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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9:1-14절) 복음의 현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이상과 현실 사이에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곤 합니다. 사실 이 차이를 발견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성숙했음을 말해줍니다.
공자는 중국이 힘으로 약한 나라를 정복하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도덕이 다스리는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 13년에 걸쳐서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어느 나라에서도 환영 받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공자가 제자와 헤어져 혼자 성 밖에 있었는데, 제자가 어떤 사람에게 스승을 보지 못했느냐? 고 물으니까 그는 키가 엄청 크고 옷은 다 떨어져 집 나온 개 같은 사람을 봤다고 대답했습니다.
나중에 공자는 그 말을 듣고 웃으면서 집 나온 개 같다고 한 말이 맞다고 했습니다.
공자는 결코 현실 세계에서 실현될 수 없는 꿈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당시 노자 쪽 사람들로부터 무시와 조롱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공자의 제자들은 스승의 높은 뜻을 존경했습니다. 결국 공자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은 제자들이 편집한『논어』를 통해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 생명의 양식을 읽고 배운 사람이『논어』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돈을 내고, 자기가 희생을 치른 것은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라도 자기가 돈을 내지 않으면, 귀한 줄 모릅니다.
예수님도“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고 하셨는데, 사람은 자기가 희생하지 않은 것은 귀한 줄 모른다는 뜻입니다.
군대에서 엄청 터져 가면서 강하게 훈련 받은 사람은 자기가 속한 부대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데 반해,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고 너무나 편하게 지낸 군대에 대해서는 불만도 많고, 욕도 더 많이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군대에서 부하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면, 군기가 해이해지는데, 나중에 보면, 총기 사고나. 다른 사고가 많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지휘관은 부하들에게 너무나 잘해주지 않고, 어느 정도 군기를 유지하며, 훈련은 신사적으로 하면서도 높은 강도(强度)로 시킵니다.
대학교나 대학원에서도 교수가 너무나 쉽게 학점을 주고, 과제물도 내지 않고, 학생들이 하자고 하는 대로 하면, 당장은 학생들이 좋아하는 것 같지만 나중에 보면, 학생들이 그 교수에 대해‘실력도 없고, 배운 것도 하나도 없다’고 하면서 욕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반면 교수가 학점을 아주 짜게 주고, 과제를 많이 내주어 학생들이 밤을 새우거나 코피 흘리면서 공부하게 하면, 쉽게 무시하지도 못하고, 나중에‘그 교수 실력 있더라.’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사람에게 무한정으로 잘해준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들끼리 믿으면 될 일인데, 왜 다른 사람까지 전도해 믿게 하려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예수 믿는 청년이 왜 자기 목숨이 위태로운 그런 나라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옛날에는 선교사라고 하면, 당연히 남자 선교사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선교 훈련이나 단기 선교, 비전 트립은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더 많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국경없는 의사회’에서 봉사하는 의사들을 보면, 그들은 자기 나라에 있으면 엄청나게 높은 연봉을 받으면서 잘 살 수 있지만, 학생 시절 아프리카나 가난한 아시아 나라에 자원봉사를 가서 의사도 없고, 약도 없어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결국 모든 것을 버리고, 그들을 도우러 갑니다.
그래서 그런 가난한 나라에 사는 사람도 의료 혜택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우상(偶像)을 섬기며 사는 사람을 보면,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복음의 놀라운 점은 영혼을 구원한다는 이상적인 면이 있는 동시에 복음 전도자도 인간이기에 먹어야 하고,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복음 전하는 자가 인간이 아니고, 먹을 필요도 없고, 돈도 필요 없다면, 모든 것을 머리로 생각해서 엄청나게 이상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전하는 자도 사람이기에 머리를 숙여 헌금을 받아야 하고, 생활비를 받으면서 감사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이상과 현실의 조화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됩니다.
Ⅰ.예수님의 복음 전도 방법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신 기간은 딱 5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간에 잠시도 쉬지 않고, 많은 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증거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택하시고 나서 이들을 갈릴리 여러 곳에 보내어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쫓게 하셨습니다. 열두 제자가 나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자, 예수님 혼자서 하실 때보다 열두 배의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이 지켜야할 원칙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마10:9-10절)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러 보내시면서도 예수님은 살아계신 동안 외국에 선교사로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다른 곳에 장기 체류하면서 복음을 전하게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장기 체류하면서 전도하는 것처럼, 돈 지갑을 가지고 다니거나, 여러 벌의 옷이나 지팡이 등을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며칠 동안의 단기 선교를 가면서 거의 이삿짐을 싸듯 옷과 책 등 짐을 잔뜩 가지고가면,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느 도시에 가면, 어느 집이든지 들어가 그 집의 평안을 빌고, 그 집에서 주는 것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전도 방법은‘믿음의 전도’였습니다. 즉 제자들이 예수님의 보냄을 받아 전도하러 나가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준비하신 집이 있을 테니까 그 집에 가서 먹고, 잠을 자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집을 찾지 못하면, 처마 밑이나 창고 같은 곳에서 잠을 자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전도 방식을 가르쳐주신 것은 제자들에게 복음 전도의 긴급성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분이 살아계신 동안 유대 사회 전체에 복음 전하는 것을 목표로 세우신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까지 유대 동네를 모두 다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입니다.
예수께 이 일은 너무나 긴급하기 때문에 제자들은 먹을 것을 준비하고, 돈을 준비하면서 다닐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제자들이 어느 곳에서 복음을 전하든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을 염려하지 말고, 복음만 전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마10:14).고 하셨습니다.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너무나 긴박하기 때문에 끝까지 말씀을 듣지 않는 마을 한 곳 때문에 씨름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마10:2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유대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기 전에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이제는 복음이 이방인을 향해 전 세계로 증거 되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 머지않아 로마와의 대 전쟁으로 무참히 멸망당할 것을 미리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유대인이 적어도 예수님이 살아계신 동안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기를 원하셨습니다.
지금도 선교하면서‘믿음의 선교 방식’을 택하는 선교단체가 있습니다. 이런 선교단체는 주님이 외국에 선교사로 보내신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채워주시리라는 것을 믿고, 사람들에게 선교비 지원 요청을 하거나, 빚을 지지 않는 방식을 택합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내지에 선교사로 가기 전, 영국에서 어떤 의사의 조수로 일했습니다. 그런데 그 의사는 기억력이 너무 나빠서 허드슨 테일러에게 봉급 주는 것을 종종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허디슨 테일러는 중국 선교의 꿈을 가지고 중국에 가면, 선교비 지원을 받기가 어려울 거라고 여겨서 기도로 공급받는 훈련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봉급 주는 것을 잊어버리고, 퇴근해도 자기 입으로 달라고 하지 앓고,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의사가 병원으로 다시 돌아와 허드슨 테일러에게 봉급을 주고 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목회를 하거나 선교를 하러 나가기 전, 자신이 왜 이 일을 해야 하며, 어떤 원칙을 갖고, 이 일을 할 것인지, 미리 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선교하러 간 것인지, 외국에 놀러간 것인지, 목회를 하는 것인지, 기업체를 운영하는 것인지, 헷갈리기 때문입니다.
목회하면서 예수님의 분명한 부르심과 자기 나름의 분명한 원칙이 없으면, 현실의 엄청난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유대의 여러 마을에 복음을 전하러 갈 때, 복음 외에는 일체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즉 복음 전하는 자는 입을 것이나, 먹을 것, 지팡이 같은 것을 일체 가져가지 말고, 가서도 오직 복음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잠잘 곳이 없고,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걱정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다른 사람의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고, 복음을 전하면 기쁨으로 그들을 영접하는 자가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실 때는 그냥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능력(能力)을 주어서 보내시기 때문에 믿음으로 가면, 반드시 능력이 나타나고, 그 복음의 능력으로 주님을 믿게 된 자들이 제자들에게 잘 곳을 마련해주고, 먹을 것을 준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을 영접하는 그 가정에 하나님의 복(福)이 임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 하나를 가지고 가면, 어디서나 심령의 부흥이 일어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사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 대신 복음전하는 자는 자신의 취미생활이나, 안락한 생활, 귀족적인 생활을 포기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복음을 전하러 간다고 하면서 바둑이나 골프채 같은 것을 챙겨가고, 그곳에서 엉뚱한 세상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는다면, 그는 복음의 사자(使者)가 아닌,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전도가는 외국에 가서 그곳에 있는 사람이 먹는 음식을 절대로 안 먹겠다고 하고, 음식이나 물을 본국에서 수송해서 먹는다면, 불신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선 선교지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영국인이지만, 중국옷을 입고, 머리도 변발(辮髮)해서 완전히 중국 사람처럼 다녔고, 중국어로 하나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중국인들은 기꺼이 그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즉 하나님 말씀은 말로써 전달되지만, 그 마음에 사랑으로 심어지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갔을 때, 그 말씀을 듣고 새 사람이 되는 사람이 있으리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선교사는 그런 확신이 없으면, 오래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자는 설교할 때마다 말씀을 듣는 자들 중에서 하나님이 분명히 역사하셔서 마음속에 큰 기적이 일어나고, 응답이 일어난다는 것을 믿어야만 성경대로 설교할 용기가 생깁니다. 그런 믿음이 없다면, 자신 있게 설교하지 못할 것입니다.
Ⅱ.사도 바울의 선교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고린도 교인으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 직업(천막일)을 가지고,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자비량 선교입니다.
9:l절)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사도 바울은 먼저 자기가‘자유인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여기서 자유인(自由人)은 사도 바울의 사회적 신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했기 때문에 혹 그가 진짜 노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노예는 아무리 일해도 사람들로부터 직접 사례를 받을 수 없고, 오직 주안에게만 먹는 것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자기를 종이라고 한 것은 영적 의미에서 종이라는 것이지, 실제로 종이나 노예는 아니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종이지, 사람들이 마음대로 부려도 되는 종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번에 또 자신이‘사도가 아니냐.’라고 묻습니다. 사도라는 신분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으로써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 중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도록 주님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인 증거로 그가 직접 주님을 보았고, 주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도의 자격입니다.
9:2절)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사도 바울은 사도들 중에서도 특히 이방인의 복음을 위해 세움을 받았는데, 고린도에서 본격적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서 부흥이 일어나고,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고린도는 사도 바울의 이방인 사도 자격에서 아주 중요한 기초가 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의 많은 목회자나, 교인들 중에서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개 예루살렘 사도를 추종하는 자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예루살렘 사도, 즉 베드로나 야고보 같은 사람과 사도 바울 사이에는 이견(異見)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라고 하면,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가르침을 받고, 기적을 행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바울은 예수님을 따라다닌 자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예루살렘 교회 출신교인 중에서 다수가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즉 예루살렘 출신의 열한 제자는 교인으로부터 사도로 인정을 받았고, 존경을 받았고, 선교비 지원도 받았지만, 사도 바울은 대개 유대인 신자로부터 사도로 인정받지 못하고, 선교비 지원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워낙 겸손해서 자신이 사도임에도 불구하고 떠들어대거나 논쟁하지 않고, 조용히 이방인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을 뿐, 실제로 그는 예루살렘 사도들과 비교해서도 전혀 부족함이 없고, 오히려 더 뛰어난 진리를 가진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고린도 지방을 떠난 뒤, 들어온 교회 지도자들 중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모든 가르침을 무시하고, 부인하는 말을 했습니다.
9:3절)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고린도 교회에서 사도 바울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지 않은 것은 그가 예루살렘 사도들처럼 당당하게 생활비를 요구할 사도의 자격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은 정식 사도가 아니라, 이방인 전도를 위한 전도자에 불과해서 정식으로 생활비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한 가지 더 주장한 것은 앞서 언급한 이유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예루살렘 사도의 가르침에 비해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이 가르친 것은 진짜 복음이 아니고, 예루살렘 제자들이 가르친 것만이 진짜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한 저명한 학자가 바울 서신의 어느 구절이 후대에 첨가된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았습니다. 개인적으로 그 학자가 그런 주장을 할 권한이 있는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받지 않았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처음 바울이 선교할 때, 고린도 교회가 너무 가난해서 목회자에게 생활비를 줄 수 있는 수준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키우면서 아이들이 너무나 어릴 때는 그들에게 *돈을 벌어 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즉 어린 아이들은 잘 먹고 쑥쑥크고, 열심히 공부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당시 고린도인이 진리를 학원이나, 선생들에게 돈을 주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특히 당시에는 소피스트(Sophist)라는 웅변술이나, 변론술을 돈 받고 가르쳐주는 선생이 있었는데, 학비가 상당히 비쌌지만, 인기가 있었습니다. 이 소피스트(Sophist)들은 요즘으로 치면, 강남의 논술학원 선생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온전한 은혜이며 선물인데, 이것을 돈을 주고 배우는 지식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례비도 거절하자 고린도 교인은 복음을 세상 철학이나 지식과 다르게 보게 되었고, 하나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해서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 뒤에 온 사람들은 바울이 돈을 받지 않은 것에 대해 그가 무자격자이기 때문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목회자에게서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면, 얼마나 못된 인간이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어떤 복음도 부정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을 권리가 없어서 안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9:4절)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복음 전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使者)이고, 천사의 자격으로 왔지만, 우리 모두는 인간이기에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우리는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이 세상에서 돈을 버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헌금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입만 살아있는 공상주의(空想主義者)가 되고 맙니다.
이런 사람은 마치 게임을 하듯 선교를 하고, 목회를 합니다. 게임 중독에 빠진 아이들의 문제는 현실 감각이 없다는 것인데, 이들은 사람 죽이는 것을 게임의 하나로 생각합니다.
요즘 미군은 폭격할 때, 드론(Drone)이라는 무인 비행기를 사용하는데, 전쟁에서 사람 죽이는 것을 하나의 게임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옛날에는 산을 넘고 시내를 건너 사람을 만나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전혀 전도를 받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전도지를 소중하게 가지고 가는 것을 보면,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도도 일종의 게임 이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기에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돈도 있어야 합니다. 먹지 않고 입지 않아도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엄청 오만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세상에 나가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일하고, 그 돈을 가지고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신앙은 대단히 실제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천사로 보냄을 받았지만, 결코 천사는 아닙니다. 우리는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며, 집이 필요한 현실 중에서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예루살렘 출신 사도들이 대접받은 것을 예(例)를 들어 말하고 있습니다. 9:5-6절)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여기서 예루살렘 사도들이 다른 지방에서 설교하거나, 교회를 돌보러 다닐 때, 부인을 데리고 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사도들이 부인을 데리고 다니는 것이 꼭 나쁘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사도나 설교자들이 부인과 함께 있음으로써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마귀가 틈탈 기회도 적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찾아가는 교회의 입장에서는 이중 부담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를 내세워 초대교회가 사도들이 부인을 데리고 오는 것을 싫어하거나, 반대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한편 바울과 바나바는 독신으로 다녔고, 선교비와 생활비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일하면서 설교를 해야만 했습니다.
본문을 보면‘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사도 바울 역시 일하지 않고, 선교비와 생활비를 달라고 할 수 있었지만, 교인들의 유익을 위해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Ⅲ.선교의 원칙
사도 바울은 자신과 바나바가 고린도에서 천막을 짜서 직접 돈을 벌어 선교한 것이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교인이 너무 믿음이 어리기 때문에 그들을 도우려고 한 것이지, 원칙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복음 전하는 자에 대해서는 후원 교회가 부담하든지, 현지 교회가 부담하든지, 생활비와 선교비를 전적으로 부담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9:7절)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사도 바울은 세 가지 예(例)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우선 전쟁하는 군인은 먹는 것과 입는 것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군인은 몸으로 가서 싸우면 되는 것이지, 자기 먹을 것까지 책임지지 않습니다. 특히 군인에게 있어 식사는 아주 중요합니다.
아무리 현대식 무기(武器)를 갖췄어도 굶으면서 전쟁을 할 순 없습니다. 그리고 군인은 추워도 전쟁을 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포도 농사를 짓는 사람은 포도 열매를 얼마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일꾼은 포도 열매 전부를 팔거나, 처분하지는 못하지만, 포도밭에서 일할 때, 포도 열매 정도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양젖을 짜는 목동은 양젖을 짜면서 목이 마르면, 양젖 정도는 얼마든지 마실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드디어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말합니다.
9:9-10절)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기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구약 율법은 소가 일 년 내내 밭일을 하다가 드디어 추수 때가 되어 곡식을 탈곡할 때, 먹을 것이 천지에 널려 있는데, 주인이 소 먹는 것이 아까워서 곡식을 먹지 못하게 입에 망을 씌우는 것을 금합니다.
하나님은 주인에게 소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라고 하십니다. 소가 일 년 내내 일하고 추수 때,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그 입에 철망을 씌워 못 먹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추수할 때만이라도 소가 실컷 먹도록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한 번씩 좋은 대접을 받으면, 자아상이 엄청 올라가기 때문에 서비스의 질이 더 높아질 수 있습니다.
특히 요즘은 서비스의 질로 승패가 결정되는 사회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좋은 자질을 가진 사람들을 뽑아서 제대로 교육을 시키고, 충분히 좋은 대접을 해주면, 수준 높은 서비스가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까워하면, 서비스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소망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밭을 가는 자도 소망을 가지고 밭일을 하고, 곡식 떠는 자도 소망을 가지고 하는데,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가 죽도록 수고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더 축복하실 거라는 기대를 가지게 됩니다.
9:11절)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목회자와 교인 사이에는 신령한 교류가 있어야 합니다. 즉 *목회자는 하나님 말씀을 공급하고, 교인은 목회자의 생활을 책임져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엄청나게 깊이가 있어서 다른 일에 종사하면서 연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교회가 개척 단계이거나, 교인의 신앙이 너무나 어릴 때는 경제적 부담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때는 무작정 사랑이나 열정, 말씀을 퍼부어줄 때입니다.
특히 청소년이라든지, 대학생 사역을 하는 사람은 그들에게 경제력이 없기 때문에 그냥 사랑을 부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청소년이나, 청년들 가난한 사람은 엄청난 사랑을 받고, 아름답게 자랄 것입니다.
그들이 성인이 되고,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추면, 하나님의 일에 물질로 참여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떠먹여 주어야 하는 어린 아이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중에 고린도 교회에서 헌금을 거두어 예루살렘 교회를 도우러 갑니다. 목회자가 교인에게 생활비를 더 달라고 하고, 살 집도 옮겨 달라고 하면, 목사님이 변했고,돈만 밝힌다고 하면서 비난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어느 정도 이유식(離乳食)이 필요합니다. 늘 사랑만 받고 이론적으로만 믿던 사람들이 때가 오면, 목회자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충격을 받기도 하는데, 이는 현실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나 자기 자식이 선교사, 목회자, 교회의 봉사자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말씀을 가르쳐주었던, 영적 아버지는 무대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무대에서 내려온 다음에는 자꾸만 간섭하면 안 됩니다. 지금은 새로운 리더십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9:12절)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구원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헌금을 많이 낸다고 해서 더 구원하거나, 헌금을 적게 낸다고 해서 덜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똑같이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이 어느 정도 자라면, 자신의 돈으로 목회자나 선교사를 책임지고, 도와야합니다.
이상한 것은 사람들은 자기가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얻은 것은 소중하게 여기지만, 누군가가 공짜로 준 것은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의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복음을 공짜로 생각해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의 삶 가운데서 복음이 우선순위에서 종종 밀리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없는 구원을 주신 것은 이것이 너무나 귀한 것이어서 도저히 값으로 계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복음을 가장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9:13-14절)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신앙은 결코 이상(異常)이 아닙니다. 성전 일을 하는 레위인이나, 제사장은 천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것을 바칠 때, 부위까지 정해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좋은 부위를 서로 챙겨가려고 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제단(祭壇)에서 봉사하는 자들은 제단의 제물을 자기 수입으로 가져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복음을 직업으로 삼아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받는 것은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마귀의 사주를 받아 기독교는 비영리단체라면서 무식한 말로 지껄입니다.
본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신앙이 거저 주어진 것이지만, 결코 *값싼 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너무나 귀하고 값진 것이어서 도저히 값으로 환산할 수 없어 거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복음이 공짜이기 때문에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너무나 이상적으로 생각해서 복음 전하는 자의 생활비를 주지 않으려고 하는 등 인색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교인도 자신이 책임질 것은 책임져야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아-멘
찬송가 332장 *우리는 부지런한*
알림(연속4)
▣ 교갱원 소속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 금년 ☞ 정착의 해
◈년말 대심방(세례겸)과 셀(cell)현장 점검을 위해 장소, 날짜, 시간을 스마트폰으로 소통해야 소속이 될 수 있으며, 정착하지 않고*특권과 의무*를 실천하지 않는 셀(cell)의 무관심이 *생명의 양식*촛대를 옮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리더(leader)1명을 뽑아 *필수과목*을 필하고,예배 인도 등 본원과 계속 소통해야 안전할 수 있습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 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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