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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념무상(無念無想)
일체의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무아의 경지에 이르러 일체의 상념이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無 : 없을 무(灬/8)
念 : 생각 념(心/4)
無 : 없을 무(灬/8)
想 : 생각 상(心/9)
(유의어)
일념통천(一念通天)
지성감천(至誠感天)
지존무상(至尊無上)
천인합일(天人合一)
무념(無念)은 ‘생각이 없음’을 나타내고, 무상(無想) 역시 ‘생각이 없음’을 나타낸다. 두 말이 겹쳐져 아무런 욕심이 없는 담담한 마음의 상태를 비유하는 말이다.
무념무상은 불교 용어로 아무 것도 마음에 담지 않고 아무 것도 생각지 않는다는 뜻인데 사람이 목석이 아닌 이상 글자 그대로 무념무상의 경지를 터득하기란 어렵다.
만약 아무것도 마음에 담지 않고 아무 것도 생각지 않는다면 그것은 스스로 나무나 돌이 되어버리기 마련이다. 어떠한 생각이 마음속에 들어오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다.
문제는 쓸데없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을 때, 바로 그것을 버릴 수 잇느냐 없느냐에 있다. 좋지 못한 생각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물과 같이 흘러 버려 뒤를 깨끗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개 사람은 두 가지 생각의 사이에서 망설이기 쉬운데, 그 앞뒤 생각에서 벗어나 현재에 처한 일에 따라 자연스럽게 해나간다면 그것이 곧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境地)인 것이다.
무념(無念)은 북종(北宗)의 기신론(起信論)에 의하여 이념(離念)을 주장했다는 대승무생(大乘無生) 방편문(方便問)의 여러 사례(事例)에서 알 수 있다.
기신론(起信論) 제1장 현시정의(顯示正義)에서 ‘중생(衆生)이 착실하게 무념(無念)을 관찰할 때는 곧 부처님 나라로 가는 지혜로 본다.’ 하였고 또 ‘무념(無念)을 이룩할 때는 곧 마음의 생주이멸(生住異滅)을 터득한다.’고 했다.
남종(南宗) 계열(系列)에서는 무념(無念)으로써 종지(終止)로 삼았고, 신회(神會)도 단어(壇語)에서 ‘진여(眞如)는 무념(無念)의 본체(本體)이며, 그러므로 무념(無念)으로써 종지(終止)로 삼는다. 무념(無念)이란 것은 견문각지(見聞覺知)를 갖추었다 해도 언제나 공적(空寂)하다.’고 했다.
또 마명(馬鳴)은 중생(衆生)이 무념(無念)을 관찰하면 곧 부처님 지혜를 얻는다. 그러므로 지금 설명하는 반야바라밀은 생멸문(生滅門)에서 단박에 진여문(眞如門)에 들 수 있다.
더구나 앞으로 비추고 뒤로 비추고, 멀리 보고 가까이 보고 할 필요가 없다. ‘도무지 이런 마음이 필요 없다.’ 하여, 암암리(暗暗裡)에 북종(北宗)의 선법(禪法)을 비판(批判)하고 있다.
신회어록(神會語錄)에서는 신회(神會)가 수행자(修行者)에게 말하는 가운데서 ‘무엇이 무념(無念)인가 하면, 이른바 유무(有無)를 생각하지 않고, 선악(善惡)을 생각하지 않고, 끝이 있고 없고를 생각하지 않고, 한계(限界)가 있음을 생각하지 않고, 보리(보제 菩堤)를 생각하지 않고, 보리로써 생각으로 삼지 않고, 열반(涅槃)을 생각하지 않고, 열반을 생각으로 삼지 않는 것, 이로써 무념(無念)으로 본다.’ 하였고,
또 ‘유무(有無)의 둘 다 던져버리고 중도(中道)도 역시 없는 것이라야 이것이 곧 무념(無念)이다. 무념(無念)은 곧 일념(一念)이요, 일념(一念)은 곧 일체지(一切 知)요, 일체지(一切智)는 곧 심심 반야바라밀이다. 바라밀은 곧 여래선(如來禪)이다.’고 찬탄(讚嘆)하고 있다.
이것은 무념(無念)을 종지(終止)로 하는 혜능(慧能)의 사상(思想)을 이어받은 것이다.
무상(無想)은 모든 사물 즉 그 사물을 발생시킨 관계 조건의 변화에 따라 변천(變遷) 소멸(消滅)하는 것이며, 곡두(穀頭)와 같은 것이라는 진리(眞理)를 깨닫고, 물체(物體)의 드러난 모습을 인식(認識)하면서도 거기 사로잡히지 않는 것을 말한다.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에 ‘무릇 모든 모습은 모두가 허망하다. 만약 모든 모습은 모습이 아니라고 볼 수 있을 때는 곧 여래(如來)를 볼 수 있다.’
신회(神會)의 단어(壇語)에는 ‘일체(一體) 중생(衆生)은 본디부터 무상(無想)이다. 지금 모습을 말하는 것은 모두가 망발(妄發)된 마음이다. 마음이 무상(無想)이라면 이는 곧 부처님 마음이다.’고 하였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은 백합약대신야수경(百合若大臣野守鏡)4권에 실려 있는 말로 불가(佛家)에서 많이 쓰인다. 자기의 모든 생각을 떨어버리고 살고 죽는 것에 대해 구별이 없어 온 세상 만물과 하나가 되는 경지(境地)를 말한다. 도술(道術)같은 것을 배울 때 마음을 비우는 것과 같다. 마음을 완전히 비운 도인(道人)의 경지이다.
비슷한 말로는 하늘과 사람이 하나로 합(合)하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된다는 천인합일(天人合一), 지극히 높아서 더 높은 것이 없다.
지극한 입신의 경지이다라는 지존무상(至尊無上), 한 생각이 하늘에 통한다. 지성으로 생각한 것이 하늘에 닿는다는 일념통천(一念通天) 그리고 지성감천(至誠感天)이란 말과 상통(相通)한다.
무념무상(無念無想)에 이르고자 하는 것 자체가 상(想)이고 념(念)이다. 즉 무념무상(無念無想)을 위해 노력(努力)하는 것 자체가 이미 상념(想念)이라는 말이다.
불교 용어에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란 말이 있다. 색즉시공은 현실의 물질적 존재는 모두 인연(因緣)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서 불변하는 고유의 존재성이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나온다.
공즉시색은 본성인 공(空)이 바로 색(色), 즉 만물이라는 말로 만물의 본성인 공이 연속적인 인연에 의하여 임시로 다양한 만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념무상(無念無想)이란 무엇인가? 형체가 없는 것이 있는 것이고 있는 것이 없는 것이니 모두가 하나일 뿐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무념(無念)은 곧 유념(留念)과 같다는 말인가? 무념무상(無念無想)은 유념유상(留念留想)인가? 아니다.
무념무상이란 내가 곧 나에게 상(想)을 갖게 하는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내가 새인지, 새가 나인지 바람이 분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바람이 되는 것이 무념무상일 것이다.
내가 모든것이 되어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 것, 즉 내 자신이 우주가 되고 만물이 되고 우주와 만물이 내가 되는 경지가 바로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일 것이다.
있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없는 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있어도 없고 없어도 있는 것을 안다면 바로 그것이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일 것이다.
그 땐 내 호흡이 세상의 바람이 되고 내 스스로 모든 기운을 호흡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아마도 진정한 무념무상(無念無想)이 아닐까 싶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는 일상생활 가운데에서 누구나 한 두번쯤 경험한다. 책을 읽을 때 독서삼매경(讀書三昧境)에 빠져 자신이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과 같은 상태이다.
이뿐만 아니라 모든 생활 가운데에서도 느끼게 된다. 다만 그 지속 시간의 길고 짧음이 문제이다. 지속 시간이 길어진다면 바로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일 것이다.
사람의 집중력에는 과학적으로 한계가 있다. 보통 5분에서 10분 정도가 그 한계이다. 따라서 잡 생각이 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집중력을 강화시키려면 첫째,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한다. 둘째, 어떤 일을 하건 20분이나 30분정도 지나면 짧게 휴식을 취한다.
명상(瞑想)은 마음속에 있는 여러가지 잡념을 없애고 정신을 하나로 통일해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몰입하게 한다. 교회나 절에서 하는 종교적인 기도도 명상과 비슷한 효과가 있다.
음악도 비발디의 사계(四季), 베토벤의 전원교향곡 등 자연의 소리와 닮은 물리적인 파동을 지닌 음악을 듣는 것이 좋다. 여기에 숲 속의 바람소리, 시냇물 흐르는 소리와 같은 자연의 소리는 정신을 맑고 쾌적하게 만들어 알파파 상태를 만들어 준다.
무념(無念)은 아무 생각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잡된 생각, 헛된 생각과 같은 상념을 버린 순수한 생각을 말한다. 마치 깊은 꿈을 꾸듯 한 생각에 깊이 빠져 마음이 고요함을 말한다.
한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면 오직 그 사람만이 마음속에 있을 뿐 아무런 생각도 들어올 수가 없다. 그렇게 너무나 행복하여 날아갈 것 같은 상태가 무념(無念)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일체의 잡념이 사라져 버린 그 상태, 큰 자연의 품에 안겨 눈부신 꽃에 마음을 몽땅 빼앗겨 버린 순간, 혹은 대의(大義)를 위해 오직 신념(信念) 하나로 온 생을 살아가는 삶이 무념(無念)이다.
불가(佛家)의 선승(禪僧)처럼 수도와 정진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꽃잎보다 여리게 바람보다 자유롭게 그리고 바다보다 큰마음으로 가슴을 세상을 품어버리는 것, 그것이 무념(無念)이다.
무상(無常)은 덧없다는 말이 아니다.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다. 세상에는 변치 않음이 없으니 그 어떠한 것에 집착할 필요도 욕심낼 필요도 미련을 둘 필요도 없다.
인생은 덧없는 것이라고 자괴감에 빠지거나 허무의 감상에 젖을 필요도 없다. 그것은 삶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상(常)의 없음, 즉,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다는 뜻이니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이다. 물이 얼거나 끓듯 순간순간이 변화의 과정이고, 생성의 연속이다. 이것이 생의 본 모습이라는 말이다.
만물은 지금 이 순간에도 변화하고 있다. 어제 그대로의 것이란 엄밀히 말해서 없다. 내 몸도 내 마음도 어제의 내가 아니다. 오늘은 어제와 다르므로 늘 새롭다 할 것이다. 따라서 만물의 무상함은 늘 변화하는 사물의 이치를 말함이니, 그것 자체가 이미 생명이다.
그러나 바위보다도 더 단단히 굳어버렸거나 얼음보다 더 차가워진 상태로 도무지 변화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생멸(生滅)의 이치를 벗어났거나 아니면 이미 죽은 것이다.
우리가 진보(進步)와 보수(保守)를 구분하는 잣대는 변화하느냐 변화하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진보는 앞으로 나아감이니 그저 내딛으면 되는 것이다.
만물이 모두 변화하거늘 변화하지 않는 그 무엇을 지킨단 말인가. 우리는 늘 새로움에 직면한다. 때문에 우리는 그저 새로움에 자신을 내어놓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진보이다.
어찌 제자리에 가만히 머무르며 보수(保守)하려는가. 무엇을 지키고 지키려는가. 물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변화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을 지닌다. 그러면서 이 세상 어디에나 만물의 깊은 속까지 틀어 앉아 만물이 그 본연의 성질을 잃지 않게 한다.
물은 아무리 모습을 바꿔도 그 근본은 물이다. 물이란 늘 변화하니 진보요, 그 속성이 변치 않으니 보수다. 만물의 변함이 진보요 변한다는 그 사실이 변치 않으니 보수다.
그러니 보수니 진보니 하는 잡된 생각을 버리라.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 변화의 물결로 나아가는 것, 큰 마음으로 따뜻한 세상을 열어가는 것, 사람도 새도 짐승도 바람도 물도 자동차도 기차도 물류도 막힘없이 평화의 길로 달려가는 것, 그런 세상을 향해 오늘 내딛는 내 한 걸음이 진보다.
그저 무념무상(無念無想)하면 된다. 그러면 당신은 변화에 마음을 내어놓으니 진보주의자요 동시에 변화한다는 변치 않는 원칙을 받아들였으니 보수주의자다.
▶️ 無(없을 무)는 ❶회의문자로 커다란 수풀(부수를 제외한 글자)에 불(火)이 나서 다 타 없어진 모양을 본뜬 글자로 없다를 뜻한다. 유무(有無)의 無(무)는 없다를 나타내는 옛 글자이다. 먼 옛날엔 有(유)와 無(무)를 又(우)와 亡(망)과 같이 썼다. 음(音)이 같은 舞(무)와 결합하여 복잡한 글자 모양으로 쓰였다가 쓰기 쉽게 한 것이 지금의 無(무)가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無자는 ‘없다’나 ‘아니다’, ‘~하지 않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無자는 火(불 화)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불’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갑골문에 나온 無자를 보면 양팔에 깃털을 들고 춤추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무당이나 제사장이 춤추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춤추다’가 본래의 의미였다. 후에 無자가 ‘없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 되면서 후에 여기에 舛(어그러질 천)자를 더한 舞자가 '춤추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無(무)는 일반적으로 존재(存在)하는 것, 곧 유(有)를 부정(否定)하는 말로 (1)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공허(空虛)한 것. 내용이 없는 것 (2)단견(斷見) (3)일정한 것이 없는 것. 곧 특정한 존재의 결여(缺如). 유(有)의 부정. 여하(如何)한 유(有)도 아닌 것. 존재 일반의 결여. 곧 일체 유(有)의 부정. 유(有)와 대립하는 상대적인 뜻에서의 무(無)가 아니고 유무(有無)의 대립을 끊고, 오히려 유(有) 그 자체도 성립시키고 있는 듯한 근원적, 절대적, 창조적인 것 (4)중국 철학 용어 특히 도가(道家)의 근본적 개념. 노자(老子)에 있어서는 도(道)를 뜻하며, 존재론적 시원(始原)인 동시에 규범적 근원임.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실재이므로 무(無)라 이름. 도(道)를 체득한 자로서의 성인(聖人)은 무지(無智)이며 무위(無爲)라고 하는 것임 (5)어떤 명사(名詞) 앞에 붙어서 없음의 뜻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없다 ②아니다(=非) ③아니하다(=不) ④말다, 금지하다 ⑤~하지 않다 ⑥따지지 아니하다 ⑦~아니 하겠느냐? ⑧무시하다, 업신여기다 ⑨~에 관계없이 ⑩~를 막론하고 ⑪~하든 간에 ⑫비록, 비록 ~하더라도 ⑬차라리 ⑭발어사(發語辭) ⑮허무(虛無) ⑯주검을 덮는 덮개 ⑰무려(無慮), 대강(大綱)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빌 공(空), 빌 허(虛)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존(存), 있을 유(有)이다. 용례로는 그 위에 더할 수 없이 높고 좋음을 무상(無上), 하는 일에 막힘이 없이 순탄함을 무애(無㝵), 아무 일도 없음을 무사(無事), 다시 없음 또는 둘도 없음을 무이(無二), 사람이 없음을 무인(無人), 임자가 없음을 무주(無主), 일정한 지위나 직위가 없음을 무위(無位), 다른 까닭이 아니거나 없음을 무타(無他), 쉬는 날이 없음을 무휴(無休), 아무런 대가나 보상이 없이 거저임을 무상(無償), 힘이 없음을 무력(無力), 이름이 없음을 무명(無名), 한 빛깔로 무늬가 없는 물건을 무지(無地),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음을 무자(無子), 형상이나 형체가 없음을 무형(無形), 아무런 감정이나 생각하는 것이 없음을 무념(無念), 부끄러움이 없음을 무치(無恥), 도리나 이치에 맞지 않음을 무리(無理), 하는 일 없이 바쁘기만 함을 무사분주(無事奔走), 한울님은 간섭하지 않는 일이 없다는 무사불섭(無事不涉), 무슨 일에나 함부로 다 참여함을 무사불참(無事不參), 즐거움과 편안함에 머물러서 더 뜻 있는 일을 망각한다는 무사안일(無事安逸), 아무 탈없이 편안함을 무사태평(無事泰平), 재미나 취미나 없고 메마르다는 무미건조(無味乾燥) 등에 쓰인다.
▶️ 念(생각 념/염)은 ❶형성문자로 唸(념)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마음심(心=忄; 마음, 심장)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今(금, 념)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포함하다, 포함되다란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 언제나 그 일을 마음 속에 생각하여 잊지 않는 일을 나타낸다. ❷회의문자로 念자는 '생각하다'나 '외우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念자는 今(이제 금)자와 心(마음 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今자는 입을 거꾸로 그린 것이다. 그래서 본래의 의미는 '입안에 머금다'였다. 念자는 이렇게 입을 거꾸로 그린 今자에 心자를 결합한 것으로 말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고 심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옛사람들은 생각은 머리가 아닌 심장이 하는 것이라 믿었다. 그러니 念자는 머릿속 생각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모습을 표현한 글자이다. 그래서 念(념/염)은 ①생각 ②스물, 이십 ③잠깐, 극히 짧은 시간(時間) ④생각하다, (마음에)두다 ⑤기억(記憶)하다 ⑥외우다, 읊다, 암송(暗誦)하다 ⑦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⑧가엾게 여기다, 불쌍히 여기다 ⑨어여삐 여기다, 귀여워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생각할 륜(侖), 생각할 유(惟), 생각할 억(憶), 생각 사(思), 생각할 임(恁), 생각 상(想), 생각할 려(慮), 생각할 고(考)이다. 용례로는 여러 가지로 헤아려 걱정하는 것 또는 그 걱정을 염려(念慮), 머리 속의 생각을 염두(念頭), 늘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간절히 바람 또는 그런 소원을 염원(念願), 바라는 바를 염망(念望), 여러 관념 속에서 공통된 요소를 추상하여 종합한 하나의 관념을 개념(槪念), 이성에 의하여 얻어지는 최고의 개념을 이념(理念), 뒤에 어떤 일을 상기할 근거로 삼음 또는 그 물건을 기념(紀念), 마음에 기억하여 두고 생각함을 유념(留念),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이 생각하는 일을 관념(觀念), 마음에 생긴 생각을 고집함을 집념(執念), 눈을 감고 말없이 마음속으로 생각함을 묵념(默念), 아주 단념함을 체념(諦念), 변하지 않은 굳은 생각을 신념(信念), 어떤 일에만 마음을 오로지 씀을 전념(專念), 생각을 아주 끊어 버림 또는 미련 없이 잊어 버림을 단념(斷念), 느끼는 생각을 감념(感念), 한결같은 생각을 일념(一念), 이치에 어긋나는 헛된 생각을 망념(妄念),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을 욕념(欲念), 일반 사회에 널리 통하는 개념을 통념(通念), 바빠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는 말을 염불급타(念不及他), 자꾸 생각나서 잊지 못한다는 말을 염념불망(念念不忘), 일체의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무아의 경지에 이르러 일체의 상념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념무상(無念無想), 정신을 집중하면 화살이 바위를 뚫는다는 뜻으로 정신을 집중하면 때로는 믿을 수 없을 만한 큰 힘이 나올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일념통암(一念通巖), 남의 잘못이나 개인적인 원한을 마음에 새겨두지 않는 것을 비유하는 말을 불념구악(不念舊惡), 하루 저녁에 천 가지 생각을 한다는 뜻으로 잠시 동안 아주 많은 것을 생각한다는 말을 일석천념(一夕千念), 좋지 못한 여러 가지 그릇된 생각을 이르는 말을 사사망념(邪思妄念) 등에 쓰인다.
▶️ 想(생각 상)은 형성문자로 음(音)을 나타내는 相(상)과 마음속으로(心) 상대를 그리워 한다는 뜻이 합(合)하여 생각을 뜻한다. 相(상)은 상대편을 가만히 보다, 마주보는 일을 말하고, 想(상)은 상대편에 바라다, 생각하다, 생각을 말한다. 그래서 想(상)은 (1)작품(作品)을 제작(製作)하는 작자(作者)의 생각 (2)대상(對象)을 속으로 가만히 생각하는 일 등의 뜻으로 ①생각 ②생각컨대 ③생각하다, 사색하다 ④그리워하다 ⑤상상하다 ⑥원하다, 바라다 ⑦닮다, 비슷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생각할 륜(侖), 생각할 유(惟), 생각할 억(憶), 생각 념(念), 생각 사(思), 생각할 임(恁), 생각할 려(慮), 생각할 고(考)이다. 용례로는 미루어 생각함으로 어떤 사물의 사정이나 마음을 미루어 생각함을 상상(想像), 기억하고 있는 지난 일을 다시 돌이켜 생각하여 냄을 상기(想起), 어떤 정황을 가정적으로 생각하여 결정함을 상정(想定), 어떤 일을 마음속에 생각하여 의식하는 여러 가지 정황을 상온(想蘊), 과거나 미래를 생각하여 봄을 상견(想見),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상념(想念), 생각이 미침을 상도(想到), 사모하여 우러러 봄을 상망(想望), 곰곰이 생각함을 상사(想思), 생각하여 헤아림을 상찰(想察), 생각하건대 반드시를 상필(想必), 어떤 일을 직접 대하기 전에 미리 상상함을 예상(豫想), 어떤 일을 생각해 내는 것 또는 그 생각을 발상(發想), 사유를 통하여 생겨나는 생각을 사상(思想), 어떤 일을 어떠한 계획으로 하겠다고 하는 생각을 구상(構想), 현실에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느끼는 상념을 환상(幻想),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생각을 공상(空想),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상태를 이상(理想), 마음에 느끼어 생각함을 감상(感想), 이치에 어긋나는 헛된 생각을 망상(妄想), 묵묵히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묵상(默想), 고요한 가운데 눈을 감고 깊이 사물을 생각함을 명상(冥想), 사실이라고 가정하여 생각함을 가상(假想), 하나의 관념이 다른 어떤 관념을 불러 일으키는 심리 작용을 연상(聯想), 고요히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함을 명상(瞑想),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함을 회상(回想), 일의 실마리가 될 만한 생각을 착상(着想), 앞으로 올 일을 미루어 생각함을 추상(推想), 쓸데없는 헛된 생각이나 부질없는 생각을 허상(虛想), 사물을 마음에 떠오르게 하여 관찰하는 일을 관상(觀想), 승부가 서로 같음 즉 서로 비김을 상승상부(想勝相負), 턱없이 과장하여 엉뚱하게 생각함을 과대망상(誇大妄想), 일체의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무아의 경지에 이르러 일체의 상념이 없음을 무념무상(無念無想), 아무 말을 아니하여도 넉넉히 생각할 수가 있음을 불언가상(不言可想), 몹시 뒤섞이고 착잡하여 어수선하게 생각함 또는 그 생각을 호사난상(胡思亂想)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