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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달별사랑
 
 
 
카페 게시글
옛집꿀뚝 스크랩 경충단 이야기
으뜸빛 추천 0 조회 14 13.02.16 06: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경충단(景忠壇)
소재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원남면 매화리 죽포동

경관연혁
- 연혁
단종복위를 모의하다 순절한 최시창(崔始昌), 최면(崔沔) 부자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32년 유림과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이조참판 민병승(閔丙承)이 글을 짓고 이종태 (李鍾泰)가 비문을 썼다. 단종복위 사건으로 연루되어 가혹한 처벌로 희생된 넋을 기리고자 세조대에 충청남도 공주의 계룡산 자락, 동학사(東鶴寺)의 동편에 초혼각(招魂閣)을 지었다. 1904년(광무 8) 황제의 명으로 초혼각을 숙모전(肅慕殿)으로 개칭하였다. 이곳에 최시창과 최면 부자의 위패가 있다. 1932년 후손과 지역 유림에서 매화리 죽포동에 경충단을 만들고 매년 음력 3월 14일에 제를 지낸다. 현재는 강릉최씨 사간공파 후손인 최기동씨가 조상의 충절을 기리고 있으며, 소중히 관리하고 있다.



관련인물
- 최시창과 충의(忠義)의 전통가문
비의 주인공은 세종 때 삼군도진무사(三軍都鎭撫使)를 한 최시창과 그의 아들 면(두 사람의 태어난 해의 기록은 없고 1456년 함께 순절)으로 울진 땅에서 거명되는 대표적 충절의 표상이다. 최시창은 고려조 공양왕 복위를 도모하다 죽임을 당한 대사간 복하의 손자되는 사람이다. 복하는 울진입향조로 그가 대사간 벼슬을 했기에 사간공파가 되었다. 그는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에 이르렀으나 국운이 멀지 않음을 알아 벼슬을 버리고 북면 기곡동 무령현(武靈峴: 지금의 북면 덕천 부근)에 은거할 때 이성계가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원주에 유폐시키고 간성으로 보냈다가 다시 삼척 근덕면 궁촌리 고돌치 깊은 곳에 가두자 이에 의분을 참지 못해 장군 장천영(張天永), 임제(林悌), 태학생(太學生) 전생(田生) 등과 모의하여 공양왕을 복위시키려고 울진, 삼척 등에서 수천 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이른바 고려복벽운동(高麗復?運動)을 일으키다 사전에 발각되어 관군에 의해 모두 참형을 당하였다.
효자집안에 효자가 나고 충신집안에 충신이 난다고 했다. 그가 복위운동을 펼치다 순절했듯이 그의 손자 시창, 증손자 면도 단종복위를 꾀하다 성삼문과 연루돼 순절한다. 당시 단종복위 모의자들의 처벌을 보면 처참하리만큼 가혹했다.
시신거열자(屍身車列者: 흔히 부관참시라는 것으로 묘에 안치된 시신을 꺼내 시신을 분리시키는 참담한 형벌) 4명에 생체거열자(生體車列者: 이른바 능지처참으로 산 사람의 몸을 찢어 죽이는 형벌)가 37명, 모의자 또는 그와 연루된 사람들의 어머니, 아내, 며느리, 누이, 딸, 첩의 딸들 모두 공신의 노비가 되거나 여종으로 전락했는데 그 수가 모두 181명이나 되었다. 조선 500년 동안 이처럼 가혹한 처벌로 마무리된 예가 없는 전대미문의 대사건이었다. 최시창·최면 부자는 충남 공주의 계룡산 자락 숙모전(肅慕殿: 단종과 그를 복위하려다 순절한 충혼들을 모신 곳)에 위패를 모시고 울진의 후손들이 1904년부터 매년 쌀 한 가마니를 1963년 사단법인 숙모회가 발족할 때까지 보냈다고 한다. 1932년 최시창·최면 부자의 위패를 지금의 경충단으로 모시고 와서 매년 음력 3월 14일에 제를 지낸다. 고려 말의 최복하, 조선 초 최시창·최면 부자에 이은 이 가문의 충의 전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울진 의병항쟁을 했던 최경호, 3·1운동 때 윤강규, 전병겸, 남재량, 윤병관, 윤학규, 남강호, 장형관 등 남수산 꼭대기에 태극기를 달고 매화장터에서 대한 독립만세운동을 이들과 함께 주도한 최중모(최중권과 같은 사람), 최효대 등이 있었다. 이 일로 일경에 체포 돼 모두 옥고를 치른다. 이들 중 윤강규는 만세운동뿐 아니라 많은 구호활동을 한 훌륭한 분으로 해방 후 초대 원남면장까지 하였으며 현재 국립묘지에 영면하고 있다.

- 위치와 형태
원남면 매화리 죽포 국도 7호선 주변 강당골 입구에 있다. 강릉최씨 사간공파 종택인 매죽당에서 동쪽으로 국도 7호선 지하통로를 이용해도 되고, 종택 동쪽을 지나는 국도 7호선에서 바로 경충단 제단으로 갈 수도 있다.
담장과 출입문을 갖추고 있고, 화강암 석재를 이용하여 제단을 쌓았다. 남쪽으로 단칸 맞배지붕의 출입문을 내었으나 편액을 하지는 않았다. 제단 앞쪽으로는 약간의 경작지가 마련되었고, 주변에 매화나무를 심었다. 담장 안에는 8m × 5m × 50㎝ 정도 규모로 화강암 판석을 깔아 단을 마련하였는데, 단에 오르는 발판이 세 개 있다. 단 위 왼쪽에는 1932년 유림과 후손들이 세운 ‘단종조순절신삼군도진무사정재최선생경충단지비(端宗朝殉節臣三軍都鎭撫使貞齋崔先生景忠壇之碑)’가 있다.

- 제단비 이야기
비문에 나온 기록을 보면 이 비는 1932년에 만든 귀부비(龜趺碑)이다. 비의 삼 요소인 귀부, 비신, 이수의 형태를 완전히 갖추고 있다. 이수는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두툼한 기와지붕이 중후한 무게감을 더한다. 비신의 크기는 대략 높이가 132cm, 너비가 39cm, 두께가 18cm이다. 귀부는 사각형에 밑이 넓고 위가 작은 몸통을 하고 있으며, 크기는 길이가 90cm, 너비가 73cm이다. 비좌(비신을 꼽는 곳)의 크기는 가로가 59cm, 세로가 43cm의 장방형이다.
귀부는 거북이 형태를 하고 있는데 머리는 사람의 눈과 코를 닮았으며 왼쪽으로 고개를 틀고 있다. 6개의 앞니에 2개의 큰 송곳니를 가지고 있다. 앞발은 5개의 발가락에 뒷발은 뒤 옆구리 쪽에 역시 5개의 발가락을 가지고 몸에 밀착되게 부조식으로 새겨놓았다. 뒷면에 우측으로 꼬리가 만들어져 있다. 갑문(등껍질에 새겨진 문양)은 불규칙적으로 마름모 형태로 사선을 교차시키고 있다.

 

명소 이야기
- 매화리와 명소
매화리의 명칭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다. 먼저 마을의 형상이 매화꽃이 떨어지는 형국이라 하여 매화라 하였다는 설, 조선 시대 광해군 때 강원도관찰사 기자헌(奇自獻)이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 주위의 들에 해당화가 만발하여 장관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고 「야다강매(野多江梅)」라는 시를 읊었던 연유로 매야(梅野)라 하다가 후에 매화(梅花)로 바뀌었다는 설이다. 또, 선조 때 윤여호(尹汝虎)의 부인 공인(恭人) 영양남씨(英陽南氏)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조상이 살던 영덕군 매일동(梅日洞)의 매(梅)자를 따서 매화(梅花)라 하였다고 전하기도 한다.
본래 울진군 원남면(遠南面)의 지역으로서, 1916년 4월 1일 상매동(上梅洞)?중매동(中梅洞)?지품동(池品洞)의 각 일부 지역이 통합되며 매화리로 개편되었다. 1944년에는 매화1리와 매화2리로 분리되었다. 매화리 동쪽은 현종산(懸鍾山, 416.7m)의 지맥이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뻗어 있어 산이 중첩되어 있고, 산 넘어 해안촌인 오산3리 무릉동(武陵洞)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쪽은 매화천(梅花川)이 북쪽으로 흐르고, 그 건너편에 금장산(金藏山)의 지맥인 대령산(大靈山)과 남수산(嵐峀山)이 좌우로 바라다보인다.
문화유적으로는 죽포사(竹浦祠), 경충단(景忠壇), 경충단 제단비, 울진 기미 독립만세기념탑과 비, 매화리 고분군, 매화리 최진탁 가옥, 매화리 전용순 가옥, 매화리 전하중 가옥, 매화리 최연우 가옥, 매화리 신태희 가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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