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현파조 김관선생의 직계가계(1∼4세)대동보 기록<요약>
문정공 김관선생의 직계가계(1∼4세)에 대해서는 편저 김종성 “김해와 문정공 김관선생 적록” 에 의하면 먼저 표 6-4와 같다.
문정공 김관선생 직계가계도
표 6-4.
표 6-4와 같이 삼현파조 문정공 김관선생의 조부 김상주(金相宙)선생은 자, 대원(大院), 호는 죽봉(竹峯)이다. 그는 1275년 고려 충렬왕 때 사각(仕閣) 벼슬에 있으면서 왕명을 받아 흰옷 입는 것을 금하였고, 1278년에는 원나라의 의관(衣冠)으로 개체하게 하였다. 부인은 나주나씨(羅氏)이며, 슬하에 방직(邦直)과 용직(龍直) 두 아드님을 두었고, 선영은 송악(松岳)이다.
선생의 부친 김용직(金龍直)선생은 초휘는 용각(龍角)이고, 관직은 고려 문화성 종4품관인 사인(舍人)에 올랐다. 부인은 함양 박씨로, 함양부원군 충의의 따님이며, 문정공 김관선생은 김용직선생의 장남이다. 삼현파조 문정공(文貞公)은 표 6-5와 같이 호(號)는 정성(靖醒)이고, 고려(高麗) 판도판서(版圖版書) 국자사이다.
김관선생에 관한 대동보 기록
표 6-5.
선생은 일찍이 왕에게 간(諫)하여 불교(佛敎)를 배제하려 하다가 이를 듣지 않아 무릉산중으로 퇴은(退隱)하여, 왕이 불러도 가지 않아 왕이 훗날 그 까닭을 깨달고 그에게 병풍을 하사하였다 하여 그가 태어난 마을을 지금까지도 어병마을 이라 칭하여지고 있다
또한 선생은 병오년(1306)에 안회간유(安晦幹裕)의 죽음에 문상을 하고, 돌아오면서 충선왕이 원나라에 유피(留被)됨을 듣고, 즉시 돌아오시게 하여 모셔오고, 갑자년에 도성이 불타는 것을 보고 불속으로 들어가 왕을 구하려 하자 하늘에서 큰비를 내려주어 불이 꺼졌다는 일화가 있다. 또 별읍학교(別邑學校)를 세워 유학(儒學)를 진흥코자 하였으나, 왕이 이를 들어주지 않음에 따라 실망한 나머지 저복산(儲福山)으로 퇴거하고, 원나라에 들어가 왕의 복위를 청하였다.
계미년(1343)에 충혜왕이 원에 억류된 후 왕을 악양(岳陽)까지 배종하여 국상을 당하자 원에게 왕을 대신하여 머물겠다고 청하자, 그 충성으로 인해 방환(放還)되었다. 을유년(1345) 2월 19일에 세상을 뜨시니, 향년 96세이다. 훈노(勳勞)로 조정에서 이인복(李人復)을 명하여 저복(儲福)산에 예장(禮葬)하게 하고, 와판(瓦板)을 펴 배토성분(培土成墳)하게 하였다.
선영은 경남 창원시 대산면 유등리(柳等里) 신좌(辛坐)이나, 이후 오랫동안 실전(失傳)되어 오던 중 지석(誌石)을 발견하여 그곳에 다시 봉분을 고쳐 매년 음력(陰曆) 10월 초 3일에 봉향하고 있다(판도판서문정공정성김선생신도비).
문정공의 2세 김문숙(金文淑)은 표 6-6과 같이 문정공(文貞公) 김관(金管)의 아들로, 자는 경선(景善) 또는 아숙(雅淑)이라 하였고, 호는 명회재(明晦齋)라 불렀다 .선생은 고려 충렬왕(忠烈王) 19년, 1293년에 태어나 어머니 나주임씨(羅州林氏)의 철저한 훈육을 받았으며, 일찍이 안회헌(安晦軒)선생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여 경덕재생(經德齋生)이 되었다.
김문숙선생에 관한 대동보 기록
표 6-6.
선생은 또 충선왕 때 명경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었다가, 한림원으로 옮겨서 칠재[(七齋) 고려 때 국학(國學)에 설치한 주역(周易), 서경(書經), 시전(詩傳), 주례(周禮), 예기(禮記), 춘추(春秋), 병학(兵學) 등 7개 과목을 일컫는다.]에서 경서(經書)를 강독하니 재생(齋生)과 사우(士友)들이 즐겨 따랐다. 당시 선생은 역동 우탁, 상당군 백이정, 동암 이진, 매운당 이조년 등과 경전을 공부하면서 도의로 교유(交遊)하였고, 명도[(明道) 북송(北宋)의 대유(大儒) 정호(程顥))선생의 역학(易學)을 칭한다.]와 주자(朱子)의 신서(新書)를 깊이 연구하여 그 이치에 통달하여 당시 제현들이 선생의 호를 명회(明晦)로 칭하였다.
부친 문정공 김관선생이 왕을 모시고, 여러 차례 원나라에 다녀왔는데, 그 때에는 배행(陪行)하여 무사히 귀국하였다. 문정공 김관선생은 충혜왕(忠惠王)이 악양(岳陽)에서 승하하자 이를 애통해하고 연로한 나머지 1345년에 별세하시니, 선생(문숙공)은 피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다가 상복을 벋은 지 두어 달 만인 1348년 4월 10일 향년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에 대하여 김해김씨(金海金氏) 대동보(大同譜)에는 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선생의 자는 경선(景善)이고, 호는 명회재(明晦齋)이다. 충렬왕 때인 서기 1293년에 출생하였고,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고향에서 천거(薦擧)하여 칠재 중에 예기(禮記)를 전공하는 성균관 복은재생(服膺齋生)과 경덕재생(經德齋生)에 제수되었으나 선생은 관직에 나가기 않았고, 충목왕 4년, 1348년 4월 10일에 홀연히 별세하였다. 선영은 저복산이다.’ 하였다.
선생의 3세 항(伉)은 표 6-7과 같이 파조 문정공(文貞公) 김관(金管)의 손자이며, 2세 명회재(明晦齋) 김문숙(金文淑)의 아들이다. 자는 이정(而正)이고 호는 둔옹(遯翁)이다.
김항선생에 관한 대동보 기록
표 6-7.
선생은 충숙왕(忠肅王) 13년, 1326년 9월 28일에 태어나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등제(登第)하여 도제고판관(都祭庫判官: 종5품)을 지냈으며, 신병으로 귀향(歸鄕)하였다가 공민왕(恭愍王) 때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정4품) 유학제거(儒學提擧)를 제수(除授)하니 왕에게 글을 올려 아뢰기를, “전하는 성학(聖學)을 숭상하고, 선불(仙佛)을 배척하면 국법이 잡히고, 인륜도 바르게 될 것이니, 부역(負役)을 줄이고 세금을 적게 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유연(遊宴)을 금하고 사치를 끊어 몸소 시무(時務)를 살피면 나라가 저절로 부하고 병사도 저절로 강해질 것이니 선악과 안위를 잘 분간하소서!” 하니, 왕이 그의 진언을 받아들여 후한 상을 내렸다고 한다 [이는 파조 문정공 김관선생의 불교관과 일맥상통하는 주청으로 보여 지고 있다.]
스승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선생이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정3품)이 되어 경학(經學), 경서(經書) 등 경술(經術)에 관한 학문이 높은 선비 김구용(金九容), 정몽주(鄭夢周) 등을 천거해 학관(學官)을 삼아 명륜당(明倫堂)에서 학문을 강론하였는데, 이때 선생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선생과 도교(道交)하게 되었고, 신돈(辛旽)의 횡포를 저지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왕에게 간언(諫言)하다가 뜻을 거슬러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여 소미동(小微洞)에 은거(隱居)하였으며, 이후 벼슬을 사양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해김씨(金海金氏) 대동보(大同譜)에는 선생에 대해,
‘자는 이정(而正)이고 호는 둔옹(遯翁)이다.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하여 벼슬은 도제고판관(都制鋯判官)을 지냈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선생과 승유(勝遊)하면서 별산군(鱉山郡, 청도)을 지나다가 소미동(小微洞) 삼성산(三省山)의 청수(淸遂)함을 보고 집 한 채를 지어 아들 서(湑)에게 먼저 이주하도록 명하고, 우왕(禑王) 8년 서기 1382년에 전 가족이 이거하였고, 그해 10월 10일에 별세하였다. 묘는 유명(遺命)에 의하여 김해부(金海府) 저복산 선영하(先塋下)에 반장(返葬)하였다.’고 하였다 [김해김씨(金海金氏) 서원대동세보(璿源大同世譜), 김해김씨(金海金氏) 삼현파(三賢派) 계보해설(系譜解說), 가락총람(駕洛總攬). ]
.
선생의 4세 현감공 김서(金湑)선생은 표 6-8과 같이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신으로 원나라에 다녀와서 의흥현감을 지냈던 청백리로 알려지고 있다. 선생은 국운이 날로 기울어짐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김서선생에 관한 대동보 기록
표 6-8.
태종 3년, 1394년 4월, 황지모반(潢池謀叛)을 해산시킨 공으로 태종이 즉위하여 추성좌리공신으로 책훈하고, 분릉군으로 봉해졌으나, 공이 사양한 후 경북 청도로 옮겨 덕업을 힘쓰다 돌아가시니 풍각현(현 청도군 풍각면 명대리) 경계 나복산 인좌언덕에 장사(葬事) 하였다.
5세 절효선생의 휘는 극일(克一)이요, 자는 용협(用協)이고, 호는 모암(慕庵), 사시호는 절효(節孝)이며, 의홍현감 김서(金湑)선생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