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BUSINESS 가 진정 내가 바라고 기대하였던것 이상으로 성공적이 였던 것은 틀림이 없었다.
이 조그만 BUSINESS 하나가 모든것을 해결해주는것은 절대 아니지만 이것은 시작이고 희망이고 그야말로
회사를 운영하는데는 정말 코끼리 코에 비스켓 정도지만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많이 판매가 되면
이것도 보통 장사를 넘어선다는 계산이 나왔다.
나는 그날 이후로 부지런히 고향의 선배 사무실을 찾아가서 점심도 하고 아직은 정말 유치원생 같은
왕초보이기에 양모에 대한 공부를 이 선배로 부터 조금씩 얻어서 배우기 시작 하였고 이 선배님이 전에
근무하였던 회사에 동료분을 또 다시 소개받아서 조금씩 나름데로 시장을 넓혀갔다.
아직은 모든 일에 중심은 비철금속이 였기에 이에 대한 업무도 소홀함이 없이 친구와 함께 조금의 빈틈도 주지않고
열심히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해도 아직은 회사가 웬만하게 돌아가는 그런 상황은 아니다.
조금이라도 BUSINESS 로 얻게되는 이익금의 상당부분을 또 다른 투자에 사용이 되는것이 전부였다.
투자라는것이 다른것이 아니다. 사람을 만나고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는것이다.
밤낮이 따로 없었다. 해가지면 오늘은 이곳에 친구를 만나고 내일은 저곳의 친구를 만나고 ......... 그야말로 술에 찌드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항상 어려움이 오는날은 매월 25일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때는 모든 공과금이나 급여일이 25 일였다.
기억이 정확한것은 그당시 친구와 나는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전 까지는 매월 30만원의 월급을 갖기로 정하였고
살림을 쪼이고 쪼여서 살아갔다. 사업 자금이 충분하지 못하여 고액의 이자를 지불하고 쓰는 사채이자을
지불하고 나면 직원들의 월급이야 내일로 미룰수가 있으나 공과금은 그렇지 못했다.
하루가 연체가 되면 그 다음날 가산료가 10% 였던 그런 시절이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그때에 이미 성공한 사업을 이끌고 있던 김 대성 회장이 퇴계로 4가 와 을지로 사이 오장동 쯤인 그곳에
신미식품 주식회사를 운영하며 중동지역에 성공적으로 국내에 식품을 수출하는 무역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호주에서 돌아와서 자주 만나지는 않았던 사이 였지만 우연히 가깝게 지나게되다보니 자주 연락을 하고 있던 그런때 였다.
나는 당시에 기억으로 매번은 아닌것 같지만 몇번을 작은 금액일때도 있었고 때로는 큰 금액을 급히 빌려서
몇일후에 갚았던 그런일이 있었다.
그 당시 탤렉스 사용비용은 상당한 금액이 매월 우리들 월급보다 많은 금액이 그리고 전화비용이 고지가 되었는데
하루가 지나면 10% 가산금이 부과가 되었기에 나는 친구의 도움을 요청하기가 일쑤 였다.
이 큰 금액을 빌려 달라고 하면 거절할까 싶어서 늘 오늘 공과금 중에서 일부가 모자란다고 설명하고 빌렸다.
또 다른 금액은 같은 방법으로 다른 친구에게 빌리기도 하였고.....
매월 25일에 있었던 해프닝이지만 그때마다 대성 친구는 내가 부탁하는 금액을 아무말이 없이 도와주었다.
정말 잊지 못하는 나에게 어려웠던 그 시절에 고마웠던 친구의 도움에 대하여 한번도 잊어본적이 없다.
이 순간을 빌려서 다시 한번 대성 친구에게 머리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해본다.
아마 대성 친구는 이일을 기억하지도 못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 당시에 기댈곳이란 이 친구가 유일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사업이 일년이 지났고 양모 사업은 급속한 진전은 없었지만 그냥 그냥 조금씩 늘려갔다,
다만 비철은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나아지기 시작하여 짧은 기간에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였고 업계에서는
우리 회사의 이름도 제법 알려지고 있었다.
지금은 아주 옛날이 되어버린 이야기 중에서 참으로 기억이 남는 사건도 있었다.
그 당시 우리는 알루미늄 INGOT 을 미국에 있는 회사와 거래를 하게 되었는데 이 회사가 공급하는
알루미늄의 가격이 상당히 경쟁력이 있었다.
당시에 이런 알루미늄을 사용하는 회사는 상당한 규모의 공장으로 가히 준 재벌금쯤은 되는 큰 회사가 많았다.
예를들면 일진 알루니늄, 선학 알르미늄, 동양 알르미늄 등등의 상당한 규모의 공장에다 생산 능력을 가지고 있는
회사가 많았다.
이 알르미늄 이란 비철금속으로 지금이나 그때나 국제가격이고 하루가 다르게 가격이 내렸다가 올랐다가 하는 그야말로
종잡을수가 없다. 다행히 좋은 가격에 계약이 되었다면 이 계약하나로 돈을 벌게되는 경우가 허다 하지만 불행이도
계약후에 가격이 폭락을 하게되면 모든게 허당이다.
이 경우 계약자는 100% 계약을 이행하여야만 공급자도 손해가 없는데 만일에 계약을 하고서는 이행을 하지 않으면
문제는 상당히 심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상황을 잘알고 있는 모든 국내의 수요자는 가격이 내려도 또 다른 반등이 있는것이기에 모든 회사가
어떤 이유이던 계약이 이행이 되는것이 관행이다.
그런데 우리가 거래를 시작한 회사중에서 대구에 소재한 조일 알루미늄이란 큰 회사가 있었다.
3,000 톤이란 엄청난 수량을 매월 500 톤을 선적하기로 계약을 하였는데 사건이 발생한것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던 알루미늄의 가격이 폭락을 하기 시작하였고 결국은 계약 가격이 시세에 반 토막이 되는 사건이 생겼다.
이러니 당연히 이행이 되어야 할 계약이 미루어 지고 결국은 우리말로 만세를 부르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당연히 수출자는 급히 한국을 방문하였고 나는 이들 일행과 대구로 향했다.
기억에 새마을호 기차를 타고 우리 일행은 대구에 조일 알루미늄에 도착하여 사무실을 들어서는데 나는 거기에서
지금은 훌륭하게 한융금속을 운영하고 있는 강 형석 회장을 거기에서 만났다.
정확한지 모르지만 아마 그 당시에 대리 아님 과장이 였을것 같다. 그때 그 만남의 반가움에 손을 덥썩 잡고서
서로가 놀라서 기뻐하였던 얘기는 지금도 형석 친구와 나는 가끔 웃으면서 옛날 그때를 이야기 하면서 회상 한다.
그때 형석 친구와 만난 이후에 나는 다시 조일 알루미늄과 거래가 없었기에 세월이 한참 흐른후에 형석 친구는 그 회사을
그만두고 자기 사업을 시작하여 오늘날 년 매출이 4,000 억이 넘는 훌륭한 기업으로 키우고 성공한 사업가가 된것이
무엇보다 자랑 스럽다.
그 당시 조일 알루미늄과 원만하게 해결이 되지 않아서 미국의 공급자는 국내에 김&장 변호사 사무실에
계약서를 제출하고 법적으로 소송을 진행하게 되었고 나는 어느쪽에 서서 일하여 주어야 할지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결국은 조일의 손을 들어주었다. 가지고 있던 그 계약서에 있던 날인에 대하여 내가 부인을 하였고 상당한
손해를 입게된 공급자는 훗날을 약속하고 일단 물러났다.
당시 서로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공급자와 김 & 장 변호사 그리고 나와 조일 알루미늄의 이 재섭 회장 모두가 부산에
조선호텔에서 2 틀 밤낮을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만나서 싸우기도 하고 설득도 하고 하여 결국은 공급자는
손해가 있었지만 어려운 해결을 하였고 그후에 이 재섭 회장은 오래오래를 두고서 나에게 감사 하는 마음을
전해 주었다. 지금은 그분도 연세가 상당할텐데 생존해 계시는지도 모른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주가 그렇다 . 계약을 하고 나서 가격이 폭락하던지 아니면 시장이 좋지 않으면
절대 그 계약을 원만하게 이행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아주 못된 기업 정신을 가진 기업주가 상당수다.
우리나라에서는 우선 BUSINESS 가 되려먼 인연의 시작이 학연. 지연 그리고 혈연이 우선이다.
이렇게 시작이 된 BUSINESS 도 때로는 잘못이 되어 원수보다 더한 사이가 되기 일쑤인 경우가 허다 하다.
그러니 계약이란것이 "갑" 과 "을" 에서 갑의 횡포가 있게되면 그 결과는 도무지 종 잡을수가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다.
이런 이유로 나는 삼성이란 기업이 지금도 훌륭하다고 보는것이 그 당시에 삼성물산과는 계약이 되면 어떤 경우이던
불 이행이란것이 절대 없다. 100 % 이행이다. 그러니 모든 공급자는 안심하고 좋은 가격을 제공하게되고
이런 신용을 바탕으로 운영이 되는 삼성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일류 기업의 자리는 불변인것 같다.
비철이란 ITEM 을 취급하면서 만났던 큰 기업중에서 ... 예전에 진해 밧데리 전신인 세방전지. 한국전지 등에는 중동전쟁이
발발하여 폐기된 군용차랑에서 그리고 전차등에서 나온 폐 밧데리를 당시에 공급하였고, 샷시 전문업체인 일진
알루미니늄에는 알루미늄 INGOT 와 BAR 그리고 우리가 마시는 오렌지 쥬스 CAN 을 생산하는 동양석판에는 TIN ( 주석) 을
공급하기도 하였고 성원 철강이란 회사에는 대만에 캬우슝에 머물면서 10만톤 급 배한척을 해체하여 선적하였던 추억도 있다.
당시에 나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것이 대만 시내에 위치하였던 국제 공항이 국내선 공항으로 바뀌고 새로 將 介石 총통의
이름을 딴 새 국제공항이 문을 연지 얼마되지 않았었을 때다.
홍콩을 다녀오는길에 배가 해체되는 과정을 보기위하여 카우슝에 가려고 국제공항에서 국내선으로 가려고 하는데
나의 짐이 홍콩에서 실려지지 않아서 나는 부득히 공항에서 다음편에 도착하는 캐세이 패시픽 항공을 기다리는
상황이 발생이 되어 부득히 국내선 예약 비행기편을 놓치게 되어 다음편으로 타이페이에서 카우슝으로 가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그때의 상황에 대하여 하늘이 도와주신것으로 감사를 하는것이 타이페이에서 출발하기로 한 내가 예약하였던
그 비행기가 출발하기전에 미리 이륙한 7--80 명이 정원인 조그만 젯트 비행기가 카우슝으로 비행중에 추락하여 모두가 사망을
하였다.
하늘이 나를 도와주셨는지 나의 조상님이 돌봐주셨는지 모르지만 만일에 내가 조금만 서둘렀으면 나도 그 비행기를 탔을지 모른다.
이 사고로 나는 그곳 현지에 수출자 사무실에 전화를 하고 네 시간이 지난후에 카우슝 공항에 도착하였다
그때 나의 동업자 MR. RYU 가 금방 나를 알아보고서는 힘껏 안아주던 그때의 그 기억은 아마 나의 일생에서는
잊혀지지 않는사건이다.
이 이야기는 그후 몇몇의 친구에게 한적도 있지만 이 이야기는 나의 가슴에 지금도 조용히 묻고 나만 알고 가려고 했던 이야기를
이제 말하고 있다.
매사에 급한 성격이고 기다림을 지겨워하는 성격은 지금이나 그때나 변함이 없지만 이제는 나이도 있고 매사에 서둘를 필요가 없다.
지금 우리 나이는 빨리가서 좋은것이 없잖는가 ??
그저 쉬엄쉬엄 쉬었다가 가는 그런것을 배우고 좀더 오래 살아야 되지 않는가 싶다.
오늘 저녁은 아내의 육순을 축하하고자 하여 스페인을 다녀 왔다는 원섭이 친구가 번개팅을 요청하였다.
지난 년말부터 얻은 지독한 감기 몸살에 아주 졸업을 못하고 고생을 하고 있지만 이제 슬슬 사무실을 나서서 스페인 여행기나
듣고 순대국 한그릇 얻어먹고 집으로 가야겠다.
첫댓글 박수! ㅉ! ㅉ! ㅉ!
대단하십니다!
그 뚝심?
어디서?? 났나요???
하늘이 도왔구먼 영원히 먼저 갈뻔 했네 ㅎㅎㅎ
대단하시군
읽음면 읽을수록 친구의 매력에 흠뻑 빠저드는군
그 순대국,
영식이가 덮어쓰고 말았다.
지독한 감기에 그래도 쐐주 한 잔 받아마셔준 일림이가 고맙고, 덮어써준 영식이가 고맙고, 양평에서 먼 길을 달려온 상철이도 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