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형무소는 일제 통감부가 대한제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한 1907년에 지금의 현저동에 건설하여 1908년 10월에 완공된 경성감옥이다.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항일운동가들을 투옥키 위한 첫 감옥이다. 일제 강점기로 부터 해방후에는 서울구치소라 불리면서 많은 시국사범들을 수감시킨 곳이다.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1987년에 폐쇄가 된다.
역사성과 보존가치등을 고려하여 1988년에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된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재개장을 한 것이다.
경성감옥에서 서대문감옥으로 그 이후에 잘 알려진 서대문형무소로 개칭한다.
17세의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1학년생으로 서울 만세시위에 참여한다. 고향에 돌아와 아버지 어머니 숙부등이 함께 아우내(병천)
만세시위를 주도 한다. 징역 3년형을 받아 서대문 감옥에 투옥된다.
다른 사람들은 다시 최종심인 고등법원에 상고를 한다. 그러나 유관순열사만은
“삼천리 강산이 어디인들 감옥이 아니겠습니까” 하며 상고를 포기한다.
1920년 3월 1일 3 . 1운동 1주년을 맞자 또다시 서대문 감옥 안에서 독립만세를 선도한다. 이때 많은 고문을 받아 방광이 파열이 된다.
미결기간을 감안하여 빠르면 1920년 10월, 아니면 1921년 1월초에는 석방될 수 있었다. 일본 족발이들은 중죄인이라고 하여 허리에 찔린 상처, 고문으로 터진(파열된) 방광도 치료해 주지 않고 방치하여 건강이 악화된다.
마지막 이화학당 교사들과 오빠가 면회왔을 때는 살이 썩어가고 있었다.
내 어머니는 1906년 12월 15일생이시다. 74세의 연세에 돌아가시기까지 손주들도 품에 안고 업으시고 할머니의 행복을 그런대로 느꼈을 터이다. 내 오마니보다 네살이아 먼저 태여나신 1902년 12월 16일에 출생한 유관순이다.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서대문 감옥 안에서 한많은 한을 품고 숨을 거둔다. 만 17세의 여리디 여린 고등학교 2학년의 나이가 아닌가. 정동 제일교회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가족 외에 같은 반 학생 몇 명만 참석이 허락된다. 부모님도 없이 쓸쓸히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힌다. 무덤은 얼마 후 일제 군용기지 확장으로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된다.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아 무연고묘로 파헤쳐진 후 유골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된다.
해마다 3월이 되면 유관순 누나의 " 대한독립만세 " 외치고 있는 모습이 가슴을 저밀고 있다.
1902년 12월 16일에 출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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