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되게 하는 것. 그 사람이 「장미」라면 「장미」가 되게 하고, 그 사람이 「호박」이라면 「호박」이 되게 하는 것. 「장미」에게 「호박의 열매」를 요구하지 않고, 「호박」 에게 「장미꽃의 아름다움」을 찾지 않는 것. 「장미의 가시」를 받아들이고, 「호박의 추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이라네. 왜냐하면 사랑은 「결심하는 의지의 행위」이기 때문이라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너무나 쉽게 일러 주십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세 인물 중 사제와 레위는 예수님 당시 백성의 지도자로 불리던 사람이었고, 또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몇 대를 걸쳐 세습처럼 내려오던 냉대와 핍박, 설움을 경험하면서 사랑보다는 미움의 골이 마음깊이 패였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인물 중 고통 속에 신음하는 사람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끼고 그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오히려 사랑을 가르쳤던 사람들이 아니라 사랑받기를 원했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믿고 가르쳤던 바를 실제로 실천해야 했던 사제와 레위가 무관심하고 외면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랑은 말이 아니라 결심하는 의지의 행위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서 너희도 그렇게 하여라.”라고 당부의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오늘날, 착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람들이 점점 우리 주위에서 보이지 않는 듯합니다. 갈수록 비유 속에 등장하는 사제나 레위 같은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 자신들조차 그러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듯합니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심지어 그 누구보다 가까워야 할 가족 간에도 무관심과 미움의 싹은 자라고 있습니다. 사랑을 먹고 자라야 할 가정이 무관심과 미움을 먹고 자란다면 우리는 분명 우리의 삶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 우리에겐 착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나! 돌아가고 싶다”라고 외치는 어느 영화 속 주인공처럼 우리 역시 비유 속 사마리아인의 삶으로 돌아갑시다. 가던 길을 멈추고 자신의 “노자와 시간까지도 아낌없이 나누어줄” 줄 아는 마음을 찾도록 합시다. 나 때문이 아니라 살아있는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기 위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해 사랑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