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는 별방진(아래 그림1.2)을 포함하여 9진이 있다.
모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축성한 진성들이다.
별방진성은 원래 김녕방호소였는데 1.510년(중종5년) 목사 장림(牧使張琳)이 이곳으로 옮기고
지명을 따서 별방이라 했단다.
옮긴 까닭은 왜선들이 별방에서 가까운 우도(牛島: 아래 그림6. 7)에 정박하고 있기 때문.
둘레 2.390척, 높이 7척에 동. 서. 남쪽에 각각 성문루가 있었고 성안에는 시변청(侍變廳), 객사,
(客舍), 별창(別倉), 군기고(軍器庫)와 2곳의 샘이 있었단다.
축성 당시 심한 흉년으로 인해 부역 장정들이 인분까지 먹어가며 쌓았다는 성이다.
그런데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제주다.
해녀상(아래 그림3)을 세우고 해녀들을 깍듯이 대접하지만 대가 끊길 위기에 처해 있단다.
해녀의 경제적 역할, 위상이 이미 시효를 마감했으니 위기라 할 것도 없겠다.
해군기지 문제가 찬반 양론의 격한 대립 양상을 보일 정도로 변한 제주다.
인분을 먹어가며 성을 쌓았다거나 아이를 땅에 묻음으로서 성이 무너지지 않았다는(아래 그림
11. 12) 이야기가 제주의 일이라 믿어지겠는가.
제주는 오직 관광수입 일변도의 단세포적 사고와 행동으로 일관하고 있다.
석다원의 돌들(아래 그림4. 5)도, 우도와 지호지간의 일출봉(아래 그림8. 9)도 관광수입을 제외
하면 의미가 없게 된 제주다.
설마, 패러글라이더(아래 그림10)까지 그 범주에 들어가는 건 아니겠지.
봄 소풍나온 듯 쪽빛 바다 위 창공에서 시간을 즐기고 있는 그가 단연코 이 날의 주인공이었다.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성인데 왜 수산진성은 중산간에 쌓았을까.(아래 그림)
더구나 축성과정의 설화는 애를 끓게 한다.
관에서는 축성을 위해 마을인들로부터 공출을 받는 중인데 워낙 빈한하여 바칠 것이 없는
한 부인은 어린 아이라도 가져가겠느냐고 말한다.
부인의 황당한 말에 어이없는 관리는 빈 손으로 돌아온다.
한데, 그 날 이후 성이 쌓는 족족 무너져 내림으로 고심중일 때 한 승려가
"원숭이띠 아이를 바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말하며 지나간다.
문득 아이를 내놓겠다던 부인이 생각난 관리는 그 아이가 원숭이 띠임을 확인하다.
그래서 약조대로 그 아이를 땅에 묻고 성을 쌓는다.
그리고 성은 붕괴되지 않고 무사히 완성하게 된다.
그러나, 그 성에서는 어린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마을의 한 여인이 음식을 성담 아래에 차려놓은 후로 울음소리가 그친다.
이후, 마을 사람들이 그 곳에 당을 세우고 모시게 된다.
바로 '진안할망당'이다.
이 후로 '진안할망당'은 수산리 마을 신앙의 대상이 된다.
경주 불국사의 '에밀레종' 설화와 흡사하다.
수산리 이도승마장(아래 그림)이 한 폭의 그림 같다.
그런데, 말들이 스트레스 많이 받겠다.
호쾌하게 질주해 볼 기회가 없으니 말이다.
하나같이 처음 말등에 올라보는 이들인데 달릴 수 있겠는가.
그러다가 영영 퇴화되는 것 아닐까.
돈만 벌면 되는 주인네가 말의 사정을 알아주기나 하겠는가.
정의현성도 산간에 있다.
수산진성과 다른 점은 당초 성산읍 고성리에 설치했다가 옮겼다는 것.
별방진 처럼 해안에서 해안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 동쪽에 치우쳐 있으므로 불편이 많은 서쪽
주민들을 위해서 그랬단다.
언뜻 수긍이 되지 않는다.
적의 침입을 해안에서 저지하지 않고 상륙시켜 산간에서 막는다고?
또, 500년 조선왕조가 백성의 삶을 얼마만큼 중히 여겼기에 이같은 큰 시혜를?
한데, 정의현성(아래 그림2는 서문) 내에 있는 옛 정의현 관아의 대표 건물인 '일관헌'(日觀軒:
아래 그림1)의 복원이 잘못됐다는 지적이 나왔단다.
편액 '日觀軒'의 뜻은 '일출을 보는 집'이므로 동향이라야 하는데 남향으로 돼있기 때문이라고.
'종일 해를 볼 수 있는 집'으로 해석하면 남향이 맞지 않을까.
거기 앉아서 정사를 보고 백성을 보살필 것도 아닌데 동향과 남향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길래
저리 구설이 심할까.
저 호사가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오늘의 중국이 있게 한 등소평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다.
향교(아래 그림3. 4)는 제대로 되어 있나 보다.
잡음이 없으니.
.
아무튼, 성읍민속마을(아래 그림5)은 제주 문화유산의 보고(寶庫)란다.
그래서,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 제188호로 지정되었다는 것.
포장은 그리 하지만 실은 관광상품성의 문제 아닌가.
전국규모라는 용인 민속촌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하물며.
보존 가치가 있는 제주의 문화유산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국보 1점 없고 보물이 6점 있을 뿐이다.
그 보다는 UNESCO자연유산 등재의 의미가 강조돼야 할 것이다.
첫댓글 언제적 걸으셨던 길인지요 지금 막 걸으셨던 길인가요
작년 3월인데 자꾸 미루다가.
순례길 떠나기 전에 옛길 정리를 완료해야겠는데 어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