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허깨비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그렇다. 사람의 마음은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다. 남의 마음은 모른다고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마음도 잘 알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자기도 컨트롤하지 못한다.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잘 통제하지 못한다.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잘 통제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는 악행이 없을 것이다. 또 신경증, 우울증 같은 마음의 병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사람의 일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마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철학이나 종교는 모두가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생겨난 문화현상이라 할 수가 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사고로부터 발전해온 인성론의 관점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성선설,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성악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성무선악설 등이 그것이다.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한 맹자는, 사람의 본성은 의지적인 작용에 의하여 인간의 덕성(德性)을 높일 수 있는 단서(端緖)를 천부적으로 갖추고 있다고 보았는데,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인 측은지심(惻隱之心), 자기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마음인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하는 마음인 사양지심(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인 시비지심(是非之心) 등의 마음이 그것이다. 그것들은 각각 인(仁)·의(義)·예(禮)·지(智)의 근원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였다.
맹자는 측은지심이 없는 것은 사람이 아니고, 수오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시비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 하였다. 이런 뜻에서 인간의 성(性)은 선(善)하다고 하였다. 성리학도 이를 받아들여 인간의 본연지성은 선하다고 하였다.
루소도 인간의 본성은 본래 선한 것인데, 문명과 사회 제도의 영향을 받아 악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자연이 만든 사물은 모두가 선하지만 일단 인위(人爲)를 거치면 악으로 변한다고 하였다.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하여 ‘인간의 성품은 악하다. 선한 것은 인위(人爲)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선(善)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이라는 것이다. 즉 선은 타고나면서부터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본성은 원래 악하지만, 교육에 의해 선해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기독교 윤리 사상인 원죄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원죄는 인간은 타고나면서 죄를 짓고 출생했다는 관점으로,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본 것이다. 사회 계약론자 홉스(Hobbes)도 자연 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라 가상하여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것으로 단정 지었다.
고자(告子)는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을 주장하였는데, 그는 인간의 품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하였다. 서양에서는 로크(Locke)가 인간의 마음이 백지와 같다고 하여 인간의 마음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하였다. 로크의 이 관점을 백지설이라고 한다.
그런데 각기 다른 이러한 인성론의 갈래는, 외형적으로는 서로 다르나 그 목적성은 다들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을 선(善)으로 이끌기 위한 하나의 전제조건으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성선설을 인간의 본성으로 받아드린 퇴계가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서 끝까지 이(理)가 발(發)한다는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주장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발하는 것은 기(氣)뿐이고 원리인 이(理)는 움직이지(발하지) 않는다는 기호학파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순선무악(純善無惡)한 본성 즉 이(理)가 발해야(움직여야) 선한 세상이 되기 때문이다. 순수선인 이(理)가 발해야 이 세상이 선해진다고 보았다.
또 성악설과 성무선악설도 다 같이 후천적인 교육을 통해서 인간은 악에 빠지지 않고 선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고자는 ‘사람의 본성은 버드나무와 같다. 의로움은 버드나무로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여 도덕적인 인이나 의는 후천적인 교육이나 학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원래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고자는 버드나무 속에는 바구니가 없지만, 버드나무를 가지고 사람들이 바구니를 만드는 것은 구부리고 휘게 만드는 인간의 후천적인 노력, 즉 장인의 수고를 통해서라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모두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서 인간은 선해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면 과연 마음은 노력에 의하여 바꾸어질 수 있을까?
프로이트는 인간의 성격을 구조화하면서, 이드(id)와 자아(ego), 초자아(superego) 세 가지 구조의 역동이 인간의 성격을 구성한다고 보았다. 그는 본능적인 이드, 현실적인 자아, 그리고 도덕적인 초자아 중에서 어떤 성격 구조가 우세한가에 따라 성격이 다르게 나타난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이드가 강한 사람은 매우 충동적이며 쾌락을 좇는 성격이 나타나고, 자아가 강한 사람은 현실에 잘 적응하는 성격이 나타나며, 초자아가 강한 사람은 매우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성격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면 인간은 왜 괴롭고 고통을 받을까?
좋은 것은 안 될 것 같고 나쁜 것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아의 생각이다. 자신의 행복보다는 불행을 더 믿고 싶은 자아의 생각이다. 이 때문에 성품 교육은 자아의 감정에 주목한다. 인간의 감정이 대부분 자아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아는 실제 상황과 생각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생각에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반응한다. 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망할 것이라고 느끼고, 누군가에게 무시를 당했다는 생각이 들면 나를 가치 없는 사람으로 여긴다.
이와 같이 자아는 자신의 생각을 무조건 따라간다.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힘없이 끌려간다. 결국 내 머릿속에서 자아가 만들어내는 생각 때문에 내가 죽는다. 극심한 고통을 당한다. 결국 일체유심조다. 내가 만든 그러한 생각 때문에 내가 그렇게 고통을 받는 것이다.
원효의 저술에 환호환탄환사(幻虎還呑幻師)라는 비유가 나온다.
환호(幻虎)는 마술사가 만든 허깨비 호랑이고, 환사(幻師)는 그것을 가지고 마술을 부리는 마술사를 가리킨다. 환사는 환호를 가지고 마술을 부린다. 그런데 마술사가 환술(幻術)로 만들어 낸 호랑이가 오히려 마술사를 집어삼켰다는 것이다. 자기가 만든 그림 호랑이에게 자기가 잡아먹힌다는 것이다. 곧 자신이 만들어 낸 생각으로 자신이 놀라고 고통받는다는 뜻이다.
인간은 모두 환사(幻師)라고 할 수 있다. 자기 마음으로 모든 것을 지어낸다.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멋대로 대상들을 지어내고, 그 대상들에 자기가 놀라고 고통받는 것이다. 허깨비 호랑이에게 속는 것이다. 결국 자기가 만들어 낸 것들에 스스로가 잡아먹힌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을 짓고 내가 지은 그 생각으로 내가 죽는 것이다. 이것이 자업자득이고 중생 놀음이다
불안한 생각과 감정은 내가 아니다. 나를 위협하지만 진정한 내가 아니다.
내 생각과 감정대로 인생이 되지 않는 것처럼, 불안한 생각과 감정대로 인생이 되지 않는다. 내 생각과 감정대로 인생이 되지 않는 것은 믿으면서, 불안한 생각과 감정대로 인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왜 못 믿을까? 똑같은 상황인데 왜 못 믿을까?
인간이 에고가 만들어낸 생각에 갇히는 이유는, 내가 처한 상황이나 내가 소유한 것들을 내 존재 가치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불행이 여기서 온다. 다행스러운 것은, 현대의 과학은 우리의 뇌는 성인기에도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 즉 ‘뇌가소성(neuroplasticity)’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아무리 꼭꼭 뇌에 저장된 자동화된 기억, 패턴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해석하고 교정하고 조절하는 뇌의 전두엽이 에너지를 들여 활동한다면 새로운 뇌신경 회로, 즉 새로운 마음,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생각은 노력에 의하여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다.
생각은 내가 아니다. 허깨비다. 그 허깨비는 기차처럼 플랫폼에 정지했다가 시간이 되면 저절로 떠나가기 마련이다. 허깨비에 속지 말자. 자기가 만든 허깨비에 속고 잡아먹히지 말자. 이 사실을 깊이 알고 깨치면 마음은 고통받지 않고 편안해질 것이다.
끝으로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 등소평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마음을 다스렸다는 맹자 고자장(告子章)의 일 절을 한번 보기로 하자. 허깨비에 잡아먹히지 않는 데 도움을 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게 하고, 근육과 뼈를 깎는 고통을 주고, 몸을 굶주리게 하고, 그 생활은 빈곤에 빠뜨리고, 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한다. 그 이유는 마음을 흔들어 참을성을 기르게 하기 위함이며,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첫댓글 저도 환호환탄환사의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나가는 모임에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옛 어른들이 흔히 쓰는 말로 '유둑이 뚝뚝 듣는다(떨어진다)'는 말처럼 느낌이 옵니다. 이분을 만나면 괜히 기분이 언짢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저도 제가 만든 허울에 휘둘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허깨비에게 잡아먹히지 않도록 애쓰겠습니다. 天將降大任於斯人也 必先勞其心志 苦其筋骨 餓其體膚 窮乏其身行 拂亂其所爲 是故 動心忍性 增益其所不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