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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솔성수도원】 "동광원 공동체 생활"
4월 19일 전남 화순군 이서면에 있는 솔성수도원에 들렸다. 마침 점심 시간이여서 무등산에 올랐다. 수도원 뒷쪽 새집 옆으로 난 길을 오르니 등산 이정표가 나오고 마을에서 무시기 폭포까지 40분이 소요된단다. 서두르면 시간 안에 다녀올 듯 하여 가 보기로 했다.
전날 비가 내려 초목이 기지개를 활짝 펴고 꽃 망울을 터트리며 싱그러움을 한결 뿜어내고 있다. 산새들도 소리를 지르며 숲 사이로 날아다니고 개울 물 소리도 요란하다. 봄은 역시 생동감이 넘치는 계절이다. 무등산에 오를 때마다 병약한 이들과 함께 살았던 동광원 (무등원) 공동체 생활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인위적인 것이 아닌 성령 받은 이들의 천국 생활을 떠올리게 된다.
내려와 세월호 희생자들의 추모시간을 갖은 후 김한중 원장님의 종교 철학 강의를 듣고 이야기를 피차 나누었다.
아래는 동란 직후 무등산에서 폐결핵 환우들과 같이 살았던 이현필 선생의 글이다.
“지금 믿었다“고 할 이가 있나요?
여기 누가 “지금 믿었다”고 할 이가 있나요? 믿으면 좋다는 말에 믿는 것이 좋은 것이겠지 하고 욕심낸 것뿐입니다. 믿은 것이 아니고요. 믿었다면 안팎이 다 새로 지음을 받은 자 같아야지요. 그리스도의 신(神)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육신으로는 아무리 얌전해도 하나님을 거슬리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죄인 하나가 참으로 회개하면 천군천사가 큰 소리로 노래를 하시지요. 천지만물도 우쭐거리고요. 한 사람이 회개만 하면 분명히 세계도 밝아집니다. 그 빛이 막혀 있는 동안은 이슬 같은 은혜도 멎어서 메마른 땅이 됩니다. 이슬 내린 것처럼 보이지 않게 내리신 은혜로 우리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슬이 말라 버려서 풀이 시드는 것 같아요. 막혀있는 동안은 시들며 성장은 없습니다. 갈릴 것을 갈리지 않으면 구원은 없습니다.
결핵환우들의 아버지, ‘카딩턴 선교사
한국전쟁은 치유할 수 없는 아픈 상처를 안겨주었다. 전쟁의 상처는 민족 분단이라는 아픔뿐만 아니라 폐허로 변한 삶의 터전, 부모 잃은 아이들의 울부짖음, 온갖 질병의 창궐 등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질병 가운데 널리 퍼진 병이 폐결핵이다.
카딩턴(고허번의 미국명)선교사는 1920년 10월 7일 미국 북 캐롤라이나주 월밍톤 시에서 태어났으며, 1949년 29세에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 한국 의료 선교사로 파송되어 왔다. 그는 폐결핵 퇴치에 자신의 삶을 걸고, 제중병원에 폐결핵 진료소를 설치한 후 병원의 명칭 까지도 ‘결핵진료소’로 바꿀 정도로 결핵 퇴치에 전념하였다
카딩턴 선교사는 1951년부터 1974년 까지 당시 결핵전문병원인 제중병원(현, 기독교병원) 원장으로 재임하면서 한국에 있는 많은 결핵환자들을 돌보아 주었다.
그는 병원 방침에 따라 환자의 병이 완치되지 않아도 입원한지 6개월 후면 무조건 퇴원 해야 하는 현실을 안타까워 했다. 그는 퇴원 후 생활과 치료를 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하고 결핵환자 요양소 무등원 설립에 크게 공헌하였다.
결핵환우들의 어머니, ‘김은자 마리아'
김은자(1924~2002) 마리아는 동광원 이현필 선생의 제자이다. 김은자 마리아는 김준호 선생 지도하에 무등원 초창기부터 공동체 생활을 관리하였다. 신앙 또한 참으로 독특하고 열렬하였으며 단순하고 소박함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난함을 본받고자 하였고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수난시기에는 단식을 하며 가시관을 만들어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고자 했다. 이러한 신앙으로 먹을 것이 부족했던 당시 무등원의 식구들을 위하여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제중병원 환우들이 먹다 남긴 밥과 누룽지를 얻어서 등에 짊어지고, 약 10km가 넘는 험한 산길을 걸어서 식구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였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상황에서 김은자 마리아의 헌신적인 사랑은 결핵환우들의 끼니 해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김은자 마리아의 눈과 가슴에는 길거리에 있는 걸인이나 환우들 한 사람,한 사람이 모두 적은 예수님으로 보였다. 그녀의 사랑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언제 어디에 있든 굶주리고 아픈 영혼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몇 십리 길이라도 달려가서 그들을 데리고 왔다.
환자로 인하여 가족이 곤란한 경우를 당할 때면 환자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를 데리고 와서 함께 생활하도록 하였다. 김은자 마리아는 ‘한 영혼이 천하 보다 귀하다.’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
무등산 곳곳의 움막집을 다닐 때나 밤중에 시내에서 산으로 돌아 올 때 밤길을 두려움 없이 성가를 부르며 다녔다. 그녀는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로이 하느님과 함께 소통하였다. 무등산에 오면 제일 먼저 은혜실에 들러서 중 환우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말씀으로 위로하며, 밤늦도록 기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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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보다 환우들을 먼저 생각하였다. 병이 깊어 식사가 어려운 환우들에게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쌀과 고기를 구하여 기운을 돋게 하는 등 치료에 힘썼다. 각혈하다 쓰러진 환우들도 주저하지 않고 간호를 해 주었고, 임종을 맞은 이들의 뒷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로 인하여 폐결핵에 감염되어 한동안 고생을 하기도 하였다.
김은자 마리아는 고통 중에 있거나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온전히 그들의 입장에 서서 나눔과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공동체 살림이 어려워도 어려운 이웃을 데려와 함께 생활 하도록 하였다. 끼니가 어려워도 누가 도움을 요청하면 앞뒤 생각하지 않고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녀는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더 행복하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늘 실천한 것이다. 이 때문에 살림살이를 맡아 일하는 이들이 곤혹스러워 할 때도 있었지만 하느님의 섭리는 항상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곤 하였다.
김은자 마리아의 생활은 하느님의 말씀 그대로였다. 그녀는 “강도 만난 자의 친구가 되어 준 사마리아인”(루까 10,29-37)과 같이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 하였다. 옷이 없는 이가 있으면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그 자리에서 혼쾌히 벗어 주었고, 신발이 없는 이에게는 자신의 신발을 벗어 주었다. 그로 인해 의복은 머리에 삼각 수건을 쓰고 다 떨어진 누더기 옷을 입었으며 하얗게 눈이 쌓인 동절기에도 맨발에 짚신을 신고 다녔다.
젊은 봉사자들과 환우들에게도 예수님을 사랑하며 살도록 준주성범과 덕행의 실천 방법을 가르쳤으며 낮은 곳에서 작은 자로 봉사 할 수 있도록 이끄셨다. 그리고 누구를 만나든지 하나님을 알고 세례를 받도록 하는 등 열정을 가지고 모범적인 선교의 삶을 살았다.
<소화 설립 50년사> P100-P10
초기의 움막 시절
김준호(레오) 선생은 성 프란치스코의 <완덕의 거울>과 <성녀 소화 데레사의 자서전>에서 두 분의 영성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선생은 1956년 3월 광주시 북구 화암동에 무등원을 설립하였다. 이곳에서 갈 곳 없는 무의탁 결핵환우와 노약자, 걸인 등 소외 받고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무등원은 무등산 중턱에 움막을 지어 생계를 보장하는 정도에 불과하였지만 선생뿐 아니라 모든 식구들에게는 은혜로운 안식처였다.
무등산을 중심으로 삼밭실, 개원사 옛 절터, 원효사촌, 덕산재, 기도실, 스기밭, 권솔재, 등 곳곳에 무등원의 식구들이 분포되어 살았다
무등원의 효시 삼밭실
김준호 선생은 1956년 8월에 두 명의 고아를 데리고 무등산 제2수원지 위 숲 속에 움막을 쳤다. 무척이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상수원이 오염될 우려가 있다하여 광주시에 의해 철거명령을 받았다. 무등산 중턱에 하얗게 눈이 내리던 날 아침, 모든 희망을 뒤로 하고 눈물을 뿌리며, 장불재를 넘어 원효사 방향으로 내려갔다.
그 후 먹을 수 있는 생수가 나는 곳을 찾아가 무등산 원효사촌에서 조씨 성을 가진 할아버지를 만났다. 대화중에 “옛날에 인삼을 심었던 삼밭이 있는데, 그 곳에 생수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을 찾아가 자리를 잡고 움막 두 채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제중병원에서 퇴원하는 무의무탁한 환우들을 요양시켰다. 이때부터 최초로 삼밭실 움막에서, 정애자, 안영자, 민임 등 5-7명의 여자 환우들이 생활하기 시작한 것이다.
삼밭실은 한 때 후두 결핵을 앓았던 이현필 선생이 와서 기거하기도 하였으며, 꽃동네 오웅진 신부도 신학교 시절에 늘 자원봉사를 왔던 곳이기도 하다. 이 삼밭실이 무등원의 효시가 되었는데 이 곳 역시 철거명령이 내려졌다. 삼밭실 근처에 관광호텔이 들어서자 광주시에서 철거명령을 내린 것이다.
개원사 옛 절터
(1) 은혜실
개원사 옛 절터 골짜기에는 은혜실, 미싱방집, 식당집, 삿갓집, 꼭대기집, 남반 등이 있었다.
은혜실은 가장 큰 건물인데, 20여 명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그 구조는 강당 식으로 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중환자(중증 결핵 2~3기, 균이 나옴)들이 생활했던 곳으로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중증 환우들은 잘 먹어야 하며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병이 호전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특별한 배려가 필요한 곳이기도 했다.
은혜실에는 젊은 여자 환우들이 많았는데, 각혈을 하다 쓰러져 회복을 못하고 임종을 맞는 경우도 있었다. 병마와 힘겨운 싸움을 하는 와중에도 아침, 저녁으로 예배를 드렸다. 잠깐 쉬는 시간에는 은혜실 근처 바위에 나와 기도와 찬송을 하였다. 이는 김준호 선생과 김은자 마리아의 가르침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환우들은 매일 성녀 소화데레사를 비롯하여 여러 성인들의 전기와 준주성범 등 영적 독서를 하였다.
정향례 자매는 “내가 쓰러지는 곳이 바로 예수님의 품안이다”라고 하신 소화 데레사 성녀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성녀처럼 자신의 고통을 십자가상 예수님의 고통과 온전히 합치시키며 살다가 선종하였다.
김정애 자매 엮시 “천국이 보인다”고 외치며 기쁘게 선종하였다. 기거하는 곳의 이름이 ‘은혜실’이듯, 결핵이라는 고통을 이기고 은혜로 변화되는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났던 것이다.
김순덕 세라피나 자매 또한 결핵으로 건강이 몹시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무등원에 들어올 때는 머리카락이 거의 빠지고 혼자서는 걸을 수가 없을 정도여서, 변재갑 형제가 지게에 지고 산으로 올라 왔으나, 무등원에서 생활한 이 후에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건강이 회복되었다. 그녀는 빠졌던 머리가 까맣게 새로 돋아나고 육체적으로 건강을 되찾게 되면서, 영적으로도 한 단계 높은 신앙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후부터 김순덕 자매는 김은자 마리아를 보필하는 일을 하였다. 그녀는 본인의 이름처럼 순하고 덕망 있는 모범적인 삶으로 모두에게 귀감이 되는 희생적인 생활을 하다가, 1997년 초여름에 선종하였다.
전경애(1937~)마르타 자매는 은혜실 식구 가운데 유일하게 지금도 생존해 있다. 그녀는 1964년에 급성결핵으로 이곳에 와서 몇 달을 치료하여 완치된 후, 지금까지 어렵고 힘든 공동체의 궂은일들에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한생을 묵묵히 바치며 소화공동체의 맡언니 역할을 하고 있다. 그녀는 ‘복음서에 나오는 마르타’처럼, 주님의 작은 형제들을 섬기는 봉사의 달란트를 받아 어르신들 뒷바라지와 농사일을 하는 등 공동체 가족들을 위해 일하였고, 현재도 집 가족들을 돌보며 함께 생활하고 있다.
(2) 꼭대기집
개원사 꼭대기집, 말 그대로 산중턱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집이다. 위치가 높다보니 사람들의 왕래가 드물었다. 이곳에는 거동이 불편한 척추결핵 환우들 5~6명이 생활하였다. 거동이 불편한 관계로 빨래나 식사 등 일상생활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었다. 그들은 병을 이기려는 노력과 함께 끊임없이 기도하고 주님을 찬미하며 예배드리는데 열중하였다.
이곳에 함께 살고 있던 정은숙(1942~)마리데레사 자매는 그 당시 다리 수술을 몇 번이나 하면서도 성서 읽기와 기도생활을 꾸준히 하며, 틈만 나면 독서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아픈 몸인데도 불구하고 여러 명의 부모 없는 아이들을 올바르게 키우는 일에 갖은 정성을 다하였다. 현재도 변함없이 깊은 신앙과 기도의 삶을 살며 천사의집 자립홈에서 가족들의 친구이자 큰 이모로써 자리를 지키며 열심히 살고 있다
(3) 삿갓집
삿갓집은 지붕이 삿갓처럼 생겼다 하여 그렇게 불렸다. 삿갓집은 매매춘 여성 두 명이 지은 집이다. 집장촌에 있던 중에 김준호 선생의 권유로 그 곳을 벗어나 무등원으로 들어와 본인들이 살 집을 크고 작은 돌들을 모아 지었다. 서툰 솜씨로 울퉁불퉁 돌담을 쌓고 방 한 칸을 만들어지붕을 삿갓처럼 올린 것이다. 이곳에서는 나중에 골 결핵 환우들이 기거하였다.
(4) 식당집
식당집은 개원사 옛 절터 집들 중에서 은혜실 다음으로 큰 집이었다. 신심회 모임이나 회의가 있을 때는 주로 이방에서 이루어졌다. 이곳에서는 간질환우와 중증 장애를 지니고 있는 이들이 기거하였다. 그리고 식당 집에는 창고가 있어서, 시내에서 물건이 들어오면 이곳에 저장해 두었다가 다른 여러 곳의 거처로 물건을 나누어주는 쎈터 역할을 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5) 덕산골 소녀반
증심사에서 원효사로 넘어가는 덕산재에 마실 물이 있는 곳이 있어 집 두 채를 짓고 그 집의 이름을 덕산재라고 하였다. 박옥선을 비롯한 자원 봉사자들과 소녀 반 10여 명이 함께 생활 하였다. 소녀 반 대부분은 부모들이 결핵에 걸려 부모와 함께 살 수 없거나 부모가 없는 어린이들이었다. 자원봉사자들은 어린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돌보았다.
시내 유안동에는 큰 집 한 채가 있었다. 무등산에서 일을 보러 시내에 내려오는 경우에 이곳에 머물곤 했다. 덕산재의 소녀 반 아이들이 학교 통학 문제로 잠시 유안동 집에서 기거하기도 하였다. 당시 소녀 반 아이들은 고명숙, 조동희, 박애자, 임숙희 등이었고 김소례 자매가 돌보았다. 이후 소녀 반이 조봉동으로 거처를 옮겼고, 이들을 위해 김경자 루시아 자매(현 미리내 수녀회 수녀)와 김순화 아네스 자매(현 예수의소화수녀회 수녀) 등이 돌보았다.
3.소망실
당시 원효사 건너편에는 흙으로 지어진 작은 집 두 채가 있었다. 1962년에 지산동 송등원에 있던 남자 결액 환우 10여 명이 이곳으로 옮겨와 살게 되면서 이 집의 이름을 소망실이라 불렀다. 그 옆의 집에는 일반 환우들 7~8명과 오방 최홍종 목사가 함께 생활하였고 식사를 담당해 주는 여자 봉사자들이 기거하였다.
4. 기도실
1958년에는 무등산 상봉 및 800미터 고지에 작은 움막집을 지어 기도실을 마련하였다. 돌담길 뜰에는 색색의 당국화가 곱게 피어있고 기도실 주변을 둘러 싼 우람한 나무들과 어울려, 크고 묵직한 산줄기들 안에서 무언가 성스러운 기운을 느끼게 하는 곳이었다.
이곳 기도실에는 1962년 23세의 젊은 나이에 구도자의 길을 찾아 출가한 윤남님 데레사 자매 (현 예수의 소화 수녀회 총 원장)를 비롯하여, 1963년 18세의 나이로 출가한 장영자 로사 자매 (현 예수의소화수녀회 수녀) 등 건강한 봉사자들이 들어와 생활하였다. 이외에도 구도의 뜻을 지닌 여러 봉사자들이 돌아가면서 생활 하였다. 기도 생활의 밑바탕에는, 김준호 선생과 김은자 마리아의 수도 영성에 대한 깊은 뜻이 이미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이곳에서 하루를 새벽 예배로 시작하여 일식을 하면서 성서와 영적 독서 묵상과 침묵 생활로 규칙을 세워 은수자들의 생활을 동경하며 살았다.
의복도 광목 흰 저고리와 검정치마를 입었다.
노동으로는 나무하기, 밭일, 식량 나르기 등을 하면서 각 분원의 갖가지 필요한 일손을 도왔다. 후에 기도실 근처에 집 한 채를 더 지어, 양성결핵 여자 환우였던 오정순, 김삼례, 김말례 등이 기거하였다.
5.스기밭
스기밭은 무등산 너머 화순 이서 쪽을 향한 무등산 분원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깊은 산 속에 자리 잡은 곳이다. 소망실의 남자 환우들 가운데 기인현 형제는 구도자의 삶을 갈망하여 어렵고 힘든 스기밭으로 자원하여 갔다. 그는 이곳에서 황무지를 일구어 감자, 도라지, 약초, 채소를 가꾸고 닭과 토끼를 기르며 7~8명의 고아, 결핵환우들과 함께 자립생활을 하였다.
식사와 살림은 김길남 어머니가 맡아서 봉사하였다. 기인현 형제는 성인처럼 철저한 고행과 기도, 노동, 극기를 하며 성서 말씀 중심으로 생활하며 그곳의 영적 생활은 물론 일상생활의 책임자 역할을 하였다. 그의 일기에는 하루하루를 반성하고, 한 달을 반성하며, 성경말씀을 암송하면서 고대 성인처럼 절제의 삶을 산 것이 들어났다. 그는 1968년 시내 좁은동으로 내려와 일을 하다 기쁘게 선종하였다.
1996년 1월 31일, 월, 맑음.
이달의 마지막 날이다 나는 이달을 어떻게 보냈으며 무엇을 하였나? 빗자루 매기, 편지 쓰기, 성경 암송, 성경 읽기(창세, 레위, 민수, 신명, 여호수아)
반성할 것은 형제를 미워했다. 탐식함으로 고생, 생각을 위로 좇지 못하고 아래에 머물렀다.
2월에는 무엇을 할까? 1) 2월 중으로 예레미아를 다 읽는다. 2) 성경 암송 베드로 전, 후서 다 외운다. 3)준주성범 매일 읽는다. 4)인생독본 매일 읽는다. 노트하기를 힘쓴다.
오늘로써 이달도 저물어 가는가 봅니다. 주님 이달 안에 지은 모든 죄와 불성실을 다 용서하여 주시고 새 달로써는 보다 주님께 의합한 길로 인도하시옵소서. 약하고 부족하고 게으른 자식의 모든 빈자리를 주님께서 채워주시옵소서. 심령이 보다 새롭고 그 나라 그 의를 추구하는 자로 만드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인현의 일기 중에서.
6. 원제실
광주시 동구 소태동 원제실과 집계봉에는 각각 집 2동이 있어서 결핵환우 5~6명이 기거하고 있었다. 원제실 땅이 구해지는 데는 최흥종 목사와 방안식 장로 어머니의 도움이 컸다. 최흥종 목사가 그리스도적 사랑의 마음을 담아 원제실 땅을 구입하도록 기꺼이 지원해 주었기에 원제실은 그분 일생의 기념탑 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 한 분의 은인인 방안식 장로의 어머니는 평생 모은 돈 10만원을 어느 전도사에게, 그 전도사가 다시 김준호 선생에게 주어 구입한 것이 원제실이다. 그 당시 오 갈 데 없는 결핵환우들이 이곳에 움막을 치고 살다가 선종하였고 그 땅에 묻혔다.
이 외에도 바람재, 권솔재, 금곡동 목장 터에도 5~6명의 결핵환우들과 장애를 가진 거족이 함께 와서 여러 곳으로 나뉘어 살았다.
초창기 환우들의 생활상
그 당시의 경제 상황은 매우 어려워 모두가 궁핍한 생활을 면하지 못하고 있던 시대였다. 궁핍한 생활은 환우들도 마찬가지였다. 주식은 주로 옥수수가루와 밀가루였고, 밥은 보리밥이 특식으로 가끔 제공되었다. 반찬 역시 거친 채소뿐으로 영양가 있는 음식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결핵이라는 병은 치료와 더불어 영양가 있는 식생활을 해야 호전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치 못하였다.
빈곤한 가정들이 가족들을 데리고 입소할 경우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남녀가 갈라져서 공동체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남자와 여자들은 각자 직분을 맡아 봉사하게 되었다. 입소 전 사회적 신분은 달랐지만 그런대로 조화를 이루었다. 부모가 아파서 같이 따라서 들어온 아이들도 많았는데 아이들은 별도로 보모가 맡아 길렀다.
대부분의 환우들은 병원에서도 더 이상 살 희망이 없다고 포기한 차츰 생명이 꺼져가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스스로 혼자 걸어서는 산을 오르지 못할 상황이었기에 변재갑 형제를 비롯한 남성들이 지게로 데리고 오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꺼져가던 생명들도 무등원에 들어와 며칠을 지내고 나면 몰라보게 살이 붙고 생기가 돌았다. 건강이 호전되면서 정신적으로도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야 말로 영육이 본래의 모습으로 다시금 재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 육간에 회복을 보이는 이들이 많았고, 어떤 이는 기쁨으로 죽음을 받아 들여 찬송을 부르며 하늘나라를 보는 가운데 선종하는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변재갑 (1936~) 토마 형제와 장순자 릿다자매는 김준호 선생과는 광주 양림 다리 밑에서부터 잘 알고 지내온 오랜 친구이자 동료요 소화자매원의 뿌리이다. 김준호 선생은 1950년대 광주천 다리밑 걸인생활을 하던 시절부터 그들을 돌보았고 지금까지 인생의 긴 여정을 함께 해 왔다.
김준호 선생의 영적인 위로의 말씀과 김은자 마리아의 따뜻한 사랑의 보살핌과 봉사자들의 희생으로, 절망을 안고 산에 왔던 많은 결핵 환우들이 은혜를 받고 마음의 평화를 얻어 기쁘게 살았다.
봉사자들의 생활상
무등산 곳곳에 작은 그룹의 생활공동체가 하나 둘씩 늘어나면서부터 크고 작은 일거리들이 많아졌다. 양성 환자라 하더라도 노동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건강한 몇 사람이 기본적인 의식주 등 모든 일들을 다 책임져야 했다. 장마 때는 지붕이 새지 않도록 산에 있는 억새풀을 베어 움막집을 덮어야 했다. 또 겨울의 추위를 대비하기 위하여 겨울 동안의 땔감을 준비해야 했으며, 김장준비도 해야 했다. 첫눈이 올 때까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제중병원에서 한 달에 한 번씩 화암부락 옆 도로에 옥수수가루와 밀가루 등 식량과 물건을 내려놓고 가면, 그날 해가 지기까지 공동체의 분원 삼밭실, 덕산재, 스기밭, 권솔재, 바람재 등 공동체 분원에 배정하여야 했다. 이를 위해 몇몇의 남녀 젊은 봉사자들은 온종일 무거운 식량과 생필품을 나르는 일을 하였다.
식량과 생필품을 지게에 지고, 머리에 이고, 서로의 힘을 돋으며 산길을 올라 다녔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도시 변두리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를 방문하여 구호물자를 나누어 주는 일 등 온갖 노동을 감당하였다. 이 때의 지나친 노동으로 인하여 후에 목과 허리의 통증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러한 중에도 공동체 남녀 젊은이들은 김준호 레오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예수님의 정배로서 순결하게 복음적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국의 각 지역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져 산속 외딴 곳에는 돌담집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김준호 선생은 ‘신심회’를 조직하여 매월 소화데레사 성녀의 영성 즉 ‘작음’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난’에 대해 가르쳤다. 가끔은 은혜실 옆 마당에 멍석을 깔고 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등불 삼아 밤늦게까지 성서말씀을 하곤 하였다.
이렇게 무등산 골짜기 어느 곳을 가든지 하느님의 성령이 함께 하시어 은총의 기운이 피어 올랐고, 순수한 믿음으로 예배와 기도가 중심이 되는 생활을 하였다.
김준호 선생은 병들고 갈곳 없는 이들에게 소화데레사 성녀처럼 결핵이라는 고통을 사랑하며 이겨내도록,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하늘나라에 갈 수 있도록 영성운동을 한 것이다. 하느님의 섭리와 김준호 선생의 감화로 많은 봉사자들이 가정에서 출가하여 구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뒤를 이어 많은 봉사자들이 일생을 헌신 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소화공동체의구성원이 되었다.
(1) 최창익 (1937~) 베드로
최창익 베드로는 1959년에 목포 해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 입대 신체검사에서 결핵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는 당시 그의 고모가 봉사하던 동광원을 통하여 김준호 선생과 김은자 마리아로부터 영적 감화를 받고 하느님을 위한 구도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젊은 청년 봉사자이다. 그는 김준호 선생을 도와 오른팔처럼 일을 하며 무등원에서 살게 되었다.
초창기 무등산의 흙집을 짖는 일, 장례 치르는 일 등 어디에나 그의 손길이 닿았고 새로 시작한 분원마다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였다. 그는 담양 산성, 전주 등지에서 자립생활을 시작하는데도 큰 몫을 하였다. 한 동안 하루에 한 끼만 식사하면서, 아무리 힘든 노동일을 하여도 새벽 4시 예배와 밤 예배를 늦게 까지 주관하는 열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구호의 손길이 끊긴 1970년대 가장 어려운 시기에 결핵환우들과 함께 의식주를 해결하고자, 기독병원에서 잔반을 리어카에 실어 날라 돼지를 키우는 일 등을 묵묵히 신앙으로 이겨나갔다. 공동체를 어떻게 해서든지 남의 도움 없이 일으켜 세워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였으나 돼지값 파동으로 빚을 지게 되어 커다란 심적 고통을 겪기도 했다.
(2) 박옥선 막달레나
박옥선 (1932~) 막달레나는 젊은 나이에 혼자되어 어린 두 남매를 둔 미망인이었다. 인정이 많고 헌신적이며, 마음이 너그럽고 큰 여장부였다. 그녀는 주방과 개원사의 온 집안 살림을 맡아 총괄하였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어려울 수밖에 없는 살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뒤치다꺼리를 군말 없이 척척해 나갔다. 맡은 일에 충실하며 많은 식구들을 거느리고 지혜롭게 모든 문제를 잘 풀어나가는 아주 믿음직한 살림꾼이었으며, 또한 김은자 마리아를 잘 보필하는 큰 일꾼이었다.
당시 무등산 곳곳에 염소를 키우고 있었다. 문제는 이 염소들 때문에 채소 한 포기 제대로 심어 먹을 수 없는 생활이었다. 시내에서 조달해 오는 반찬거리는 항상 부족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박옥선 막달레나의 살림 솜씨에 힘입어 그 큰살림을 무리 없이 꾸려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루 하루가 기적 같은 나날이었다.
식량은 밀가루와 옥수수 가루가 주식이었고 쌀은 금싸라기와 같이 귀했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배급되던 콩기름은 풍부해서 구운 빵을 자주 먹을 수 있었다. 박옥선 막달레나는 큰 손으로 찐빵과 구운 빵을 넉넉히 만들어서 명절이나 신심회, 식구들이 모였을 때 잔치를 베풀곤 하였다. 그 중에서도 도토리 빵은 아주 일품이었다. 가을에 무등산 곳곳에 널려 있는 도토리를 주워 일 년 내 내 빵을 만들어 공동체 식구들의 끼니를 때우곤 하였다. 도토리 빵은 식량이 부족한 시절에 큰 보탬이 되었는데 쪄서 말린 도토리를 잘 불려 삶아 담가두었다가 그것을 으깨어 밀가루를 섞어 반죽한 다음, 손바닥만하게 빵을 만들어 쪄 놓으면, 모양새는 마치 소똥처럼 보였는데 맛은 기가 막히게 좋았다.
금성산성에서의 생활
1960년~1965년 담양군 금성산성에서 공동체 생활이 시작되었다. 구도의 뜻을 갖고 출가한 자매들과 급성결핵이 치유된 많은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함께 살았다.
김준호 선생은 공동체 식구들이 늘어나 구호 식량에만 의존하여 생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젊은 청년들과 부모와 떨어져 생활하는 청소년들을 담양에 있는 금성산성 안(논과 밭이 있었음)으로 파견하여 농사를 짓고 뽕나무를 가꾸어 누에치기를 하면서 자립생활과 영성생활을 하도록 하였다.
흙담집 3동에 남, 여 30~40명이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새벽 4시 아침 예배로 하루를 시작하여 저녁 예배 시간 까지 고된 노동을 하면서도 깊은 기도와 예배중심의 생활을 하였다. 최창익 베드로 형제를 비롯하여 몇 몇 자매들은 가끔씩 하루 일식으로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성인들의 삶을 본받고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을 다 하였다. 농사를 지어 광주 본원의 공동체 식구들을 도와 살게 하려는 의지와 자립의 열정으로 힘든 노동을 감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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