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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구암사 봉사팀 이끌며 1년에 15만 그릇 국수 보시 지역사회 각종행사서 ‘인기’
20년 전 불교귀의하며 시작 육군32사단 등서 봉사활동
4월1일 대전현충원 급식소 설치 15개 팀 100여명 이끌며 봉사
“봉사는 스스로를 내려놓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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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대전 구암사 주지 북천 스님이 김근분(53, 여래성) 보살에게 국립대전현충원 참배객 대상의 무료 국수공양을 제안했다. 현충일에 맞춰 그곳을 찾는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더불어 부처님 자비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자는 취지였다. 처음 스님의 제안을 들은 김 보살은 손을 저었다. 그때까지 15년 동안 국수봉사를 펼쳐왔지만 수천그릇의 국수를 삶아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6월3일 저녁, 현충일이 불과 3일 남은 시점이었다.
“3일 만에 어떻게 준비해요 스님.”
“그래도 한번 해봅시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짧은 대화였지만 그것을 통해 마음속 뭔가가 꿈틀거리고 있음을 느꼈다. 구암사 국수봉사팀원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아침에 구암사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얼마나 동참할지 걱정도 했지만 기우였다. 다음날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구암사로 모여들었다. 그동안 김 보살과 함께 구암사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국수를 삶아온 팀원들이었다. 일손에 대한 걱정은 덜었지만 진짜 고생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애초에 약속된 3000개에 1000개를 더한 4000명분의 국수를 준비했다. 총괄팀장으로서 일을 배분하고 식재료도 구매했다. 몸도 마음도 힘들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행사 당일, 현충원의 구암사 무료급식소에는 예상인원을 초과한 6000명의 참배객들이 방문했다. 구암사 봉사팀이 2일 동안 밤을 새가며 준비한 국수를 맛있게 먹고 있는 참배객들의 모습이 김 보살 눈에 아른거렸다. 마지막 국수를 삶아내고 김 보살은 그때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환희심이 온 몸을 휘감고 있음을 깨달았다. 항상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오던 터였다. 꾸준히 봉사활동을 해왔지만 뭔지 모를 허전함을 떨치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날, 현충원에서 김 보살은 예기치 못했던 행복을 느꼈고 남은 삶 동안 걸어가야 할 길을 목격했다.
그 후 6년이 지난 지금도 국수를 삶는 김 보살의 손은 쉴 틈이 없다. 그가 총괄팀장으로 활동하는 구암사 봉사팀이 정성스럽게 만들어낸 국수는 봉사자들의 성실함과 화학조미료를 일체 쓰지 않는 맛이 입소문을 타, 지역사회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구암사에서는 대전지역 각종 단체들의 국수봉사 요청이 끊이질 않고 있는 상황이다. 1년에 자그마치 15만 그릇의 국수를 삶는다. 일정이 겹치는 경우도 있어서 양해를 구해야 할 때도 많다. 행사에서는 대부분 수천 명이 먹을 국수를 삶아야 하지만 그래도 김 보살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어차피 사람들에게 대접하기 위해 하는 것이니 더 많이 오면 좋지 않으냐고 웃음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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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 때도 분명 있어요. 가끔은 아침에 일어나면 몸에서 아프다고, 오늘은 어렵겠다고 신호를 보내기도 해요. 그런 날에는 나갈지 말지 고민도 하고요. 하지만 봉사현장에 나가면 항상 힘이 샘솟곤 해요. 정성껏 국물을 우려내고 국수를 말아 사람들에게 대접하는 순간의 뿌듯함은 말로 다 못하죠. 몸은 고단해도 마음은 부자에요.”
구암사 봉사팀을 이끌고 있는 김 보살의 하루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특히 지난 4월1일 현충원 내에 무료급식소를 설치한 이후로는 매일 출근도장을 찍는다. 현충일과 천안함용사 추모식, 보훈사랑 걷기대회 등의 행사에서의 국수공양을 눈여겨 본 현충원 측에서 종교계에서는 유일하게 구암사 봉사팀에게 급식소를 마련해준 것. 전보다 더 바빠진 김 보살은 아침 5시에 일어나 부처님에게 기도를 올리고 구암사로 향한다. 재료를 살피고 당일 봉사자들을 체크한 후 현충원에 도착하면 팀원들과 함께 간단하게 식사를 한다. 많게는 수백 명에게 국수를 대접한 후 오후 2시 경에 현충원을 나오면 팀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구암사에 들러 봉사자 모집도 한다.
올 봄에는 복지이론을 체계적으로 배울 목적으로 대덕대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2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봉사에 매진해왔지만 대학에서 배운 이론은 새로운 세계였다. 총괄팀장이라는 막중한 책임감은 대학서 배우는 심리학 등 복지이론을 통해 한층 더 깊어지고 있다. 밤 11시에 수업이 끝나고 집에 들어오면 몸은 녹초가 된다. 이처럼 바쁘고 육체적으로 고단한 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김 보살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봉사를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국수봉사를 마치고 느껴지는 뿌듯함과 부처님 자비를 세상에 알린다는 자부심이 그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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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김 보살은 처음부터 불교신자는 아니었다. 20대 초반, 종교를 가져야겠다는 마음으로 찾아간 교회에서 불교를 폄훼하는 내용의 설교에 실망한 김 보살은 크리스마스에 친구의 안내로 사찰을 찾는다. 법회에서 스님은 이웃종교를 포용하고 상생하자는 내용의 법문을 했다. 불법에 귀의한 김 보살은 보현불교대에 입학해 2년 동안 부처님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 그는 불교교리를 그야말로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 듯 흡수했다.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존재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가끔 집근처 구암사를 들르곤 했을 뿐이었지만 보현불교대를 다니게 된 후로는 본격적으로 신행활동을 시작했다.
국수봉사도 그때 시작했다. 당시 구암사에서는 국수봉사팀 ‘지장회’가 있었다. 지장회는 매주 수요일 저녁 육군32사단을 찾아 군인들에게 국수를 보시했다. 밀폐된 공간에서 국수를 삶다보면 군인들에게 나오는 냄새가 코끝을 찌르곤 했다. 일부 봉사자들은 냄새를 견디며 봉사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러나 김 보살은 그것이 역하기는커녕 집 떠나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군인들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법당에서 군인들의 군화소리만 들려도 신이 났다. 그렇게 소규모 국수봉사를 해오던 김 보살에게 6년 전 현충원 봉사는 큰 전환점이었다. 구암사에 납골당이 설치되고 “슬픈 사람들이 내는 돈이니 그들을 위해 회향할 수 있는 방법을 찾자”는 북천 스님의 제안에서 시작된 현충원 국수공양이 이제는 대전 전역으로 확대됐다. 따뜻한 국물 한 그릇으로 위로를 건네는 김 보살, 그리고 그 국수를 맛있게 먹고 고마움을 표시하는 사람들은 서로 상생의 길 위에 서있다.
현재 김 보살은 오는 6월6일 현충일 국수공양 준비에 여념이 없다. 15개 팀, 100여명을 총괄하며 1만3000인분의 국수를 만들기 위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를 내려놓는 연습이죠. 봉사는 그런 것 같아요. 국수를 말며 스스로를 많이 내려놨어요. 하지만 내려놓는 것은 곧 채우는 일이기도 해요. 마음 가득 부처님 자비를 품고 살아가죠. 그래서 마음만은 부자라고 생각해요. 제가 특별한 게 아니에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