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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강해
1. 기도를 배워야 하는 이유
1) 인사의 말씀
할렐루-야! 그 어떤 신문 보다도 재미(在美) 한국인 성도들의 영성 증진을 위하여 진력(盡力)하고 있는 신문, 크리스찬타임스(Christian Times)에서 이 부족한 종이 ‘기도 중의 기도’ 또는 ‘모든 기도의 이상적 모델’로 알려진 주기도(“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마태 6:9-13)에 대하여 강해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됨을 기쁘게 생각한다.
2) 기도를 배워야 하는 이유
주기도문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깨닫고 배워야 할 내용은, 성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허락된) 특권인가 하는 것이다. 고급 자동차일수록 운전하는 방법을 알아야 그 성능을 맛보게 되듯이, 21세기 영혼의 핸드폰이라 할 수 있는 기도에 있어서도 이를 사용하기 위한 올바른 방법이 있게 마련이며 그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는 격언에서 보는 것처럼, 그리고 사람이 호흡을 멈추면 죽게 되는 것처럼, 기도는 성도에게 있어서 영혼을 살리고 성숙케 하는 고귀한 은혜요 특권이 아닐 수 없다. 성도가 기도를 멈추는 순간 엄청난 위기에 빠지게 되는데, 마치 어린 아이가 아빠(또는 엄마)와의 전화 연락이 끊겼을 때 당하는 위기와 같다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성도는 세상 임금 이라 불리우는 마귀의 시험 속에 계속 존재하게 되는데, 성도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마귀가 쓰는 작전 가운데 하나가 어떻게든 이 기도를 못하게 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연결된 생명선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26:41);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어떤 청년이 목사님을 찾아가 질문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성도가 필요한 것을 모두 아시므로 구하지 않아도 주실텐데, 우리가 왜 그렇게 밤낮 쉬지말고 기도해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목사님은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죽는 것처럼 성도들도 기도를 떠나면 그 영혼이 죽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한다. 같은 맥락에서 영국의 대 부흥사였던 스펄전 목사님도 “기도 없는 영은 그리스도 없는 영이고, 그리스도가 없는 영은 죽은 영이다”라고 말하였다.“사람을 만나면 역사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을 만나면 기적이 이루어진다”라는 어느 목사님의 말씀도 기도와 관련된 또다른 명언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영혼을 숨 쉬게 할 뿐만 아니라 목마른 인생들로 하여금 신비로운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맛보게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광야 같은 세상에 살면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고 일생동안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주님께서 물려주신 무기 또는 매스터 키(Master Key)가 기도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친히 새벽에도 기도하시고, 때로는 철야하시며 밤새껏 기도하심으로써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범을 보이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기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구약성경은 물론 신약성경을 통하여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수많은 교훈들 가운데 기도에 대한 권고와 명령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8-29)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눅 18:1)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하나님께서 성도가 기도하는 것을 기대하시고 기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요일 4:8,16)
“사랑은 주고 받는 것”(Give & Take)이라는 속담에서 보는 것처럼, 사랑의 관계는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통하여 지속되고, 때로는 선물을 주고 받음으로써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이와 같이 성도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필요한 것을 구하고 응답받음으로써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 부족한 종이 장신대의 성서학 교수로 재직할 때 신대원생들을 인솔하고 12번 이상 성지순례를 다녀왔는데, 그때마다 잊지 않고 이행한 관행은 어린 세 딸에게 선물을 사다 주는 것이었다. 특히 성지 가운데 하나인 이집트는 세계에서 목화 생산량이 풍부하고 섬유 제품이 저렴하여, 20불만 주어도 화려한 원피스 세 벌을 사고도 남았다. 2주간의 성지순례를 마치고 귀국할 때 세 딸들에게 선물을 갖다 주는 아빠로서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은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를 위하여 생명보다 귀한 아들(예수님)까지 아끼지 않고 선물(속죄제물)로 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녀된 성도에게 무엇을 아끼시겠는가?(롬 8:32)
기도의 중요성을 알아야 하는 두번째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도 응답을 받을 때 성도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특별한 기쁨을 맛보게 되기 때문이다. 기도 응답을 통하여 성도는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아울러 자신이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충남의 홍성고등학교 출신인데, 3년 동안 삽교에서 홍성까지 장항선 기차를 타고 통학하였다. 그 당시에는 삽교역에 울타리가 없었기에 한달치 통학 패스만 구입하면 논두렁 길 위로 달려가 기차에 올라 탄 다음 홍성역에서 패스를 보여주면 되었다. 학교는 아침 8시경에 시작되었는데, 장항선 기차가 아침 7시 아니면 9시에 삽교역에 도착하는지라, 부득이 아침 7시 기차를 타야만 첫 수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어느날 아침, 새벽기도에 다녀온 후 시계를 보니 이미 7시가 다 되었고, 삽교역에 기차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집에서 기차역까지 거리는 약 800m였는데, 부리나케 책가방을 챙겨들고 삽교역으로 달려갈 때 기차는 벌써 떠나고 있었다. 다급한 김에 논두렁을 가로질러 기차를 따라가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기차를 멈춰 주십시오, 제발 멈추게 해주세요.” 그런데 기차가 약 600m쯤 전진하다가 천천히 멈추는 것이 아니겠는가? 기차에 올라 탄 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입구의 트랩에 서서 마주치는 바람에 옷깃을 날리며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채로 홍성역에 도착하기까지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찬송을 목이 터져라 불렀던 것으로 기억된다. 50여 년 전의 이 경험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되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 부족한 종의 기도를 응답하셨다는 첫 경험이었고, 그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에도 이와 같이 기도 응답을 받은 경험은 자주 있었고, 지금도 그 경험은 계속되고 있음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기도 응답을 경험함으로써 성도는 기도의 중요성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은 성도의 기도를 반드시 응답하신다고 약속하셨고(딛 1:2),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신실하신 하나님(히 6:18)은 반드시 이 약속을 지키시는데, 대체로 하나님께서는 다음의 세 가지로 성도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1) 예스(Yes); 2) 노우(No); 3) 웨이트(Wait).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기도일 때 “Yes”로, 그 뜻에 부합하지 않을 때, 즉 그 기도에 즉각적으로 응답하면 결과적으로 성도에게 해로운 결과가 나타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No”로 답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응답할 때가 아닐 경우에는 “Wait”로 응답하신다. 마치 다섯 살 밖에 안 된 어린 아들이 날카로운 잭 나이프를 갖고 싶다고 아빠에게 졸라댈 때 철이 들면 사 줄테니 그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3) 주기도문을 배워야 하는 이유
이와 같은 기도의 능력과 중요성을 알고 있는 성도에게 있어서 처음으로 대두되는 질문은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하는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응답받는 기도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기도의 내용과 방법이 주기도문에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성도는 마땅히 주기도문에 대하여 배워야 하며, 그래서 주기도문에 대한 강해가 필요하다.
‘주기도문’이 성도들의 모든 기도 가운데서 최고의 권위와 가치를 소지한 모본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 기도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스승이신 예수님, 즉 기도의 대가(大家)이자 챔피언이신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지혜가 세상의 그 어떤 명문대의 교수나 철학자보다 우수하기에 그분에게 기도를 배우는 사람은 그 어떤 SKY대학(서울, 고려, 연세대) 졸업자보다 영적으로 우수해진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승이요, 교수라는 사실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물론 그분의 대화 가운데서 분명히 드러나 있다. 이에 대한 사례로써 두 가지 일화(요한 8장; 마태 22장)가 있다.
어느 날 유대교의 교권자들, 즉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고 흠 잡기 위해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모세의 법대로 그녀를 돌로 쳐 죽여야 할지, 아니면 예수의 가르침대로 용서하고 놓아 주어야 할지 물었다. 어떤 쪽으로 대답하든 예수님은 흠 잡힐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모세의 법대로 그녀를 돌로 쳐 죽이라 하면 예수 자신의 사랑의 법에 걸리고, 용서하라 하면 모세의 법을 범하는 거짓 선지자로 고발을 당하게 된다. 그때 예수님은 땅 바닥에 글을 쓰신 다음 “죄없는 자가 먼저 돌러 치라”고 말씀하심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흠을 잡으려던 자들이 모두 양심에 가책을 받아 들고 있던 돌을 내려놓고 떠나갔던 것이다. 죄 지은 여인도 용서하여 구원하시고, 교권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를 돌아보게 하심으로 율법의 본래의 목적을 일러주셨을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은 상상하기 힘든 지혜로운 대답을 통하여 친히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신 것이다. 이보다 지혜로운 스승은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인류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스승이라는 두 번째 증거로써 우리는 역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제기한 세금 문제를 들 수 있다. 당시 유대인의 원수 국가인 로마 제국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지, 아니면 거절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어느 쪽으로 대답하든 예수님은 그들이 친 덫에 걸리게 되어 있었다. 세금을 바치지 말라 하면 로마 제국에게 항거하는 반역자로 몰리게 되고, 세금을 바치라 하면 역시 메시야이자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자처하던 예수께서 민족의 반역자요, 매국노로 몰리게 되었다. 이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답변으로 시험하러 온 반대자들과 제자들 양쪽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교훈을 남기셨다. 로마의 셋돈으로 지정된 동전(데나리온) 하나를 달라 하신 다음 그 동전에 새겨진 로마 황제의 얼굴 형상(Image)을 가리키면서 반문하셨다.
“이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 그들이 “(로마 황제) 가이사(Caesar)의 것이요”라고 대답하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대답하심으로써, 교권자들의 올무에서 벗어나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질문자들이 로마 제국에 속한 매국노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창1:26)으로 창조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지 반성케 하고, 예수를 믿는 제자들에게는 마음 중심에 예수의 영(성령)께서 좌정하시어 왕으로 통치하고 계시는 참된 성도인지 아닌지 항상 반성해 보도록 가르치셨던 것이다.
주기도문은 이처럼 인류 역사에서 가장 지혜로운 스승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아시는 예수님만이 가르치실 수 있는 기도의 모범이므로, 거기에 담겨 있는 내용과 의미가 대단히 심오하고 신비하며, 무엇보다도 2천년 전의 언어로 기록된 문장이므로 성경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아는 성경 전문가에게 배울 필요가 있다.
만약 성도가 주기도문이 담고 있는 참된 기도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앵무새가 중얼거리듯 외운다면 ‘주기도문’이 아니라 ‘주문’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으며, 오늘의 신도들 가운데 식사 때나 모임을 마무리할 때 이처럼 주문 외우듯이 주기도문을 사용한다면 세상에 이보다 더 어리석고 망령된 일이 없을 것이다.
2. 주기도문 강해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주기도문의 각 단어와 문장을 고찰하기에 앞서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면 그것은 오늘의 주기도문이 2부 구조로 되어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즉 전반부(마 6:9-10)에서 ‘세 가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를 올리고, 후반부(마 6:11-13)에서 ‘세 가지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를 올리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기도의 순서를 가르쳐 주는 것으로써, 먼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즉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마 6:33) 난 다음, 자기 자신을 위하여, 즉 ‘일용할 양식’과 ‘죄 용서’와 ‘마귀의 유혹으로부터의 구원’을 간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의 우선순위(Priority)는, 기독교 진리의 핵심을 표현하는 교회의 종탑에 세워진 십자가처럼, 먼저 수직봉을 세운 다음에 거기에 수평봉을 매달아 부쳐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해야 인간관계도 형통하게 된다는 뜻이다. 예컨대, 일주일의 첫날인 주일(일요일)을 하나님께 온전하게 드림으로써 먼저 올바른 영적 관계를 회복한 다음에,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6일 동안의 육신적 물질적 삶을 위한 기도를 드리게 된다는 것이다.
주기도문의 중심이 두 가지 구조로 되어있다는 사실 못지 않게 주기도문의 서두와 말미에 언급된 두 번의 송영(Doxology,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찬양), 즉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마 6:9)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 6:13)의 수사학적 구조(소위 ‘수미쌍관’/首尾雙關적 구조)도 깊은 의미를 보여준다. 즉 인간의 본분은 (무슨 일을 하든지) 처음부터 끝가지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고(고전 10:31),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 즉 인간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있다는 것이다(사 43:21). 인생은 (억지로라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함으로(살전 5:16-18)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영육간에 건강하고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부합한 정상적인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주기도문의 첫 마디는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정체가 누구신가를 감동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헬라어 원문에는 “아버지여(pater)” + 우리의(hemon) + “하늘들에 계신(ho en tois ouranois)”의 순서로 되어있는데, 이처럼 주기도문의 첫 단어가 “아버지(아빠)”라는 말로 시작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시작하면서 설레이는 가슴을 느끼게 해 준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다름아닌 우리의 “아빠 아버지”(막 14:36; 롬 8:15; 갈 4:6)라는 것이다. 이 용어는 사랑하는 세 딸이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필자를 부를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필자의 딸들이 “아빠!”하고 필자를 부를 때의 그 행복과 기쁨을 생각한다면, 이 행복은 필자의 것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필자를 그렇게 부르는 딸들의 것이 아니겠는가? 요즘 필자에게 가끔 떠오르는 걱정이 있다면 그것은 이제 중년에 접어든 딸들이 내게 다가와 (심각한 어조로) ‘아버님!’이라고 부르면 어찌 하나 하는 것이다.
이처럼 주기도문이 가르쳐 주는 첫번째 중요한 진리는 곧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아빠와 딸(또는 아들)의 관계라는 것이다. 세상에 이처럼 친밀한 관계는 없다. 아빠의 마음은,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딸에게 무엇이든 주고 싶다. 탕자의 아버지(눅 15)처럼 오매불망 딸만 생각하며 무한대의 은혜를 무조건적으로 베풀어 주고 싶은 것이 아빠의 심정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상에 어떤 아빠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주겠는가? 깡패같이 포악한 아빠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나님)께서 성도들이 기도할 때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선물로 주시지 않겠는가? 만약 필자가 미국의 거부 록펠러(John D. Rockfeller)나 빌 게이츠(Bill Gates) 같은 재벌이라면 딸이 간청할 때 무엇을 아끼겠는가? 지구보다 더 큰 별들을 수천억 개 이상 소유하신 우주의 주인으로서, 무엇보다도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예수)까지 희생제물로 내어 주시고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무한대의 사랑과 자비를 베푸신 창조주, 곧 하늘(들)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자녀되는 성도가 간구할 때 그 무엇을 아끼시겠는가?
이와같은 창조주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아빠”로 소개해 주신 예수님의 사상은 수천년의 인류역사 가운데 그 어떤 성인(聖人)이나 철학자나 예언자도 가르쳐준 적이 없는,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관계에 있었던 다윗 같은 성인조차도 상상하기 힘든, 가장 개혁적이고 혁명적이고 창의적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소개하실 수 있는 진리였다. 우리가 아는대로, 구약성경에 소개된 발전된 개념으로서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기껏해야 왕과 백성 또는 주인(창조주)과 종(피조물)의 관계였다. 우리를 위한 대속적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시켜 주신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아빠로 부를 수 있도록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성도는 이와같은 최고의 스승이요 구원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기도야 말로 최고의 행복과 기쁨을 경험하는 것임을 배우고 감사하게 된다.
(2) 하늘(들)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늘(들)에 계신...”: 주기도문에 나오는 단어와 어구를 풀이함에 있어서 가장 먼저 대두되는 질문은 “하늘(들)에 계신”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 어구가 헬라어 원문으로는 단수(‘하늘’/우라노스)가 아니고 복수(‘하늘들’/Heavens/우라노이스)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문제를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든다. 이 헬라어 단어가 복수로 되어있다는 것은, 이 단어가 본래의 히브리 단어를 문자적으로 번역한 데서 기원했음을 가리키는데, 구약성경에서 ‘하늘’이라는 히브리어는 항상 복수(샤마임)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하늘들’이라는 단어의 뜻을 알려면 고대 중동 사람들의 우주관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고대 중동의 우주관에 의하면, 창조주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궁창(Firmament)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을 나누신 것처럼 하늘도 궁창 아래의 (가시적) 하늘과 궁창 위의 (불가시적) 하늘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궁창 위의 하늘에는 천사들이 거주하는 지역과 창조주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가장 높은 하늘도 존재하였는데, 사도 바울이 자신의 신비한 체험에 대하여 간증할 때 셋째 하늘(The Third Heaven)에 다녀온 사실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을 보면(고후 12:2)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공간에는 (현세/現世의 인간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적어도 두 개 이상의 하늘이 존재함을 믿지 않을 수 없다.
이와같은 고대 우주관에 따라 “하늘에 계신”의 뜻을 다음의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1)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아버지는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우주를 창조하신 초월적 존재라는 것이고, 2)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은 궁극적으로 돌아갈 아버지 집 곧 하늘 나라(Kingdom of Heaven)가 있다는 것이다.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성도는 기도의 서두에서 이처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종말론적 소망을 고백하면서 기도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성도가 하나님께 기도 드리기 전에 요구되는 신앙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너무나 놀랍고 위대하신, 최고의 초월자요 창조주라는 사실이다. 현대의 과학적 우주관을 빌려 말한다면, 2천억개의 별들로 구성된 태양계, 그리고 그 태양계와 같은 사이즈의 은하계를 2천억개 이상 창조하시고 관할하시는, 실로 무한대의 능력과 권세와 영광을 소지하신, 위대하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가장 높은 하늘에 거주하시는 초월자이시기에, 그 자녀로 인정받은 성도에게 있어서 (간구하는 내용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면) 언제 어디서 무엇이든지 간구하면 응답 받을 수 있다는(요 16:24)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을 확신할 때 성도는 기도를 시작하면서부터 가슴이 설레이게 되고, 지나간 세월동안 더 많은 기도를 열심히 올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된다. 나폴레옹이 자신있게 말하고도 이루지 못했던, “내 사전에 불가능이라는 단어는 없다”는 말은 초월자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고백하는 성도만이 자신있게 외칠 수 있는 특권이요 행복이다.
또 한편으로, “하늘에 계신”이라는 용어는 이 환난 고통 근심 걱정으로 가득찬 세상에 살고있는 성도에게 영원한 안식과 평화(샬롬)의 ‘하늘 나라’(Heavenly Kingdom), 곧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거주하시는 ‘하늘 나라’가 존재함을 일러준다. 성도들은 기도할 때마다 항상 이 ‘하늘 나라’를 바라보게 마련이며, 이 ‘하늘 나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있기에 성도들은 아무리 절망적인 위기를 당하여도 낙망하지 않고, 영원한 ‘하늘 나라’를 바라보면서 새로운 삶의 용기와 희망을 회복하여 다시 전진하게 되는 것이다.
불트만(R. Bultmann)과 같이 유명한 성서학자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핵심 메시지는 ‘천국’(Kingdom of Heaven) 또는 ‘하나님 나라’라는 종말론적 주제에 집중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마 3:2/“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이처럼 예수를 믿는 성도에게 있어서 종말론, 곧 ‘하늘 나라’에 대한 소망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한국의 위기는 바로 이와같이 중요한 종말론적 메시지가 교회의 강단에서 사라지거나 잊혀진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필자의 정신적 삶에 있어서 ‘하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예를 들어 설명해 보려 한다. 2년 전에 교통사고로 인하여 발견된 목 디스크를 약 3개월간 치료 받았는데, 그때 척추교정 의사 선생님이 가르쳐준 치료 방법은 약 30도 각도로 목을 치켜 들고 하늘을 바라보며 매일 10분 이상 걷는 것이었다. 이때 알게 된 것은, ‘인간’이라는 헬라어는 ‘안쓰로포스’인데, 그 뜻은 “위(하늘)를 바라보는 자”였다. 인간은 본래부터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야 건강하도록 창조되었는데, 이같은 창조 원리를 저버리고 땅만 바라보며 살게 되면서 목의 자세가 구부러져 결정적인 순간에 목 디스크가 발생한 것이다. 요즘에도 필자는 하루 10분 이상 침팬지처럼 두 손으로 뒷짐을 지고 배를 앞으로 내밀고 하늘을 바라보며 걷는 운동을 계속하면서 매일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게 된다. 하늘을 바라보면 무한대의 하늘이 보이고, 하늘에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다. 영원한 하늘나라에는 눈물, 질병, 고통도 없고, 참된 쉼과 평화와 풍요와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아버지의 품으로서, 잠시 잠깐의 일생이 끝나면 그곳에서 앞서가신 부모님과 형제 자매와 친구들을 만나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
(3) ... 우리(들의) 아버지여
주기도문의 헬라어 서두(파테르 헤몬/“우리 아버지”)에서 두번째로 언급되는 “우리”(헤몬)라는 단어에 대하여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찌하여 예수께서는 보통 성도들이 기도할 때 하는 것처럼 “(하늘에 계신) 나의(My) 아버지여”라 말하지 않고, 그 대신에 “(하늘에 계신) 우리(Our) 아버지여”라 부르라고 말씀하시는가? 뒤에 언급되는 기도 항목들, 즉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시고”라는 문장들에서도 한결같이 ‘나’(1인칭 단수) 대신에 ’우리‘(1인칭 복수)라는 용어를 쓰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라는 용어는 (한국어 ‘우리’는 한 ‘울타리(울)’ 안에 함께 거주하는 가족 공동체를 의미하듯이) 성도들이 함께 모이는 교회가 가정과 같은 ‘우리’ 공동체임을 일러준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룩하실 ‘하늘 나라’ 또는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피(보혈)로 세워질 혈연(血緣) 공동체라는 것이다.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라는 통일찬송가(278장)의 가사처럼, 기독교인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죄 씻음을 받은 자들로서, 성만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에 정기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혈연 공동체의 일원(Member)임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한 가정의 식구들처럼 서로 사랑하고 우애하는 ‘우리 공동체’의 의식(意識)을 공유하며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라는 용어를 통하여 교회가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利己的)인’ 공동체가 아니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이타적(利他的)인’ 가족 공동체임을 가르쳐 주셨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어떤 종교나 철학도 가르쳐 준 적이 없는 사랑의 최고 윤리, 즉 “원수까지” 사랑해야 할 것을 명령하심으로써, 교회 공동체야 말로 이 세상의 어떤 공동체도 도달할 수 없는 최고의 윤리, 곧 완전한 사랑의 공동체임을 선포하셨다.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참으로 완전한 사랑의 경지는 모든 인간을 한 가족으로 여기는 혈연 공동체 의식이 없이는 도달할 수 없는 사랑의 최고 경지이다. 이와같은 사랑의 최고 경지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못박고 욕하는, 원수 같은 로마 군인들과 유대인들을 위하여 용서를 비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볼 수 있고, 자신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 유대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스데반 집사와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공산당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했던 손양원 목사님에게서도 엿볼 수 있다.
이와같은 이상적인 ‘우리 공동체’로서의 의식(意識)과 실현(實現)이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지, 그리고 ‘하나님(하늘) 나라’의 그림자라 할 수 있는 현대의 한국교회와 미국교회에 이와같은 ‘우리 공동체’ 실현이 얼마나 절실한지 모두 알고 있으나, 문제는 이와같은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우리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로 한결같이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교만하고 거짓되고 미움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주기도문을 통하여 배우는 ‘우리 공동체’의 의식과 꿈을 갖고 ‘우리’라는 용어로 기도하면서도 여전히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의기소침 할 수 밖에 없는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과 감사 가운데 ‘우리’의 기도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주님께서 이와같은 이상적인 ‘우리 공동체’가 온전하고 완벽하게 실현될 종말론적 천국(하늘 나라)을 약속해 주셨기 때문이다.
주께서 재림하시고 우리 모두의 육체가 부활하여 들어가게 될 하늘 나라, 곧 종말론적이고 우주적인 ‘우리 공동체’에서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우리 모두는 예수의 보혈로 맺어진 혈연 공동체의 멤버가 되어 예수님이 보여주신 성숙되고 온전한 영성과 인성, 곧 진실과 겸손과 사랑을 실천하면서 무한대의 평화와 기쁨을 영원토록 누리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먼저 세상을 떠난, 모세와 다윗과 사도 바울과 성프랜시스 같은 성자들은 물론이고, 이 험악한 세상에서 함께 주님을 믿었던 수많은 성도들과 부모형제를 모두 만나 영원한 ‘우리 공동체’를 이루게 될 것이다. 감사한 것은, 그곳에는 더 이상 악한 짐승, 곧 교만과 거짓과 증오로 가득찬 이기적인 세력은 침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악한 짐승들은 그들의 대장 마귀와 함께 영원한 불못에 던져져, 예고된대로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 곧 지옥의 형벌을 맛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 공동체’는 삶의 동기와 목적에 있어서 공산주의 공동체(Communism)와 확연히 구별된다. 창조주 하나님과 영원한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고, 그대신 유물론(唯物論)이라는 거짓 신(神)과 우상을 숭배하며, 오직 물질적 풍요를 얻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교만과 거짓과 증오 위에 건설된 공산주의는 필연적으로 그 반대의 입장에 서있는 기독교를 박멸해야 할 최대의 적으로 인식할 수 밖에 없고, 쏘련과 중공과 북한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최악의 방법으로 기독교인을 비롯한 모든 반대자를 숙청하고 고문하고 살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의미에서 ‘우리 공동체’의 깨달음 속에서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오늘의 기독교인이야 말로 현 시대의 풍조와 이데올로기를 분별하는 가운데 인생의 참된 목적과 동기와 해답을 갖고 천국을 향해 전진하는, 진정으로 행복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2) (당신의/아버지의/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이 구절은 주기도문에 나오는 여섯 가지 간구들 - (1) 하나님의 이름, 2) 하나님의 나라, 3) 하나님의 뜻, 4) 일용할 양식, 5) 죄 용서, 6) 악(마귀)에서의 구원 - 가운데 첫 번째 간구인데, 이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하기에 앞서, 지나간 주기도문 강해에서 간단히 설명한 바와 같이, 이 구절의 수사학적(修辭學的/Rhetorical) 구조, 즉 주기도문의 서두와 말미를 장식하는 송영(doxology)으로서의 ‘수미쌍관법’(首尾雙關法/inclusio)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려 한다.
우리가 친구나 상관에게 선물을 바칠 때 선물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포장(형식)도 중요하기에 깨끗하고 예쁜 포장지를 사용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 있어서도 내용 못지 않게 (문학적) 형식과 표현이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올바르고 효과적인 기도의 순서로서 - 기도할 때 어떤 간구를 나열하기에 앞서 - 먼저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구별하여) 찬양하고(칭찬/Praise), 기도를 끝마칠 때에도 “(당신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송영을 반복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잊지 말 것을 이와같은 ‘수미쌍관법’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성품(사랑)을 닮아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때 마음에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것처럼, 인격자이신 하나님께서도 만물의 영장(Lord of All Creation)인 인간으로부터 찬양(칭찬)을 통한 사랑의 고백을 받으시길 기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찬송 가운데 거하기를 기뻐하시며(시 22:3) 찬양을 받으시기 위하여 자기 백성을 창조하셨다(사 43:21). 소요리 문답에도 나오는바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은 이처럼 찬송과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사도 바울이 언급한 것처럼(고전 10:31),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해야 한다. 성경의 중심부를 차지하는 책으로서 예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고 인용하셨던 구약의 시편(테일림/찬송가)에 나오는 150편의 노래를 쥐어짜면 ‘할렐루-야’(야웨를 찬양하라)라는 한 마디 엑기스가 나온다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소설가 마크 트웨인(M. Twain)의 말처럼, 사람은 멋진 칭찬을 들으면 그것만 가지고도 두 달을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며, 나폴레옹 황제가 어느 날 면담 끝에 “황제처럼 위대한 지도자를 만난 저와 프랑스 백성이야 말로 참으로 영광스럽고 행복합니다”라 칭찬해 준 어떤 신하에게 강원도처럼 크고 아름다운 땅을 선물로 주었다는 일화도 같은 맥락에서 고려해 볼 가치가 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Hallowed be your name/NIV)라는 구절에서 제기되는 또 하나의 문제는 “이름‘이라는 단어에 붙은 소유격을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영어 번역으로 읽으면 그 뜻이 분명하지만 한글개역과 공동번역, 그리고 새로 나온 주기도문에서 각기 그 번역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헬라어(Onoma sou/Your Name)를 “당신의 이름”으로 문자적으로 번역할 경우, (아버지를 “당신”이라 부를 수 없는) 한국인의 정서에 어긋나므로, 새로 나온 한글 주기도문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의역하고 있으나 역시 만족한 번역은 아니다.
구약성경을 알고있는 독자들은 ‘당신의 이름’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그 이름은 ‘여호와’(‘야웨’)이다(출 3:15). 유대인의 전통, 즉 인간의 부정한 입술로 거룩하기 그지없는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발음할 수 없어 ‘아도나이’(주님)로 대치했던 오래된 관행에 따라 본래의 “야웨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라는 표현에서 “야웨의”를 생략한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웨’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정체(Identity) 및 명예를 드러내는 지고의 거룩한 명칭이므로 피조물인 인간이 발음하면 인간의 지배 아래 창조주 하나님을 구속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어 (주전 6세기부터?) 그 발음을 금지시켰고, 지난 2천년 동안, 그리고 현재까지도 발음하지 않기 때문에 그 정확한 발음법을 잊어버린 상태에 있었는데, 주후 1500년 이후에야 그 발음이 이방인 문서에 나타난 발음법을 참고하여 ‘야웨’(‘야훼’? ‘야흐베?’)로 밝혀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심각하게 유의해야 할 사실은 야웨께서는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다른 신(神/gods)에게 또는 어떤 인간에게도 절대로 양보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성경 곳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이 차지하려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한 경우를 여러 번 발견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하와와 모세이다.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려다가 아담과 함께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으며, 모세는 광야에서 물이 없어 불평하는 백성 앞에서 “반석을 향하여 물을 달라고 말하라”(의역)는 야웨의 명령을 어기고 오히려 분노한 자세로 (자기가 물을 주는 자인 것처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민 20:10) 소리치며 지팡이로 두 번이나 반석을 내려치는 것을 본다. 이와 같은 망령된 일로 인하여 하나님은 진노하사 모세와 아론으로 하여금 그토록 사모하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셨던 것이다. “....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20:12)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라는 구절은 거룩한 삶을 통하여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를 높여 드리려는, 다시 말하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와 다짐을 담고 있고, 아울러 하와 및 모세와 같이 야웨의 영광을 어떤 상황에서도 탈취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게 해 주시기를 기원하는 성도의 첫 번째 기도 제목이라 할 수 있다.
(추가 설명)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구절은 주기도문의 서두를 장식하는 송영(Doxology), 즉 인간의 근본적 본분(사 43:21)으로서의 찬양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고있는 성도가 그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찬송이었다. 동시에 이 서두는 크리스천에게 마땅한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통하여 우주 만물 앞에서 하나님의 명예를 높여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저 하는 성도의 첫 번째 기도 제목이라 할 수 있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앞에서 강조한 또 하나의 설명은, 하나님께서는 그 거룩하신 이름을 높여드리지 않고 “하나님처럼 되려는”(창 3:5), 즉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그 어떤 인간의 행동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죄악을 범했던 하와와 모세가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자초했는지 살펴 보았다. 바벨론 제국의 황제 느부갓네살이 그 제국의 영광과 부귀가 극치에 달했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마치 자신의 업적인양 교만한 말을 하자마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광야로 쫓겨나 이성없는 소처럼 풀을 먹으며 짐승처럼 살아야 했던 사례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단 4:28-33).
그러나 하와에 앞서, 즉 천지 창조 이전에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가장 먼저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려다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자초한 범죄자, 곧 원초적인 교만과 저주의 주범으로 주목받는 자는 사탄(Satan)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여러 천사장들 가운데 하나로서, 라틴어로 ‘루시퍼’라는 별명(사 14:12)을 갖고있는 그가 ‘사탄’이라 불리우게 된 이유는, 그가 영광스런 옷을 입고 아름다운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사명을 부여받은 그룹(Cherub)임에도 불구하고(겔 28:13-14) 자신의 높은 지위와 화려함에 도취되어 자신의 존재 이유를 망각/착각한(?) 나머지 스스로 교만해져서 자신을 하나님처럼 높이려 하다가(사 14:14) 결국 하나님을 대항하는 대적자(히브리어로 ‘사탄’은 ‘대적자’/Adversary/Opponent를 의미함)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사탄을 ‘마귀’(Devil)라 부르는 이유는, 그가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려다가 실패하자 하늘 보좌에서 쫓겨나 공중(지구)에 갇친 자가 되었을 때(엡 2:2) (마치 공산당이 감언이설로 당원들을 모집하듯이) 지구에 살고있는 하나님의 백성, 곧 아담과 하와를 비롯한 성도들을 감언이설로 속이고 유혹하여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가 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담 이후의 모든 후손들,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모든 인간들로 하여금 결국은 마귀와 함께 영원토록 고통과 멸망을 받게 될 지옥 백성으로 만든 악질적 거짓말쟁이요 살인자요(요 8:44) 이간자이므로 ‘마귀’(헬라어로 ‘디아볼로스’는 ‘이간자’를 의미함)라고도 불리운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지럽히려는 이간자 마귀의 유혹을 당하여, 즉 하나님의 이름을 대적함으로써 온 인류가 지옥과 같은 고통과 저주를 자초하게 된 또다른 대표적 사례로서 우리는 바벨탑 사건을 들 수 있다. 노아 홍수 이후에 인간들은 다시는 대홍수 때문에 멸망당하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서 바벨탑을 건설하게 되는데, 이 바벨탑의 또다른 동기는 인간의 명예욕, 즉 자신들의 위대한 이름을 후세에 남기자는 것이었다(창 11:4). 이와같은 하나님의 명예에 도전하는 일에 마귀와 한 패가 되었을 때 인간에게 내린 재앙은 언어의 혼잡이었다. 인간의 사회적 삶에 있어서 언어의 불통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극복하기 힘든 장벽인지는 조국을 떠나 미국에 건너와 살고있는 한국인 이민들이 잘 알고 있다. 영어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이야말로 매일 매일 겪게 되는 하나님의 심판이요, 혹독한 형벌이 아닐 수 없다. 바벨탑을 쌓아 자기 이름을 남기려 했던 선배들의 명예욕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분노를 자초했는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실례가 아닌가!
이 대목에서 우리에게 떠오르는 또다른 질문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명예와 이름을 침범하는 자들을 혐오하시고 심판하시는 하심으로써 그토록 일관되게 자신의 명예에 집착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다양할 수 있겠으나, 우선적으로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야웨 이름은 야웨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마치 ‘장보고’와 ‘이순신’이라는 이름 한 마디에 그들의 인격과 신분과 명예가 다 들어있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야웨 하나님의 이름을 믿고 찬양할 때 이는 야웨(또는 예수님)의 정체성, 곧 야웨의 인격과 성품을 다른 신이나 피조물로부터 구별하고 인정하고 존경하는 것을 가리키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기뻐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대접해 주시는 것이다(요 1:12).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정체를 인정하여 순종하지 않는다면, 즉 야웨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면, 반대급부적으로 결국 야웨를 대적하고 반대하는 마귀와 한 패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야웨는 이와 같이 자신의 이름에 손상을 입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명예를 걸고 자기 백성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분이심을 알고 있기에, 모세와 같은 지도자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항상 야웨의 명예에 호소하는 것을 볼 수 있다(민 14:15-19). 야웨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얼마나 존중하시는지, 성군(聖君) 다윗도 시 23편을 통하여 감동적으로 고백하였다: “(야웨께서는)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2017년도의 사순절(Lent)을 보내면서, 주기도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하여 우리가 잊지 말고 깊이 묵상해야 할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히 3:1). 하나님의 뜻을 거역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에 폐를 끼친(?) 첫 번째 사람 아담과는 달리, 둘째(마지막) 아담으로 불리우는(고전 15:45,47)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인류 역사상 ‘하나님의 이름(명예)’을 가장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높여드린 사람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 of Christ”이라는 영화(2004, Mel Gibson 감독)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가 얼마나 크고 참혹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했던 우리 인류의 죄가 얼마나 무겁고 혹독한 것이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며, 동시에 이와 같은 예수의 죽음은 독생자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내어주사(요 3:16)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결국 골고다 언덕에 서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이름(‘야웨’ 또는 ‘예수’)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정체성 곧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완벽하게 증언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최고로 높여드린 영광과 승리의 깃발이었던 것이다.
150편의 시편(찬송) 가운데 70편 이상을 작사작곡하였을 뿐만 아니라 4천명 이상의 성가대로 하여금 이 찬송을 부르게 함으로써(대상 23:5) 이 세상에서 전무후무(前無後無)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려 했던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세상의 그 어떤 인물보다 더 영광스런 존귀와 명예(대상 29:28)로 보답해 주신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골고다의 십자가 위에서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한량없이 높여 드린, 그야말로 이 세상의 그 어떤 인물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시원하게 해 드렸던(잠 25:13),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존귀하게 해 주시고, 그의 이름을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영원토록 영광스럽게 높여드리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6~11).
위에 언급된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 찬미’에 나타나는 바, 우리가 예수님께 배워야 할, ‘하나님의 이름’에 최고의 영광을 돌리는 바람직한 방법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그것은 겸손과 순종이다. 순종은 겸손을 전제로 하고 겸손은 순종으로 표현되기에 이 둘은 떼어 놓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를 높여드리는 최고의 미덕이다.
먼저 겸손의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자. 예수께서는 본래 영광스런 하나님의 본체요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비천하고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마굿간까지) 내려오셨으며, 일생동안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해 주고 눈물을 씻어주는 종(Servant)의 자세로 사셨고, 마침내 모든 인류에 대한 최고의 섬김과 봉사, 즉 죄로 인하여 지옥 형벌을 받아 마땅한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고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바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성전 마당에서 인간의 죄를 묵묵히 지고 가는 어린양처럼, 당시 최악의 죄인괴수에게만 주어지는 십자가 형틀을 지시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 인류 역사상 가장 고통스런 방법으로 처형을 당하시고 죽으심으로써 무덤의 자리로까지 낮아지셨던 것이다. 이보다 더 낮아진 종이 어디 있으며, 이보다 더 놀랍고 위대한 겸손이 세상에 어디 있으랴. 이와 같은 겸손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천국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 원리로서의 온유/겸손을 완벽하게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증거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명예를 가장 높여드릴 수 있었던 두번째 방법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 순종/복종이었다. 마치 필자의 딸들이 아빠 되는 필자의 명령과 뜻에 동의하고 그 명령에 100% 순종하고 복종할 때, 주위 사람들 앞에서 필자의 명예와 권세와 영광이 드러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독생자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예수께서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다. 이 십자가의 길이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럽기에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이나 이 잔을 지나가게 해 주시기를 간구하였다. 이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는 즉시 예수께서는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완전하게 그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금년도 사순절에 우리 크리스천들은 무엇을 묵상해야 하며,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릴 수 있을 것인가? 이 시대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섬김의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은 무엇이며, “원수까지 사랑하라”(요 13:34-35)는 예수님의 간절한 명령을 순종함으로써 예수님의 명예를 높여드리는 방법은 어떤 것인지 스스로 자문해 본다.
3) (당신의/아버지의/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1) 나라가 임하옵시며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성도에게 있어서 이처럼 중요한 구절도 없고, 중요한 만큼 그 뜻을 설명해 줄 많은 도움이 요청되는 구절도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주기도문 가운데서 이 구절이 기도를 이끌어 가는 핵심으로 보았다. 예수님께서도 성도의 최우선적 기도 제목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지칭하셨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너희는 먼저 그(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하라”(마6:33).
이 구절이 21세기의 한국 성도들에게 잘 이해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2천년 이상의 문화적 간격 때문일 것이다. ‘나라’라는 말에서 느끼는 바와 같이, 예수님 당시의 문화적 상황이 2천년 이후의 현대인들에게 금방 떠오르지 않게 마련이다. 이 구절은 차라리 영어 번역 “(May) your kingdom come!”(NIV)이 좋아 보이는데, 한국말로 ‘나라’로 번역된 헬라어 ‘바실레이아/Basileia’는 2천년 전 왕이 통치하던 ‘왕국’(Kingdom)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그 왕국이 (이 땅에) 임하게 하소서”라고 번역하면 좀더 이해하기 쉬워진다.
그럼 하나님(또는 예수님)께서 왕이 되시어 통치하시는 그 왕국은 어떤 나라인가?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사랑(Love)과 공의(Justice)의 나라’이다. 마귀의 포로가 되어 고통당하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곧 사랑의 왕 예수를 보내시어 그 아들의 생명을 희생하시기까지 무한대의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왕의 나라이며, 또 한편으로는, 죄악으로 인하여 지옥 형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을 공의의 법대로 심판하기 위하여 죄없는 자기 아들(예수)에게 그 죄를 전가(轉嫁/transfer)시켜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게 하실 정도로 공의가 실현되는 왕국이다. (마치 왕위를 계승해야 할 왕자가 국가의 법을 어기어 한 손을 절단해야 하는 형벌을 받게 되자 그 왕이 자기의 손을 자르게 함으로써 아들의 벌을 대신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은 완전한 사랑과 공의의 통치 가운데서 참된 구원과 평안(샬롬)을 누리는 백성들이 그 놀랍고 위대하신 왕 하나님(또는 예수님)께 감사 감격하여 영광을 돌리며 그 이름을 영원토록 찬양하게 되는 나라가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 ‘하나님 나라’의 최고 지도자(왕)가 보여주는 사랑의 통치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예수님의 일생에서 보는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높으신 창조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약하고 비천한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내려 오시어 가장 낮은 종의 자리까지 낮아져서 온유하고 겸손한 자세로 백성의 발을 씻어 주기까지(빌 2:5-11) 섬기시는 왕이다. 세상에 이런 사랑과 겸손과 선하심으로 통치하는 왕이 어디 있겠으며(행 10:38), 그분의 통치를 받는 백성은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결코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민 23:19) 진실하신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종말에 주시기로 약속하시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는 성경에서 종종 ‘하늘 나라(천국)’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 ‘하늘 나라’는 음부(어둠)의 권세 곧 마귀의 세력이 결코 침투하지 못하는(마 16:18) 이상적 교회로서의 광명한 천국이요, 더 이상 고통과 눈물과 죽음이 없는, 온전한 생명과 샬롬과 안식과 의(義)가 흘러 넘치는 영원한 천국이다.
따라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오늘 여기에) 임하옵소서” 기도할 때 그것은 종말에 실현될 그 온전한 ‘하늘 나라’를 앞당겨 21세기 현재(Now) 자신이 살고있는 이곳에서(Here) 현실로 경험하게 해 주시기를 믿고 간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예수님을 왕으로, 구세주로, 주인으로 영접함으로써 성령(예수의 영)의 통치를 받고있는 성도들은 (중생을 경험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고백하듯이) 천국에서 누릴 그 기쁨과 만족과 행복과 평화를 현재적으로 맛보게 된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도 실현되기를 간구하는 또다른 이유는, 이 하나님의 나라를 반대하고 저항하는 세력이 있고, 그 마귀의 권세 아래 고통을 당하다가 결국은 마귀와 함께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게 되어 있는, 수억의 불쌍한 이웃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와 같은 혈통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귀하게 창조된 형제 자매요 이웃임을 생각한다면, 이보다 더 안타깝고 답답하고 시급한 상황이 어디 있겠는가? 북한 공산당의 억압 가운데서 비참하게 살고 있는 그들에게도 대한민국(또는 미국)의 시민이 되는 길이 있다면 어찌 가만히 앉아 있겠는가? 예수께서 주기도문을 통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시급하게 이들을 위하여, 즉 마귀의 권세 아래 갇쳐 있어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을 얻지 못한 불쌍한 이웃의 구원을 위하여 우선적으로 간구하도록 명령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성도의 시급한 기도제목이라 할 수 있는 이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을 위하여 오늘의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일차적으로 매사(每事)에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고백하고 찬양함으로써 마음에 ‘하나님 나라’(눅 17:21)가 이루어지도록 하며, 그리고 제2차적으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인 사랑과 공의와 겸손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도래(到來)를 세상에 증거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어차피 누군가의 지배를 받게 되어있는데,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 재물과 쾌락과 지식 등의 우상일 수도 있고, (어떤 몰상식한 깡패의 말처럼) 자기 주먹일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자기 안에 마귀의 나라를 세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이 구절은 마귀의 유혹에 빠져 교만과 거짓과 미움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실했던 과거의 어리석음을 버리고 ‘코람 데오’의 삶을 회복하기로 다짐하고 결단하는 회개의 기도라 할 수 있다.
(2) 나라가 임하옵시며
앞에서도 간단히 언급한바, ‘하나님 나라’의 위대함은 사랑과 진실과 겸손으로 통치되는 그 나라의 윤리관에 있으며, 그 윤리의 중심에는 인간의 생명(영혼 또는 인권)에 대한 애착과 존중이 자리잡고 있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에서는 인간의 생명을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고귀한 가치로 여긴다. 인질로 잡혀가는 국민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항공모함과 특공대 수천명을 투입하는 미국 정부처럼(영화 ‘캡틴 필립스’ 참조),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은 인간의 목숨(영혼) 하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천군천사를 동원하실 뿐만 아니라 독생자 예수의 생명까지도 기꺼이 희생하고 투자하실 정도이니, ‘하나님 나라’에서 인정받는 당신과 나의 생명(영혼/인권) 값은 얼마나 고귀하고 비싼 것인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
하나님 나라에서 그토록 인간의 생명과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와 근거는 무엇인가? 창세기의 첫 장에 기록된 것처럼, 인간은 본래부터 ‘하나님의 형상’(첼렘 엘로힘/Image of God)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문자적으로 이 용어는 인간의 모습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끼리끼리 모인다”라는 말에서 보는 것처럼, 사랑 자체이신(요일 4:8,16)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함께 동거하며 교제할 수 있는 사랑의 대상으로, 특히 모든 피조물 가운데 최후의 걸작품으로, 존귀하게 창조하였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처럼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적이고 신적(神的)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역사에 동참할 수 있는 창조의 파트너로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그리고 그 나라의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창조되었기에, 세상에서 그보다 더 지혜롭고 유능하고 존귀한 피조물은 없다. 인간의 두뇌만 하더라도 정부의 수퍼 컴퓨터 700대를 합친 것보다 더 우수하고, 작디 작은 인간의 유전자에 들어있는 모든 정보를 풀어 책으로 출판할 경우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00미터 되는 거대한 창고를 채우고도 남을 정도의 분량이라니, 얼마나 신묘막측한(시 139:14) 존재인가?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토록 공들여 만드신 인간의 영혼을 기껏해야 100년 동안만 사용하다가 폐기처분되도록 디자인 하셨겠는가?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윤리에 따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거룩한 백성(성도)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동료 인간의 생명과 인권도 귀중히 여길 수 밖에 없고, 이 원리에 따라, 마치 예수께서 모든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여 자신의 것과 동일시 하신 것처럼, 자기 이웃의 생명을 예수님의 생명과 동일한 값으로 존중하여, 그들도 예수를 믿고 천국 시민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그들의 삶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도록,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명 존중의 원리에 따라 기독교에서는 모든 인간의 생명을 동일한 가치로 인식할 수 밖에 없고, 그런 의미에서 어린 아이의 생명을 귀중히 여기어 낙태를 반대하고, 여성의 인권을 남성의 인권과 동등하게 여겨 차별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서는 인종차별주의나 계급주의적 사회구조를 반대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인간의 생명과 인권을 존중하는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세력, 곧 ‘사탄의 왕국’이 이 세상 우리 곁에 여전히 존재한다는데 있다. ‘공중의 권세 잡은자’(엡 2:2) 또는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6:12)이라 불리우는 이 ‘마귀의 나라’는 ‘교만과 거짓과 증오’의 통치 원리 위에 세워져 있으며, 이 원리에 따라 존귀한 인간의 영혼과 생명을 파괴하고 인권을 유린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 사악(邪惡)한 사탄의 왕국은, 한편으로는, 주님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 때까지 수많은 영혼들을 거짓말로 유혹하여 마침내 영원한 멸망의 지옥으로 끌고 가는데 목적이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마치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듯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을 끊임없이 공격/핍박하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방해하기에, 성도들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이 땅에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의 지구상에 존재하는바,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가장 막강한 대표적인 ‘사탄(마귀)의 나라’는 공산주의(Communism)라 할 수 있다. 이 사악한 왕국은 우선 무신론 공동체로서,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며, 그 대신에 ‘유물론’(Materialism)을 신격화하여 숭배하기에, 인간의 양심은 물론 영혼의 존재나 사후(死後) 세계와 영생 천국을 거부하며, 따라서 생명과 인권의 고귀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물질적 풍요만이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목표이자 덕목(德目)이요 행복이라는 거짓말로 속인다. 말하자면 이들은 ‘유물론’으로 둔갑한 사탄을 숭배하는 악하고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들이다. 최근의 북한 정권의 만행에서 보는 것처럼, 공산당의 부흥과 확장을 위해서는 인간의 생명을 파리 목숨 만큼도 여기지 않고, 자기 친척을 무참히 살해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는 자들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가족이나 친척을 핍박하고 잔인하게 살해할 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차별하며, 심지어 남성에게만 허락된 할례를 어린 여아에게도 강요하여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는 (극단주의적) 이슬람교도들의 실상을 고발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의 기도 첫 번째 항목을 기억하면서, 다시 한번 우리 개인의 마음과 가정과 교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할 뿐만 아니라, 수십억의 영혼들이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이 지구촌에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임하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리게 된다.
(3) 나라가 임하옵시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지난 두 번의 강해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가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한 나라인지, 특히 그 나라의 중심적 윤리인 생명(인권) 존중 사상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아마도 21세기 현재 지상에서 가장 발전된 문명의 나라요 가장 잘 사는 나라로 여겨지는 미국(USA)보다 몇 천억 배나 더 좋은 나라가 ‘하나님 나라’다. 이 나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창조주이시니 시골 우물의 두레박보다 작은 인간의 두뇌로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며, 손바닥보다 작은 입으로 어찌 다 설명할 수 있으랴! 그 나라의 백성이 된다면 지금 당장 죽어도 좋은 것이요, 그 나라를 위하여 생명을 바쳐도 결코 아깝지 않은 이유는, 생명을 바치는만큼 더 풍성한 생명으로 보답 받으리라는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소지한 성도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가 한낱 배설물(Dung/빌 3:8)에 불과하고, 세상의 좋은 것을 모두 소유한 사람이라도 천국 시민권을 얻지 못했다면, 그 사람처럼 불쌍하고 가련한 인생은 없다.
문제는 이 좋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 즉 천국 시민권을 얻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하나님 나라’일지라도 그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모른다면 그것은 ‘그림의 떡’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미리 반가운 소식을 알려 드리고 싶다. 그것은, 미국 시민권을 얻으려면 무척 힘들고, 때로는 많은 돈을 들여야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얻는 방법은 너무나 쉽고 간단하다는 것이다. 성경적 표현을 빌린다면, 천국의 시민권은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은혜/롬 3:24)이고, 세속적인 말로 표현하면, ‘무료’요, 공짜다. 하나님께서 천국 문을 남녀노소 차별 않고 누구에게나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항상 열어놓고 계신 것을 보면, 인간의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천국 시민권을 취득하는 것을 가리켜 성경 저자들은 ‘구원’(Salvation/눅 19:9)이라는 용어 외에도 ‘중생’(Born Again/요 3:5), ‘의인’(Justification/롬 10:10) 등의 여러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신학적 용어들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고, 좀더 쉽게 설명해 보려 한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길은 한 마디로 ‘예수’ 이름을 믿는 방법 밖에 없다(행 4:12).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이심을 믿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이 예수께서 죄로 인하여 지옥에서 멸망당할 수 밖에 없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빌 2:6-8) 세상에 내려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고, 정해진 때가 되었을 때 우리의 모든 죄(지옥 형벌)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참조) 3일 후에 부활하신 분이심을 믿는 것이다. 죄 없으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써 그분이 대신 짊어지신 당신과 나의 모든 죄도 함께 죽어버렸고, 그분이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당신과 나는 모든 죄를 탕감받은 의인으로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활하게 된 것을 믿는 것이다. 성경에 요약된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이처럼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천국 시민권은 세상의 어느 나라의 입장권 또는 시민권보다 비싼 가격이다. 하나님께서는 억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곧 예수님의 생명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지름길은 복음(Good News), 즉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요 3:16)는 사실을 믿는 것이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딸들이 아빠의 선물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듯이) 기꺼이 환영(영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나니”(요 1:12). 이와 같은 소식은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되고, 이와 같은 소식을 믿고 인정하는 것도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죽기 1분 전에도 가능하기에 진정한 의미에서 천국 시민권은 전천후(全天候)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공개되는 복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복음은 영생극락에 이르기 위하여 수백 마일의 ‘차마고도’를 ‘삼보일배’하며 걸어가는 불승들의 고행을 반대한다. 그 어떤 고행으로도 씻어낼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죄요, 그 어떤 인간의 공적(功績)으로도 살(to buy) 수 없는 것이 천국 시민권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사도 바울이 그토록 반대했던 율법주의, 곧 선행(善行)을 통하여 영생을 얻으려는 인간의 생각은 기독교인이 조심해야 할 또다른 적이요 원수다.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가 제시하는 구원의 방법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대신 희생시키신 하나님의 방법을 거절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공로를 무효화시키며,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생각이요, 여기에서 뒤따르는 회개이다.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거절하고 자기 맘대로 살며 왕노릇했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하나님의 구원 방법을 수용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메시야(왕/그리스도)로 고백/영접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폄하하는 죄를 짓게 되고(요일 1:9), 이와 같은 불신자에게 천국문은 열리지 않는다. 이와 같은 어리석은 불신자들에게도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임하소서”라고 우리는 오늘도 기도드린다.
(4) 나라가 임하옵시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
기독교인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 나라’(천국)의 백성이 되었다는 확신 가운데서 맛보는 행복과 기쁨은 너무나 놀랍고 감사하기 그지 없지만, 이와 동시에 떠오르는 의문과 안타까움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방법이 그토록 쉽고 편리한데도 이 천국 시민권을 얻지 못하고 결국은 마귀와 함께 영원한 멸망(지옥)을 받게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다(마 7:13-14). 마치 (정해진 기간 안에) 이름을 등록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미국 시민권 또는 영주권을 공짜로 주겠다는 대통령의 특령이 공포되었다고 가정할 때, 이 소식을 믿지 않다가 그 고귀한 기회를 놓치는 것과 같다. 만약 기회를 놓친 사람들이 나의 가까운 친족이나 친구 또는 같은 피를 나눈 동포라면 이 얼마나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겠는가? 나에게는 그토록 쉽고 편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인데, 똑같은 이성과 가치관을 소지한 다른 사람에게는 그 복음이 믿어지지 않고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요 풀리지 않는 신비 가운데 하나이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살후 3:2);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성경 말씀에 의하면, 예수를 믿지 못하고 결국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지 못하는 원인은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불신자 자신의 책임, 즉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과 교만 때문이요,
둘째는 사탄의 훼방 때문이며,
셋째는 먼저 믿는 기독교인들의 비행(卑行), 특히 교회 지도자들의 타락한 삶 때문이다.
성경 말씀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이라 부르고, 때로는 그들을 ‘부자’에 비유하기도 한다. 심지어 예수께서는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말씀하셨다(눅 18:24-25; 마 19:24; 막 10:25). 어떤 의미에서 모든 비기독교인들은 ‘부자’라고 볼 수 있는데, 복음을 믿는 기독교인들보다도 더 우수한 생각과 철학을 자신들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교만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천국보다 더 좋은 세상의 물질과 쾌락과 영광이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단단한 길 바닥에 떨어져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리는 씨앗과 같고, 가시덤불 위에 떨어져 세상의 쾌락과 욕망의 가시에 질식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씨앗과 같다 할 수 있다(마 13:4-7).
부자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놓치게 하는 결정적인 실수는 그들의 교만한 생각(철학) 때문이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고, 이 사실을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영생 천국을 얻는다는 것이 선뜻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쉽고 간단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독생자 예수의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베풀어 주시는 그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거절하는 것으로써,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보다 더 큰 모욕이 없기에,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선물을 거부하고 지옥으로 달려가는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원칙에 따라) 결코 구원의 길은 없게 마련이다(행 4:12). 어느 나라이든 그 나라 주권자의 사랑과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지 않는 백성은 그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두번째의 결정적인 원인은 복음을 깨닫지 못하게 방해하는 세력 곧 마귀(사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마귀는 ‘하나님 나라’의 원수이자(마 13:39; 벧전 5:8)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거짓의 아비로서(요 8:44), 하나님 나라의 번창을 시기 질투하여 수많은 인생들로 하여금 복음을 믿지 못하게 하고 결국은 영원히 멸망할 자기 나라인 지옥으로 끌고 가는 최악의 유혹자요 살인자이다. 모든 인간들의 마음에 끊임없이 욕심과 교만(딤전 3:6)을 부추기고, 하나님의 존재는 물론 영혼의 존재와 예수의 부활을 부인하도록 가르치며,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길을 가로막고 온갖 수단과 방법과 권세를 동원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대적하고 핍박하기 마련인데, 모든 불신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고 대적하는 이 마귀의 나라와 권세에 종속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세 번째의 중요한 요인은 기독교인들의 부적절한 행동 즉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과 진실과 겸손의 삶을 저버린 삶 때문이고, 특히 교회 지도자들의 타락한 삶 때문이다. 이들은 예수님 당시의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천국 문 앞에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다(마 23:14-15). 불신자들도 보는 눈은 있어서, 성도들의 비행이나 교회 지도자들의 타락한 모습을 보면 기독교 진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알고, 기독교인들이 저 모양이니 그들이 가르치는 천국 영생의 진리도 거짓말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이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 없이, 성도들이 거짓말하고 욕심을 부리고 돈과 쾌락에 탐익하여 이전투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오늘의 한국교회를 3류 종교로 전락시키는 핵심 요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가 속히 임하옵소서“라는 기도에는 과거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지 못했던 과거의 죄악을 회개하고, 이후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기로 다짐하는 성도의 결단이 담겨있다.
4) (당신의/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1)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
이 구절도 한글 성경에서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로 번역되어 있어서 그 의미를 금방 이해하기 어렵다. 성경 원문(헬라어)을 비교적 쉽게 번역한 영어 번역(NIV)을 참고하기 바란다: “Your will(purpose)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주기도문 가운데서 이 기도 제목(쎌레마 쑤/Your Will)이 얼마나 실천하기 힘든 것인지 알려면,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제목만을 놓고 피땀 흘리면서 밤새껏 기도하신 사건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예수께서는 성 금요일 전날 밤에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할지, 아니면 그 참혹한 고난의 잔을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싶어하는 자아(自我)의 ‘뜻’을 따라야 할지... 이 둘 사이의 갈등 속에서 그토록 처절하게 씨름하셨고, 결국은 ‘인간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단하신 후 기꺼이 그 무겁고 수치스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 죽임을 당하셨던 것이다.
이 구절을 대할 때 성도에게 떠오르는 하나의 질문은,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 곧 ‘하나님의 뜻(쎌레마/목적/소원)’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성경 전체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로서의 ‘사랑과 공의’로 요약될 수 있고, 좀더 넓은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모든 인간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율법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눅 10:27-28);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 “나는 인애(헤세드/사랑)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주기도문의 세번째 기도 제목 역시 두번째 기도 제목이었던바 ‘하나님 나라’의 성취와 확장을 위한 선교적 기도라 할 수 있다(마 6:33). 사도 바울이 아들 같은 디모데에게 당부한 바와 같이, 이 기도 제목에 근거하여 성도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복음을 전하는데 집중하고 인생을 계획하고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제기하는 또다른 질문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문장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필자가 동의하는바, 정통적 성서주석가들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함께 창조된 천사들이 있었고, 그 우두머리 천사들(미가엘과 가브리엘과 루시퍼 등) 가운데 하나인 루시퍼(사탄/마귀)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반란을 일으키다가 공중(세상)으로 쫓겨났으므로(계 12:7-12; 사 14:12-15; 겔 28:12-17) 하늘에는 더 이상 거역하는 세력이 없고, 하나님의 뜻이 방해를 당하는 일이 없으며, 천국의 모든 천사들과 백성들이 한결같이 하나님의 뜻에 일사분란하게 순종하여 질서와 화평과 기쁨이 가득한 것처럼, 지상에서도 천지만물과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 나라 곧 질서와 안정과 평화와 행복과 기쁨이 가득한 천국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간구요, 요청이라는 것이다.
어떤 건물이든 기계든 예술 작품이든 간에 제작자의 뜻과 목적이 있게 마련이듯이, 하나님께서 하늘의 세계와 땅의 세계 곧 온 우주와 인간과 물질을 창조하신 목적과 뜻이 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마치 장항선 기차가 정해진 선로(線路) 위를 이탈하지 않고 계속 달려갈 때 기대하는 목적지(장항)에 무사히 도착하여 승객들에게 기쁨을 주고 기차를 운영하는 국가의 발전에도 공헌하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들이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겸손히 받들어 순종할 때 어둠과 무질서와 불안로 가득찬 이 세상은 질서와 화평과 기쁨으로 가득찬 천국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마치 정해진 길을 달려가야 할 기차가 선로를 이탈할 경우에 초래하는 고통과 불행이 막대한 것처럼,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거역할 때 하나님의 보시기에 심히 좋고 아름다웠던(창 1:31) 우주는 어둡고 무질서한 지옥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가 당하는 재난과 고통과 불행도 이루 말할 수 없다. 영적 안목을 소지한 기독교인 의사들의 공통된 견해에 따르면, 현대인이 걸리는 질병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인간의 뜻을 따라 교만과 시기, 질투, 간음 등의 죄에 빠졌을 때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인간의 뜻’을 고집하는 행위는 마치 가시채를 뒷발질 하다가 큰 상처와 아픔을 당하는 말처럼(행 26:14) 어리석은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경험을 반복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여전히 미숙한 우리 모두가, 어떤 목회자가 신신당부한 것처럼, 매일 아침 하루의 일들을 시작하기에 앞서 반드시 새벽기도를 드리며 예수님처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와 거역하는 자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복을 누리게 되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 온갖 불행과 저주를 당하게 된다는 성경적 진리는 기독교인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도 알고 있는 보편적 진리이다. 동양의 위대한 스승으로 존경받는 공자의 가르침에도 “순천(順天)자는 흥하고 역천(逆天)자는 망한다”(順天者興 逆天者亡)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와 같은 행복의 원리는 모든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귀가 닳도록 들어왔는데도 실제로 세상에서 이 진리대로 사는 성도들이 (한국인의 경우에) 전체 인구의 20%도 안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뜻’을 알더라도 그 뜻에 순종하려는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고 분별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롬 12:1-3). 이를 위해서는 간접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심어 놓으신 이성과 양심에 귀를 기울일 수도 있겠지만,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원리를 따르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하나님의 계시(啓示)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고(요 5:39; 딤후 3:15-17), 또 하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성도가 어느 길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인지 분별하기 힘들 때 우선적으로 취해야 할 자세는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렘 33:1-3; 요 14:13-14; 빌 4:6). 성도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보혜사 성령님의 감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되며(요 14:26), 때때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하여 ‘곡조있는 기도’로 불리우는 찬송가를 부르면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성도가 마땅히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나는 갈 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 어디가야 좋을지 나를 인도하소서”(새찬송가 375, 통합찬송가 421장)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찾고 분별하기 위한 보다 직접적인 방법은 전통적인 교회 지도자들이 했던 것처럼 성경을 상고(詳考)하는 것이다. 성경의 내용을 살피면 거기에 이미 ‘하나님이 뜻’을 따르고 순종했던 사람들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열거되어 있으므로, 성도들은 이들 역할 모델들의 삶에 비추어 자신이 선택해야 할 올바른 길을 분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훌륭한 지도자 모세와 여호수아를 따라갔을 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었으나, 악한 지도자였던 아합 왕이나 압살롬을 추종했을 때 결국은 그 악인들과 함께 멸망과 불행을 당했음을 알게 된다. 신구약 성경에는 이들 두 종류의 역할 모델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으나 우리는 지면 관계상 두 사람(아담과 아브라함)만 선택하여 설명해 보려 한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최초의 인간으로서, 그가 인생의 전반부에서 누린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다 열거할 수 없겠으나, 인생 후반부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함으로써 최초의 범죄자요 실낙원의 주인공이 된 비극적 인간이었다. 그는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인을 아내로 맞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풍요로운 에덴동산에 살았으나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였는데, 성경 말씀에 의하면, 그 불행의 원인은 뱀(마귀=사탄)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였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아담과 하와는 거짓말쟁이(요 8:44) 마귀에게 속은 것이다. 마귀는 먼저 감성이 예민한 하와에게 접근하여 하나님께서 “따 먹지 말라” 명령한 선악과를 보여 주면서 그것을 따 먹으면 “하나님처럼 (지혜롭고 영광스럽게) 된다”는 말에 속아(창 3:5) 아담과 함께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창 3:6) 그 열매를 따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하는 최초의 범죄자가 되었고, 그 결과 개인적인 죽음은 물론 가정과 사회와 자연에게까지 무질서와 갈등 및 고통과 슬픔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요일 4:8,16)께서는 사랑의 핵심인 자발적 순종을 통하여 인간과의 영원한 사랑을 유지하시기를 기대하셨으나 마귀(디아볼로스=이간자)의 이간질에 굴복함으로써 결국 마귀(지옥)의 백성으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에게도 ‘믿음의 조상(원조)’으로 불리울 정도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했던 긍정적인 역할 모델이다. 그는 “네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고 말씀하시는 야웨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에 순종하여 가나안땅으로 이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귀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모리아산(현재 예루살렘)까지 나아가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 했고, 그의 믿음을 인정하신 야웨께서 숫양을 보내어 대신 바치게 하심으로써(창 22) 약 2천년 뒤에 일어날 위대한 구원 사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는, 복받은 인물의 대명사가 되었던 것이다.
오늘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아담과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아담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게 했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5)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하고, 아울러 축복의 길을 가로막는 현대판 우상들을 아브라함처럼 과감히 포기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만을 최고 가치로 믿고 섬길 때 누리는 현재적이고 미래적인 행복과 영광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깨닫도록 가르쳐 준다.
(3)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름길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질문하였고, 그것은 성경을 상고(詳考)하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연속된 질문으로서, 그렇다면 성경에서 증언하는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롬 12:2)은 무엇인가?
거의 모든 유대인들은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갖고 있는데, 다름 아닌 ‘쉐마’(Shema‘/신 6:4-9)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이 ’쉐마‘를 하루에 세번 이상, 심지어는 죽기 전에도, 외운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도 비슷하였다. 어느 서기관(율법사)이 찾아와 “(성경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도 유대인들처럼 이 ’쉐마‘로 대답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쉐마).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29-31; 마 22:36-40; 눅 10:25-28). 다시 말하면 (구약)성경에서 말하는바 가장 핵심적인 ‘하나님의 뜻’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한 마디로 줄이면 그것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사도 바울의 교훈도 동일하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율법(교훈)의 완성(fulfillment)이니라”(롬13:10).
그러나 예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사랑’은 유대인들의 ‘쉐마’를 훨씬 능가하는바, ‘절대적(아가페적) 사랑’이라는 점에서 예수님의 답변이야 말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마지막 정답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네 원수까지 사랑하라(마 5:44; 눅 6:27; 요 13:34-35)는 것이었다. 세상의 그 어느 철학자나 스승도 말한 적이 없는, 가장 초월적인 이 진리와 윤리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으로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눅 23:34) 몸소 실천하심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가장) 기뻐하는 자”(마 3:17; 17:5)라는 칭찬과 인정을 받으셨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추가로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에 언급된 수많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사랑’이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성경적 답변은 창조신학에서부터 시작한다. 즉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본질적 성품이신 ‘사랑’ 때문이며(요일 4:8,16), 필연적으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사랑의 대화가 가능한 존재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창 1:27), 모든 인간의 마음에 이 사랑의 성품을 주입하시어 사랑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도록,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가장 행복하도록 만드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본질적으로 모든 인간은 사랑이 있는 곳이 천국이고, 사랑이 메마른 곳이 지옥임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사랑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규명함에 있어서 우리는 ‘쉐마’의 핵심 구절인 “마음(레바브/심장/Heart)을 다하여‘라는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인체(人體)에서 가장 소중한 심장을 바치는 것이 참 사랑이요, 이 참 사랑 앞에 모든 인간은 (원수의 마음까지도) 녹아지고 굴복하게 마련이며, 이 사랑을 감지하는 순간 기쁨과 희열 가운데 사랑을 베푸는 분에게 모든 것을 바쳐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부부가 갱년기에 부부싸움을 할 때 남편이 부인에게 “내가 당신에게 안 해 준 것이 없는데, 왜 그리 바가지를 긁느냐? 자가용과 보석 반지와 호피 반코트까지 해 주었는데, 무엇이 그리 불만이냐?”고 묻자, 그 부인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지 않는가? “그런 여러 가지 선물을 해 준 것은 사실이나, 한 가지는 안 주었소. 당신의 마음은 안 주었소. 당신의 마음이 지금 여비서 미스 박에게 가 있지 않소?”
문제는 이와같은, 마음을 다한, 아가페적 사랑의 (잠재)능력이 인간에게 없다는 것이고, 오히려 인간은 아담 이후로 본질적으로 죄의 지배를 받아 사랑과 겸손 대신에 미움과 교만에 이끌려 지옥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주변을 지옥으로 만드는 원인은 바로 우리에게 끊임없이 나타나는 미움의 대상 때문이다. 만약 우리 앞에서 이 원수들이 모두 제거된다면, 다시 말하면, 원수 같은 모든 이웃을 형제 자매 같은 사랑의 대상으로 바꿀 수 있다면 그곳에 천국(에덴동산)은 회복될 것이다. 예수님의 명령대로 원수까지 내 몸처럼 사랑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원수는 사라지고, 원수가 사라지면 자유가 회복되고, 자유가 회복되면 비로소 참 행복과 기쁨의 천국도 회복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사도 바울처럼 자기가 ‘죄인 괴수’였음을 회개하기를 기대하시며, 회개의 열매로 주어지는 성령(행 2:37-38)을 통하여 원수까지 사랑하는 능력으로 무장하여 스데반처럼(행 7:60) 자기를 핍박하는 원수를 사랑하는 경지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성도는 24시간 1440분의 하루 일과 가운데서 매순간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인 사랑의 동기에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확인해야 하며(고후 13:5), 이를 위하여 쉬지 말고 성경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할 필요가 있다. 아직도 자신의 마음에 원망, 불평, 걱정, 근심, 미움과 시기와 탐심이 지배하고 있는가? 곧 바로 회개하고 성령을 통하여 사랑의 능력을 재충전 받을 필요가 있다. 이때 비로소 성도는 원수까지 사랑할 능력으로 무장하게 되고, 원수까지 사랑할 때 비로소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서의 자부심과 함께 어두운 가정과 직장과 사회와 조국을 밝게 비추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게 될 것이다.
(4) '사랑’ 다음으로 중요한 하나님의 뜻 : ‘정의’
'사필귀정'이야말로 성경의 하나님 말씀과 동일하다
앞 장에서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사랑’에 대하여 다루었다. 그러면 성경에서 ‘사랑’ 다음으로 빈번하게 언급되는 중요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의(正義/Righteousness)’인데, 이를 부인할 신학자는 없을 것이다.
이 ‘정의’의 개념을 표현하는 성경적 원어 ‘체다카’(히브리어) 또는 ‘디카이오씨네’(헬라어)는 가끔 ‘의(義)’ 또는 ‘공의(公義/Justice)’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문자적으로 법정(Court)에서 그리고 윤리적 삶에서의 ‘올바름’(Justice, Rightness)을 의미한다. 신약에서는 이 용어에 기초하여 ‘이신득의(以信得義)’, 즉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교리가 선포된다.
하나님의 첫번째 가장 중요한 성품이 사랑이며, 이 ‘사랑’이 다분히 심장과 관련된 감성적(感性的)인 용어라면, 하나님의 두번째 중요한 성품으로서의 ‘정의’는 다분히 두뇌와 관련된 이성적(理性的)인 용어라 할 수 있다. 이 두 요소는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의 양면을 가리키며, 또한 하나님의 역사 운영 방식에 있어서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의 두 바퀴에 비유할 수 있고, 하늘로 비상하는 독수리의 두 날개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종종 인용되는 금언, “정의 없는 사랑은 무례하고, 사랑 없는 정의는 잔인하다”는 말도 하나님의 두 성품의 상호 보완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 변증가들이 기독교의 상징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한 문장으로 설명할 때,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사랑과 정의가 십자가에서 만났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필자가 어려서부터 부친이 들려주신 우리 가정의 가훈 ‘사필귀정(事必歸正)’이야말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정의’를 참 잘 표현한 용어가 아닌가 생각된다. 세상만사에서 정의와 불의가 대결할 때 하나님께서는 정의가 반드시 승리하게 하시고, 불의는 반드시 망하게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정의를 존중하시는 하나님은 힝상 정의 편에서 역사를 올바르게 운영하시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가 뱀에게 속아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우주질서를 어지럽혔을 때 정의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불의와 죄를 심판하시어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시고 “죄의 값은 사망”(롬6:23)이라는 정의의 원칙대로 반드시 육체가 죽을 수 밖에 없도록 심판하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사랑이신지라(요일 4:8,16)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이 사람(독생자)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내려와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대신 지옥 형벌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완벽하게 보여주셨고, 또한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인간을 죽음으로 끌고가는 마귀의 권세(죽음)를 완벽하게 심판하셨던 것이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바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은 약자들, 특히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억압당하는 자들을 구제/구원하는데 집중되어 있다(시12:5; 약 1:27; 사 1:17,23 등).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도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체다카’(정의)를 ‘구제’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이것은 사회적 불공평과 불의를 시정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그만큼 이들 사회적 약자들을 외면하고 억울하게 할 때 하나님의 진노는 극에 달하게 된다. 소돔과 고모라가 하늘에서 떨어진 유황불로 인하여 멸망당한 사건은 강자들의 억압으로 인한 약자들의 부르짖음(창 18:20; 19;13)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었고, 인류 역사는 이와 같은 사회적 억압과 불의와 무질서(동성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멸망의 연속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바 성도들이 염원하는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정의가 완벽하게 구현되는 곳이지만, 이 개념은 다분히 종말론적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여 사는 세상은 항상 정의를 추구하는 의인보다는 불의를 추종하는 죄인들이 판을 치게 마련이고(시 14:1-5; 롬 3:10-12),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세상이기에, 예수님의 재림과 마지막 심판 직후에 세워질 궁극적인 정의의 나라, 곧 하나님의 정의가 완전하게 실현되는 궁극적인 영원한 천국을 하루도 빠짐없이 간절히 기다리며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곳이야말로 온전한 의인들, 즉 예수의 이름을 믿고 구세주로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 의롭다 판정을 받은(이신득의)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로 가득찬 삶을 누리는 의인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지옥 곧 마귀의 나라는 불의와 교만과 거짓과 음란을 회개치 않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동료 인간 특히 약자들의 인권을 멸시 천대하고 억울하게 했던 사람들이(염소로 판정을 받아/마 25:31-46)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거쳐 정죄를 받고 끌려가 영원한 불 못에서 고통을 받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시는 정의(공의)의 하나님을 생각할 때 성도가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것은, 야웨를 경외(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시작/출발점)이라는 진리이다(잠 9:10). 최후의 심판에서 뿐만 아니고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반드시 실현될 것을 믿기에 필연적으로 매사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이 두려움이 우리로 하여금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코람 데오) 의롭고 정직하고 겸손하게 만들어 주며, 무엇보다도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토록 강조했던 바(암 5:24; 사 3:13-15; 렘 7:6; 겔 22:29; 슥 7:10; 말 3:5) 약자들에 대한 사랑과 공의가 성도들의 삶을 통하여 구현되도록 기도하고 노력하게 된다.
5)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지금까지 우리는 주기도문의 전반부에 해당하는바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영적 기도 제목들, 즉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주기도문의 후반부에서 우리는 성도의 세상 살이와 관련된 육신적 기도제목 세 가지, 즉 ‘일용할 양식’과 교회 공동체 삶에 필요한 ‘죄 용서와 정신적 평안’, 그리고 ‘마귀의 시험과 악에서의 구원’에 대하여 살펴보려 한다.
주기도문 후반부에 들어와 우리 모두가 우선적으로 궁금한 질문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각자의 세상적 삶에 있어서 ‘먹을 양식’(음식)’에 대한 기도를 맨 앞 자리에 배치하신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특히 한 달 또는 일년치의 양식을 구하라 하지 않고 ‘일용할 양식’ 곧 하루치의 양식만을 구하라 하시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질문들은 “금강산도 식후경”(A loaf of bread is better than the song of many birds/인터넷 인용)이라는 동양 격언 한 마디로는 다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을 읽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일용할 양식” 하면 금방 떠오르는 성경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현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 40년 동안 시내 광야를 통과할 때에 매일 새벽마다 하늘에서 이슬처럼 내린 ‘만나’(히브리어로 ‘만후’/‘이것이 무엇이냐?’)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제외하고 매일 이 만나를 거두어 요리해 먹으면서 먹거리가 전혀 없는 황량한 광야를 굶어죽지 않고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직 금요일 아침에만 이틀 분 만나를 거두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심으로써 안식일에는 글자 그대로 음식을 거두는 노동 없이 안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만나 사건은 인간이 세상에 사는 동안 가장 필요한 음식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려는 데 그 동기와 목적이 있었지만, 그 이전에 그 음식보다 중요한 것이 만나로 하여금 하늘에서 떨어지도록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깨닫게 하시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2-33).
“일용할 양식”과 관련된 기도를 매일 드림에 있어서 우리 성도들이 특별히 유의해야 할 성경적 관념/사상은 종말론(Eschatology)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내일 또는 10년 뒤의 양식에 대하여 간구하거나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늘 하루의 양식만 구하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일 주님이 재림하실지도 모르고, 내일 세상에 종말이 올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수명을 장담할 수 없다. 모든 성도에게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는 죽음이라는 관문이 있고, 그 뒤에는 영원한 천국에서의 종말론적 행복한 삶이 보장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의 종말론에서 강조하는 중요한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를 걸어가면서 경험한 것처럼, 인생은 가나안 복지를 향하여 하루 하루 전진하는 나그네 길과 같고, 그것은 영원한 천국 같은 가나안에 비하면 잠간이요 너무나 짧은 기간이라는 것이다. 인생 각자에게 내일은 안 올 수도 있고, 내일이 되면 하나님께서 또 다른 양식을 주실 것이다. 만약 내일 하나님이 부르시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면 된다. 따라서 성도에게는 오늘이 최고의 날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하루 하루의 양식을 구하는 성도의 삶, 즉 종말론적 삶을 실천하는 한 가지 방법을 제안해 본다. 그것은 매일 적어도 30분 이상 30도 각도로 머리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보며 걷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인의 최대 관심 거리 가운데 하나인 건강에도 필수적인 운동이다. 본래 ‘인간’(안쓰로포스)이라는 용어(헬라어)는 ‘위를(아나) 바라보는 자(쓰로에오)’를 의미하는데, 우리가 하늘을 바라볼 때 인간다운 인간, 행복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무한대 크기와 넓이의 푸른 창공, 무한대로 끝이 없는 하늘 나라의 세월, 무한대 능력의 하나님과 영생 천국을 바라보게 되고 그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아울러 2천억개의 별이 있는 태양계와 2천억개의 은하계를 갖고 있는 우주에 비하면 하나의 점에 불과한 지구를 생각하게 되고, 그 지구의 1억분지 일도 안 되는 점에 불과한 자신의 정체, 곧 한 없이 작고 연약하고 잠깐 왔다가는 가련한 자신의 정체를 깨닫게 된다. 이와 같은 자각을 통하여 내일 올지도 모르는 인생의 종말을 생각하면서 준비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즉 내일 두고 가야 할 사랑하는 가족과 명예와 재산들이 너무나 아깝고 허무하지만 그보다 더 아름답고 풍성한 영원한 가치, 곧 천국에서 누리게 될 궁극적인 기쁨과 풍요를 생각하면서, 오늘 하루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성화(Sanctify)시키게 된다. 죽음 이후의 영생은 아무리 준비해도 부족한데, 오늘이야 말로 죽음과 영원한 천국을 준비하도록 주어진 기회로 알고, 설레이는 가슴으로 하늘을 바라보면서 걸어간다면 걱정 근심 탐욕을 떨어버릴 수 있어 정신적으로도 좋고 육신적으로도 건강을 지키는 지혜로운 삶이 아니겠는가?
(2)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앞에서 우리는 “일용할 양식”과 관련된 기도를 드림에 있어서 특별히 기억해야 할 요점은 종말론(Eschatology)이며, 내일 주님이 재림하시고 세상의 종말이 오고 천국이 시작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날의 하루치 양식만을 구할 것을 가르쳐 주셨음을 설명하였다. 성도들은 이 땅에서 천년 만년 영원히 정착하여 살 사람들이 아니며, 잠시 잠깐 후에 육체의 장막을 떠나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백성이기에, 매일 매일 하늘을 쳐다보면서 죽음과 영생을 준비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하다. 내일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성도는 내일 다가올 영생 천국만은 놓쳐서는 안될 것을 우리 주님께서 간접적으로 강조하신 것이다. 두 손, 두 발,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 보다 하나의 손, 발과 외눈으로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더 지혜로운 사람이며, 하나의 눈이 성도로 하여금 범죄케 하면 차라리 그 하나를 찍어 내 버리고서라도 천국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지 않은가?(마 18:8-10). 미국으로 이민가는 사람이 한 끼 굶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미국으로 떠나는 비행기만은 제 시간에 맞추어 탑승해야 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천국의 시민 된 기독교인이 ‘일용할 양식’만을 간구해야 하는 또다른 이유는, 양식이 너무 풍족하면 풍요병에 걸려 세상을 즐기려는 욕심이 생기게 되고, 이 풍요병에 걸리면 자기도 모르게 천국 소망을 잊게 될 뿐만 아니라 더욱더 큰 욕망에 사로잡혀 세상 사람들처럼 죄악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마치 ‘밑 빠지 독’과 같아서 풍요를 맛보면 맛볼수록, 쾌락을 즐기면 즐길수록, 더 큰 풍요와 더욱 진한 쾌락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험은 특히 마약 중독자들의 고백을 통하여 밝혀지고 있고, 50이 넘은 장년이면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육체적 쾌락을 종종 짜디짠 바닷물에 비유하는데, 태평양을 횡단하던 여객선이 난파되어 겨우 구명 보트에 올라탄 몇 사람이 바다 가운데서 방황하다가 목이 말라 바닷물을 마시게 되었고, 마실수록 더욱 큰 갈증을 느껴 결국은 모두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이와 같은 비극을 당하지 않도록 ‘일용할 양식’만을 구할 것을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 선생께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 즉 성숙한 크리스천들에게 나타나는 아홉 가지의 증상(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가운데 ‘절제’(Self-control)를 가장 원숙한 인격적 덕목으로 지목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갈 5:22). 성도들이 세상에서 거룩하고 진실하고 겸손하고 부지런한 자세로 살다 보면 자연히 세상적인 부귀와 명예를 누리게 되는데, 이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더 큰 쾌락을 향한 ‘탐욕/욕심’이고, 이 탐욕을 절제하게 될 때 지옥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갈릴리의 산 위에서 가르치신바, 천국 복음의 진수로 불리우는 8복의 첫번째 항목도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마 5:3)로 되어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면서 천국에서 누릴 궁극적인 풍요와 쾌락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나보다 가난하고 빈곤한 사람들을 잊지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풍요를 이웃에게 나눠주기 위하여, 검소하고 절제된 삶을 추구하게 되며, 자기에게 주어진 풍요와 쾌락의 기회를 복음 전도를 위하여 기꺼이 포기하고 절약과 절제를 통한 또다른 살아있는 제사(예배)를 주님께 드려야 할 것을 사도 바울도 강조하였다(롬 12:1).
오늘날의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풍요롭고 부유한 나라가 되었지만, 오히려 교회는 쇠퇴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멸시할 뿐만 아니라 부활과 천국의 존재까지도 부인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으며, 그만큼 사회적 범죄 특히 총기 난사로 표현되는 폭력이 난무하고 수많은 가정들이 파괴되는 원인이 무엇일까? 어떤 교회의 목사님이 지적한대로, 그 중요한 원인 하나가 바로 이 풍요병이요, 이 풍요병에 걸려 미국인들의 탐욕은 하늘보다 높아지고 있고, 극도의 이기주의와 쾌락주의가 판을 치는 상황에서, 쾌락주의의 직접적인 열매 가운데 하나인 불륜과 이혼을 경험하지 않은 가정이 거의 없을 정도이며, 너무나 먹을 것이 많아 성인병의 첫번째 항목인 비만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과거 역사, 특히 청교도들의 삶을 돌이켜 보면 그들은 얼마나 청결하고 검소하고 절제된 삶을 통하여 가정과 교회와 국가가 평안하고 행복하였던가? 특히 20세기 후반에 걸쳐 얼마나 많은 제3세계의 빈곤 국가들이 미국 사람들이 절약하여 저축한 잉여 농산물로 원조를 받고 미국 사람들을 존경하며, 그들이 전해주는 복음과 민주주의를 수용하고 하나님 나라 건설의 꿈과 이상을 공유하게 되지 않았던가?
이와 같은 ‘탐욕과 절제’라는 주기도문의 교훈과 관련하여 여기에서 우리가 또 주목하게 되는 내용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적이 있는바, “우리”라는 단어로 표현된 ‘공동체 의식’(意識)이다. 즉 “오늘날 ‘나’(me)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로 되어있지 않고, 오히려 “오늘날 ‘우리’(us)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로 되어 있다는 것은 주기도문의 사상이 ‘개인주의’(Individualism)가 아니라 ‘공동체 의식’(Communism)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주후 1세기의 초대교회가 서로 물질과 소유를 공유하고 공동체적 삶을 통하여 천국에서 누릴 공동체적 평안과 행복을 미리 맛보게 된 것은 이와 같은 주기도문의 정신을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간구하는 하루치의 양식은 나 혼자만 먹고 만족할 양식이 아니라 내 곁의 이웃과 함께 나눌 양식이요, 이와 같은 공동체적 사랑은 주님의 재림 후에 이루어질 천국에서 누릴 참 풍요와 행복을 예고하는 것이기에, 역시 주기도문의 핵심에 종말론이 자리잡고 있음을 암시했다고 볼 수 있다.
6)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당신/하나님/아버지도)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1)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앞에서 우리는 “일용할 양식”과 관련된 기도를 드림에 있어서 특별히 기억해야 할 요점은 종말론(Eschatology)이며, 내일 주님이 재림하시고 세상의 종말이 오고 천국이 시작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날의 하루치 양식만을 구할 것을 가르쳐 주셨음을 설명하였다. 성도들은 이 땅에서 천년 만년 영원히 정착하여 살 사람들이 아니며, 잠시 잠깐 후에 육체의 장막을 떠나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백성이기에, 매일 매일 하늘을 쳐다보면서 죽음과 영생을 준비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하다. 내일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성도는 내일 다가올 영생 천국만은 놓쳐서는 안될 것을 우리 주님께서 간접적으로 강조하신 것이다. 두 손, 두 발,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 보다 하나의 손, 발과 외눈으로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더 지혜로운 사람이며, 하나의 눈이 성도로 하여금 범죄케 하면 차라리 그 하나를 찍어 내 버리고서라도 천국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지 않은가?(마 18:8-10). 미국으로 이민가는 사람이 한 끼 굶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미국으로 떠나는 비행기만은 제 시간에 맞추어 탑승해야 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천국의 시민 된 기독교인이 ‘일용할 양식’만을 간구해야 하는 또다른 이유는, 양식이 너무 풍족하면 풍요병에 걸려 세상을 즐기려는 욕심이 생기게 되고, 이 풍요병에 걸리면 자기도 모르게 천국 소망을 잊게 될 뿐만 아니라 더욱더 큰 욕망에 사로잡혀 세상 사람들처럼 죄악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마치 ‘밑 빠지 독’과 같아서 풍요를 맛보면 맛볼수록, 쾌락을 즐기면 즐길수록, 더 큰 풍요와 더욱 진한 쾌락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험은 특히 마약 중독자들의 고백을 통하여 밝혀지고 있고, 50이 넘은 장년이면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육체적 쾌락을 종종 짜디짠 바닷물에 비유하는데, 태평양을 횡단하던 여객선이 난파되어 겨우 구명 보트에 올라탄 몇 사람이 바다 가운데서 방황하다가 목이 말라 바닷물을 마시게 되었고, 마실수록 더욱 큰 갈증을 느껴 결국은 모두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이와 같은 비극을 당하지 않도록 ‘일용할 양식’만을 구할 것을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 선생께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 즉 성숙한 크리스천들에게 나타나는 아홉 가지의 증상(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가운데 ‘절제’(Self-control)를 가장 원숙한 인격적 덕목으로 지목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갈 5:22). 성도들이 세상에서 거룩하고 진실하고 겸손하고 부지런한 자세로 살다 보면 자연히 세상적인 부귀와 명예를 누리게 되는데, 이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더 큰 쾌락을 향한 ‘탐욕/욕심’이고, 이 탐욕을 절제하게 될 때 지옥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갈릴리의 산 위에서 가르치신바, 천국 복음의 진수로 불리우는 8복의 첫번째 항목도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마 5:3)로 되어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면서 천국에서 누릴 궁극적인 풍요와 쾌락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나보다 가난하고 빈곤한 사람들을 잊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풍요를 이웃에게 나눠주기 위하여, 검소하고 절제된 삶을 추구하게 되며, 자기에게 주어진 풍요와 쾌락의 기회를 복음 전도를 위하여 기꺼이 포기하고 절약과 절제를 통한 또다른 살아있는 제사(예배)를 주님께 드려야 할 것을 사도 바울도 강조하였다(롬 12:1).
오늘날의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풍요롭고 부유한 나라가 되었지만, 오히려 교회는 쇠퇴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멸시할 뿐만 아니라 부활과 천국의 존재까지도 부인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으며, 그만큼 사회적 범죄 특히 총기 난사로 표현되는 폭력이 난무하고 수많은 가정들이 파괴되는 원인이 무엇일까? 어떤 교회의 목사님이 지적한대로, 그 중요한 원인 하나가 바로 이 풍요병이요, 이 풍요병에 걸려 미국인들의 탐욕은 하늘보다 높아지고 있고, 극도의 이기주의와 쾌락주의가 판을 치는 상황에서, 쾌락주의의 직접적인 열매 가운데 하나인 불륜과 이혼을 경험하지 않은 가정이 거의 없을 정도이며, 너무나 먹을 것이 많아 성인병의 첫번째 항목인 비만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과거 역사, 특히 청교도들의 삶을 돌이켜 보면 그들은 얼마나 청결하고 검소하고 절제된 삶을 통하여 가정과 교회와 국가가 평안하고 행복하였던가? 특히 20세기 후반에 걸쳐 얼마나 많은 제3세계의 빈곤 국가들이 미국 사람들이 절약하여 저축한 잉여 농산물로 원조를 받고 미국 사람들을 존경하며, 그들이 전해주는 복음과 민주주의를 수용하고 하나님 나라 건설의 꿈과 이상을 공유하게 되지 않았던가?
이와 같은 ‘탐욕과 절제’라는 주기도문의 교훈과 관련하여 여기에서 우리가 또 주목하게 되는 내용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적이 있는바, “우리”라는 단어로 표현된 ‘공동체 의식’(意識)이다. 즉 “오늘날 ‘나’(me)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로 되어있지 않고, 오히려 “오늘날 ‘우리’(us)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로 되어 있다는 것은 주기도문의 사상이 ‘개인주의’(Individualism)가 아니라 ‘공동체 의식’(Communism)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주후 1세기의 초대교회가 서로 물질과 소유를 공유하고 공동체적 삶을 통하여 천국에서 누릴 공동체적 평안과 행복을 미리 맛보게 된 것은 이와 같은 주기도문의 정신을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간구하는 하루치의 양식은 나 혼자만 먹고 만족할 양식이 아니라 내 곁의 이웃과 함께 나눌 양식이요, 이와 같은 공동체적 사랑은 주님의 재림 후에 이루어질 천국에서 누릴 참 풍요와 행복을 예고하는 것이기에, 역시 주기도문의 핵심에 종말론이 자리잡고 있음을 암시했다고 볼 수 있다.
(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앞에서 우리는 용서와 사랑이 깃들어 있는 공동체(교회)야 말로 성도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이상(理想)이요 목표임을 고찰하였다. 세상의 어떤 공동체든 간에 용서와 사랑 대신에 미움과 분쟁으로 서로 물고 뜯는 순간부터 해체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인류 역사상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라 호언장담하던 제국들이 망하게 된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외부의 침략보다는 내부의 부패, 즉 자기들끼리 싸우고 고발하고 분쟁한 때문이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도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마 12:25).
문제는, 이처럼 교회 공동체의 생존에 필수적인 ‘용서’와 ‘화목’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이다. 호텔의 매스터 키(Master Key)처럼 요긴한, 어떤 상황에서도 ‘용서’를 가능케 하는 방법과 비결은 무엇이며, 우리 주님께서는 형제가 잘못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명령만 하시고 그 ‘용서’의 길과 방법에 대하여는 함구(be silent)하고 계시는가?
성경에 제시된바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용서의 동기와 방법을 우리는 대략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의 비유에서 암시하는 것처럼 먼저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용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둘째, 용서와 미움의 차이, 즉 용서할 경우에 누리는 행복과 기쁨, 그리고 용서하지 않을 경우에 초래될 비극과 고통이 얼마나 큰 것임을 알아야 한다. 셋째, 종말론적 비전을 통하여 성도가 ‘용서’를 체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비유(마 18:23-35)를 통하여 1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경우와 1백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 받는 경우를 대조함으로써 성도 각자가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용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가르쳐 주신다. 당시 1 달란트(Talent)는 6천 데나리온이었고, 1 데나리온은 성인의 하루치 임금(Wage)이었다. 현대의 성인 한 사람이 받는 하루치 임금(시간당 $5x8시간=$40=약 4만원)을 고려할 때, 1만 달란트 빚진 자는 최소한 24억 불($)을 탕감 받았는데도,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4천 불) 빚진 동료를 용서할 수 없었다. 오늘날 성도가 하나님께 용서받은 것에 비하면 형제의 작은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빚)를 탕감해 주시기 위하여 독생자(예수)의 피 값, 즉 수천억 달러보다 더 비싼 생명 값을 지불하셨는데, 우리는 티끌 같이 작은 형제자매의 빚(죄)을 탕감해 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하여 주님은 만약 형제자매의 작은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네가 하나님께 진 엄청난 죄도 용서해 주지 않고 지옥에 쳐 넣겠다”는 위협적인 최후통첩도 암시하고 계시다. 미워한 것도 살인죄(마 5:22)로 보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 모두는 얼마나 악한 살인마, 죄인 ,괴수들이며(딤전 1:16) 얼마나 큰 용서를 받은 사람들인가?
우리로 하여금 형제자매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도록 자극하는 동기로써 성경은 요셉의 일생(창 37~50)을 실례로 든다. 형들의 잘못을 아빠(야곱)에게 고자질함으로써 형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간 요셉은 애굽에서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곡식을 사러 입국한 형들을 복수하기 보다는 오히려 두려워 떠는 형들을 위로하고 용서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에 참 기쁨과 평안을 누리고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동생 요셉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여 노예상에게 팔아 넘긴 형들은 마음에 일생 동안 죄의식과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며 살았을 뿐만 아니라 가뭄과 기근을 당하여 식량을 구매하러 애굽에 내려가 총리대신이 된 동생 요셉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야 하는 수치와 비극을 당하였던 것이다.
형들을 용서함에 있어서 드러나는바 요셉의 탁월한 신학 사상은 ‘섭리론’(Providentialism)이라 불리우는데, 형들이 자신을 미워하게 된 것도, 자신이 애굽에 노예로 팔린 것도, 자신이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투옥된 것도, 감옥에서 만난 애굽 관리가 복직하면 요셉의 억울함을 밝혀 출옥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망각한 것도, 가나안 땅에 가뭄과 기근이 닥쳐 형들이 애굽에 내려온 것도, 모두 역사를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를 위하여 모든 여건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섭리하시는(롬 8:28)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요셉에게는 그 어떤 환경도 원망과 불평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살전 5:16-18)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형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지 않았다면, 그리고 보디발의 아내가 억울한 누명(성폭행)을 씌워 요셉을 투옥시키지 않았다면,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는 기회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섭리론적 신앙의 기초 위에서 생각한다면 가까운 형제자매의 어떤 잘못이나 실수도 우리는 오히려 기꺼이 용서할 수 있는 감사의 조건으로 바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로 하여금 형제자매의 죄와 허물을 기꺼이 용서하도록 동기 부여를 해 주는 성경적 사상은 종말론적 비전이다. 교회에서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구속함을 받은, (찬송가에 나오는 것처럼)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혈연적 ‘우리’ 공동체요 한 가족이요, 천국에서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하며 사랑과 기쁨을 나눌 천국백성임을 성도들은 주기적으로 성만찬 의식을 통하여 확인하지 않는가? 모든 성도는 결국 죽음에서 부활하여 더 이상 죄악과 어둠이 없는, 빛과 거룩과 사랑만이 지배하는,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이 세상에서의 악한 성품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온전한 영성과 인성을 구비한 성도로 변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앞에 서 있는 형제자매는 잠시 잠깐 뒤에 죽음 저편에서 만날 가족이요, 온전한 진선미를 구비한, 아름답고 거룩하고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의 잠재력을 갖고있는 형제자매인데, 이와같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앞에 두고서 잠시 동안 거쳐가는 이 땅에서 미리 용서 못할 형제자매가 어디 있겠는가?
(3)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주기도문을 통하여 성도는 일용할 양식을 간구하여 육신의 안녕과 행복을 지킬 뿐만 아니라 매일 형제자매의 죄악을 용서함으로써 정신적 평안과 행복을 유지하게 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와 같이 용서의 중요성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은 성령님의 감동을 통하여서만 가능한데, 성령님의 감동을 위하여 우리는 앞서간 성도들의 간증과 예화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예화들은 모두 필자가 들었거나 인터넷을 통하여 채취한 것들을 인용한 것으로서, 이미 대부분 목회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것이라 생각되어 그 저자와 출처를 일일이 밝히지 않았음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A) 용서와 관련된 명언과 금언:
“한 번 용서하면 자신을 얻고, 두 번 용서하면 사람을 얻고, 세 번 용서하면 세상을 얻고, 계속 용서하면 영원을 얻는다”(사랑밭새벽편지/2015.3.17.).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용서하는 것이다”(엘리잘 벤 주다/따뜻한 하루/2016.4.20.). “선(善)을 악(惡)으로 갚는 것은 사탄의 성품이요,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보통사람의 성품이요,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다”(서양 속담). “당신이 남에게 복수하면 그 기쁨은 잠깐이지만, 당신이 남을 용서하면 그 기쁨은 영원하다”(탈무드). “가장 고상한 복수는 진정으로 용서하는 것이다”(Fuller).
(B) 용서와 관련된 예화들:
1) 베트남 전쟁 때 미군이 네이팜탄 마을에 폭탄을 투하했다. 마을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그때 불길 속에서 겁에 질린 한 소녀가 울부짖으며 알몸으로 도망 나왔다. 소녀는 온몸에 3도 화상을 입었다. AP통신의 닉 우트 기자는 네이팜 소녀의 비참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전쟁의 참화를 생생하게 보여준 이 사진은 닉 우트 기자에게 퓰리처상을 안겨 주었다. 이 소녀의 이름은 킴푹(99년 현재 37세). 그녀는 현재 평화를 호소하는 유엔의 명예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킴푹은 말한다. “나를 전쟁의 상징으로 기억하지 말아 달라. 한때는 열일곱 번이나 수술을 받으며 사람들을 증오했다. 그런데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내 자신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나는 모든 사람을 용서했다. 그때부터 행복과 사랑이 보이기 시작했다.”.... 용서는 비극적인 인생을 소망적인 인생으로 바꾸어 놓는다(1999년 12월 1일 ‘겨자씨’).
2) 링컨은 그의 정적(政敵)인 스탠튼(Stanton)을 용서하여 최고의 인격자라는 명예를 얻었다. 스탠튼은 링컨을 ‘오리지널 고릴라’라고까지 비방하였으나 대통령이 된 링컨은 그를 국방장관에 임명하였고, 암살 당한 링컨 대통령의 장례식장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통곡한 스탠튼이 한 말: “나는 평생 동안 날 감동시키는 한 사람을 만났다. 내가 만난 가장 위대한 사람이 지금 내 앞에 누워있다”.
3) 중국 선교사였던 김요석 목사의 간증: 불교인들이 가득한 한 마을에서 몇 가정이 예수님을 믿었다. 어느 날 그 마을에 사는 한 집사님이 어두운 얼굴로 목사님을 찾아왔다. “목사님 어찌하지요?”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예. 저희 집 돼지 다섯 마리가 이웃집 채소밭에 가서 채소를 뜯어먹었는데 그 집에서 변상하랍니다.” “해야지요.” “그런데 세상에! 돼지 다섯 마리를 다 달라고 합니다.” “심한 요구이지만 그렇게 해 주세요.” “예? 채소를 좀 뜯어 먹은 것뿐인데 돼지 다섯 마리를 다 주라고요?”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니 선한 마음으로 줍시다. 우리는 이 세상의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지요.” 그 집사님이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두 말 하지 않고 돼지 다섯 마리를 다 주었다. 마을 사람들이 비웃었다: “저 사람, 바보네, 저 사람 미쳤구먼.”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말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르네.” 가난한 농가에서 돼지 다섯 마리를 잃어버렸으니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마는 목사님 말씀에 순종하고 아무 말 없이 순종했다. 얼마의 세월이 흘렀다. 하루는 그 집사님 채소밭에 그때 그 집의 황소 일곱 마리가 와서 채소를 다 뜯어먹었다. 집사님은 너무 좋아서 목사님께 막 달려갔다. “목사님, 그 집 황소 일곱 마리가 우리 채소밭에 와서 채소를 뜯어 먹었어요.” “집사님, 그 황소를 다 돌려주세요.” “아니, 그 집에서는 우리 돼지 다섯 마리를 다 갖고 갔는데요?”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다 돌려보내세요.” “다 돌려보내다니요?” “예. 다 돌려보내세요.” .... 그런데 그 이튿날 아침 그 부잣집 영감이 그 집사님을 불렀다. “이 사람아, 어젯밤에는 자네 때문에 한숨도 못 잤네. 나는 황소 7마리를 다 잃어버린 줄 알았네. 그런데 황소 일곱 마리를 다 돌려주다니, 자네의 선함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네. 자네 돼지를 다 갖고 가게.” 그러면서 돼지 90마리를 돌려 주었다. 돼지 다섯 마리가 그동안 낳은 새끼를 포함하여 모두 90마리가 된 것이다.
4) 유명한 화가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베드로부터 시작하여 열두 제자의 얼굴을 한 사람씩 그려나가다가 가룟 유다를 그릴 때에는, 자기를 일생동안 괴롭힌 원수 같은 친구가 생각났다. 그 친구만 생각하면 마귀 같은 느낌이 들어, 가룟 유다의 얼굴은 그 친구를 모델로 그렸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차례인데 좀처럼 영감이 떠오르지 않았다. 몇 달을 두고 고심해도 예수님의 얼굴은 그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한 수도사를 만나 고민을 털어놓았다. 수도사는 곧장 “자네를 괴롭히는 그 친구를 용서하지 않고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가 없을 걸세”라고 충고했다. 그는 곧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그 친구를 위해 기도하고 용서했다. 그 후에 마음의 눈이 열려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있었다 한다.
7)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1) 시험하는 자의 정체
지금까지 우리는 주기도문에 나와 있는 전반부의 세 가지 기도 제목(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과 후반부의 두 가지 기도 제목(일용할 양식, 죄 용서)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이제 후반부의 세번째 기도 제목으로서의 ‘시험하는 자(마귀)와 악으로부터의 구원’을 고찰하면서, 떠오르는 한 가지 질문이 있다면, 그것은 성도가 일상생활 가운데서 꼭 간구해야 할 세 가지 기도 제목 가운데, ‘의식주’(일용할 양식)와 ‘정신적 평안’(죄 용서)에 이어서 ‘마귀의 시험으로부터의 보호’를 언급하신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성경 전체의 맥락에 비추어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일용할 양식이 육(肉)적인 건강을 위한 것이라면, 죄와 허물의 용서는 정신(혼/魂)적인 건강을 위한 것이요, 마귀의 시험으로부터의 승리는 영(靈)적인 건강을 위한 기도라 할 수 있으므로, 즉 육체(Body)와 혼(정신/Soul)과 영(Spirit)의 3부 구조로(히 4:12; 살전 5:23; 창 2:7) 되어있는 인간의 몸을 고려할 때, 이 세번째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 성도들이 온전하고 전인적(全人的)인 건강과 안녕을 유지하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인도해 주셨다는 것이다.
인생 자체를 하나의 치열한 전쟁터로 이해한 어느 시인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신앙생활 자체가 마귀(또는 사탄)와의 싸움의 연속이며(엡 6:12),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는 손자병법의 한 구절처럼 우리 성도는 원수 마귀의 정체를 알고 자기를 아는 것이 영적 전쟁에서의 승리의 기본이요 철칙이다. 마귀(사탄)와 그의 졸병들로 알려진 귀신들은 공산당 스파이나 도둑이나 사기꾼처럼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항상 은밀하게 숨어서 활동하면서, 결국은 성도들을 영적으로 유혹하여 죽이고 멸망시키려고(요 10:10)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도의 최대 적이요 철천지 원수다. 그들은 양의 가죽을 쓴 늑대처럼, 그리고 광명의 천사(고후 11:14)로 위장하고, 구멍을 찾는 뱀처럼 틈을 엿보아 거머리처럼 끈질기게 성도들의 허약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실족(失足)하게 하고 기진맥진하게 만들어 결국은 그 죽은 영혼을 자기들의 영원한 거처인 지옥으로 끌고 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간교하고 악질적인 존재이므로, 우리 성도는 이들의 존재와 정체를 한시도 잊어서는 안되고, 그들의 유혹과 작전에 대하여 항상 깨어 대비해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겟세마네 동산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 26:41) 당부하신 것이나,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신신 당부한 것은, 이처럼 계속 기도하는 것이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벧전 5:8) 대적 마귀의 공격과 시험을 이기는 지름길이요 최대의 예방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귀의 시험에 빠져들지 않고 사도 바울처럼(딤후 4:7-8) 마귀와의 전쟁에서 최후 승리의 개가를 부르기 위해서는 성경에 제시된 마귀의 정체, 곧 마귀의 근원과 활동과 종말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구비할 필요가 있다. 마귀(또는 사탄)는 본래 천사장들 가운데 하나인 ‘광명성’(라틴어로 ‘루시퍼’)이 스스로 교만해져서 하나님과 대결하여 하나님보다 높아지려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공중으로 내어 쫒긴 존재로서(사 14:12-15), 그 역할에 따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대항할 때는 히브리어로 ‘사탄’(Satan, Adversary)이라 불리웠고, 공중(세상)권세(엡 2:2) 곧 세상의 모든 권세를 잡은 자로서(마 4:8-9; 눅 4:6)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간질 하며(마귀=디아볼로스=이간자)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멸망시키는 역할을 할 때는 ‘마귀’(Devil/디아볼로스)라 불리우며, ‘루시퍼’가 타락하여 공중(세상)으로 내어 쫒길 때 함게 추방당한 수많은 악의 천사들을 가리켜 ‘귀신’(다이모니온/Demons)이라 부른다. 특징적인 것은, 성경에서 귀신은 단수로 표기되지 않고, 항상 복수 형태로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귀신은 항상 많은 무리로 떼를 지어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귀신 들려 무덤 사이에서 짐승처럼 생활하던 청년을 치료해 주실 때 그에게 붙어 있던 귀신의 이름이 ‘군대’(Legion/연대 병력)였고, 그 귀신을 명하여 돼지 떼에게 들어가기를 허락했을 때, 귀신 들린 2천 마리의 돼지가 호수에 빠져 죽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막 5:1-13).
기독교인이 복음으로 믿고 확신하는 바 ‘십자가의 도(道)’(고전 1:18)는 우리로 하여금 마귀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보다는 오히려 마귀의 시험과 유혹 앞에서 담대함을 고백하게 한다. 이 십자가의 도에 의하면, 마귀는 자신을 최종적으로 멸망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영역인 공중(세상)에 내려온 하나님의 아들(예수님/요일 3:8)을 필연적으로 공격할 수 밖에 없으므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본래부터 아무런 죄가 없고 다만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므로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롬 6:23) 죽음을 당하셨으나, 역시 하나님의 공의대로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마귀의 최대 권세인 죽음(사망) 권세를 빼앗으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고 고백함으로써 예수님과 연합된 모든 성도들에게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십자가의 도를 믿는 성도들은, 비록 예수님의 재림 때에 펼쳐질 마귀에 대한 최후 심판(지옥행)을 앞두고 최후로 발악하는 마귀의 유혹과 공격을 받을지라도 그것은 이미 자신의 마지막 무기(사망 권세)를 빼앗긴 패잔병의 유혹이요 거짓말장이의 시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시험을 당할 때마다 마귀와 함께 죄악에 빠지기는 커녕 오히려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 죄악의 뿌리인 교만을 버리고 예수님처럼 겸손하고 의롭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기회로 삼게 된다는 것이다.
(2) 유혹의 통로
앞서 우리는 시험하는 자 곧 마귀의 정체에 대하여 고찰하였는데, 이 간교하고(창 3:1) 악질적인 마귀의 유혹을 사전(事前)에 차단하고 그 시험에서 승리하려면 우선 시험하는 자 마귀가 인간을 유혹하고 공격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마치 전쟁에서 적(Enemy)의 작전 계획을 사전에 미리 알고 대처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마귀의 유혹 방법과 작전은 (1) 마귀(뱀)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는 것을 살펴 보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고(창 3:1-15), (2) 그 마귀가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로 하여금 예수님을 배반하게 하고 결국은 스스로 목매어 자살케 하는 장면을 보아서도 잘 드러나며(요 13:1-30; 마 27:3-10), 마지막으로 (3) 마귀(사탄/막 1:13)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公生活) 직전에 나타나 그를 시험하는 세 가지 시험(마 4:1-11)을 분석해 볼 때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 세 경우를 요약하면 그것은 인간의 욕심,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5)이라는 세 가지 통로를 통하여 마귀는 인간을 유혹하여 넘어뜨리고 마귀의 종으로서 온갖 죄를 짓게 하다가 결국은 마귀의 마지막 거처인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것이 마귀의 작전이요 최종 목표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마귀는 둘로 갈라진 혀를 널름거리는 뱀으로 상징되는데, 마치 뱀이 틈만 있으면 그 틈으로 침입하고 거짓된 혀로 치명타를 가하듯이, 성도가 세 가지 중 하나의 욕심이라도 빠지게 되면 그 틈 새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성도의 삶에 치명타를 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자극한 인간의 근본적 욕심은 바로 선악과를 따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이었다. 마치 천사장 루시퍼가 스스로 교만해져서 자신의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벧후 2:4; 유 1:6) 하나님처럼 되려고(사 14:12-14; 겔 28:17) 하나님께 도전하다가 죄를 짓고 지옥으로 떨어진 것처럼(계 20:1-3),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도 하나님처럼 영원하고 영광스런 존재가 되고싶은 욕망을 갖게 마련인데, 마귀는 이 욕망과 욕심을 이용하여 선악과를 따 먹을 때 그 목적이 달성된다고 거짓말로 유혹하였던 것이다. 마귀의 간교한 거짓말을 듣는 순간 마귀의 방법에 따라 하나님처럼 되고픈 욕심이 생겼고,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교만)를 짓게 됨으로써 영광스런 영생의 길에서 떠나 마귀와 함께 죄와 저주와 멸망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거의 동일한 방법으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시험해 보도록, 즉 40일간의 금식으로 인하여 주리신 예수로 하여금 돌에게 명령하여 떡이 되는지 시험해 보도록 유혹하였던 것이다. 뱀은 얼마나 간교한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 마귀의 말대로 돌에게 명령하여 떡이 되게 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확인해 보라는 것으로서, 이 말에 순종하면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마귀의 종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마귀의 작전 뿐만 아니라 거짓의 아비로서의(요 8:44) 마귀의 근본 정체를 알고 계셨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 시험을 물리치셨다. 마귀는 본래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피조물이므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미약한 존재임을 아셨던 것이다. “(성경 말씀에)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마 4:4; 신 8:3).
마귀는 이와 같은 물질(빵)과 관련된 시험 외에도 두 가지의 또다른 업그레이드 된 유혹의 통로를 사용하여 예수님을 시험하였는데, 이 시험은 아담과 가룟 유다는 물론 오늘의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두 번째 방법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명예였다. 마귀가 예수님을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성전 꼭대기 위로 데리고 가서 그 위에서 뛰어내려 보라 제안하였다. 예수께서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수 십 미터 아래로 뛰어 내렸을 때 천사들이 예수님의 몸을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을 것이고, 이를 바라본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고 그 명예를 칭송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 시험의 함정도 알고 보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마귀의 말에 있었고, 예수님의 본래적 신성(神性)을 시험함으로써 예수님의 인간적인 본성인 명예심을 자극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도 마귀의 말을 따를 경우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마귀의 말에 순종하여 마귀에게 예속되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때에도 예수님은 “(성경 말씀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신 6:16)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 앞에 속수무책인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던 것이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세 번째 항목은 천하만국(天下萬國)을 지배할 수 있는 권세였다. 물욕(物慾)보다는 명예욕(名譽慾)이, 명예욕보다는 권세욕(權勢慾)이 인간이 추구하는 더 높은 차원의 욕망이요 마지막 목표임을 마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험은 지극히 높은 산에 올라 서서 천하만국을 내려다 보는 위치에 선 사람들이 예외없이 빠지게 되는 함정이 이 권세욕임을 암시한다. 이 시험 앞에서도 예수님은 다른 말씀보다는 앞의 두 가지 시험 때와 동일하게 “(성경 말씀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신 6:13)는 성경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 앞에 속수무책(束手無策)인 마귀가 더 이상 예수님을 시험치 못하고 도망쳤으며(마 4:11) 천사들이 나아와 수종들게 되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위의 세 가지 유혹의 통로(물욕, 명예욕, 권세욕)를 통해 쉴 새 없이 침투하는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는 비결은 ‘성령의 검’(엡 6:17) 곧 하나님의 말씀 뿐이며,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성도가 이 말씀을 기억하고 인용할 때만 말씀 앞에 속수무책인 마귀의 유혹과 간계에서 벗어나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성도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3)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말씀과 생각
앞서 우리는 마귀(사탄)의 정체와 그가 인간을 유혹하고 공격하는 방법 및 그가 사용하는 유혹의 통로에 대하여 살펴 보았고, 아울러 성도가 마귀로부터 시험을 당할 때 그를 이기고 정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써 성도의 유일한 공격 무기 곧 하나님의 말씀(엡 6:17)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마귀는 본래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피조물로서(겔 28:13-15), 영원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에 대하여 알고 있으며, 마치 8.15 해방 당시 일본 천황의 항복으로 무장 해제가 된 일본 군인처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절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항복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성도가 마귀의 시험을 당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사탄아, 물러가라” 선포하고 결단하는 것처럼 힘든 일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험을 당하는 성도가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기록된(마 4:4,6,10)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에는 먼저 그 말씀을 의심하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고, 이와 같은 자기 생각의 포기(마 16:24)와 더불어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결단과 각오가 있어야만 마귀는 물러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하면 물건이 더 잘 팔리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성도가 현장에서 거짓말을 한번 해 보라는 마귀의 유혹을 받을 때 속이거나 “거짓말 하지 말라”는 성경말씀(출 20:16)과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 8:2)는 말씀을 기억하고 선포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합당한 거룩과 진실을 지킬 것인지, 결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귀는 그 어떤 피조물 보다도 간교한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성도의 믿음 수준을 꿰뚫어 보고, 계속 그를 유혹할지 아니면 그로부터 떠나갈지 결정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오늘의 한국교회와 미국교회의 대부분 성도들이 당하는 마귀의 시험은, 앞서 언급한대로, 쾌락과 명예와 권세를 통하여 하나님처럼 영원한 영광을 누리고 싶은 욕망이라 할 수 있는데, 이와같은 육체의 욕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마치 맛 잃은 소금처럼) 교회가 종종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조롱 및 멸시 천대를 당함으로써 마귀가 개가를 부르는 모습을 볼 때(시 25:2) 안타깝기 그지없다. “사람에게는 각자 지옥으로 내려가는 사다리가 하나씩 있다”는 서양 격언에서처럼 사람 마다 각자 마귀가 공격하기 쉬운 취약한 부분이 있게 마련인데, 그것이 성적 쾌락이든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나 권세이든 간에, 마귀는 그 취약한 부분을 거머리처럼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악질적 존재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을 때처럼 마귀는 성도로 하여금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세가 인생 최고의 행복인 줄 착각하도록 만들고, 잠시 잠깐이면 사라질 허상에 불과한 그 세상 영광을 사막의 신기루처럼 아름답게 보이도록 속임으로써 성도들로 하여금 허상에 불과한 그 우상에 탐닉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고귀한 시간과 물질과 정력을 헛되이 탕진하도록 유혹한다.
현대의 발달된 문명 국가에서 대부분의 성도들이 빠지기 쉬은 마귀의 시험 거리는 육체적(성적) 쾌락이다. 마귀는 이와 같은 성적 쾌락이 무제한적으로 허용되는 곳이 지상낙원이요 인간 행복의 절정인양 착각하게 만들고, 모든 물질과 명예와 권세를 동원하여 이와 같은 성적 쾌락에 빠지도록 유혹한다. 국민소득이 높은 선진국일수록 이혼률과 타락한 성문화와 성범죄율이 높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이들 선진국들에서 허용되기 시작한 동성연애가 전세계로 확산되는 것도 지구촌을 파멸로 이끌려는 마귀의 작전에 온 인류가 휘말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끝없는 성적 욕망은 마약과 같아서 그 어떤 방법으로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는 사실과,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과 만족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때 비롯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결국 마귀의 말에 온 인류가 속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다.
성도가 마귀의 천편일률(千篇一律)적 시험, 곧 돈과 명예와 권세를 통한 쾌락으로의 유혹을 차단하고 극복하는 지름길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바, 종말에 대한 말씀(종말론)이다. 성도들은 영원한 하늘 나라(천국)의 백성이요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긍심과 더불어, 잠시 잠깐의 인생 여정이 끝나면 (어쩌면 내일 아침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미리 예비해 놓으신 천국에 들어가 진정한 사랑과 진실과 겸손이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의 행복과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생각과 결단이 성도로 하여금 마귀가 주는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현재의 고난과 시험과 역경 가운데서도, 마치 마라톤 선수처럼 주변의 유혹에 눈 돌리지 않고, 목표를 향하여 전력을 다하여 질주하게 만드는 것이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6).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어느 목사님이 설교에서 지적한 것처럼, 신앙인의 종말론적 관점으로 바라볼 때, 한국교회와 미국교회의 타락한 모습은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돼지들이 내일 죽을 줄도 모르고 타고 있는 트럭 위에서 자리 다툼을 하며 짝짓기에 열중하는 모습 같고, 아빠에게 인형을 선물로 받은 아이가 방 안에 들어가 예쁜 인형에 도취되어 “밖으로 나와 가족과 함께 준비된 식탁에 참여하자”는 아빠의 부름을 듣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머리 위로 참새가 날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어도 그 참새가 자신의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지 않겠는가?
(4)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말씀과 생각
앞서 우리는 마귀(사탄)의 정체와 그가 인간을 유혹하고 공격하는 방법 및 그가 사용하는 유혹의 통로에 대하여 살펴 보았고, 아울러 성도가 마귀로부터 시험을 당할 때 그를 이기고 정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써 성도의 유일한 공격 무기 곧 하나님의 말씀(엡 6:17)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마귀는 본래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피조물로서(겔 28:13-15), 영원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에 대하여 알고 있으며, 마치 8.15 해방 당시 일본 천황의 항복으로 무장 해제가 된 일본 군인처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절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항복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성도가 마귀의 시험을 당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사탄아, 물러가라” 선포하고 결단하는 것처럼 힘든 일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험을 당하는 성도가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기록된(마 4:4,6,10)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에는 먼저 그 말씀을 의심하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고, 이와 같은 자기 생각의 포기(마 16:24)와 더불어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결단과 각오가 있어야만 마귀는 물러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하면 물건이 더 잘 팔리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성도가 현장에서 거짓말을 한번 해 보라는 마귀의 유혹을 받을 때 속이거나 “거짓말 하지 말라”는 성경말씀(출 20:16)과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 8:2)는 말씀을 기억하고 선포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합당한 거룩과 진실을 지킬 것인지, 결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귀는 그 어떤 피조물 보다도 간교한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성도의 믿음 수준을 꿰뚫어 보고, 계속 그를 유혹할지 아니면 그로부터 떠나갈지 결정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오늘의 한국교회와 미국교회의 대부분 성도들이 당하는 마귀의 시험은, 앞서 언급한대로, 쾌락과 명예와 권세를 통하여 하나님처럼 영원한 영광을 누리고 싶은 욕망이라 할 수 있는데, 이와같은 육체의 욕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마치 맛 잃은 소금처럼) 교회가 종종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조롱 및 멸시 천대를 당함으로써 마귀가 개가를 부르는 모습을 볼 때(시 25:2) 안타깝기 그지없다. “사람에게는 각자 지옥으로 내려가는 사다리가 하나씩 있다”는 서양 격언에서처럼 사람 마다 각자 마귀가 공격하기 쉬운 취약한 부분이 있게 마련인데, 그것이 성적 쾌락이든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나 권세이든 간에, 마귀는 그 취약한 부분을 거머리처럼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악질적 존재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을 때처럼 마귀는 성도로 하여금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세가 인생 최고의 행복인 줄 착각하도록 만들고, 잠시 잠깐이면 사라질 허상에 불과한 그 세상 영광을 사막의 신기루처럼 아름답게 보이도록 속임으로써 성도들로 하여금 허상에 불과한 그 우상에 탐닉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고귀한 시간과 물질과 정력을 헛되이 탕진하도록 유혹한다.
현대의 발달된 문명 국가에서 대부분의 성도들이 빠지기 쉬은 마귀의 시험 거리는 육체적(성적) 쾌락이다. 마귀는 이와 같은 성적 쾌락이 무제한적으로 허용되는 곳이 지상낙원이요 인간 행복의 절정인양 착각하게 만들고, 모든 물질과 명예와 권세를 동원하여 이와 같은 성적 쾌락에 빠지도록 유혹한다. 국민소득이 높은 선진국일수록 이혼률과 타락한 성문화와 성범죄율이 높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이들 선진국들에서 허용되기 시작한 동성연애가 전세계로 확산되는 것도 지구촌을 파멸로 이끌려는 마귀의 작전에 온 인류가 휘말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끝없는 성적 욕망은 마약과 같아서 그 어떤 방법으로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는 사실과,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과 만족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때 비롯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결국 마귀의 말에 온 인류가 속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다.
성도가 마귀의 천편일률(千篇一律)적 시험, 곧 돈과 명예와 권세를 통한 쾌락으로의 유혹을 차단하고 극복하는 지름길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바, 종말에 대한 말씀(종말론)이다. 성도들은 영원한 하늘 나라(천국)의 백성이요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긍심과 더불어, 잠시 잠깐의 인생 여정이 끝나면 (어쩌면 내일 아침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미리 예비해 놓으신 천국에 들어가 진정한 사랑과 진실과 겸손이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의 행복과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생각과 결단이 성도로 하여금 마귀가 주는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현재의 고난과 시험과 역경 가운데서도, 마치 마라톤 선수처럼 주변의 유혹에 눈 돌리지 않고, 목표를 향하여 전력을 다하여 질주하게 만드는 것이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6).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어느 목사님이 설교에서 지적한 것처럼, 신앙인의 종말론적 관점으로 바라볼 때, 한국교회와 미국교회의 타락한 모습은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돼지들이 내일 죽을 줄도 모르고 타고 있는 트럭 위에서 자리 다툼을 하며 짝짓기에 열중하는 모습 같고, 아빠에게 인형을 선물로 받은 아이가 방 안에 들어가 예쁜 인형에 도취되어 “밖으로 나와 가족과 함께 준비된 식탁에 참여하자”는 아빠의 부름을 듣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머리 위로 참새가 날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어도 그 참새가 자신의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지 않겠는가?
7)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당신(아버지/주님)의 것이옵니다, 아멘
(1)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당신(아버지/주님)의 것이옵니다, 아멘
전통적인 주기도문 번역에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번역한 것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의역한 것이다. 이 경우에도 영어 번역이 헬라어 원본에 더 가깝다: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앞서 우리가 고찰한대로 주기도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서두와 말미가 2인칭 단수로 되어있는 영광송(Doxology), 즉 하나님의 거룩하고 위대하신 이름 또는 그 권세와 영광을 찬양하는 것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찬송가라 할 수 있는 시편에서도 이와 같은 수사학적인 구조가 발견되므로, 예수께서는 기도(주기도문)와 찬양을 같은 맥락으로 동일시(同一視)하셨다고 볼 수 있다. 기도를 찬양으로 시작하고 마친다는 것은 기도하는 성도의 믿음, 곧 자신의 기도를 주님께서 반드시 들으시고 응답(Yes, No, Wait)하실 것을 확신하는 일종의 “(들으심의) 확신”이라 할 수 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15).
이와 같은 ‘들으심에 대한 확신’은 150개의 시편 가운데 20여 개의 ‘탄원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그것은 탄원시, 특히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 서두를 암송하신 시 22편에 보면, 그 전반부(예: 시 22:1-21)에서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고통과 억압 가운데 울부짖다가 후반부(예: 시 22:22-31)에서 갑자기 분위기가 역전되어 감사와 감격이 넘치는 찬양으로 시를 마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전환(Change of Mood)의 배경인즉, 비록 현재는 암울한 상황이지만 성도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써 구원과 치유와 기적을 베푸실 것을 믿고 미리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린다는 것이다.
또다른 흥미로운 사실은,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에 나타나는 송영에서도 주기도문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3부 구조’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주기도문의 전반부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라는 3개 항목이 언급되고, 후반부에서도 ‘일용할 양식’과 ‘죄용서’와 ‘마귀의 시험에서의 구원’이라는 3개 항목이 언급되며, 마지막 송영에서 ‘당신(아버지/주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의 3부 구조가 또다시 언급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세번이나 반복하여 ‘3부 구조’라는 수사학이 동원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와 같은 반복적인 3부 구조로서의 수사학적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3의 수(數)는 모든 숫자 가운데 ‘완전의 수’요 ‘하늘의 수’로서, 완전성과 안정성과 영원성을 표현할 때 쓰이며(수학 박사들의 견해 참조), 성경에서는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창조 세계에 대하여 이 3의 수가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늘이 세 개로 구성되어 있으며(고후 12:2), 하나님은 홀로 존재하시지만 3위 1체(성부+성자+성령)의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 완전 수로써의 3이 세상(동서남북 4방)의 수인 4와 결합할 때 7의 수, 곧 또 다른 온전하고 거룩한 수로 발전하며, 3과 7이 합하여 또다른 충만과 완전의 수인 10으로 발전하고, 7과 10을 제곱하여 70이라는 또다른 온전한 수를 이루고, 3과 4를 제곱하면 12가 되어 또다른 온전함과 거룩함을 가리키게 된다. 하나님께서 7일 동안 세상을 완벽하고 거룩하게 창조하셨다는 것, 하나님 나라의 초석으로서 이스라엘을 12지파로 구성하시고, 예수께서 12제자를 선택하신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의미가 있다. 야곱의 가족이 70명이 되었을 때 애굽으로 인도하셨고(출 1:5), 포로된지 70년 만에 바벨론에서 해방되게 하셨으며(렘 29:10),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일생(120년)이 40년의 왕자 생활, 40년의 광야 생활, 40년의 백성 지도자로서의 삶으로 구성된 것이나, 요셉이 30세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고, 다윗이 30세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며, 예수께서도 30세까지 가정을 돌보시다가, 30세부터 3년 동안의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은 30세겔에 가룟 유다에 의해 유대의 교권자들에게 팔려 십자가에 달리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신 것 등등, 3의 수가 상징적으로 의미있게 적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국 주기도문에서 3부 구조가 세 번이나 연속적으로 적용되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거룩성과 완전성과 영원성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초대교회의 전통에 따라) 매일 3번 이상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고, 교회 모임의 말미에서도 주기도문으로 마치며, 기도가 막히고 어려울 때 주기도문으로 기도의 문을 여는 것도 이와 같은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송영에 언급된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3가지(‘하나님/아버지의 나라’ + ‘하나님의 권세’ +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언급이 필수적으로 포함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첫번째 용어(‘당신/아버지의 나라’/Thy Kingdom)에 집중하여 그 의미를 살펴 보자. ‘하나님 나라’를 무엇보다 먼저 생각하고 그 위대함을 찬양하고 감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는 어떤 나라인가?
이 ‘하나님 나라’는 ‘하늘 나라’ 또는 ‘천국’(Kingdom of Heaven)으로 불리우는데, 글자 그대로 전지전능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이 왕으로 통치하시는 나라요, 그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가장 강하고 가장 아름다운 왕국이요, 하나님의 의롭고 거룩한 자녀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예수님의 성품으로서의 사랑과 진실과 겸손이 지배하는, 무한대의 공간과 무한대의 시간과 무한대의 풍요와 행복과 평안으로 단장된 영원한 왕국이니, 이와 같은 이상적인 나라를 성도가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으며, 그 나라에 들어가있는 백성으로서 어찌 자랑하고 선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당신(아버지/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우리는 앞서 주기도문의 마지막 송영(Doxology)이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의 3부 구조로 구성되어 있고,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함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그러면 나머지 두 가지 항목, 즉 ‘하나님의 권세’(헬라어로 Dunamis)와 ‘영광’(헬라어로 Doxa)이 영원함을 인정하고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권세’라는 헬라어(두나미스)는 ‘다이너마이트’라는 파생어에서 보는 바와 같이, ‘힘(Power), 권능, 권세, 능력, 세력’ 등의 뜻을 갖고 있다. 세상에 하나님의 힘 또는 권세보다 더 강력하고 영원한 것이 어디 있으며, 아무리 입을 크게 벌린들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어찌 다 표현하겠는가?
아픈 허리를 치료하는데 좋다 하여 오늘 아침에도 뒷짐을 지고 하늘을 향하여 머리를 45도 각도로 높이 쳐들고 양반(침팬지)처럼 걸으면서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하늘의 무한한 크기와 위대함이었다. 빛의 속도로 500광년을 달려가도 끝이 없다는 광대무변의 하늘(태양계), 그와 같은 크기의 은하계가 우주에는 1천억 개 이상 된다 하지 않는가? 그처럼 어마어마한 크기의 우주(하늘)가 푸른(Blue) 색깔로 되어있는데,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들 그토록 큰 하늘과 바다와 들판을 어찌 다 파란색과 초록색으로 아름답게 색칠할 수 있겠는가?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은 이처럼 그 사이즈(Size)에 있어서 무한대일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무한대로 길게, 영원토록 지속됨을 우리는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은 천지 만물의 창조에서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통하여서도 그 막강함과 영원성이 입증되었다. 가장 힘이 센 인간으로 알려졌던 람세스, 진시왕, 징기스칸, 알렉산더, 시저, 나폴레옹 등의 무덤에서 보는 것처럼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죽음의 권세를 이긴 자는 없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이 모든 사람 위에 군림했던 죽음을 정복하시고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권세의 무한대성과 영원성을 입증하셨다. 이와 같은 무적의 권능을 통하여 예수를 믿는 우리 성도들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할 것을 믿고 매일같이 그날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지 않는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권세의 무한대성과 영원성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잡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로 우주가 창조되었고, 그 말씀을 통하여 인류는 생존하며, 그 말씀을 통하여 인류 역사는 종말을 맞게 될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마지막으로,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하심을 인정하고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영광’(Doxa)이라는 헬라(Greek) 말은 ‘영광, 찬란함, 아름다움, 위엄, 위대함, 명예’ 등을 뜻하는 추상명사로서, 이 용어가 사람에게도 적용되었다(솔로몬/마 6:29; 히스기야/대하 32:27; 느부갓네살/단 2:37; 헤롯/행 12:23). 그러나 성경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영광에 비할 때 사람이 갖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영광(명예)은 상대적이어서 풀의 꽃과 같고 지나가는 바람 같이 헛되고 잠깐임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벧전 1:24-25).
하나님의 영광의 절대성과 영원성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사상으로서, 다윗의 수많은 찬송시에서, 특히 그의 임종 직전의 마지막 찬송에서도 발견되고, 예언서에서도 두드리지게 언급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이르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대상 29:10-13). “스랍들이 ...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사 6:2-3).
하나님의 위대한 명예와 영광은 그의 창조 능력에서 뿐만 아니라 그분의 놀랍고 위대한 성품, 즉 찬송가 304장(통일 404장) 후렴에서 강조되는 것처럼, 그분의 위대한 사랑에 집중되어 있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모든 인간을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로 하여금 우리가 당해야 할 지옥 형벌을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로 하여금 영원한 기쁨과 자유와 행복을 하나님과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영생 천국을 예비하신, 그야말로 한도 끝도 없는 사랑을 보여주신 창조주시다. 이와 같은 사랑의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은 우리 성도들이 마땅히 인정하고 넘치는 감사 가운데 찬양해야 마땅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함을 인정하고 찬양함으로써 성도는 앞에서 드린 여섯 가지의 기도 내용이 반드시 응답될 것을 “아멘”으로 서명(Sign)할 뿐만 아니라, 죽음 저편 영원한 천국의 성가대가 부를 찬송에도 미리 앞당겨 동참할 수 있게 된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4:11)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