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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론/하얀 바탕
하얀 바탕 / 박장원
삼라만상이 소재이다. 작가의 뜨거운 체온이 전해지면 소재는 제재로 생명력을 얻게 된다. 바로 그 제재가 작가의 손길을 통해 생생해지면 주제가 되는 것이다. 소재를 통한 주제의 접근과 주제 다음의 소재 모색은 마치 계란이냐 달걀이냐의 차이이며, 선택된 소재인 제재가 어떻게 놓이고 어떤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가에 따라 주제의 강도가 결정되는 것이니, 중심제재의 적절한 운용과 효과적인 포석은 바로 매끄러운 구성과도 직결된다.
소재를 향한 집념엔 인생이 걸려 있다. 강태공이 곧은 낚시를 드리울 땐 아무도 느긋한 그의 기다림을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문왕文王이 나타나면서 실마리가 풀리게 되었다. 강태공에겐 문왕만이 최상의 중심제재이자 주제였다. 소재파악을 마친 후, 그 소재가 자기의 제재로 낚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터이다. 금 덩어리가 지천으로 널려 있다면 이미 금이 아니듯, 소재에서 참신한 제재를 얻어내는 작업도 일생에 그리 빈번하지는 않을 것이다.
소재와의 만남에서 수필은 힘차다.
“자하가 묻는다. 활짝 웃음에 보조개가 어여쁘고 아름다운 눈에 눈동자는 선명한데, 흰 비단으로 채색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공자가 이르길,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비단을 마련한 다음에 하는 것이다.(子夏問曰, 巧笑?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 何謂也. 子曰, 繪事後素.)” -《논어論語》팔일八佾 〉중에서
바탕을 제자는 간과하였지만, 스승은 중요시하였다.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비단을 마련한 다음(繪事後素)’이란 말에는 유‧무형을 망라한 소재의 탐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암시가 깔려 있고, 무늬 없는 흰 바탕의 ‘소(素)’에는 주관과 객관이 하나 된 공시적 파노라마의 여백이 확보되어야 하는 것이다.
공자는 ‘일이관지(一以貫之)’를 노자는 ‘성인포일(聖人抱一’)을 석가는 ‘만법귀일(萬法歸一’)을 종지로 삼았으니, 하나에서 시작되고 다시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우주의 힘이고 이치이며, 모든 것을 하나로 하나를 다시 모든 것에 투영하는 수렴과 발산의 탄력적인 심상(心象)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은 것이다. 때문에 안중에는 시시콜콜한 일이 없고 흉중에는 자디잔 계책이 없으며 수중에는 자잘한 필법이 없으며, 작은 주제로 큰 논리를 제시하는 것을 대가의 영역이라고 청나라 김성탄(金聖嘆)은 말하였다.
현대수필이 광역화를 동력으로 고정적인 틀을 깨고 새로운 실험정신을 요구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면 이미 존재하는 하나로 꿰어야 하는 끈의 탄성과 변용의 귀납일 뿐이다. 에세이를 중수필과 경수필로 나누기도 하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수필의 바다에서 지류와 본류는 의미가 없으며, 잡문은 허다하나 소(素)가 귀한 것은 현대수필의 광막한 시공에서 지남(指南)을 정하지 못하고 표류하기 때문이다.
소재는 화두의 풀림이다. 일상의 잡박함을 말꼬리 이어가며 성 쌓고 남은 돌처럼 그저 벌여놓는다고 수필이 되지는 않는다. 소재가 성공하면 이미 절반이며, 작가는 구도자의 모습으로 최고의 선(善)인 존재를 단순 명료하게 드러낸다.
그러기에 삶의 공간을 깨끗이 비우고 가득 채우는 유연한 소재의식은 도가의 소요유(逍遙遊)처럼 자적하다. 하나에서 시작되고 다시 하나로 돌아가는 우주의 힘을 하얀 바탕으로 삼는다면 수필의 화폭에 풀벌레에서 하늘까지도 담을 수 있는 것이다.
소재가 문학적 생명을 획득하는 것은 수필가와의 진정한 만남이다. 만남이 있어야 사랑도 무르익듯이, 애정 어린 관심과 시선에서 발아되는 문학이 특히 수필이다. 모든 것은 가까이 있지만 마음이 없으면 멀어지는 법이다. 사람도 사물도 그렇다. 우연보다는 필연에 가까운 것이 자연이기에 작가의 시선은 여기에 머물러야 한다. 특히 수필가는 사랑의 마음으로 듣고 또 볼 때 수필문학은 시작되는 것이다.
예술이 생활이고 생활이 예술이지만, 삼라만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형상화시키는 작업이 바로 예술가의 몫이다. 공감하고 있는 것을 강요하면 억지지만, 관심밖에 있던 것을 공감시키는 것이 예술행위이며 생명의 창조이니, 예술가의 실험적인 삶은 여기에 근거해야 한다.
시를 몰라도 또는 알아도 자연은 누구에게나 친숙하지만, 작가의 시선은 언제나 소재(素材)의 소재파악(所在把握)에 형형한 빛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이 형안(炯眼)은 작가의 역량에서 비롯된다. 독서, 관찰, 체험 그리고 사고를 통한 작가의 수업정년은 없다. 직‧간접적인 뼈를 깎는 접촉에서 소재는 불현듯 노두(露頭)를 드러낸다. 자연에서 숨죽이고 있던 소재가 작가의 눈에 포착될 때, 금맥을 찾은 갱부의 눈빛처럼 형용할 수 없는 감동과 충격이 없다면 그것은 맥석(脈石)에 불과하다. 명검이 칼집에서 서서히 뽑혀 질 때 발하는 푸른 검광 같은 소재는 작가에겐 천재일우의 영감이다.
화가는 화구를, 연주가는 악기를 항시 챙겨야 하지만, 작가는 항상 자신을 뭔가에 투영시켜야 한다. 투사의 조건은 과학적이면서도 논리적이어야 하고 사물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다가서야만 무형의 소재는 유형의 제재로 감지되고, 그 제재가 혹독한 세련의 단계를 거치면 작가에겐 서 말의 구슬이 되는 것이다. 보석은 갈고 닦을수록 영롱해지니, 구슬 아니면 돌멩이를 택할 것인가는 작가의 재량도 되지만 남다른 역량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은 소재가 제재에서, 다시 주제로 우뚝 서는 일련의 창작과정이 극적으로 마감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삼 획은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이며, 그 가운데를 이은 것은 그 도를 통한 것이다.(三劃者,天地與人也, 而連其中者, 通其道也.)” -동중서董仲舒의《춘추번로春秋繁露》에서의
‘왕(王)’의 해석은 흥미 있다. 권위의 대명사인 제왕을 기하학적으로 풀이하여 한자말의 깊이를 배가시켰다. 하늘과 땅과 사람, 바로 천지인(天地人)의 합일은 중국 지식인의 화제였다. 하지만 불행한 군주는 분리시켰고 백성은 오랜 세월 허리를 펴지 못하였고, 그것을 당연시하는 역사도 있었다. 지배자의 바탕이 불순하면 족쇄이다.
때문에 삼 획의 가운데를 잇는 바탕은 사랑이어야 한다. 아마 우주의 시작도 하나였으니 바탕도 하나일 것이다. 작가는 창조자이다. 창조는 빛이고, 빛은 사랑이다. 작가의 본질론이 여기에 근거해야 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소재도 마찬가지다. 여하히 소재론을 추구하였지만, 설만 분분하다. 삼라만상이 소재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지만, 그것에 대한 운용과 접근이 부족하다. 어둠에 묻힌 우주는 작가의 선택에서야 비로소 밝아진다. 이것이 문학의 출발이며 정점이다. 소재의 파악은 수필의 열쇠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지금도 우리 곁을 무심히 지나치는 형상과 사물들이 있다. 그러한 이미지들은 심상에 맺혀지고, 또 다른 모습으로의 분출을 준비하고 있다. 이러한 것을 미적 형상화로 우뚝 창조해 내는 것이 문학의 즐거움이다.
수필의 소재는 항상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소재에 대한 관심은 작가의 폭넓은 운신이며 뜨거운 만남이다. 유능한 작가에게 우주의 삼렬한 소재는 경외와 따스한 시선을 보내는 하늘의 별과 같은 존재이다. 어느 날, 그 별들이 뿜어내는 화려한 유성우가 작가의 상념으로 쏟아지면 그제야 한 작품의 주제로 승화되어 불멸의 작품으로 빛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