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문학은 착취다..인세든 책값이든 모두 착복이다.
폐교많은 세상에 문학관으로 꾸며 놓으니 좋습니다.
책속의 주인공들이라 더 이뻐 보입니다.
강아지똥 처럼 생겼습니다.
복도 그림전시까지 ...
캐릭터들의 인형...아트상품까지
일생
일본 제국의 도쿄 빈민가에서 태어나 자라다가[4],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경상북도 청송군으로 귀국했다. 조선인연맹[5]에 가입해있던 친인척 둘은 나중에 뒤따라 오기로 했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아 평생 생사를 모르고 살았다고 한다.[6] 귀국 후에도 살림이 무척 어려워서 국민학교도 겨우 졸업했고, 또한 바로 나무 장수, 고구마 장수, 임노동자 등의 궂은 일을 하며 성장했다.
19세 때 그는 폐병에 걸려서 항생제를 보급받기 위해 읍내 보건소를 찾아갔으나 공급이 제대로 되질 않아 허탕치는 날이 많았으며, 같이 폐병을 앓던 고향친구들이 하나둘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의 병세는 점점 심해져서 폐결핵과 늑막염을 거쳐 신장결핵과 방광결핵으로 인하여 온 몸이 망가져버려서 사람 구실을 못 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평생 오줌통을 몸에 차고 살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 부모님마저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집도 없고 기댈 곳도 없어진 그는 1967년 경상북도 안동군(현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 일직교회 부속의 토담집에서 기거하며 종지기를 하게 되었다. 생활은 여전히 조악해서, 여름이면 소나기에 뚫린 창호지 문 구멍 사이로 개구리가 들어와 울고, 겨울이면 생쥐들이 들어와 발가락을 깨물거나 옷속을 비집고 겨드랑이까지 파고들 정도였다고 한다. 처음엔 깜짝 놀라고 귀찮았지만 시간이 점차 흐르고 나중에는 아랫목에 먹을 것을 두고 생쥐들을 기다릴만큼 정이 들었다고 한다.
1969년 단편동화 《강아지똥》을 발표하여 월간 《기독교교육》의 제1회 아동문학상을 받으며 동화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당선되었고, 1975년 제1회 한국아동문학상을 받았다. 1984년부터 교회 뒤편의 빌뱅이언덕 밑에 작은 흙집을 짓고 혼자 살며 꾸준히 창작을 했다.
1981년작 몽실 언니 등의 베스트셀러를 쓰면서 수억원에 이르는 인세를 매년 받았으나, 정작 산골의 흙집에서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고, 옷도 단벌이어서, 이웃 사람들은 그가 굉장히 가난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의 사망 후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과 그가 남긴 재산에 대해 알고서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7] 사실 여기엔 어두운 뒷 이야기가 있다. 출판사에서 지급한 권정생의 인세가 작가에게 전달되지 않고 중간에 사라진 것. 출판사와 권정생 사이에 있던 아무개가 착복한 것이다. 이 일에 대해 아무개는 "권정생은 워낙 순수한 사람이라 돈이 있어도 쓸 줄 몰라 주지 않았다"라고 변명했다고 한다. 금전에 무지한 권정생이 훗날 유언장에 유산에 관한 부분을 남기게 된 사연이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연 선생께서 정말로 모르셨을까?
인세든 책을 판 값이든 베스트셀러이어도
위와같이 일년에 수억원이 들어온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전권이 베스트셀러였습니다.
아직도 책을 팔아먹으려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고
팔아먹었던 사람에게 돈을 뿌리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위와같이 착복을 일삼으며 도둑질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대한민국 문학이 이러합니다.
열심 해도 이러한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작가들 중에 이러한 경우는 무명작가들에게 더욱더 심한데
그냥 원고료를 안주려는 심보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관행처럼 구는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예술분야입니다.
그림도 똑같습니다. 미술세계도 요즘 실감나게 느끼고 있습니다.
문학 미술 각분야가 이러한듯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