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유조선 좌초로 갈라파고스 제도 오염피해 극심
2001년 오늘, 남미 에콰도르에서 서쪽으로 960km 떨어진 갈라파고스 해역에서 유조선이 좌초됐다.
이 사고로 원유 600여 톤이 유출됐다. 기름띠가 퍼진 면적이 1,200㎢에 이르렀다.
생태계의 보고(寶庫)로 알려진 갈라파고스제도의 여러 희귀 동식물이 큰 피해를 입었다. /YTN
[1992년] 엘살바도르 정부와 반군, 12년 만에 평화협정 체결
엘살바도르 정부와 반군대표들이 1992년 1월 16일 평화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지난 1981년부터 12년 동안 지속해온 내전종식에 합의했다. 알프레드 크리스티아니 대통령이 이끄는 엘살바도르 정부측과 좌익 반군인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NLF) 협상대표들은 휴전발효시기가 2월 1일부터라고 발표했다.
그동안 케야르 유엔사무총장 중재로 유엔본부에서 휴전협상을 벌여온 양측은 지난 1월1일 내전종식을 원칙 합의한 바 있다. 정부측은 평화협정 체결에 따라 사회개혁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그간 반정부 인사 탄압에 이용되고 있다고 비난받아온 기존 경찰기구를 해체하고 반군측 병력을 일부 흡수, 새로운 경찰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조선
[1991년] 연합군, 이라크에 공중폭격 개시
← 사담 후세인(صدام حسين عبد المجيد التكريتي )
1991년 1월 16일 미군을 위시한 연합군이 이라크에 공중폭격을 개시했다. 역사적으로 이라크는 쿠웨이트와 국경선 확정 문제를 놓고 여러 차례에 걸쳐 국경 분쟁을 겪었는데, 이들 분쟁지역 중 특히 페르시아 만 어귀에 위치한 와르바와 부비얀 섬은 페르시아 만 지역의 세력 균형을 변경시킨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페르시아 만 연안지역의 전략적 요충지로서 이라크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90년 8월 2일 사담 후세인은 이들 분쟁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는 무역금지 조치 등의 제재를 통해 이라크 군이 철수할 것을 요구했으며,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군은 사우디아라비아에 군대를 파병했다. 후세인은 안전보장이사회의 철수 요구를 끝까지 거부했다. 1991년 1월 16일부터 시작된 공중폭격으로 이라크의 통신시설, 무기고 등 여러 시설이 파괴되었다.
[1982년] 국전을 대한민국미술대전으로 개편
1949년부터 1981년까지 30회를 열었던 대한민국미술전람회(大韓民國美術展覽會, 國展)를 1982년 1월 16일 대한민국미술대전(大韓民國美術大展)으로 개편하면서 기성작가전과 분리하여 순수한 작가 발굴 및 육성을 위하여 새로운 제도를 실시하였다. 초기에는 반관반민(半官半民) 형태로 운영되다가 이후 한국미술협회가 주관하였고, 1986년부터는 기존 국전의 10개 부문 중에서 사진과 건축 부문은 각 해당협회가 독자적으로 운영하도록 이관하였으며, 동양화 ·서양화 및 조각의 구상 ·추상 구분을 폐지, 통합하였다.
전시회는 봄과 가을로 나누어 개최되는데, 봄에는 서예(사군자 포함) ·공예 부문, 가을에는 회화 1-한국화, 조각 및 회화 2-양화(洋畵) 부문으로 구분하여 열린다. 작품심사는 입선작품 심사위원회와 특 ·수상작품 선정심사위원회로 2원화하고, 각 위원회의 구성은 부문별 7인 이내로 구성하되 전문가의 자문을 거쳐 주최측에서 위촉하며, 작품심사는 공개적으로, 심사위원별 채점은 기명비밀로 한다. 시상은 각 부문별로 대상과 우수상을 각 1점씩 뽑고 상금과 매입을 일원화하여 매입 상금제로 시상한다. 또한 대상 수상자는 해외연수의 특전이 주어진다.
특징은 회화를 동양화 ·서양화로 구분했던 것을 공식적으로 한국화 및 양화로 개칭한 것과 민간단체에서 주관하는 순수한 작가 발굴을 위한 미술대전이라는 점에 있다. 1993년 제12회때부터는 1부 비구상(봄 개최), 2부 구상(가을 개최) 계열로 분리 실시하고 시상도 전부문에서 1명의 대상 수상자만을 선정하였다. 한국 최대 규모의 신인미술작가 등용문으로 국전의 맥을 잇고 있다. /naver
[1979년] 모하마드 레자 샤 팔라비 이란 국왕 망명
← 레자 샤 팔라비
1979년 1월 16일 이란의 모하마드 레자 샤 팔라비 국왕이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팔라비 왕가를 세운 레자 샤 팔라비의 큰아들로 미국의 원조 아래 경제발전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는 백색혁명으로 불린 국가발전 계획에 착수했는데, 이 계획에는 도로와 철도, 항공망의 확장과 건설, 수많은 댐 건설과 관개사업, 말라리아와 같은 질병의 퇴치, 공업발전에 대한 지원과 장려, 그리고 토지개혁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부패한 정부에 대한 비난과 함께 국가발전 과정에서 소외된 종교지도자들과 하층민, 시장 상인 등의 불만이 팽배해졌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에 의해 강제 출국되었던 호메이니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란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와 파업이 일어났다. 이 여파로 샤는 망명했으며, 호메이니가 이란혁명의 종교지도자로 추대되었다. 호메이니는 친서방정책을 버리고 이슬람교를 근본으로 한 강력한 신권 지배 정책을 폈다.
[1969년] 소련 소유즈 4호와 5호간에 첫 우주 도킹 성공
최초의 우주선 랑데부는 1965년 12월 15일 미국의 제미니 6호(65년 12월 15일 발사)와 제미니 7호(65년 12월 4일 발사)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이어서 제미니 8호는 1966년 3월 16일 표적용 무인우주기 아제나와 처음으로 도킹하였다. 소련에서도 소유즈 4호(1인 탑승, 69년 1월 14일 발사)와 소유즈 5호(3인 탑승, 69년 1월 15일 발사)의 도킹에 성공하고, 5호의 탑승원 2명이 4호로 옮겨탔다. /naver
[1968년] 소설가, 목사 전영택 사망
1894. 1. 18 평남 평양~1968. 1. 16 서울.
가난하고 착한 사람들을 등장시켜 사실주의적 수법으로 따뜻한 인간애를 그려냈다. 본관은 담양(潭陽). 호는 늘봄·추호(秋湖)·장춘(長春)·불수레.
아버지 석영(錫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910년 평양대성중학교 3년을 수료하고 진남포 삼숭학교에서 잠시 교사로 근무했다.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 고등부 문과를 거쳐 1918년 아오야마학원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곧 신학부에 입학했다. 이때 김동인·주요한·김환 등과 한국 최초의 문예동인지인 〈창조〉 동인으로 참여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도쿄[東京]에서 진행된 유학생독립선언에 참여했으며, 잠시 귀국하여 채혜수와 결혼했다. 일본에 다시 건너가 1922년 신학부를 졸업한 뒤, 서울에 있는 협성신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1927년 아현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다가 1930년 미국으로 건너가 퍼시픽 신학교에 입학하고 재학시절 흥사단에 입단했으며, 1932년 수료하고 귀국했다. 그리스도교 잡지 〈새사람〉·〈예수〉의 발간에 힘썼고, 일제 강점기말에는 평양 근교에 숨어살며 목회했다. 8·15해방 이후 1946년 미군정 문교부 편수관, 1947년 국립맹아학교 교장, 1948년 중앙신학교 교수, 1949년 감리교신학교 교수, 1954년 대한기독교서회 편집국장 등 학계와 언론계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다. 1961년 한국문인협회 초대 이사장과 1963년 기독교계명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1968년 종로에서 교통사고로 죽었으며, 크리스천 문학가협회의 주선으로 경기도 금촌에 묘비가 세워졌다.
[1957년] 이탈리아 지휘자 토스카니니 사망
← Robert Hupka가 촬영한 토스카니니.
‘엄격한 악보 제일주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1957년 1월16일, 90세로 뉴욕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그가 지휘를 그만 둔 것은 1954년 4월4일, 뉴욕 카네기홀에서 가진 NBC교향악단과의 공연 중 지휘봉을 놓치면서였다. 잊을 수 없는 날이었지만 NBC교향악단이 그의 은퇴를 기념해 10월에 마련해준 ‘지휘자없는’ 공연은 전례도 없었을 뿐더러 토스카니니에게도 더더욱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순간이 됐다.
토스카니니가 추구한 음악세계는 ‘음의 객관화’. 연주자 개인 감정의 군더더기,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하에 이뤄지는 음·템포·리듬에 대한 자의(恣意)적인 해석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오직 작곡가의 의도에만 충실하려 한 그의 지휘는 음악을 객관적인 궤도에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런 지휘를 빗대 ‘군악대장’이라며 꼬집었다.
19세에 대타(代打)로 지휘대에 올라 악보를 보지 않고 성공리에 지휘해 스타덤에 오른 토스카니니는 31세 때 꿈에 그리던 그의 고향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 상임지휘자로 발탁됐다. 그는 리허설 때 단원들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휘봉을 꺾거나 단원의 악보를 찢어버리는 괴팍한 성격으로도 유명했다. 지휘봉이 부러지지 않으면 애꿎은 손수건이나 웃옷이 찢어졌다. 삐끗하거나 틀린 음이 발견되면 지체없이 ‘노!노!’ 불호령을 토해내 단원들은 그를 ‘토스카노노’라고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늘 쉬어있었다고 한다. 공연을 보러온 무솔리니가 파시스트 찬가(讚歌)를 요청하자 그 자리를 뛰쳐나가 결국 무솔리니가 고집을 굽혔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1948년] 한국 최초의 오페라 '춘희' 공연
← 1948년 1월 16일, 명동 시공관에서 열린 ‘춘희’ 초연 모습.
한국 최초의 오페라 ‘춘희(椿姬)’가 1948년 1월16일 명동 시공관에서 초연됐다. 의사이자 성악가였던 이인선이 제작·번역·남자주인공의 1인3역을 소화했고, ‘한국 오페라의 대모’ 김자경이 마금희와 함께 여자주인공 ‘비올레타’역을 맡아 한국최초의 ‘프리마 돈나(prima donna)’가 됐다. 연출은 서항석, 지휘와 연주는 임원식과 고려교향악단이 맡았다.
5일동안 전회(10회) 매진을 기록하며 무성한 화제를 불러일으켰지만 제작자가 ‘숫자’에 밝지 않다보니 집과 피아노를 처분해야 했다.
한번 ‘춘희’는 ‘영원한 춘희’였다. 김자경이 오페라에 눈을 뜬 것도 ‘춘희’였고, 그가 1968년 창단한 ‘김자경오페라단’이 첫 작품으로 올리고, 김자경이 세상을 뜨기 석 달 전 마지막으로 공연한 것도 ‘춘희’였다. 김자경은 자서전에서 “‘춘희’가 이어준 오페라와의 인연으로 오페라에 살고 죽는 ‘오생(生) 오사(死)’ 인생을 살았고, ‘오씨 성에 이름이 페라’인 오서방과 결혼했다”고 말했다.
알렉산더 뒤마의 소설을 원작으로 베르디가 오페라로 만든 ‘라 트라비아타’는 이탈리아어로 ‘엇나간 여자’라는 뜻. 일본인이 ‘춘희’라 의역한 것을 우리가 그대로 따르면서 이 땅에도 ‘춘희’란 이름이 정착됐다. ‘라 트라비아타’가 초연된 것은 1853년 3월6일 베네치아에서였다.
[1944년] 시인·독립운동가 이육사(李陸史) 사망
← 저항시인 이육사
‘내고장 칠월은 /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 주절이 열리고 /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1904. 4. 4 경북 안동~1944. 1. 16 중국 베이징[北京].
항일운동가로서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염원하는 시를 썼다. 본관은 진보(眞寶). 본명은 원록(源祿). 자는 태경(台卿). 이명은 원삼(源三)이었으나 뒤에 활(活)로 바꾸었다. 아호인 육사는 대구형무소 수감번호 264에서 따온 것이다.
이황(李滉)의 14대손으로 아버지 가호(家鎬)와 어머니 허길(許吉) 사이의 5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예안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대구 교남학교에 잠시 다녔다. 1921년 안일양과 결혼한 뒤 1925년 형 원기(源琪), 동생 원유(源裕)와 함께 항일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으며, 그해 10월경 의열단의 임무를 받고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1926년 잠시 귀국해 일제에 억압받는 민족현실을 괴로워하다가 중국으로 가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사훈련을 받았다. 1927년 국내에 들어왔다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이후 10여 차례 투옥되었다. 1929년 출옥하자마자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적을 두고 만주와 중국을 돌아다니며 독립투쟁을 벌였다. 1933년 귀국해 신조선사 등의 언론기관에 근무하면서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를 발표했으며, 1937년에는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시동인지 〈자오선〉을 펴냈다. 1941년에는 폐결핵으로 한동안 요양생활을 했다. 베이징과 서울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4월 서울에서 검거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이듬해 건강이 악화되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베이징 감옥에서 죽었다. 일제 말기 대부분의 문인들이 변절하여 친일행위를 한 반면 그는 끝까지 민족적인 신념을 가지고 일제에 저항했다. 유해는 고향인 낙동강변에 안장되었고 1964년 경상북도 안동에 시비가 세워졌다.
[1929년] 의성단장 편강렬(片康裂) 순국
1892(고종 29) 황해 연백 ~ 1928.
호는 애사(愛史). 아버지는 상훈(相薰)이다. 을사조약 체결 후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에 입대했다. 용략이 비범출중하여 1907년 선봉장 겸 소모장이 되었다. 1908년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 부대를 이끌고 동해안을 돌아 경기도 양주에 진입하여 일본군과 3일간 격전을 벌였으나 패배했다. 이때 전투에서 부상당해 일단 귀향했다. 1910년 평양 숭실학교에 재학중 '105인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복역했다. 출옥 후 광복단(光復團)에 가입하여 동지를 규합하면서 활동하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 지방의 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동생 덕렬(德烈)을 상하이[上海]에 파견하여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던 중 '구월산주비단사건'에 관련되어 해주감옥에서 복역했다. 출옥 후 국내 각지의 일제기관을 파괴하기 위해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들과 연락을 취하기로 하고 김경배(金庚培)·김태규(金泰奎)·조종호(趙鍾鎬) 등과 함께 만주로 건너갔다. 1923년 회덕현(懷德縣) 오가자(五家子)에서 양기탁(梁起鐸)·남정(南正) 등과 함께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하여 단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단원들과 함께 창춘[長春]의 일본 기관을 습격하고 펑톈[奉天]에서는 시가전을 전개하기도 했다. 1925년 만주 전체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하여 새 단체를 만들기 위해 활동하던 중 밀정의 밀고로 하얼빈(哈爾濱)에서 체포되었다.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신의주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척추염이 발병하여 병보석되었으나 1928년 만주의 안둥적십자병원[安東赤十字病院]에서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23년] 소설가·아동문학가 방기환(方基煥) 출생
1923. 1. 16 서울 ~ 1993. 1. 9 서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중등교원양성소를 수료했다. 1947년 어린이잡지 〈소년〉을 창간했고, 1954년 학생잡지 〈학생계〉 편집장을 지냈다.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중앙위원, 한국문학가협회 사무국장, 한국문인협회 간사 등을 역임했다. 1944년 극단 청춘좌 현상모집에 희곡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46년에 아동잡지 〈소년〉에 소년소설 〈꽃필 때까지〉를 발표했고 아동극집 〈손목 잡고〉(1949)를 낸 뒤 단편 〈뱀딸기〉(문예, 1950. 3)·〈파괴〉(문예, 1954. 3) 등의 소설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사소설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영웅·역사 소설에 관심을 갖고 〈왕손 王孫〉(문학예술, 1956. 9)·〈단종역란 端宗逆亂〉(대구매일신문, 1966. 1~1968. 12)을 발표했다. 냉담한 현실 속에서도 따뜻한 인간애를 잃지 않는 문학세계를 보여주었다. 소설집으로 〈동첩 童妾〉(1952)·〈옥루몽 玉樓夢〉(1961)·〈초한전기 楚漢戰記〉(1962)·〈어우동 於于同〉(1979)·〈이벽 李蘗〉(1983) 등과 동화집으로 〈나의 집〉(1963) 등이 있다.
[1916년] 서정시인 박목월(朴木月) 출생
1916년 1월 16일 태어남 / 1978년 3월 24일 죽음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박목월, <나그네>
박목월은 김소월과 김영랑을 잇는 향토적 서정의 시인이다. 1916년 경상북도 경주에서 태어났고 본명은 영종(泳鍾)이다. 1939년 문예지 <문장 文章>에 <길처럼>·<그것은 연륜이다>가 추천됨으로써 시단에 등장했다. 정한모는 그의 시에 담긴 자연에 대해 '향토적인 현실의 풍경이 아니라 공간을 초월하여 살아 있는 상징적인 실재(實在)로서의 자연'이라고 평하고 있다. 또한 <문장>에 청록파 시인들을 추천한 정지용 역시 박목월의 <윤사월>·<청노루>·<나그네> 같은 시들을 보고 '북에 김소월, 남에 박목월' 이라고 격려했다. 주요 시집에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낸 <청록집> 이외에 <산도화 山桃花>·<경상도 가랑잎> 등이 있으며, 수필집 <토요일의 밤하늘>과 전기 <육영수 여사>가 있다. 동시 부문에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1916년] 소설가 이봉구(李鳳九) 출생
1916. 1. 16 경기 안성 ~ 1983.
1933년 안성보통학교를 거쳐 중동중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에서 농촌계몽사업을 벌였다. 1935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서 청강하다가 소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38년 귀국하여 한때 서점을 경영했으며 1943년 매일신보사에 입사한 뒤, 〈서울신문〉·〈태양신문〉·〈경향신문〉 등에서 근무했다. 1974년 고혈압으로 쓰러지고나서는 작품을 거의 쓰지 못했다. 1935년 〈조선중앙일보〉에 소설 〈메물〉·〈봉사꽃〉 등을 발표했고, 귀국하여 한때 오장환·김광균·서정주 등과 〈시인부락〉·〈풍림〉·〈자오선〉의 동인으로 활동했다. 1936년 〈조선문학〉 6월호와 11월호에 〈광풍객〉·〈아편〉 등을 발표했으며 〈명동의 엘레지〉(백민, 1950. 2)·〈여수 旅愁〉(서울신문, 1956. 11~12)·〈밤길〉(자유문학, 1961. 7)·〈뻐꾹, 뻑뻐꾹 소리〉(현대문학, 1976. 10) 등을 발표했다. 명동의 술집이나 다방을 배경으로 실제 인물인 시인이나 소설가들의 감상적 이야기를 썼다. 실제 반평생을 명동에서 지냈으며 사람들에게 명동시장(明洞市長)이라고 불릴 정도로 명동을 좋아했다. 소설집으로 〈명동 20년〉(1966)·〈도정 道程〉(1972)·〈명동 비 내리다〉(1978) 등이 있다.
[1915년] 소설가 김만선(金萬善) 출생
1915. 1. 16 서울 ~ (월북)
배재고등보통학교에서 수학했다. 1935년 조선중앙일보 기자로 활동했으며 194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홍수〉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했다. 해방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했으며, 이후 월북했다. 그는 활발하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꾸준히 작품활동을 했다. 1946년 2월 〈조선주보〉 제10호에 〈절름발이 돌쇠〉를 발표했으며, 1948년 동지사에서 〈압록강〉이라는 제목의 창작집도 간행했다. 1946년 7월에 발표한 〈한글강습회〉는 해방 후 귀국 직전의 단계를, 〈압록강〉은 귀국길에 올라 있는 단계를 다룬 것이며, 〈귀국자〉·〈노래기〉·〈어떤 친구〉·〈형제〉 등은 귀국 이후에 제기된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중국적〉은 아직 본격적인 귀국의 물결이 일기 전인 해방직후의 시기를 배경으로 하여 부정적인 한국인상과 당대의 혼란상을 결부시켜 쓴 작품이다. 그는 창작에 있어서 체험을 중요시했다. 이런 사실은 다음과 같은 2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 그의 소설에 나오는 해방직후의 만주 풍경과 귀국자들의 내면 풍경에 대한 기록이 사실적이란 점, 즉 그의 작품들이 그 시대의 중요한 측면에 대한 성실한 증언으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그의 작품들이 해방의 감격을 추상적으로 혹은 도식적으로 강하게 내세우지 않고 냉정하게 그 현장의 명암을 직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에게는 해방을 맞이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신진작가에게서 으레 나타날 만한 생경한 흥분의 기미가 전혀 없고 침착하고도 정확하게 관찰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이는 작가가 체험의 공간을 자신의 주된 문학적 기반으로 선택한 데에 크게 힘입은 현상으로 보인다.
[1909년] 오스트레일리아의 남극탐험가 모슨(Mawson, Douglas) 남극점에 도달
1882. 5. 5 ~ 1985. 10. 14
모슨은 남극탐험으로 전세계적인 찬사를 받았다. 모슨은 1902년 시드니대학교에서 광산공학학사학위를 받았으며, 1909년 뉴사우스웨일스 서부 중앙에 있는 브로컨힐 광산의 야외답사 연구로 과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07년에는 어니스트 헨리 섀클턴 경의 남극탐험대에 과학연구원으로 참가해, 1909년 1월 16일 T. W. E. 데이비드와 함께 빅토리아랜드 빙하고원의 남자기극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이 획기적인 여행을 썰매를 타고 해냈다. 모슨는 그뒤 1911~14년 오스트레일리아 남극탐험대를 지휘했으며 1929~31년에는 영국·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의 연합탐험대를 이끌고 남극탐사를 실시했다. 그의 탐험으로 오스트레일리아는 남극대륙 가운데 약 647만㎢에 달하는 면적을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탐험가이자 과학자로 많은 업적을 세운 모슨는 1914년 기사작위를 받았다. 또한 다른 많은 활동 이외에도 22권의 〈오스트랄라시아의 남극탐험 보고서 Reports of Australasian Antarctic Expeditions〉를 편집·집필했다. 이 책과 더불어 또 하나의 유명한 저서로 〈눈보라의 본원 The Home of the Blizzard〉(1915)이 있다. /브리태니커
[1903년] 시인 김영랑(金永郞, 김윤식) 출생
1903. 1. 16 전남 강진~1950. 9. 29.
절제된 언어로 민요적 운율의 시를 썼다. 본관은 김해. 본명은 윤식(允植).
지주인 아버지 종호(鍾湖)와 어머니 김경무(金敬武) 사이의 5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마치고 이듬해 결혼했으나 1년 반 만에 아내를 잃었다. 그해 어머니의 도움으로 서울에 올라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배우다가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했다. 휘문의숙 3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 학교를 그만두고 강진에서 의거하려다 체포되어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 학원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서 공부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유학중 무정부주의 혁명가인 박열과 사귀었고 괴테, 키츠 등의 외국문학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뒤 고향에 머물면서 1925년 김귀련(金貴蓮)과 재혼했다. 1930년 정지용과 함께 박용철이 주재하던 〈시문학〉 동인으로 참여했다. 일제 말기에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는 곧은 절개를 보여주었다. 8·15해방 후 강진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결성하고 대한청년단 단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49년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내는 등 우익보수주의자의 입장에서 정치에 참여했다. 평소에 국악이나 아악, 서양명곡을 즐겨 들었다. 비교적 여유있는 삶을 살다가 1950년 9·28수복 때 유탄에 맞아 죽었다. 묘지는 서울 망우리에 있고, 광주광역시에 있는 공원에 시비가 세워졌다.
[1584년] 조선 중기의 학자, 정치가 이이(李珥) 사망
← 율곡 이이(李珥)가 청주목사로 재임시 제정 실시한 서원향약 외 사창법절목이 수록된 율곡별집.
1536 ~ 1584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석담(石潭), 시호 문성(文成), 강원도 강릉 출생이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이다.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년(선조 9)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 사업에 종사하였는데, 그동안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교육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 등 전보다 한층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 무렵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고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과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naver
그 밖에
2000년 칠레 대통령에 리카르도 라고스 당선
1998년 영화 촬영감독 유영길씨 별세
1987년 호요방 중국공산당 총서기 사임
1983년 터키 여객기 추락. 46명 사망
1982년 한국-쿠웨이트 항공협정 발효
1982년 폴란드 군정, 언론 대수술(42개 일간지를 22개사로 통폐합)
1981년 미국, 대륙간탄도미사일요격용 레이저광선무기실험 성공
1976년 한-영-캐나다 3국, 원자력 3호기 건설차관협정 체결
1971년 일본 재일동포 영주권 신청 마감
1967년 한국, 베트남 민간항공협정 체결
1964년 아시아태평양이사회(ASPAC) 가입
1962년 혁명재판소, 부정축재조사단 사건의 양인현에 사형, 정태영에 무기, 기타 5명에 최고 20년 언도
1962년 제6차 한일회담 재개
1962년 도미니카에 쿠데타
1951년 중국, 유엔의 한국전 정전안 거부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
1924년 소작쟁의로 농민 500여명 광주경찰서 습격
1922년 조각가 문신 출생
1913년 영국, 의원법 적용에 의해 아일랜드 자치법안 의결
1893년 하와이에 쿠데타. 미국 해병대 투입
1853년 영국의 배우 포브스 로버트슨 출생
1836년 마지막 나폴리 왕 프란체스코2세 출생
1545년 독일의 다작(多作) 작가 조지 슈팔라틴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