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온전한 지식을 가진 자라고 말하는 엘리후(4절)가 욥에게 계속 말을 이어갑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을 위해 욥에게 말하는 것이라고 하면서(2절), 자신은 먼 데서 지식을 얻은(한정된 것이 아니라 광범위한 지역을 다니며 지식을 쌓았다는 의미) 자로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을 밝히겠다고 말합니다(3절). 그러면서 자신이 하는 말은 모두 진실이며, 자신은 온전한 지식을 가진 자이니 자기 말을 명심하여 잘 들으라고 말합니다(4절). 엘리후는 자신의 지식과 지혜에 대하여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러나 엘리후의 이 말은 매우 교만하게 보입니다. 물론 자기의 말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후가 하는 말은 신학적으로 타당성이 있어 보이긴 하여도, 욥의 상황과 하나님께서 욥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신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기에 매우 섣부른 자신만만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와 같이 목사로서 사역하는 이들이나 교회의 중직(重職)을 맡은 이들이 저지를 수 있는 실수입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흠이 없는 자들을 멸시하지 않으시고(5절), 악인은 살려두지 않으시고 고난 받는 자에게는 공의를 베푸시며, 의인들을 굽어 살펴보시면서 의인들은 존귀하게 여기신다고 말합니다(6절, 7절). 혹시 의인인데도 고난이나 고통을 당하게 된다면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게 하시고,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8절~10절). 그래서 그들이 돌이켜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다시 복을 주실 것이고, 순종하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11절, 12절). 즉 의인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지만, 혹시라도 의인이 고난이나 고통을 겪게 된다면 그들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이키면 다시 하나님의 복을 누릴 것이고, 돌이키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찾지 않기에(13절), 결국 그들은 단명(短命)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남창(男娼)들도 일반적으로 일찍 죽었다는 의미에서 남창과 함께 있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14절).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교훈을 주셔서 그들이 고난 속에서 귀를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신다고 말합니다(15절). 16절은 하나님께서 욥을 넉넉하고 풍성하게 해주셨었다는 것을 상기(想起)시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욥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며(17절) 이러한 상황에 놓인 욥이 제대로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와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피해 가거나 비껴갈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18절~20절). 하나님께 뇌물을 바친다고(아마 하나님께 속죄제물을 바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해결될 것도 아니고, 돈으로 해결할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저 밤이 되면 이 모든 것들이 해결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도 갖지 말라고 말합니다(20절).
엘리후는 욥에게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고 말하면서, 욥이 환난을 택했다고 꾸짖습니다(21절). 즉 욥이 하나님께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았기에 계속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욥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이런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욥에게 다시 한번 회개를 촉구합니다(22절~25절). 하나님을 기억하고 높으신 하나님,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알 정도로 공의로우시고 존귀하신 하나님께 돌이키고 나아오라고 촉구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후의 말은 신학적으로 꽤 타당성 있는 말들입니다. 물론 욥의 다른 세 친구들의 말들도 신학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내용들이 대부분입니다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후의 말도 여전히 욥을 악한 자로 단정 짓고 있습니다. 욥이 악을 행했으면서도 자기의 악을 회개하지 않고 파렴치하게 하나님께 그 모든 원망을 돌리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옳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무리하게 그것들을 욥에게 적용하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엘리후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악한 자를 벌하시고, 의로운 자들을 선대(善待)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공식처럼 모든 상황에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아가며 헌신하였지만, 극심한 고난을 겪다가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자들에 대한 설명이 어려워집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이 악을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욥기 1장과 2장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욥이 극심한 고난을 겪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욥을 정죄하고, 욥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명확한 진리를 근거로 하였다고 생각하면서 섣부른 조언, 섣부른 판단, 섣부른 교훈을 행하는 것을 조심해야 하겠다는 깨달음을 갖습니다. 좀 더 깊이 생각하고, 좀 더 깊이 묵상하고, 상대방에 대해 좀 더 살핀 이후에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안창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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