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란
Quiet Time의 준말로, '경건의 시간'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QT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내용은 없으나, 여러 정황을 볼 때 위대한 신앙인들은 QT를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면하여 이야기했다고 하였으며(출 33:11), 다윗은 시편에서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2)"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새벽이 밝기 전에 하나님과 교제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막 1:35).
이처럼 QT를 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하지만 QT를 할 때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경이 재미없게 느껴질 때도 있고, 읽기는 읽는데, 어떻게 읽어야 할지, 읽고난 뒤 무엇을 해야할지 잘 모를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바벨론의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다(시 137:9)."와 같은 구절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무척 난감합니다. 어린아이를 바위에 메치라는 말씀을 읽으며 어떻게 묵상하고,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QT의 방법론〉이 필요할 때입니다. QT를 하는 방법에는 크게 4가지가 있습니다.
[2] 경험주의적 해석
두 번째 방법은 경험에 비추어 말씀을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QT를 한다는 건 어쨌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뜻이고, 이는 자신의 삶을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해석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 인생을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QT에 적용하는 방식이 경험주의적 해석 방법입니다. 경험주의적 해석은 오늘 주신 말씀을 내가 살면서 경험한 내용에 비추어 살펴보는 것입니다. 가령 살아오면서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다."라는 점을 어렴풋이나마 경험했을 겁니다. 이때, 고린도전서 13장을 읽으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이 어떠한지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고, 자랑하지 않으며……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 혹은 내가 잘못했을 때 하나님께서 잘못을 깨닫게 한 경험이 있다면,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시 18:27)라는 구절을 묵상하며 내가 겪었던 일화를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경험주의적 해석은 과거의 삶을 기독교적으로 되돌아보는 방법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묵상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경험주의적 해석의 약점은 과거의 경험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새신자(새가족)과 같이 하나님에 대해 아는 지식이 제한적이라면 경험주의적 해석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3] 하나님의 속성 탐구
세 번째 방법은 '교훈주의적 해석'에서 더 나아가고, '경험주의적 해석'을 보완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묵상법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어떠한 일을 하셨는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즉, 하나님의 속성을 탐구하는 방법입니다. 사실 신앙의 연차가 많은 사람은 경험주의적 해석이 더 쉽기 때문에, 마치 관성의 법칙처럼 묵상할 때마다 '내가 아는 하나님'만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성 탐구 방법은 경험주의적 해석 방법과 반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방법으로는 저 난해한 구절, "눈이 범죄하게 하거든 눈을 빼어 내버려라."를 좀 더 풍부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일까요? ① 하나님은 눈으로 지은 죄도 심판하실 만큼 정의로우시고, ② 심판 받아 가게 될 지옥은 그만큼 고통스럽다는 뜻입니다. 또, ③ 하나님은 우리가 이 지옥에 가지 않길 원하시기에 끊임없이 경고하시는 분입니다. 이를 통해 심판하시고, 정의로우시며,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QT가 상당히 흥미로워집니다. 똑같은 구절, 똑같은 말씀인데 매일 조금씩 다르게 보입니다. 내가 아는 지식과 일치하는 혹은 다른 하나님의 속성을 깨달으며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알아가는 재미가 있습니다. 또한 이 방법은 QT를 하며 가장 풍성한 은혜를 느끼게 하는 네 번째 방법으로 이[4] 예수중심적 해석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한 책입니다. 한 신학자는 "구약에 있는 모든 구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는 뜻인 만큼, QT 역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방식으로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방법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탐구하였습니다. 정의로우시고 심판하시며 경고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새로운 속성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경외심과 흥미로움을 불러 일으키지만 동시에 공포감을 주기도 합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인됨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지만, 그 심판을 대신 받으신 이가 그리스도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벨론의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들은 복이 있다"는 구절을 생각해 볼까요? 여기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은 악인에 대해서 인정사정없이 가혹하게 심판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어린 것들'은 동시에 나 자신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악(惡)이 바벨론의 어린 것들보다 덜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바위에 메어쳐질 사람은 나 자신이었지만, 예수님께서 나 대신 바위에 메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가혹하지만, 그 심판은 우리가 받지 않아도 됩니다. 이를 통해, 처음 거듭날 때 느꼈던 십자가 은혜와 사랑을 다시금 만끽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감격과 기쁨이 계속 쌓일 때, QT가 삶에 주는 영향력은 점점 커집니다. 심판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셨는데,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는데,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로 근심과 걱정에 시달릴 이유가 있을까요? 물론 당장은 이 모든 고민과 어려움을 끊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속적인 QT는 마치 누룩이 빵을 부풀게 하고 겨자씨가 무성한 나무를 이루듯 신앙과 삶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칩니다.
QT란 Quiet Time의 준말로, '경건의 시간'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QT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내용은 없으나, 여러 정황을 볼 때 위대한 신앙인들은 QT를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면하여 이야기했다고 하였으며(출 33:11), 다윗은 시편에서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2)"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새벽이 밝기 전에 하나님과 교제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막 1:35).
이처럼 QT를 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하지만 QT를 할 때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경이 재미없게 느껴질 때도 있고, 읽기는 읽는데, 어떻게 읽어야 할지, 읽고난 뒤 무엇을 해야할지 잘 모를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바벨론의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다(시 137:9)."와 같은 구절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무척 난감합니다. 어린아이를 바위에 메치라는 말씀을 읽으며 어떻게 묵상하고,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QT의 방법론〉이 필요할 때입니다. QT를 하는 방법에는 크게 4가지가 있습니다.
[1] 교훈주의적 해석
가장 기초적인 방법입니다. 성경 말씀의 표면적인 내용을 그대로 적용하는 방법으로, 가장 단순하고 명쾌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가령 다윗이 우리아를 대리 살인하고, 밧세바와 불륜을 저지른 사건을 보고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자."라는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혹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람의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고 다윗을 왕으로 세운 사건을 묵상하며 "외모가 아니라 사람의 중심을 보자."와 같은 교훈을 이끌어 낼 수도 있죠.
오늘글이예요 주말 잘들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