카봉 남쪽 아래의 짝 잃은 문인석을 지나 내리막길을 지나면 해등로 고개를 만나게 된다.
해등로 고갯마루에서 남쪽 주룡은 잠시 오르막인데 서쪽은 모두 주택으로 개발되어 있다. 이윽고 주룡이 마지막 봉우리를 맺고 좌우로 분기된다. 동남쪽이 쌍문근린공원으로 가는 ‘쌍문맥(雙門脈’)이고 서남쪽으로 분기된 줄기가 효문중고등학교와 덕성여대 방향으로 흐르는 ‘효문맥(孝門脈)’이다.
< 네이버지도 1>
* 토치카봉 : 도봉산에서 남으로 뻗은 주룡이 해등로를 만나기 직전에 불룩 솟은 작은 봉우리로 토치카가 구축되어 있다.
* 초당맥 : 토치카봉에서 쌍문동 초당초등학교 쪽으로 뻗은 해등로 북쪽의 산줄기
* 해등맥 : 토치카 봉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능선으로 도로에 끊겼는데 해등로 남쪽의 삼성빌라 아래까지 경사가 이어진
다. 또 한줄기 는 법종사에서 도로 위 서쪽(아카데미빌라)으로 능성을 형성한다. 법종사에서 금강사를 지나 북쪽
은 내리막길이다
* 법 : 법종사(法鐘寺)
< 네이버지도 2 >
<네이버지도 2>를 살펴보면, 토치카 봉우리에서 초당초등학교 쪽으로 뻗은 ‘초당맥’이 있고 남쪽 계곡으로 해등로가 동서로 길게 횡단하고 있다. 해등로의 고개 서쪽 길은 북쪽으로 상당부분 절개하여 일부 산맥을 끊었다. 해등로 중턱 북쪽의 법종사 우측도 역시 절개하여 축대를 쌓았다. 그러나 절개지인 법종사에서 아카데미빌라 서쪽으로 산맥이 살아있다.
법종사 남쪽 해등로를 건너면 ‘우이천로 48길’을 따라 삼성빌라 까지 내리막 경사가 이어진다. ‘천주교우이성당’에서 동쪽 주룡 방향으로 오르막이다.
우이빌라 북쪽 ‘우이천로 50길 28-5번지’의 단독주택은 높이 솟아올라 봉우리(高峰)를 형성하고 있고 이 봉우리와 주룡의 ‘우이그린빌라’ 지대를 연결하면 이른바 ‘빌라맥’의 산 능성을 이룬다. 이 ‘고봉(高峰)’의 바로 남쪽 아래가 ‘우이빌라 2동’이다. 이 곳 남쪽으로 평지를 조우한다.
3. 겸재공 가족묘 현황
□ 해등촌 계성리 묘소 현황
겸재공 가족묘소는 그림에서 보면 모두 4기이다. 족보에 의하여 유추하면 위쪽부터 ① 겸재공 및 경주이씨 합장묘, ② 만교공(장남) 및 경주이씨 합장묘, ③ 만수공(차남) 묘, ④ 재공(손자) 묘소 순서이다. 이 그림을 그리신 손암 정황공의 묘소와 만교공의 장자이신 합(柙)공은 경기도 광주(廣州) 자작촌에 묘소를 두었고 만수공의 아들인 재공을 끝으로 이곳의 가족묘원은 막을 내리게 된다.
* 족보에 만교공이 갑진(1724년) 생으로 기록되었는데 갑신(1704년) 생으로 고쳐야 맞다
□ 선대 묘소 현황
9세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서해(瑞海) 휘 응규(應奎) 공이 경기도 광주(廣州)의 문현산 아래의 자작촌(自作村)에 입향(入鄕)하신 이후, 10세 동지(同知) 증호조판서(贈戶曹判書) 휘 연(演)공의 아들 6형제 분 들의 많은 후손들이 이 곳을 중심으로 세거하게 되었다.
< 선대 묘소 >
* 글과 학문의 재주와 명망은 한 시대에 이름을 떨쳤으나 불행히 조세하셨다. 집안에 유집이 가전되었으나 누차 화재로 소실되어 한
평생의 뜻과 덕업을 되돌아 볼 길 없으니 길이 자손의 한이다.
< 1845년 발간 광주정씨 을사보 >
겸재공에 대한 족보 기록은 간략한 편인데, 가세가 기울고 자손이 영락한 것에 따른 것으로 1845년 광주정씨 족보 인쇄 초간본인 을사보를 살펴보아도, 최종 동지중추추부사에 오르고 한성판윤을 추증 받은 사실과 구체적인 행장이 기록되어있지 않다. 배 연안송씨는 정부인(貞夫人)으로 기록되었다. 다만, 이 당시에도 유고 수십권은 남아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자는 원백이고 호는 겸재이며 음직으로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일찍이 심취하여 「도설경해」 등 서묵이 기묘하여 중국인들이 탄복하였으며 관직은 하양현감에 이르렀고 수십권의 유고를 남겼다.
字元伯 號 謙齋 蔭僉正 嘗迷圖說經解等書黙妙爲中州人歎賞官至河陽縣監遺稿數十卷 |
< 증조부 11세 창문(창문) 공 묘소 : 경기도 광주시 오포면 추자리 선영 >
< 겸재공 조, 부의 납골묘원 : 경기도 광주시 오포면 추자리 >
4. 겸재공 묘소에 대한 두 가지 주장
겸재공 묘소의 추정지는 위에 살펴 본 바와 같이 두 곳의 장소로 의견이 나뉘고 있다. <양주송추>도 상, 묘소가 전답지역의 바로 위 언덕에 있었다는 점과 묘소 위의 긴 능선을 어느 지맥으로 보느냐의 두 가지 점이 핵심문제이다.
□ A설 : 토치카봉 기점 해등맥
- 한국산서회 심산 저자(2019.6.28. 발간 책자)
< 양주송추 2 해등맥도 >
해등로 고개 북쪽에 오르면 등산로 상 문인석 1점을 만나게 되며 조금 올라가면 봉우리 지역에 토치카 흔적을 만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북한산을 마주하는 전망이 있다. 서남쪽 바로 아래 부분에는 큰 참나무 몇 그루와 큰 소나무 두 그루 정도가 서있는 데 휴식용 프라스틱 의자가 6개 정도 놓인 주민의 휴식터가 있다.
여기서 간좌 서남 방향으로 능선이 이어 지는데 해등로와 법종사(法鐘寺), 금강사(金剛寺) 방향이다. 봉우리 아래 주위에는 양봉장이 파묘 형태의 터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여러 파묘 터의 흔적이 보이는데 특징 있는 고묘나 비석, 석물형태는 보이지 않는다.
간좌 방향을 탐색하기 위하여는 가시덤불과 교목 숲을 헤치고 나가야 한다. 토치카봉 일대는 능선의 정상부이므로 살필 필요가 없다. 이 지맥이 겸재공 산소가 위치하는 능성이라면 묘소 위치는 중턱 이하 지대이므로 해등로 바로 위 부분이거나 도로 건너 삼성빌라 쪽의 연장선상에 있게 된다.
그러나 이 주장은 하단이 전답지역과 만나지 않으며, 양주송추도의 초가집 마을 부분을 가기 위해서 ‘빌라맥’의 고지대를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설은 도로위의 능선이 그림상 긴 능선이라는 점을 살피지 못한 오류가 있다.
< 토치카 봉우리 >
□ B설 : 우이빌라 지역 : 조장빈(2016.12.13.일 글), 정철중(2019.7.13. 답사 후)
< 양주송추 3 ‘빌라맥’도 >
< 양주송추도 3 >의 토치카봉에서 뻗은 긴 능선이 Ⓐ능선인데, 법종사(法鐘寺)에서 해등로 북쪽의 지형이 높은 지대를 형성한다. 즉 법종사에서 북쪽의 금강사를 지나 북쪽 길이 내리막이고 법종사 서쪽 우이천 방향의 아카데미빌라 지대가 높다. 이 지맥이 비교적 긴 능성이므로 겸재공 산소 북쪽의 긴 능선이며 ‘해등맥(海等脈)’이라는 것이다.
< 네이버지도 2 >를 보시면, 해등로(海等路)에서 동아하이츠빌라, 삼성빌라 골목길(우이천로 48길)로 남행하면 비탈길로 내려오게 된다. 계속 진행하면 평지에 이른다. 삼성빌라에서 주룡(동쪽)을 바라보면 천주교우이성당을 지나 우이빌라 쪽으로 오르게 되는데, 이 골목길 북쪽에 자라 잡은 우이빌라는 비탈길 위로 가파르게 올라야 한다. 평지 전답지대의 북쪽과 만나는 산기슭이 되는 것이다. 우이빌라의 바로 북쪽 담 위의 민가(도봉구 우이천로 50길 28-5번지) 일대가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다. 이 봉우리가 주룡의 우이그린빌라와 연결되어 산등성이 지맥인 ‘빌라맥’을 형성하고 있다. 이 민가에서 북쪽으로는 내리막이므로, 해등로 위 능성과 ‘빌라맥’ 사이에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다.
양주송추도상 겸재공 산소터가 28-5번지 봉우리(高峰)에서 서남향의 우이빌라 1동~2동 간에 위치했다고 추정되는 이유이다. 우이빌라 2동의 빌라 뜰에서 서남향을 바라보면 묘지 터로 매우 훌륭하다는 느낌이 온다. ‘해등맥’ 보다 전답을 이루는 평지가 가깝고 마음이 훨씬 온화하고 평안하다.
이 우이빌라는 1985년에 건축되었고 우이그린빌라는 1986년에 준공되었다. 우이빌라 경비원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건축은 30년~40년 되었고, 1980년대에 단독주택들이 이 지역에 들어섰다는데, 개발 전에는 산이었고 아래 평지는 논밭지대였다고 한다. 적어도 쌍문동 일대가 1980년대 이전에는 산지의 형태가 보전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 빌라맥의 끝 봉우리 민가 28-5번지 >
< 우이빌라 >
5. 겸재공 묘소는 우이빌라 자리이다
∎ 주소 : 서울시 도봉구 우이천로 48길 21(쌍문동 524-87) 우이빌라
네이버 지도상 주택지구는 등고선이 없으므로 평지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에 실사를 통하여 세밀하게 파악하여야 한다. 이 ‘해등맥’ 줄기의 긴 능선이 주택지구에 숨겨져 있고, 남쪽지형에 ‘빌라맥’의 능성 또한 주택지구에 숨겨져 있다.
주룡에서 짧고 선명하게 뻗은 ‘빌라맥’의 남쪽으로는 평탄지 즉, 양주송추도상 전답지대에 접한다는 사실이다. <네이버지도 2>의 묘A가 산소자리라면 민가를 이루는 동네는 ‘빌라맥’의 산능성 언저리로 올라가야 되므로 주장하기 어렵게 된다.
양주송추도상 묘소의 북쪽 줄기가 길게 뻗어 있는데 이 줄기는 ‘해등맥’의 연장선으로 보아야 지형상 자연스럽다. <양주송추도 2, 3>의 Ⓐ맥이며 실제 답사 결과도 법종사 서쪽 아래 아카데미빌라로 이어저 산능성을 형성하고 있다.
방학동에서 우이령 아래로 넘어오는 길의 남쪽 지형에서 이 ‘해등맥(A맥)’ 줄기보다 길게 뻗어 나온 능선은 없다. ‘빌라맥’은 짧다. 짧은 능선의 끝자락에서 서남쪽 비탈면 아래 위로 늘어선 가족묘원은 우이빌라 지대로 추정할 때 너무나 자연스럽다.
겸재공 가족묘원이 전답지의 바로 위 부분이 민가가 들어선 가옥들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지형과 그림을 연구할수록 산소 터는 이 일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난 가을 혼자 현장을 서성일 때 암담함이 있었다. 다 끝난 일이라고! 실제 산소 터는 멸실되었다고 본다.
희망이 과하여 마치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그림 상 전답 바로 위의 산 기슭이 산봉우리 인근으로 오판되어서도 안 된다.
‘해등맥(A설)’이든 ‘우이빌라맥(B설)’이든 거리상 불과 몇 백 미터에 불과하고 작은 산봉우리 하나 차이이다.
아쉬운 점은 산지로 남아있던 이 지형이 1980년대에 개발되었다는 것이다. 일찍이 겸재공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면 보존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명성이 천하에 떨치고 불멸의 업적을 이루었어도 이를 기록하고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후대 사람들의 정성과 부지런함에 달려있다. 문필이 부족하면 기록을 부탁하여 남길 일이다. 생전의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는 것은 당대의 일이지만 영원히 효도하는 것은 수천 년간 업적과 명성을 빛나게 하는 것이다. 조선 삼천년래 최고 화성의 업적이 뿔뿔이 흩어져 꽃잎처럼 뿌려지고, 죽어 한줌의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였다는 것은 집안의 수치이고 나라의 슬픔이다. 적어도 이 산소자리라도 비정하여 기념비라도 세워서 공께 사죄하고 역사의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일이다.
술 한 병 들고
간좌 묘역에 앉아
도봉을 등지고 삼각산 석양노을 바라보네
아래엔 푸른 논밭 펼쳐지고
농부는 소 몰고 씨 뿌려 곡식이 여물던 곳
산바람 골바람 쏘이며
아들 손자 오순도순 이 곳에 앉아 있었네
양주송추도 한 장 손에 쥐어들고
오늘도 260년 전 이 언덕을 서성이네
산천은 변했어도
전할 말 있으련만 아무 말 없음이 더욱 서글퍼라
뜨거운 여름 날 바람 한줄기 불지 않는 곳
좁은 비탈 골목길엔 집들만 빼곡하고
우이빌라 시멘트 바닥 열기 뜨거워
넋조차 숨쉴 곳 없으리
인왕곡 살던 곳
금강산 빼어난 절경
한강변의 시원한 물줄기도
그림에 남아 명성은 세상에 드높은데
비갠 후 무지개처럼
붓질한 주인장 찾을 수 없네
북쪽의 830년 은행나무 청춘을 뽐내는데
어디에 계시는가
임군이 불러주신 효자여
어디로 떠나셨는가
쑥대는 캐내어 옥답을 만든다지만
한줌의 흙조차 파여져 육신이여 혼백이여 간 곳이 없구나
< 14세 겸재공 묘소 설단 : 경기도 광주시 오포면 추자리 선영 >
* 증정부인(贈貞夫人)이 증숙부인(贈淑夫人)으로 잘못 표기되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내연산은 대구경북지역본부장 재직시에 직원들과 함께 올라갔던 산입니다. 매우 아름다운 산입니다. 이 곳에 겸재공의 다녀가신 흔적이 새겨졌다고 하니 내연폭포 일대인가 봅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항시 건강하시고 좋은일만있으세요 ~~~~ 정원배 올림
감사 합니다
겸재공 묘소를 찾게 되기를 기원 합니다
책의 내용과 같이 진짜 찾은 것은 아닙니다. 장소를 특정했다는 설입니다.
정철중선생님 저는 겸재정선미술관 실장 손국현입니다 010-5309-4713연락바랍니다
네이버 지도에 나오지 않는 등고선 관련 7.13자 현장답사를 하였고, 추가 답사를 해서 이 부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위 글에 대한 수정을 할 생각입니다. A 지역인가 B 지역인가 좁은 지역 안에서의 차이입니다. 간좌릉에 대한 조사는 수풀과 잡목이 우거져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토치카 봉에서의 조망은 탁월하나 너무 높은 지역입니다.해등로 남쪽 우이빌라 지역 또한 능성을 형성하고 빌라 남쪽 부분을 전답으로 볼 수 있기에 판단에 일부 혼선이 오고 있습니다.
최종수정이 끝났습니다!
28-5번지 사진은 실지 않았는데 우이빌라와 인근 지역을 조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집과 우이빌라 조성대지간 옹벽의 높이 만큼 산지가 깍여 나갔을 것이다. 묘소는 산능성을 봉분의 바람막이로 삼으므로 빌라지역을 유력한 산소터로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