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국제여객터미널을 출발한 씨플라워2 호는 영도다리와 오륙도를 뒤로하고 망망대해를 항해한 지 2시간 40분 만에 이즈하라
항에 도착. 지문 채취와 얼굴 사진 촬영 등 일본 내 입국 수속 절차가 예전보다 까다로워졌지만 한국말과 친절함에 지루하지 않게
입국수속 완료.
대 마 도
소속
: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 쓰시마 시.
면적
:
708㎢ (울릉도의 약 10배, 제주도의 약40%, 섬 전체 89%가 산림지대)
거리
:
대마도에서 한국까지 49.5㎞ (일본 후쿠오카까지 138㎞)
인구
:
약 4만 2천(2004)
중심도시는 이즈하라[嚴原]이며 이곳에 전체 인구의 절반이 거주하고 있다. 중앙부의 아소만[淺茅灣]과 인공적으로 굴착된 만제키세토[萬關瀨戶:瀨戶는 水路]에 의해 상 ·하 두 섬으로 나뉜다. 섬 전체가 해발고도 400m 내외의 산지이고, 산지의 계곡들은 곡벽이 험준하다. 예로부터 한국과 대륙 사이의 중계지로서의 위치
를 차지하여 대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동서 폭은 18㎞, 남북의 길이 82㎞이며 본 섬 외에 107개의 섬이 있고 그 중 5개 섬이 유인도이다. 본 섬은 두 개의 섬으로 나눠져 있고, 이를 만제끼 다리가 연결하고 있다. 행정을 살펴보면 1市 6町 (쓰시마市, 이즈하라마치, 미츠시마마치, 토요타마마치, 미네마치, 카미아가타마치, 카미쓰시마마치)
이다.
특히 부산에서 약 50km의 거리에 있어 한국과 관계가 깊었다. 고려 말부터 조공을 바치고 쌀 ·콩 등을 답례로 받는 관계에 있었
다. 그러나 왜구가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출몰하자, 조선시대에 들어와 회유책 ·귀화정책 등을 쓰다가 세종 때에는 이종무 장군이
원정(遠征)에 나선 바 있다. 1274년 1281년 두 차례 몽고군이 고려군과 함께 상륙한 기록이 있다.
뒤에 쓰시마도주(島主) 소[宗]씨의 간청으로 조선이 삼포(부산포 ·염포 ·제포)를 개항하자, 쓰시마는 에도[江戶]시대 말기까지
대(對)조선무역을 독점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 수군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으며 러일전쟁시에는 아소만의 지형을 이용한
쓰시마해전으로 대승을 거둬 러일전쟁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
농경지는 총면적의 4%에 불과하고 계단식 밭이 많으며 최근까지 화전 경작을 했다. 산촌에서는 숯 구이와 표고버섯 재배가 주
업이었으나 조림이 이루어졌다. 오징어 ·도미잡이와 전복 ·소라 ·성게 ·천연김 채취를 하고, 아소만에서는 진주조개 양식이 성하
다.
중심도시 이즈하라는 13세기 중엽 이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이르기까지 쓰시마를 지배해온 소씨[宗氏] 일족의 거성(居
城)이 있던 곳으로 성터와 그 시주사 등이 남아 있다.
현재 육상, 해상, 항공 자위대가 주둔하고 있는 일본 최 서북단 군사 요충지이자 이끼섬과 더불어 일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많은 일본 관광객이 왕래하고 있으나 젊은층은 본토로 빠져나가고 노령화가 가속화 되고 있다.
인공림의 대부분은 쓰기(삼백나무)와 히노끼(측백나무)이며 이를 경제가치로 환산하면 일본 국민이 3년 동안 먹을 식량과 교환
이 가능할 정도이다.
=이즈하라항에서 대마도 시내들어가는 입구-
오후 1시에 대마도에 도착하기 때문에 대마도 오착전에 배안에서 도시락을 드시는 손님들이 많았다.
하지만, 우리일행은 대마도에 도착해서 도시락 를 +회 에 점심을 식당에 예약을 했다. 많은 식사 시긱이 필요. 미니버스로
식당으로 이동. 5명과 스텝3명 8명.
대마도의 생선회는 한국처럼 수족관에서 바로 잡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장만 해둔 것을 마트에서 판매를 하고 있다. 그러
나 미리 예약을 하면 바로 잡은 싱싱한 생선회를 맛 볼 수 잇다. 가격도 한국과 비슷하니 아주 저렴하다고 할 수 있다. 주로 참돔,
방어, 오징어 등이 유명하다. 특히 전복은 한국보다 저렴하고 맛이 좋아 한국관 광객들의 귀국 선물로도 아주 인기가 높다. (자연산 1kg ¥8,000 선)
***가볼만한곳***
⊙ 덕혜옹주비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왕(황제) 고종(高宗)과 후궁인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종이 회갑연에 얻게된 딸로,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1919년 일제
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약혼하
였다.
그러나 1925년 4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어 일본의 학습원을 마친 뒤, 1930년 봄부터 몽유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친왕(英親王)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으로 진단되었고, 이듬해
병세는 좋아졌다.
1931년 5월 쓰시마섬[對馬島]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강제 결혼해 딸 마사에[正惠]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에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이후 계속 병상생활을 하다가 1953년 다케유키와 이혼하였다. 하나 있는 딸마저도 결혼에 실패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비극을 겪었고, 1962년 1월 26일 귀국할 때까지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서 비극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
다.
한국에서의 생활도 순탄하지 않아 귀국 20년 만인 1982년이 되어서야 호적이 만들어졌고,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에 묻혔다.
★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덕혜옹주
덕혜옹주의 남편인 소 다케유키[宗武志]는 한국에 알려진 것처럼 난폭하고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 일본 동경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수재로서 대마고등학교 교가를 작사 작곡하고 대마도지에 시를 기고하였고 유화그림(대마역사자료관에 전시 중)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등 시서화에 두루 재질을 보인 사람이었다.
덕혜옹주의 비극에 대한 소문은 옹주가 종무지백작과 결혼하기 직전부터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그 진원지는 구 조선왕실의 상궁나인들이라 할 수 있다. 금지옥엽 조선옹주가 일본의 섬 백작과 결혼한다는 소문이 나자 조선왕실은 발칵 뒤집혔고 1930년 이미 4년 전에 이복 오빠인 순종황제가 돌아가시고 나선 일본정부에 정식으로 항의할 사람마저 없었던 때에 이루어진 이 결혼식에서 상궁나인들은 상당한 치욕과 옹주를 동정하는 마음에 섬 백작에 관한 진실을 곡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백작이 애꾸에 곱추에 난폭하고 배운 것 없는 농장 주인인데 일본정부가 옹주와 결혼시키기 위해 편법으로 백작으로 만든 거라는 소문이 떠오르기 시작하고, 아무도 정정을 해주지 않자 조선 내에서는 사실로 굳어져 버렸다.
하지만, 사실 종무지 백작은 애꾸도 곱추도 난폭하지도 배운 것 없는 농장주도 아니었다. 종가는 대대로 대마도를 통치한 집안으로 종무지는 그 후손으로 대마도를 상속받았지만 명치유신으로 폐번치현(번이 없어지고
현으로 바뀌면서 번주의 자치가 사라지고 천황을 중심으로한 중앙집권제가 시작됨)이 되자 황실에서 도주의 작위를 폐하고 백작의 작위를 하사한 것이다.
종무지의 후원자는 다이쇼천황의 부인인 사다코 황후로 종무지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자 조선왕가의 딸로 지참금이 상당했던 덕혜옹주를 맺어주어 그 재정난을 덜어주려고 하였다. 사다코의 중신으로 맺어진 두사람은 다분히 정략적인 결혼이었지만, 초반에는 행복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황실로부터 백작위를 하사받은 종무지는 대학교수로 훗날 태어난 딸 마사에도 상당히 사랑하여 손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다고 한다.
훤칠한 키에 전형적인 일본의 고운 마스크를 지닌 그는 덕혜옹주와 결혼 후 대마도가 아닌 도쿄에 저택을 두고 그곳에서 생활을 했다. 결혼 2년 뒤 둘은 딸을 낳았지만, 딸 출산후 덕혜옹주가 다시 정신병이 재발하게되었다. 덕혜옹주의 정신병은 꽤 오래된 것으로 아버지의 죽음 후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와 일본인 귀족학교에서 이지매를 당하면서 향수병과 함께 커졌고, 어머니인 양귀인의 죽음 이후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당시 정신병은 신체 장애와 함께 상당히 부끄러운 질병 가운데 하나였고, 특히 귀족인 덕혜옹주의 정신병은 당시에는 상당한 가쉽 거리였었다.
종무지는 이를 꺼려해서 덕혜옹주를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할 생각을 못하고 집안에 가둬두는 것으로 대신하였고, 옹주가 자꾸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집밖을 나가려고 하자 발목에 족쇄를 채웠다고도 한다.
태어나자 마자 옹주의 정신병 재발로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옹주의 딸 정혜(일본명 마사에)는 어머니보다는 아버지를 더 사랑했고,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마사에의 죽음에 대해서도 어머니의 결혼생활 못지 않게 말이 많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현해탄 투신자살 설. 해방 후 조선왕족을 감당하지 못한 종가 사람들에 의한 살해설. 마사에는 해방후 20대 초반의 나이에 일본인과 결혼하게 되는 데 연애 결혼이었음에도 이에 적응하지 못하였고 얼마 후 가출을
하게 되었는데 가족들은 그녀를 애타게 찾지만 결국 야산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고 전해진다. 정확한 사인은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다. 덕혜옹주의 병이 점점 심해지자 종무지는 그녀를 병원에 입원 시켰고, 1951년 사다코 황후가 사망하자 이혼하게된다. 그 후 종무지는 일본인 여성과 재혼하지만, 해방 후 1962년에 덕혜옹주가 한국으로 귀국하고 나서는 한번 보고싶다고 찾아 왔던
적도 있었다고 하지만, 옹주의 충격을 염려한 측근에 의해 거부 당했다고한다.
덕혜옹주와 소다케유키는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 소설의 주인공 같은 삶을 살다 간 것이다.
⊙ 한국전망대 쓰시마 내 가장 북쪽의 마을 카미쓰시마 쵸에 위치한 한국 전망대는 한국의 이미지를 담아 만든 팔각정 건축물로 계획 단계부터 완성까지 한국산 재료구입. 전문가 초빙 등 철저히 한국풍을 고집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거제도와 부산시의 윤곽을 육안으로 뚜렷이 볼 수 있어 그야말로 \'국경의 섬\' 임을 실감케 한다. 특히 쯔즈자키 해상공원과 사오자키 공원, 그리고 에보시타케 전망대와 더불어 한국 휴대폰(SK텔레콤)이 터지는 장소라 잘 도착 했노라는 안부 전화를 걸 수 있는 장소이다.
⊙ 박제상 순국비 박제상 순국비는 한국전망대에서 약 30분 거리의 작은 포구에 홀로 서있는, 그야
말로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신라 충신의 기념비라 할 수 있다. 관광 코스와 조금 떨어져 있는 관계로 약간의 소요시간이 필요하나 대마도에 들른
한국인이라면 쵝인현 선생 순국비와 이곳은 꼭 들러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박제상 선생은 신라의 충신으로 파사왕의 5대 손이다. 박제상의 아들은 우리가 잘 알고있는 거문고의 달인 백결 선생인데 백결이란 "현
순백결(懸 百結:가난하여 입은 옷이 갈가리 찢어짐)"의 문자를 빌려 백결선생이라
고 하였다고 한다.
실성왕 원년 신라는 왜국과 강화를 하였는데 왜왕은 내물왕자 미사흔을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실성왕은 일찍이 형
님인 내물왕이 자기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낸 것을 원통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한을 풀려고 왜의 청을 거절하지 않고
미사흔을 왜국으로 보냈다. 실성왕은 또 고구려에서 미사흔의 형 복호를 인질로 보내라고 하자 두말하지 않고 보냈다.
그런 뒤 눌지왕이 즉위했다. 눌지왕이 박제상을 불러 동생을 구해줄 것을 요청하자 흔쾌히 응낙했다. 박제상은 즉시 고구려로 들어가서 고구려왕의 허락을
받고 박제상은 복호와 함께 신라로 귀국하였다. 그러자 눌지왕이 또 부탁했다.
"내가 두 아우를 좌우의 팔과 같이 생각하는 데 지금 다만 한 팔을 얻었으니 이를 어찌하리오."
박제상은 이번에도 기꺼이 응했다.
"신이 비록 재주가 없고 어리석으나 이미 몸을 나라에 맡겼사오니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큰
나라이고 왕도 어진 임금이어서 신의 말이 통했으나 왜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꾀로써 그들을 속여 왕자를 돌아오도록 하겠
나이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신이 왜국으로 가면 곧 신이 나라를 배반하고 간 것처럼 말을 퍼뜨려 그들로 하여금 믿도록 하여 주
십시오."
박제상은 죽기를 맹세하고 아내도 보지않고 떠났다. 그는 율포에서 배를 타고 왜국으로 향하였다. 그 아내가 사실을 알고 급히
포구에 나가 떠나는 배를 바라보고 대성통곡하며 말했다. "잘 다녀오시오" 박제상이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임금의 명을 받고 적국으로 들어가니 그대는 나를 다시 볼 기약을 하지 마오." 박제상은 왜국으로 들어가서 나라를 배반하
고 온 것처럼 말했다. 왜왕은 처음엔 박제상을 의심하였으나 먼저 왜국으로 들어온 백제사람이, 신라가 고구려와 함께 왜를 침범
하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자 왜왕은 군사를 파견하여 국경수비를 강화했다. 이때 마침 고구려가 침입하여 왜의 수
비병을 사로잡아 죽이니 왜왕은 백제사람의 말을 사실로 믿었다. 또한 신라왕이 미사흔과 박제상의 처자를 가뒀다는 소문도 들려 왜왕은 박제상이 신라를 반역하고 온 것이라 믿었다.
왜왕은 이에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습격하려고 박제상과 미사흔을 장군으로 삼고 그들로 하여금 인도하게 하여 바다 가운데 섬
에 이르렀다. 이 섬을 일본서기에서 죽도(竹島)라고표기하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對馬島 이다. 이때 왜장들은 비밀리에 다음과
같이 모의했다. "신라를 멸망시킨 뒤에 박제상과 미사흔의 처자를 몽땅 우리나라로 데려오자." 박제상은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미사흔과 배를
타고 놀며 고기와 오리를 잡는 척 했다. 왜인들이 이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왜인들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박제상은 미사
흔에게 신라로 돌아가라고 했다. 미사흔이 함께 가자고 했으나 박제상은 두사람이 함께 탈출하면 실패할 염려가 있다고 하며 미
사흔을 재촉했다. 미사흔은 박제상의 목을 끌어안고 울면 서 이별을 하고 귀국하였다.
박제상은 다음날 시간을 벌기 위해 아침에 늦게 일어났다. 그러자 왜인들이 늦게 일어난 이유를 물었다.. 박제상은 어제 뱃놀이
를 너무해서 피곤해서였다고 둘러댔다. 얼마 후 왜인들이 미사흔의 탈출을 알았다. 그들은 박제상을 포박하여 미사흔의 배를 추적했다. 그러나 안개가 짙어서 놓치고 말
았다. 미사흔을 놓친 왜인들은 박제상을 왜왕에게 보냈다. 왜왕은 그의 충성심에 탄복하여 회유하려 하였으나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의 신하는 될 수 없고, 신라왕의 회초리를 맞을지언정 왜왕의 칭찬은 들을수 없다"고 하여 왜왕을
분노케 하였다. 왜왕은 박제상의 발바닥을 벗겨 불타는 대나무 위를 걷게 하였으며 그것도 모자라서 나무에 불을 질러 온몸을 태운 후 목을 베어
죽였다고 전해진다. 눌지왕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박제상에게 대아찬의 벼슬을 추증하고 박제상의 둘째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은혜를 갚
게 했다. 한편 박제상의 부인은 딸들을 데리고 이곳 치술령에 올라 일본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는데 , 그 몸은 돌로 변해 망부석이
되고 ,영혼은 새가되어 날아가 은을암에 숨었다고 전한다. 그 후 사람들은 박제상의 부인을 치술신모라 하고 사당을 세워 제사 지냈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 사당자리에 치산서원이 세
워졌다고 한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에 가면 박제상의 사당이 있다.
⊙ 수선사와 최익현 선생 순국비 대마도에 들러 반드시 찾아야 할 곳으로 최익현선생 순국비가 있다. 이즈하라 시내에 위치하여 찾아가기도 쉬우며 특히 순국비가 위치하고 있는 수선사는 백제의 비구니인 법묘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최익현 선생1833 (순조 33)∼1906 (광무 10) 본관 경주(慶州). 자 찬겸(贊謙). 호 면암(勉庵). 경기도 포천(抱川)에서 출생하였다. 김기현(金琦鉉)·이항로(李恒老) 등의 문인(門人).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수봉관·지방관·언관 등을 역임하며 강직성을 드러내 불의·부정을 척결하여, 관명을 날리고, 1868년 경복궁 중건의 중지, 당백전(當百錢)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873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기용되자 명성황후(明成皇后) 측근 등 반(反)흥선 세력과 제휴, 서원(書院) 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하고, 호조참판으로 승진되자 다시 대원군의 실정 사례를 낱낱이 열거, 왕의 친정(親政), 대원군의 퇴출을 노골적으로 주장함으로써,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으나, 군부(君父)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형식상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875년에 풀려났다.
이듬해 명성황후 척족정권이 일본과의 통상을 논의하자 5조(條)로 된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려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다가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되었으며 1879년 석방되었다. 1895년에는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이를 반대하다 투옥되었다. 1898년(광무 2)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이 되고 뒤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의정부 찬정(贊政)·경기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진력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상경, 왕의 자문에 응하였고 일본으로부터의 차관(借
款) 금지, 외국에 대한 의부심(倚附心) 금지 등을 상소하여 친일 매국도들의 처단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두 차례나 일본 헌병들에
의해 향리로 압송 당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
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였다. 74세의 고
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
여 싸웠으나 패전, 체포되어 쓰시마섬[對馬島]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敵)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 단식을 계속하다가 유소(遺疏)를 구술(口述), 임병찬에게 초(抄)
하여 올리게 한 뒤 굶어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문집에 <면암집(勉庵集)>(합 48권)이 있다.
⊙ 서산사와 현소 석상, 김성일 선생 시비 서산사는 조선통신사가 대마도를 들렀을 때 유하던 장소로서 지금도 그것이 인연
이 되어 특이하게도 유스호스텔을 운영하고 있다. 대마도 유일의 유스호스텔을 사찰이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서산사를 찾아가면 3군데의 볼거리가 있는데 사진에 있는 이태안의 건축물과
김성일 선생의 시비(詩碑),그리고 현소스님의 석상이다.
● 이태안(1611 ~ ) 현재의 건축물은 화재로 손실 된 것을 복구한것이나 입구부분의 구조물은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조선통신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옛 대조선 외교기관이라 할 수 있다.
● 학봉 김성일 선생 시비 (鶴奉 金誠一 先生 詩碑) 김성일 선생 1538(중증 33)∼1593 (선조 26) 본관은 의성이며 영남의 대 유학자라
일컬어진다.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이다. 조선 선조 대왕이 왜국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황윤길과 함께 통신사로 파견하
였다. 돌아와 조정에 보고하기를 필히 왜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는 황윤길의 의견과 반대
의견을 보고하여 당시 동인과 서인의 세력 갈등의 상황에서 우위였던 동인 세력인
김성일의 의견이 채택되었다. 같은 동인이었던 유성룡 선생과의 교분이 깊어 임진
왜란이 발발하여 선조대왕의 처벌의지에도 유성룡 선생이 적극 변호하였다 전해
진다. 임진왜란 당시 초유사로 종군하다 병사하셨다. 서산사 뒤 산 기슭에 원래의 시비
가 현소 스님의 부도탑과 함께 나란히 서 있으며 경내에 있는 시비는 의성 김씨 문
중에서 설립하였다.
● 현소 스님 석탑 현소 스님은 하카다(博多) 세이후쿠사(聖福寺)에서 승려생활을 시작하였다.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부름을 받고 그의 수하 승려가 되어 1588년(선조21년)부터 조선에 드나들며 자국의 내부사정을
설명하고, 일본과 수호관계를 맺고 통신사를 파견하라고 요청하였다. 1590년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許筬)등의 통신사 일행이 풍신수길의 저의를 살피기 위하여 일본으로 갈 때 동행
했으며 , 이듬해 다시 입국하여 조선의 국정을 살피고 토요토미의 명나라 침공을 위한 교섭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고 결국 1592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가 이끄는
선봉군에 국사(國使)와 역관 자격으로 종군하였다. 이후 임진강을 사이에두고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과 대치할 때 고니시(소서행장)의 제의로 이루어진 ,중추부 동지사(中樞府同
知事) 이덕형 등과 강화회담에 <야나가와 초신>과 함께 일본의 전시외교 활동에 종사하였다. 서산사 뒤 산기슭에 스님의 부도탑이 안치되어 있고 김성일 선생의 시비도 나란히 서있다.
⊙ 대마역사 민속 자료관 조선통신사 행렬도, 초량 왜관도 등 다양한 유물과 쓰시마 야마네꼬(산고양이), 쓰시마 사슴, 물수리 등 천연기념물이 보관되어 있다. 또한 대마도의 포경어업(고래잡이)의 기록이 고스란히 그림으로 제작되어 전시되고 있어 옛 대마도인들의 생활상을 엿 볼수 있다.
민속자료관 일대에는 "조선통신사비", "고려문", "성신지교린비" 등이 있다.
● 조선통신사 비 1697~1811(210년)동안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 통신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두었다. 대마도에는 이곳 외에 수많은 조선통신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통신사 일행은 300~500명 정도의 인원이었으며 조선의 앞선 문화로 인해 일본인들에겐 하나의 "문화적 충격" 을 가져다 주었고 당시 통신사 일행을 구경하기 위한 인파를 "누에"와 비교할 정도이니 그 광경을 짐작할만하다.
1811년 일본의 역지빙례(易地聘禮)- 외국의 사신은 본국의 중심부로 들이지 않고 그 나라와의 접경지역에서 예를 다함- 정책에 의하여 12차 통신사 일행은 대마도에서 머물다 귀국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통신사의 왕래는 끊기고 말았다. 통신사는 원래 막부 장군의 장군직 계승 등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의 임무였으나 차츰 국서교환 등의 임무가 주어지게 되었다.
● 고려문 (高麗門) 화재로 소실 된 것을 재건축 하였다. 조선통신사를 성대하게 대접하기 위해서 만든 것 이라고 한다.
●성신지교린비 (誠信之交隣) 아메노모리호슈(1668-1755) 선생이 주창한 "성신지교린"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교역은 성실과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아메노모리호슈 선생은 1689년 쓰시마번에 임관하여 조선과 의 외교를 담당하였고 동문인 아라이 하쿠세키가 도쿠가와 장군을 일본의 국왕으로 표현한 것을 비난한 왕호사건으로 유명하다. 특히 부산 왜관에 와서 3년간 조선어를 공부하고 대마도로 돌아가 1727년 3년 과정의 "조선어학교"를 개소할 정도로 조선과 유학을 숭배하였으며 그로 인해 일본 최초로 한글 교습소가 대마도에서 생겨나기도 하였다.
⊙ 에보시타케 전망대
상대마 일대 관광의 일미
아소 만을 360도로 둘러볼 수 있는 유일한 전망대이며 깎아지른 듯한 산과 푸른 바다가 절묘하게 펼쳐진 익곡의 조화는 그야말로 최고의 비경이다. 이곳에서 운이 좋으면 한국 휴대폰이 터지기도 하는데 차에서 내려 60M 정도를 걸어 올라가면 된다.
⊙ 미네 역사 박물관 미네 쵸에는 약 3천년 전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유적 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으며 그 시대의 문화유산들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를 수집하고 미네 쵸 만의 향토자료를 보존한 미네역사자료관에서는 대마도 사
람들의 생활상을 느낄 수 있다. 또한 한국으로부터의 문화 전래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고 흡사 우리나라의 박물관에 온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하는 곳이다.
⊙ 와타츠미 신사(和都多美神社) 토요타마 쵸의 상징인 이 신사는 히코호호 데미노미코토와 토요타마 히메를 제사지내는 해궁으로 바다신을 모신 신사로는 가장 오래된 신사이며 가야의 김수로왕의 자손이 대마도로 건너와 세웠다 는 설과 장보고 장군의 소가(小家)였다는 설 등이 전해지고 있다. 본전 정면의 바다속에 서 있는 토리이(신사 문)는 만조시 2m정도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파도가 잔잔한 아소만과 어우러져 신화의 세계를 연상케한다. 신사 뒤로 돌아가면 토요타마히메(豊玉姬)의 석관묘가 외롭게 서 있고 주위엔 울창한 숲과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있다. 이곳의 지명은 토요타마쵸라 불리워지는데 바로 토요타마히메의 이름에서 따온것이라한다. 대마도에서 아주 귀한 수백년 묵은 海松이 신전 뜰에 심어져있다.
⊙ 만제키 바시(萬關橋) 이 다리는 일본이 자랑하는 러일전쟁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던 "쓰시마 해전"의 대승을 가져다
준 아주 의미 있는 다리이다.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의 틈바구니에는 조선의 우선권이 중심에 있었다. 러일 전쟁의 기록을 살펴보면
1904년 2월 4일 일본은 대(對)러시아 개전(開戰), 국교단절을 결정하고, 8일에는 육군 선발대
가 한국의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향하고, 한편 뤼순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어 10일 러·일 양국으로부터
선전 포고되었다. 서전에서 일본군은 한국을 제압하고, 한국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요해 유리한 전략체제를 확립하였다.
4월 하순 한국에 상륙, 북상한 일본 제1군은 5월 초 압록강 연안에서 러시아군과 충돌하여 격파했고, 같은 달 랴오둥반도[遼東半
島]에 상륙한 제2군은 난산[南山] ·다롄[大連]을 점령하고 뤼순을 고립시켰다. 다시 6월에는 만주군 일본총사령부를 설치하고
15개 사단을 동원하였다. 8월 랴오양[遼陽] 부근에서 양국군이 첫번째 대규모적인 접전을 벌였고, 10월의 사허후이전투[沙河會
戰鬪], 1905년 1월의 헤이거우타이전[黑溝臺戰] 등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고전 끝에 모두 승리하였다.
한편 뤼순의 러시아 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을 꾀하였으나, 8월 황해에서 일본 해군의 총공격을 받고 항구 안에 봉쇄당하
였다. 뤼순 공략을 맡은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의 제3군은 여러 차례에 걸친 203고지 공격으로 많은 손실을 보았지만 1905년 1
월 드디어 공략에 성공하였다. 유럽으로부터 지원군을 얻은 크로파트킹 지휘하의 러시아군 32만과 오야마 이와오[大山嚴]가 이
끄는 일본군 25만은 3월에 펑톈[奉天:현 瀋陽]에서 회전(會戰), 러시아군이 패퇴하였으나 일본군도 사상자가 7만에 이르는 큰 손
실을 보았다. 한편 러시아는 육전(陸戰)에서의 패배를 해전에서 만회하려고 로제스트벤스키 지휘하의 발틱함대를 회항시켜 5월
27,28일 대한해협에서 대해전을 전개하였으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에 격파되어 전멸하였다.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은 대마도 아소만에 미리 함정을 대기시켜 발틱함대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렸으며 시간이 촉박
한 발틱함대가 최 단거리인 쓰시마를 통과하게 되자 이를 기습 공격하여 대승을 거둔 것이다. 만제끼다리는 대마도에 건설된 인공적인 운하 위에 설치한 다리로서 1904년 완공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총 3회에 걸쳐 보수공사를
하였다. 지금의 다리는 처음보다 약 10M 정도 이동된 자리이며 주민들이 배를 운항할 때 섬을 한바퀴 돌아가는 불편을 없애고 군
함의 출입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만든 다리이다. 수심 4.5~5.1m, 폭 40~65m, 길이 210m
⊙ 팔만궁 신사 이즈하라 시내에 있는 신사로 대마도의 대표격인 신사다. 연중무휴에 입장료는
없으나 보물전 관람은 따로 돈을 내야 한다. 삼한에 임나일본부를 건설했다는 가
상의 인물인 신공황후를 받들고 있어 일본인들의 역사왜곡의 증거를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보물관에는 三十六歌仙 두루마리 그림이 장관이며 소서행장의 딸로서 19대
대마도주 소 요시모토와 결혼한 마리아를 참배하는 신사가 있다.
⊙ 국분사 1811년 역지빙례(易地聘禮) 정책에 의하여 대마도에서 통신사의 초빙예식이 진행되게 되었다. 이때 통신사의 거처를 만들기 위하여 일본 조정에서 내린 하사금으로 건립된 사찰이다.
⊙ 코모다하마 신사 1274년 10월, 합포(마산)를 출발한 고려와 몽고의 3만 일본정벌군은 대마도의 코모다하마 해변
으로 상륙한다. 이때 대마도의 1만 병사들은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전원 목숨을 잃었다. 특히 당시 도주는 67세의 노장(老將)이었으며 전쟁 후 목과 몸이 따로 발견되어 그 싸움의 치열
함을 알 수 있었다 한다. 숨진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코모다하마 신사에서는 전사한 병사들의 위패를 받들고 있으
며 매년 11월에 위령재를 지낸다. 동경의 야스쿠니 신사와 함께 일본에서 두 곳 밖에 없는 군인을 모신 신사이다.
⊙ 이시야네 시이네 지방에는 지금도 돌로 지붕을 쌓은 고상식 건물인 이시야네 (돌지붕)가 보존되어 있는데 강풍과 화재를 대비하여 지붕을 널빤지 모양의 자연석으로 올렸으며 창고로 이용되었다. 지금은 몇 개 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으며 일본에서는 대마도에서만 볼 수 있는 진귀한 건축물이다.
⊙ 쯔즈자키 해상공원 대마도 여행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대마도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장엄한 광경은 보는 이의 탄성이 절로 나게
한다. 특히 걸어가며 한국 휴대폰으로 전화를 할 수 있어 여기저기로 전화하는 한국 관
광객의 모습을 보는것도 이채롭다.
해안을 따라 돌아가면 2차 대전 당시 화약고로 이용했던 시설물이 아직 남아 있다.
⊙ 아유모도시 자연공원 은어가 돌아 온다는 계곡으로 수려한 자연경관을 그대로 살린 공원이다. 강 전체가 천연 화강암으로 덮혀진 일본 전국에서도 진귀한 곳이며 구름다리, 산책로, 놀이기구, 캠프장 시설 등이 갖추어져 있다.
첫댓글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