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티칸 시국 지도>
바티칸은 이탈리아 로마 북서부의 언덕에 위치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며, 이탈리아 로마 시내 티베레강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성 베드로 광장 앞에 도로 위에 그어져 있는 흰색 선이 이탈리아와 바티칸의 국경이다. 바티칸의 영토는 엄밀하게 말하면 가톨릭의 총본산 바티칸 궁전을 중심으로 하는 구역만이 아니고, 이탈리아 국토 안에 산재하는 약간의 성당 및 교황의 여름 별장지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를 포함하는데, 성베드로 대성당과 그 주변 및 로마에 있는 성당과 궁전을 포함한 13개 건물, 로마 동남쪽 120km지점에 있는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가 바티칸에 있다
규모는 작지만, 카톨릭의 총본산으로서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으며, 매년 세계에서 몰려드는 카톨릭 신자로 넘쳐난다.
8세기 이후 중세·르네상스기·근세를 통하여, 교황은 중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광대한 영토를 교황령이라는 소유 형태로서 가지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통일운동은 1868년경까지 거의 대부분의 교황령을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시키고, 70년 9월에는 로마를 점령, 71년 5월에 이탈리아 국법으로 바티칸 궁전을 이탈리아 왕국에 귀속시키고 말았다. 교황 및 그 후계자에게는 바티칸 궁전·라테라노 성당·카스텔 간돌포 별장의 영구사용권이 허용되었으나, 교황은 스스로 '바티칸의 포수(捕囚)'라 지칭하면서 그에 반발, 이른바 '로마문제(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청과의 논쟁)'가 시작되었다.
1929년 2월 11일 무솔리니 정부와 교황청 사이에 라테른 조약이 성립함으로써 '로마문제'가 해결되어, 바티칸 시국이 탄생하였다. 이 조약은 바티칸 시국의 교황의 완전주권을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국내에서의 교회·결혼·종교교육 등의 취급에 관한 외교조약,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몰수된 교회재산에 대한 보상지불에 관한 재정협정도 포함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제법상의 주권국, 바티칸 시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시내에 위치하고 있는 바티칸 시국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고, 인구가 1천여명 남짓되는 작은 나라이지만, 독자적인 행정 체계와 독자의 화폐·우표 등을 발행하는 엄연한 국가이다.
전세계 카톨릭 교회와 신자를 통괄하는 카톨릭 교회의 통치기관인 교황청의 소재지로, 카톨릭(Roman Catholic)이 국교이다. 주민은 대개 이탈리아인, 스위스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시국의 경비를 위해 오랜 전통에 따라 스위스인이 고용되고 있으나, 우편사무·화폐주조 및 산피에트로 광장의 경비 등에 관해서는 이탈리아 정부와 그 시행에 관한 사항을 협의하여 결정하고 있다.
바티칸 시국의 시민권을 가지는 자는 로마에 거주하는 추기경과 국무장관 또는 지사의 허가를 얻어 바티칸 시국에 정주하는 개인(직접·간접의 교황청 봉사자) 및 그 가족이다. 바티칸에서 영주권을 취득하려면 바티칸 시내에 거주하며 직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주거권을 인정받으면 곧 거주할 수 있다. 바티칸 시국의 특색은 교황이 원수로서 절대적인 주권을 가진다는 점인데, 그 주권은 시국 창건 이전부터 있어 온 교황주권이고, 또한 교황주권에 봉사하기 위해서 시민권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입각한 주권이다.
제265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hanes Paulus II)가 78년 10월 즉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바티칸은 가톨릭 교회의 총본산으로서 전세계에 정치적·문화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특히 제2차 바티칸 공회의 이후에는 세계의 그리스도교 제세력의 중심으로서 전인류의 단합과 세계평화에 공헌하려는 결의를 보이고 있다.
세계각국과 대사를 교환하는 외에, 외교관 교환이 없는 나라에는 교황사절을 파견하고 있다.차 그리니치 천문대보다 1시간이 빠르고, 한국시간보다 8시간 늦다. 3월 마지막 일요일 부터 9월 마지막 일요일까지 실시되는 서머타임 기간에는 한국보다 7시간 늦는다.
* 성베드로 광장
좌우 양쪽으로 큰 반원을 이루고 있는 폭240m타원형꼴의 대광장인 이곳은 반원으로 이루어진 열주회랑이 있으며 그 위 테라스에는 142성인의 대리석상들이 도열되어 있는데 248개의 원주들과 88개의 각주들이 4열종대를 이루고 좌우양쪽 테라스를 떠받치고 있다. 이 회랑은 그리스도가 세계를 향하여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상징한다. 1655-67년에 교황 알렉산더7세의 명으로 설계 건축된 이 광장의 중심에는 오벨리스크가 있는 데 그 한가운데의 원형석판에서 기둥을 보면 4개의 기둥이 하나로 포개어져 보인다.
* 성베드로 성당
A.D326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성베드로의 무덤위에 세워진 이 성당은 교황 실베스터1세에 의해 축성되었다. 성당의 중앙대제대는 성베드로의 무덤 바로 위에 있으며 120년에 걸쳐 1626년 드디어 완공되었다. 이 공사는 미켈란젤로가 책임을 맡았으며 성당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 구석에의 삐에타(Pieta)는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손꼽힌다. 베드로 성당과 비티칸의 경비는 스위스의 용병이 맡았다는 전통이 있어 지금도 스위스인들이 경비를 맡고 있다고 하는데 조금은 우스꽝 스러운 복장은 미켈란젤로가 디자인 한 옷으로서 아직까지도 전통을 지키고 있다.
* 바티칸 박물관
- 라오쿤
작품의 주인공 라오쿤은 트로이에서 아폴로신을 모시는 신관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트로이 전쟁이 일어나자 신 아폴로는 그리스 원정군의 편에,그의 신관 라오쿤은 그가 모시는 신보다는 그를 따르는 인간 트로이인들의 편에 서게 된다. 그 유명한 '트로이의 목마'가 여기에 얽힌 이야기이다. 신관 라오쿤은 그리스 원정군이 목마를 이용한 속임수로 트로이 성을 함락시키려 한다는 것을 알고 목마를 성내에 끌어들이지 않도록 경고한다. 그리스 원정군 편에 가담하였던 아폴로 신은 대단히 분노하였다.
이에 아폴로는 두 마리의 큰 뱀 퓌톤을 보내어 라오쿤과 그의 두 아들을 졸라 죽이게 한 후 그리스 군의 목마가 트로이의 성안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이 작품은 그리스 후기 헬레니즘 말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미술사에서 고전 고대의 양식에 대립하는 가장 오래되고 훌륭한 바로크적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전설의 내용 역시 절제된 이상미를 추구하던 고전 고대의 양식보다는 보다 감정의 표현이 강해지는 헬레니즘 양식에 어울린다. 이 작품의 핵심은 '고통의 절정'을 조형적으로 표현한 방식이다. 여기서는 뱀에 휘감겨 죽어가는 한 자연인의 육체적 고통도, 사랑하는 두 아들의 죽음을 목격하는 정신적 고통도 공간을 울리는 절규로서 표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이 시라면 라오쿤의 비극이 불안에 찬 예감과 현실적 고통과 지나간 고통에 대한 공감들 모두가 절절하고 섬세한 감정으로 표현되었으리라. 그러나 문학과는 달리 조형미술은 한 순간의 형태로서 그 '고통'과 '미'를 동시에 표현해야 했기 때문에 절규하는 고통의 극한 상태보다는 절정에 이르기 직전의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절정의 순간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보다는 그 직전의 상태에 멈춤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무한한 예술적 상상력을 발휘케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조형예술이 자신의 미를 발견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렇게 최고의 규범적인 완전함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16세기에 발굴된 이래 수많은 시인들에 의해 찬미되고 예술논쟁을 불러일으킬만큼 그 정신이 모든 에술분야에 관여하게 되는 불후의 명작으로 남았다. 특히 18세기의 유명한 고고학자 빙켈만은 라오쿤상을 보면서 그리스 미술에 대해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이라는 역설적이면서도 너무나 적절한 표현을 부여하였다.
- 최후의 심판
미켈란젤로작품.
1536-1542년작 바티칸 성시스틴성당벽화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천정화와 벽화는 교황전용예배당인 시스틴성당의 약 55평에 이르는 천장에 벽화를 그리라는 교황 율리우스2세의 명에 의해 당시 나이 33세인 1508년부터 시작한 작품이다.
약5년간의 작업끝에 완성시킨 미켈란젤로의 천정화는 그 장대한 크기와 궁형천장에 그려진 구약의 창세기평을 주제로 한 '아담의 창조' '천지창조' '해와 달의 창조' '원죄' '노아의 방주'등의 내용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작품은 당시 교황의 총애를 받던 미켈란젤로를 시기한 나머지 브라만테가 미켈란젤로에게 벽화를 맡기도록 교황을 부추겼고, 높은 천정화를 그리기 위해 비계위에 올라가 작업을 하다가 떨어져 다치거나 죽기를 바랬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약 5년간의 작업끝에 그의 조각가로서의 면모를 일신한 역작을 남기게 되었고 브라만테는 결국 영광스런 자리에 미켈란젤로를 추천하게 되고 말았다. 천정화가 완성된 후 24년이 지난 1536년 시작하여 6년간의 작업끝에 완성시킨 성당 중앙벽면의 벽화가 프레스코화인 '최후의 심판'이다.
이 작품은 구태의연한 종교화로서의 품격을 버리고 인간의 신체가 갖는 아름다움과 표현력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추구해 나가려는 인본주의에 충실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이 벽화에 나오는 1백여명의 인물들은 모두 각기 다른 포즈를 취하며, 등장하는 천사들도 모두 날개가 없다. 또한 이들은 모두 나체로 등장하고 있다.
최후의 심판이 4분의3정도 완성되었을 때 교황이 이 작품을 친히 보러 왔고 그를 수행한 관리들중 교황의 예식부장(지금의 의전실장)인 체세나가 나체의 군상이 예배당같은 신성한 장소에 그려져 있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으며 '품위를 완전히 거부하고 있고 배신적이며 목욕탕이나 술집에 어울린다'고 혹평을 서슴치 않았다. 이에 화가난 미켈란젤로는 교황이 돌아간 이후에 체세나의 혹평에 복수하려고 악마들 사이에 뱀에게 다리와 몸통을 감기운 카론의 배에 타고 있는 미노스의 모습을 체세나로 그려 놓았다.
이 작품이 완성된 이후에 외설시비는 더욱 강해져 게 피에트로 알레티노에 의해 미켈란젤로의 호모취향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교황 파울로스3세에 의해 그림을 지워버리라는 명령을 받기도 하였으나 지우고 다시 그리기보다는 옷을 입히는 것이 경제적이라는 말에 오늘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당시 교황의 명에 따라 인물들은 속옷을 입게 되었는데, 이렇게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 가필을 한 사람은 다니엘 다보르테라는 사람이다. 그는 이 일을 마치고는 '속옷 장사꾼'이라는 별명을 평생 짊어지고 다녀야 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