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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주월(베트남) 한국군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예비역 중장이 28일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사병묘역에 안장됐다. 국립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묻힐 수 있었지만 “사랑하는 파월장병 곁에 묻어 달라”는 고인 유지에 따라 서울현충원 사병묘역에 안장된 것이다. 건군 사상 국군 장성이 사병묘역에 묻힌 것은 처음이다. 고인의 남다른 전우애를 느낄 수 있다. 양갈보 고지 전투 6·25전쟁시 채명신 장군이 7사단 5연대장으로 이 고지 점령에서 후배 전투부대 지휘관들이 배워야할 첫 째는, 난공불락의 어려운 고지 공격을 포병을 동원한 교묘한 기만전술로 점령할 수 있었던 극히 창의적인 공격전술이다. 둘 째는, 부하의 인명을 중시하는 지휘관이자 전투에 앞서 면밀히 정찰하고 분석하는 전략가인 명장 채명신 장군의 자세다. 채명신 장군은 북한에서 교편을 잡다가 월남하여 육사 5기로 임관, 제주도 4.3사태 때부터 월남전까지 수없이 생사가 엇갈린 전장을 누빈 역전의 지휘관이다. 그만큼 실전을 풍부히 겪은 군인도 드물었었고 또 그가 지휘한 전투에서 항상 승리를 거둔 상승장군이기도 했다. 그는 1951년 2월 600명의 백골병단 유격대를 이끌고 적 후방에 침투하여 두달간 종횡무진 활약한 뒤 7사단 5연대 부연대장으로 부임했다. 이 5연대는 창설 이래 전투에서 자주 패해서 왔다갔다 연대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계속 문제를 일으켜 1년간 연대장이 6번이나 채장군의 상관 김용배 대령도 전사하자 모두 겁을 먹고 아무도 후임 연대장으로 부임하려고 하지 않았다. 사단장은 할 수없이 1951년 8월 부연대장인 채장군을 대령으로 승진시키고 연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채장군은 연대장이 되자 장병들을 맹훈련시키며 부대의 오욕을 씻을 기회를 노렸다. 정식으로 연대장이 된 후 얼마 안 되어 그는 양갈보 고지를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양갈보 고지는 양구 동북방 지역에 있는 800등고선상의 워낙 아군과 적군이 자주 바뀌어 정조가 없다고 해 그런 괴상한 별명이 붙었다 한다, 게다가 생김새도 꼭 여자의 그 곳처럼 뾰족하게 튀어 나와 사방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감제고지라 그곳을 빼앗지 않고는 "잘됐다. 이번 기회에 아예 5연대의 사기도 올리고 나는 단단히 결심을 했다. 우리 장병들의 자신감 회복을 위해서 기필코 양갈보 고지를 탈환해야 했다. 나는 며칠동안 그곳 지형을 탐색해 보았다. 정말 가까이 가서 보니 고지는 양측방이 절벽이어서 측방으로는 접근이 불가능했다. 전략은 정보를 가공해서 만드는 것이다. 명장들은 작전에 앞서 항상 공격대상에 대한 가능한 한 최대의 정보를 취득하기 위해서 사전정찰을 철저히 한다. 요즘 중국에서 전략가로 재평가를 받아가는 중국의 전 국방상 모택동에 반대하여 모반 실패로 소련으로 망명중 사망했다. 하는데 기회가 있으면 다시 이야기 하고자 한다. 따라서 적이 확보하고 있는 감제고지를 우회하여 적진 깊숙이 침투, 적의 뒷면을 차단하는 방법뿐인데 그게 쉽지 않은데다 자칫하면 공격 부대의 전멸을 각오해야 하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적도 이 것을 알기에 주요 거점 고지의 우회 가능 접근로에 미군은 이 1951년 10월 단장의 능선 전투 때 몇 번이나 실패한 그러나 채명신 장군의 이런 우회 접근의 고지 공략은 가능한 지형 정면공격에 앞서 항상 먼저 기습[우회]의 가능성을 살펴라라는 고지를 공격할 때 적보다 압도적인 우위 병력으로 채명신 장군은 전쟁의 9대 원칙인 병력 절약의 원칙에 철저한 작전을 구상했던 것이다. 그 때 지휘관들은 병사들의 소모쯤이야 피할 수없는 통제 불능의 변수라고까지 생각했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공격 중대를 지정하고 지형이 비슷한 곳에서 철저히 특수훈련을 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습전술은 6·25 전쟁에 개성 북방 송악산전투 때 써먹은 방법을 쓰기로 했다. 6·25전쟁 전 1949년, 개성 송악산에서 있었던 전투에 채명신 장군은 중대장으로 참전해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었다. 사단장 김석원 장군은 일본군 대대장으로 중일 전쟁에 채명신 장군은 위험한 고지 전투 현장을 찾아와 부하들을 격려하는 김석원 장군의 리더십에 크게 감명 받고 그 뒤 이를 배워서 실행했었다. 그러나 김석원 장군은 일본군이 화력이 약한 중국군에게 사용해서 자주 성공하던 총검돌격을 좋아했었다. 1949년 송악산에서 있었던 육탄 10용사의 신화는 그의 지도하에 감행된 것이다. 포항 전선에서 용감하지만 무모했던 총검돌파로 숱한 병력 손실이 있자 사실상 한국군 사단장 인사권이 있었던 미군에게 미움을 받고 소장으로 군문을 떠났다. 그러나 총검에 의한 정면돌격은 6·25전쟁은 물론 월남전에서까지 국군 일선부대에 의해 자주 사용되었었다. 총검 돌격은 충분히 훈련되고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정병(精兵)들만이 구사할 수 있는 것이지만 부대의 인명 손실이 컸다.
용감하기는 하나 자동화기가 발달한 현대전에서는 부적합한 전술이다. 즉 며칠 간에 걸쳐 포병화력을 최대로 집중시키고 공격은 기만하는 방법이다, 확신한다. 참전 용사분 말씀을 들으니 북진작전 때 영국군이 적 부대에 밤새 비록 한 두 발이라도 계속 불규칙 연속포격을 가해서 잠을 못자게 방해하고 다음날 공격하더라고 했었다. 채 명신 장군의 연속 포격도 이런 효과를 발휘했으리라고 본다. 드디어 D 데이, 날이 막 밝아 올 무렵 양갈보 고지에 엄청난 포탄 세례를 퍼부은 뒤에 정면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엄청난 포격에 놀란 적이 대피호에 처박혀 있는 동안 기습하는 것이었다. 공격대가 올라가 보니 역시 적은 예상대로였다, 적은 워낙 심한 포격에 주력병력 대부분을 대피호에 대피시킨 채 몇 몇 경계병력만 남겨 놓은 상태였다. 이 때는 적인 중공군 또는 북한군에게 전매특허격인 관통터널을 뚫어서 공격하는 유엔군을 괴롭혔다. 공격대는 호 속에 남아 있는 적을 처치하고 대피호에 들어가 있는 적병들을 수류탄으로 섬멸하여 아주 쉽게 고지를 탈환해버렸다. 나는 지형 특성상 적의 반격이 거세질 것이라는 점은 각오하였다. 때문에 고지를 점령하자마자 북측 능선으로 도주하는 적을 그 곳에 호를 파야했다. 고지 점령과 동시 무엇보다 먼저 할 일은 적의 역습에 대비한 6·25전쟁 내내 고지를 빼앗기면 적은 신속히 예비병력까지 공격 부대는 연막까지 피워가며 호를 팠다. 물론 공격대가 진지를 구축할 때 까지 후방에서는 계속 포 지원사격을 해주어서 공격대는 간신히 충분한 방호가 되는 진지를 구축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예전에 했던 대로 적의 포탄이 우리 호 앞쪽으로 떨어지면 무조건 얼굴도 내밀지 않다가 뒤쪽으로 떨어질 때야 비로소 얼굴을 내밀고 수류탄을 던지는 방법을 사용했다. 6·25 전쟁 고지방어 전투에서 최고의 유효수단은 수류탄 투척이었다. 실패한 적은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연속해서 역습해왔다. 그러나 이미 전면 방어진지를 구축한 우리 진지는 요지부동, 게다가 맹렬한 포화력의 집중 지원으로 끝내 사수하는데 성공했다.
그 뒤에도 되풀이 하는 적의 공격을 이틀간 견디어 내니 우리 5연대는 완전히 잃었던 사기를 되찾은 데다 승리에 대한 자신감도 갖게 되었다.
고지들이 완전 확보된 뒤 고지를 둘러본 나는 깜짝 놀랐다. 한마디로 고지에는 적의 시체가 즐비하여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시체를 다 처리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양갈보 고지 탈환은 내가 적 후방에서 백골병단작전 할 때 적의 군단 사령부 위치를 알아낸 것만큼이나 대단한 성과였다. 백골 병단은 포로를 심문해서 그 위치를 알아낸 군단 사령부를 직접 기습하려다가 적의 경계가 너무 삼엄하여 포기하고 이를 항공지원으로 초토화했었다. 미 10 군단장은 김용배 사단장에게 '용전분투하여 고지를 탈환함에 진심으로 축하합니다'란 메시지를 보내오니 사단장은 크게 고무되었고 사단은 축제 분위기가 감돌았다. [사단장은 전사했던 5연대 연대장 김용배 대령과 동명이인이다.]
이후에도 우리가 열 차례가 넘는 적의 공세를 끄덕 없이 넘기자 사기가 오른 7사단과 미 10군단은 쉽게 북진할 수가 있었다, 이젠 절대로 적에게 빼앗기지 않는다는 뜻에서 우리 장병들은 양갈보 고지의 이름을 절개 고지로 바꾸었다,
이 고지를 점령함으로서 아군은 곧 좌우와 연계해 북진, 백석산을 점령하고 1,220 고지와 문등리로 뻗어 내려가는 고지와 능선 일대도 쉽게 확보했다, 채명신 장군은 연대 지휘 기간 여러 번의 고지 전투를 위의 전술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 말의 타당성을 미군은 일본군 사병들의 광포한 공격하고 방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말한 바대로 난공불락의 적 고지는 독특한 공격 전술을 구사하기가 극히 힘들어서 항상 공격은 포병이나 항공공격을 가한 뒤 큰 희생을 감수 할 수도 있는 정면공격을 하는 것이 전형적인 전투행태였다.
채명신 장군의 전술 개발과 구사의 정신은 그대로 월남전으로 이어져 중대 전술기지, 대민 심리작전, 교전수칙 등의 창의적인 전략 전술을 개발하여 이를 그의 뛰어난 리더십으로 훈련시키고 지도해서 한국군이 그 용맹을 세계에 알린 상승의 전공을 세우게 했다. 베트남참전사와 채명신 장군 한민족 역사에 많은 전사들이 이어져 오지만 승전 보다는 정복 당한 실패의 패전사가 대중을 이루는 속에서 베트남 참전사는 승전은 아니더라도 긍지를 가지고 후세에 전할 만한 성공한 전쟁사이다. 인간은 무조건 인격과 덕망만을 가져야하며 전쟁은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상주의자들에겐 전쟁사에 무슨 긍지를 가질 수 있느냐고 하겠지만 인간사 현실은 어제도 전쟁은 있었고 내일도 전쟁은 이어진다. 우리가 침략을 하지 않더라도 남들이 우리를 노예 삼으려고 침략해 올 때 어차피 치러야할 전쟁이라면 일전 불사의 투혼을 불살라 우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런 국민은 덕망지자이기 보다는 노예근성에 젖은 하등인간의 집단에 불과하다. 지난 10년간의 좌파정권처럼 적이 엄포를 놓는다고 재화를 상납하며 무릎 꿇고 선처를 비는 행위는 한층 더 치졸하기 이를 때 없는 노예근성이다. 전쟁이란 무엇인가? 팔, 다리 잘리며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포화를 뚫고 적과 싸우는 이유는 결국 자신과 가족 그리고 자국민의 인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닌가? 전쟁이 인간도량의 장이 아닌 이상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고려장군 최영의 이념은 전쟁의 목적에 위배된다. 물론 군졸들이 재물에 과욕을 부리고 전투를 게을리 하지 않기를 바라는 지휘관의 교조적 언명이겠지만 이러한 전투이념은 전후 군졸의 희생에 대한 보상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의미를 담을 수 있고 전쟁의 목적과 의지를 희석시킬 적절치 않은 발상이라고 본다. 하나의 전쟁이 승전 또는 성공으로 막을 내리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 중에 그 전쟁을 책임지고 진두지휘 할 장군이 전쟁의 기초이념에 얼마나 충실한 인물이 선택 되느냐가 제일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런 점에서 베트남 참전사는 출발부터 성공의 뿌리를 가지고 베트남에 심어졌다. 혹자는 천금 같은 젊은이 5천명이 죽고 1만 2천여 명이 다쳤는데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하겠지만 6.25전쟁은 베트남 참전기간의 3분의 1인 전쟁 3년 만에 국군만도 988,920명의 사상자를 내고도 국민에게 국토의 폐허와 기아의 가난만을 남긴 실패한 전쟁이었고 외세의 도움이 없었다면 국가마저 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참담한 실패의 전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베트남 참전은 그래서 한민족의 긍지를 살려준 전쟁사이고 거기에는 채명신이라는 명장의 전술과 탁월한 예지가 깃들어 있다. 어느 날 “이번에 출판하시는 회고록(베트남전쟁과 나)에는 경제적인 기여 부분은 얼마나 넣으실 생각이십니까?” 잠시 생각에 잠긴 후 “지금 생각으론 한 80%는 넣고 싶어”...이러한 전 사령관님의 호국과 부국은 하나라는 전쟁관은 참전 당시 고생한 부하들에게 다만 몇 푼이라도 더 도움을 주기 위해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는 장병들에게 당시 국내에서 인기상품이던 TV나 오디오를 사 가지고 귀국하도록 배려한 바 있는데 “군인이 장사꾼인가” 라며 예의 최영장군 이념에다 현실 무지의 국내 정치인들과 갈등을 빚은 유명한 일화가 대변한다. 당시 베트남 참전에 대한 국내 정부, 국회, 국민의 성원이 하늘을 찌를 듯 했고 그 성과가 찬란했듯이 베트남 참전은 한국으로선 분명히 성공한 전쟁이었고 그 선두에 부국, 강병의 기치를 높이든 명장 채명신 장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항상 사병들을 애틋하게 생각하였고 베풀 수 있는 한 정성을 다 하였다. 현재 팔순을 훨씬 넘긴 노구를 이촌동의 아파트 한 채에 의지해 사는 그는 정치권과 세간의 많은 유혹을 뿌리치고 청렴한 장군의 표상을 고려장군 최영처럼 말하지 않고 실천한 것이다. 채명신 장군의 인덕은 장군이라기 보다 집안의 웃어른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지만 자택의 현관문을 들어서면 스님이 손수 쓴 액자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열린 덕망과 지극한 부하 사랑은 베트남 전우이면 누구나 손부터 잡고 반기는 인자함에서 옛 부하들로부터 시대를 초월한 추앙을 받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전사를 빛낸 장군 중 여러분의 충무공이 있다. 베트남 참전의 성과는 진두에서 지휘한 장군에 충무공의 수여에 부족함이 없고 빈국을 구제한 경제의 기초를 마련한 점은 ‘忠武濟公’ 채명신 장군으로 봉작(封爵)추경(推敬)하여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나라가 위급할 때는 언제나 영웅이 나타나 나라를 구하는 것이 우리 역사에 많이 회자되고 있고 실제 그렇게 나라가 위급할 때는 영웅호걸이 많이 나와 이 나라가 건국 이래 998회의 외침을 당했음에도 이렇게 굳건히 나라가 유지되어 나간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다. 필자는 1966년 베트남전쟁에 교체 일진으로 파병을 지원하여 갔다. 베트남전은 전선이 없는 전쟁으로 언제 어디서 적이 나와 기습을 하고 숨어버릴 지 모르는 그야말로 안개에 싸인 전쟁인 것이다 히트엔 런( Het and Run ) 작전이 베트남 전쟁의 특징이었다. 전선 없는 전쟁을 어떻게 수행해 나갈 것인가? 그 대답은 게릴라 전의 대가가 아니면 풀어나갈 수 없는 명제인데 그 당시 주월 한국군 사령관이셨던 채명신 장군께서는 중대 작전기지 개념으로 훌륭히 이 난제를 풀어 나가셨다. 6.25 전쟁 때, 게릴라 대장으로 백골병단을 지휘하여 적 후방에 침투 후방을 교란하고 요인 암살과 병참부대 습격 등, 백골병단을 이끌었던 유격전의 대가이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적진 깊숙이 침투한 장군께서는 적 후방을 교란하며 조선공산당 제2비서이자 대남유격부대 총사령관이 었던 김원팔 북한군 중장을 비롯 빨치산부대 참모진을 몰살시키는 등 한국전쟁에서 처음으로 게릴라 전법으로 적을 섬멸하는 공을 세우신 분이기에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의 전술전략적인 면에서 한국군에게 유리하도록 주월 미군사령관 웨스트 모어랜드 장군과의 담판에서 한국군의 전술전략적인 중대개념 전술기지를 만들어 전투에 임하게 한 것이 채 사령관의 탁월한 판단력과 선택이었으며 성공적인 중대급 전술기지의 성공 요인이되었던 것이다. 전선이 없는 전투현장에서 어떻게 성공적으로 적의 공격을 방어하고 공격할 것인가? 허허 벌판과 높고 깊은 산악지대 정글이 이어지는 전선 없는 전투현장.. 생각만 해도 아득한 일 아니겠는가. 그런데 중요 지형지물을 이용 중대급 부대가 주둔하도록 철조망과 지뢰를 이용, 중대기지를 설치하는 성을 쌓아서 효과적으로 적의 기습과 침투에서 훌륭하게 방어해 내는 중대단위 기지를 만들어 성공적인 전투를 수행하는 과업을 완수해 낸 것이다. 적의 직사화기나 곡사화기로부터 은폐와 엄폐가 가능하도록 벙커를 구축 요새를 만들었다. 베트남전의 승리 요인은 바로 이 중대부대 전술의 성공에서 온 것이다. 중대전술기지의 성공사례는 두코 작전과 짜빈동 전투가 바로 그것이다. 두코 작전은 맹호 기갑연대 3대대 1개 중대가 월맹군 2개 대대 기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 적군 189명을 사살하고 아군은 7명이 전사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고 자빈동 전투는 해병 청룡 1개 중대가 적 1개 연대를 섬멸하는 대승을 거뒀다 적 243명을 사살한 유례없는 대승이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채명신 장군의 탁월한 지휘능력에서 연유한 것이다. 내가 소속된 백마부대도 판랑 지역의 비행장을 경계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적이 중대 기지를 몇 번이나 기습했으나 우리는 잘 훈련된 전투요원들로 일치단결하여 적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적은 많은 희생을 치르고 도망가게 만들어 적을 격퇴하곤 했었다. 내가 주둔했었던 곳은 148고지로 바위로 이루어진 산으로 돌산이라 불렀고 돌산에 벙커를 구축해서 천연의 요새를 만든 중대전술 기지였다. 적의 직사화기나 곡사 화기가 맥을 못 추도록 요새화된 중대 기지에서 나는 큰 전투만 18회, 매복이나 전투 정찰은 수 백회를 치르면서 부하들이나 나 자신이 손톱하나 상한데 없이 모두 건강하게 귀국을 시켰다. 대단히 자랑스런 결과이어서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대단히 명예스럽게 생각하며 하느님의 도움으로 생각한다. 임무를 마치고 귀국, 2군사령부로 보직을 받기위하여 부대 정문 쪽으로 걸어서 가고 있는데 채 사령관님의 세단이 옆에 와 서서 차에 타라한다. 앞자리에는 전속부관이 앉아있고 사령관님은 뒷자리에 앉아 계셨다. 사령관님 옆 자리에 앉으니 유난히 검고 바싹 마른 육군 상사, (특진을 하여 나이에 맞지 않게 어린 상사) 상사답지 않은 젊고 어린 상사가 보기에도 베트남에서 바로 귀국했다는 건 누구나 보면 알 것 같은 그런 분위기의 나였다. 고생 많이 했다는 치사를 하셨을 때 나는 용감하게 공수부대로 가기를 희망 하는 건의를 드렸고 그곳에 가면 고생이 많을 텐데 그래도 가겠느냐? 물으신다. 2군사령부에서는 육군본부 직속인 공수부대 전속선이 이니였기에 그렇게 사령관님을 만나 뵙게 된 동기로 전속선이 2군에서는 전속이 되지 않는 어려운 전속명령으로 공수부대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채 사령관님에 대한 일화가 많이 있다 무공을 세우고 훈장을 타고 사이공 관광을 갔다. 사령관님이 식사를 마련, 함께 식사를 하는데 식사를 하는 그 장소에서 말씀하시기를 힘들게 전투를 하면서 얼마 되지 않는 수당으로 카메라나 기타 사치품을 사는 친구들은 내가 사위를 고른다면 그런 친구들은 사위로 삼지 않겠다고 말문을 여시고는 우리의 현실과 국가 재건에 드는 자금이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 아느냐? 또 너희들 부모는 깊은 가난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고생하고 있으니 한번 생각해 보라고 뼈 속에 꼭꼭 박히도록 말씀을 들려 주셨는데 지금도 그 분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계급이 가장 높은 나에게 무엇이 가장 먹고 싶으냐? 고 물으셔서 냉면이라 대답했더니 그날 저녁은 냉면으로 대접해 주시고 중대 돌아가면 전우들과 함께 먹으라며 마른 냉면을 한 짐 싸 주셨다. 군인은 모름지기 명령에 죽고 사는데 진정 존경하는 지휘관을 위하여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그런 존경과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진정한 상하관계가 바람직하게 구성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이 나이에도 가장 존경하는 분은 박정희 전 대통령님 채명신 장군님이다. 이 두분은 민족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하신 분들이다. 채 장군님께서는 돌아가신 엊그제 유언으로 베트남 파병 용사사병 영역에 묻히기를 말씀 하셔서 그곳에 묻히셨다. 더욱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장군이 사병 묘역에 묻힌 것은 채 장군님이 처음이다
우리가 시방 잘 살고 있는 것은 우리가 받은 전투수당 중 많은 부분을 떼어내 국가 재건에 사용하였기에 베트남과 중동과 독일에서 피땀을 흘려 벌어들인 외화를 기반으로 하여 이만큼 잘 살게 된 것이다. 오늘날 국회와 각종 정치단체에서 하는 짓거리를 보며 분통이 터지는 것은 비트남이 망할 즈음의 행동들을 하고 있는 거다. RO 는 무엇이며 통진당은 또 무었이냐? 이북에 가 김일성 묘역에 참배를 하고 국가보안법을 어긴 여자로 막무가내같이 철 따위가 없는 국회의원이 있는가 하면 촛불집회는 무엇이며 모든 문제가 있으면 버스를 대절해 떼로 덤벼드는 무리들이 있으니 참으로 두 눈 감고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정치적 혼란이 찾아오면 걷잡을 수 없게 금방 무너져 버리는 것이 국가이다. 아무리 첨단 무기를 갖고 있다 해도 정치적으로 무기력해지면 안방을 내 줘 버리고 말고. 나중에 밖에서 울며 후회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채명신 장군과 월남전 일화와 박정희 대통령 노병(老兵)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최근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사태에 대해 막 묻던 참이었다.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군은 확신을 갖고 빠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1926년 병인생 만 84세의 서리가 내린 호랑이 눈썹이 순간 움찔하며 부르르 떨었다. “교전규칙이란 건 가이드라인일 뿐이야. 승리는 누가 빠른 속도로 갈기느냐에 달렸어. 북한이 다연장로켓포 끌어낼 때 뭐했어? 천안함 사건은 아주 큰 전투행위였어. 말단 지휘관들이 충분한 대비를 못 한 거라 봐야지. 그때 정신을 바짝 차렸으면 이런 연평도 포격같은 일은 없잖아? 책임은 노무현, 김대중이 져야돼. 2004년 김충배 육사 교장이 예비생도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해보고 깜짝 놀랐어. 아, 글쎄 34%가 우리의 주적은 미국이라고 하잖아? 놀라서 정신교육 예산 달라고 했더니 그걸 못하게 막았단 말야.” 채 장군은 김관진 신임 국방장관의 등장을 반겼다. 당연한 일이라는 반응이었다. 다시 장군의 말이 빨라졌다. “이번 국방장관이야말로 제대로 전투를 할 수 있는 지휘관 아닌가. 아주 잘한 거야. 북한이 한 번 더 도발하면 교전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위권 차원에서 단호하게 응징하겠다는 김 장관의 소신은 군인으로서는 당연한 거지. 이제 군을 국민들이 믿고, 국회의원들도 밀어줘야 해. 다음 번엔 본때를 보여야지. 북한은 우리가 안 가진 걸 갖고 있어. 핵도 그렇고, 화학가스나 생물학병기 같은 거 말야. 그거 장사정포에 장전할 수 있거든. 수도권을 삽시간에 공격할 수 있는데, 우리 단독으론 막을 힘이 없어. 그래서 미국과 같이 해야 하는 거야. 세계 2차대전을 승리를 이끈 뒤 영국의 처칠 수상이 남긴 유명한 명언이 있어. ‘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아도 될 전쟁이었다’고. 히틀러도 처음에 조금씩 유럽 인접국들을 도발했거든. 그때 단호하게 응징하지 못하고, 공상적 화평주의에 젖은 연합국 지도자들이 머뭇거리다가 결국 큰 전쟁을 불러왔다는 거야.” 그는 1926년 황해도 곡산에서 태어나 스무 살 무렵 월남한 뒤 1947년 육사 5기로 입교하여 1972년 중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24년을 군인으로 살았다. 6·25 전쟁 때는 백골병단 부대장으로 게릴라전을 이끌며 청년장교로 전장을 휩쓸었고, 39세 때 일약 수도사단장(맹호부대) 겸 주월한국군사령관으로 임명돼 최초의 파병군대로 베트남전을 치렀다. 남들은 평생 한 번 겪기도 힘들다는 전쟁을 두 번이나, 그것도 직접 전투현장에서 체험하고 지휘한 것이다. 한 마디로 ‘전투와 전투 속에’ 살아남은 ‘야전의 사나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전쟁광이 아니라, 평화주의자다. 노(老)장군의 전쟁관을 물어봤다. ―전쟁을 두 번이나 경험한 장군께서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뭡니까. “흔히 인류의 역사를 전쟁의 역사라고 하는데, 전쟁 그 자체는 잔인성과 잔혹성 면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간활동이야. 나는 전쟁을 죄악시하고 혐오해요. 그러나 전쟁의 본질을 알려고도 않고 평화를 부르짖는 것 또한 대단히 위험합니다. 평화주의가 오히려 전쟁을 부추기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아왔고, 내가 하려는 말도 그런 거예요. 나의 전쟁 체험을 통해 전쟁의 본질을 이야기하고, 전쟁을 어떻게 회피하며, 불가피하게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해서 이겨야 하는지를 말하고 싶어. 아마 생존한 한국군 중 가장 전쟁을 많이 한 사람이 나일 거야. 나를 전쟁과 인연 깊은 사람으로 볼지 모르지만, 처참한 전쟁을 해봤기에 단연코 이 땅에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고 호소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평화주의자보다 전쟁을 혐오하고 저지하는데 앞장 설 겁니다.” ―월남전을 회고해볼까요. 그때 제1원칙으로 삼았던 작전의 요체는 뭐였습니까. “‘100명의 베트공을 놓치더라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하라’였어. 내가 이 원칙을 한국군에게 주지시키자, 미군과 월남군의 강한 반발이 있었지. 우리 연대장과 대대장도 반대했어. 전투를 회피하는 비겁한 군대 같은 인상을 준다는 거였어. 하지만 이건 내가 6·25 게릴라전을 통해 몸소 체득한 것이요. 미군은 월남에서 ‘서치 앤 디스트로이(Search & Destroy)’ 전략을 썼어. 탐색해서 때린다는 거였지. 하지만 나는 ‘세퍼레잇 앤 디스트로이(Separate & Destroy)’ 전략을 구사했지. 적과 양민을 분리시킨다는 개념이야. 시민과 군대는 물과 고기의 관계야. 물이 중립만 지켜줘도 승리할 수 있어. 인민(물)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요체지.” ―주월한국군사령관으로서 미군과 독립된 작전지휘권을 쟁취했던 일화도 유명하던데요. “월남전에서 미국이 패한 원인 중 하나는 미국 정부가 너무 간단하게 생각했다는 거야. 당시 험프리 부통령이 ‘월남 인민이 냉장고만 갖게 되면 전쟁은 안 할 거다’ 이렇게 망발을 할 정도였지. 물론 월남 인민들은 가난하고 늘 상처투성이였지. 한국 군의관들이 항생제를 발라주면 싹 나으니까 하느님 같이 모셔요. 왜, 그 해방 직후에 다이아진 같아. 만능통치약이야. 하지만 대민지원이란 게 물건이나 갖다 주는 게 다가 아니거든. 마음을 얻어야해. 국가 전략 자체가 잘못됐으니 그 아래 군사전략도 잘못됐다, 이렇게 비판했지. 박정희 대통령이 브라운 주한 미국대사에게 한국군의 지휘권을 미군에게 맡기겠다고 했대. 내가 ‘안 된다, 개죽음 당한다, 그렇게는 못 한다’고 대들었지. 각하가 곤란해 하더군. 브라운 대사한테 벌써 다 이야기했다는 거야. ‘각하 마음대로 해놓고 지금 어떻게 뒤집습니까?’ 막 화를 냈더니 ‘나중에 독자 전작권 행사가 옳다고 주장해 보시오’ 이래. 그래서 미군 장성회의에 가서 30분간 일장연설을 했지. 세계최강의 부대가 세계최강의 B-52 지원을 받아 3개월 작전해서 월남부락 하나 장악한 거 있느냐? 이 전쟁을 몇십 년, 몇백 년 끌고 갈 거냐? 당신들은 이틀이면 월남 전역을 쑥대밭 만들 능력이 있지 않느냐? 이 복잡한 정치전쟁에서 유엔군이나 월남군 하의 지휘라면 명분이 있겠지만 우리가 미군 지휘로 들어가면 월남전 청부전쟁이라는 소릴 듣지 않겠느냐? 물론, 당신들 덕분에 한국군도 있는 거다. 100% 맘대로 하는 게 아니고 협의해서 할 테니 작전권을 달라. 이랬더니 장내가 조용하더군. 다들 한국전 참전 장군들이야. 그중에서도 라슨 장군이라고 제일 까다로운 이가 있었지.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내게 악수를 청하더군. 전부 다 해결되는 순간이었어. 한국군의 독자적 작전권, 이게 없었으면 개죽음 당했겠지. 적은 아카보 자동소총인데, 우리는 단발 M1소총이야. 나중엔 독자적 헬기, 탱크도 필요하다고 했지. 이 얘긴 너무 기니까 천천히 하도록 하지.” ―(벽에 걸린 사진을 가리키며) 이건 뭔가요. 장제스(蔣介石) 총통과 찍은 사진 같은데…. “1967년 장제스 총통의 초청으로 대만을 방문한 적이 있어. 그때 찍은 기념사진이지. 장 총통이 ‘채 장군은 월남전을 어떻게 하고 있소?’ 하고 묻더구만. 내가 ‘70% 대민, 30% 전투’로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어. 그랬더니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으며 ‘참 잘하는구려. 나는 국공합작이 끝난 뒤 마오쩌둥(毛澤東)과 중원을 놓고 다툴 때, 카이로다 뉴욕이다 프로펠러 비행기로 며칠씩 돌아다니다가 그만 대민관계를 뺏겨버렸어요. 그 길로 친해져서 방문일정 내내 대환영을 받은 기억이 나네.” ―주월한국군사령관을 끝내자마자 스웨덴, 그리스, 브라질 등지로 특명전권대사를 3번이나 역임하며 해외로 전전하셨어요. 이후에도 미 하버드, 버클리대와 일본 게이오(慶應)대 등을 돌아다니셨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견제설도 떠돌았는데, 진실은 뭔가요. “하하. 그런 게 있었나? 내가 스웨덴 대사 가자마자 박 대통령이 계엄령과 유신을 선포하긴 했지. 나는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두 분만 대통령으로 꼽고 있어.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은 각각 과오가 있지. 하지만 대한민국을 부강하게 한 자유민주주의와 국력강화의 기초를 닦은 분들이야. 과도 있지만 공도 있어. 100점 만점으로 치면 한 85점, 70점쯤 될까. 물론 내 맘대로 점수지. 하하.” “각하. 정권을 연장하시겠다는 건 결국 이중플레이 아닙니까? 1971년 연설에서도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입에 침도 마르기전 정권을 연장하겠다고 하는 것은 이중플레이입니다. 무슨 명분으로 그러십니까? 정치라는 건 국민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 이게 지도자의 생명 인데 그렇게 나가시면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 아닙니까? 제 명에 못 돌아가십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때 정치생명의 끝이라는 말은 부하의 손에 죽게 된다는 그런 뜻의 말은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모든 사람이 4성 장군으로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4성 장군이 되지 못하고 예편한 것과 관련해서는 후일담을 전하기도 했다. ‘채명신 장군이 현역에 있으면서 4성 장군이 되면 참모총장도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유신 체제는 안 된다’고 한 말을 이후락씨 측근이 대통령께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채 장군은 예편 후 스웨덴 대사로 나간 것은 순전히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10월 유신 선포는 그가 대사로 나간 이후 선포됐다. 1972년 5월 2군사령부 연병장에서 간소하게 전역식을 하고 많은 장병들의 눈물의 환송에 도 꾿꾿하게 참았다가 막상 고속도로로 진입하는 순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는 채명신 사령관은 “나에게 맞는 건 군인밖에 없다. 다시 한다 해도 최전방 지휘관을 하고 싶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군인은 높은 자리로 가기 위해 하는 군인은 맞지 않다, 모두가 평화를 원하지만 평화는 공짜가 아니고,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전쟁이라는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며 국방 대비태세의 중요성을 후배들에게 전한 그는 “내 고집, 내 인생관대로 살았다는 그런 평 가를 받고 싶다”는 말로 인터뷰를 끝냈다. 채명신 장군, 적장이 맡긴 천재고아 교수로 키워 채명신 장군이 6.25전쟁때 김일성의 핵심 부하였던 길원팔을 생포하고, 그의 바람대로 자결케한 일화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채 장군이 길원팔의 부탁으로 전쟁 고아를 거둬 호적에 동생으로 올리고 서울 유명대 교수로 키운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습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3월. 유격부대 백골병단을 이끈 채명신 장군은 강원도의 한 마을을 급습해, 김일성의 오른팔인 길원팔 인민군 중장을 생포했습니다. 비록 적이었지만, 뛰어난 능력을 높이 평가해 전향을 설득했는데, 길원팔이 거부하고 끝내 죽기를 원하자 명예롭게 생을 마감하도록 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만난 많은 군인 중에서 길원팔만큼 똑똑한 군인이 몇사람 있겠느냐. 결국 본인의 원대로 권총으로 자결하도록 했습니다." 채 장군의 배려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길원팔이 "아들처럼 키워온 전쟁 고아 소년을 남조선에 데려가 공부시켜 달라"며 남긴 마지막 소원까지 들어주기로 한 겁니다 당시 25살이었던 채 장군은 14살인 이 소년을 자신의 호적에 동생으로 올리고, 친동생처럼 돌봤습니다. 채장군의 보살핌에 힘입어 훗날 이 소년은 서울대에 입학해 이학 박사를 받고 서울 유명 대학의 교수가 됐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채 장군이 혹여나 동생에게 피해가 갈까 비밀에 부쳐왔지만, 지난달 25일 별세한 뒤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적장과의 약속을 지키고 그의 양아들까지 사랑으로 키워낸 채 장군,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은 그 어느 전장에서의 승리보다 위대했습니다. ―6·25 때 게릴라 전투 중 적진에서 홀로 국군 복장으로 인민군 정찰대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남하에 성공했던 무용담을 들었습니다. 담대한 것은 원래 집안 내력인가요. “글쎄, 선천적으로 타고 났나 봐. 겁난다, 거리낀다, 뭐 이런 건 없어. 부하들을 모두 남쪽으로 내려보내고 국군 복장 그대로 마을을 불쑥 찾아가 ‘내가 당 직속정찰대인데, 여기 당 세포위원장 어디 있느냐’ 호통을 쳤지. 빨갱이 집만 골라 다니며 잘 얻어먹고 남하에 성공했지. 남로당 빨갱이 천지였지. 충남 당진에 상륙해서 간신히 살았어.” 보수다운 보수 - 권혁두 국장 <보은·옥천·영동> 蔡命新 將軍 출생 1926년 11월 27일 출신지 황해도 곡산 직업 사회기관단체인 학력 육군참모대학 경력 2004년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총재, 2004년 사단법인 6·25참전유공자회 회장 수상 2006년 자랑스러운 육사인상, 2005년 고려대학교 제3회 정책인대상
양 력: 1926년 12월 31일 18:00 음/평: 1926년 11월 27일 18:00 남자 시 일 월 년 癸 甲 庚 丙 酉 午 子 寅 己 戊 丁 丙 乙 甲 癸 壬 辛 대운: 순행 酉 申 未 午 巳 辰 卯 寅 丑 81 71 61 51 41 31 21 11 1.13 대운 시작: 1세 13월 29일
사망 나이: 88 세 (계사년, 2013년) 사망 대운: 酉 생일은 인터넷 <인물>에서 구한 것이고 출생시는 추정한 것임. 1944년 19세 때 제2국민병으로 일본군의 동원훈련을 받음. 1945년 12월 초 부친이 항일운동가로 광복직후 석방됐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음. 1947년 월남하였음. 1948년 4월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지원하여 육군사관학교 제5기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됨. 1948년 제주도 9연대로 발령되어 죽을 고비를 넘김. 1949년 5월 4일 개성 부근 송악산 전투에 참전함. 1949년 11월 남파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게릴라들을 토벌하기 위해 태백산에 투입됨. 1950년 6월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 12월 특공대 작전 중 죽을 고비 넘김. 1951년 11연대 편성에 참여하고 스스로 연대장을 자원하였다. 3사단 참모장 시절 사단을 방문한 박정희와 함께 대령으로 진급한 그는 제7사단 5연대장, 제3사단 참모장, 제20사단 60연대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연대장으로 있을 무렵, 그는 문정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문정인은 경북 영덕의 재력가 집안 출신으로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문정인에게서 1남 2녀가 태어났다. 1954년 제3군단 작전참모, 육본 작전기획과장. 1955년 10월 논산 제2훈련소 참모장. 1958년 8월 준장으로 승진, 제1군사령부 작전참모로 부임. 1960년 5월 16일 군사 정변에 군의 일원으로 야전사단을 이끌고 반란에 가담. 7월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면서 그를 국가재건최고회의 감찰위원장으로 발탁했다. 1965년 대통령 박정희에 의해 주월한국군 사령부 총사령관으로 임명됨. 1966년 7월 20일 베트남 전쟁 중에 소장에서 중장으로 승진했다. 1969년 4월 헬리콥터로 이동 도중 베트콩의 피격을 받고 국군 28연대 주둔지역인 투이 호아에서 헬기가 추락, 부상을 당하기도 했으나 기적적으로 생명을 구하였다. 1969년 5월 3일 특별군용기편으로 김포공항에 귀국하였고, 그해 5월 12일 육군 제2군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1972년 6월 1일 유신 반대로 제2군사령관직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전역함. 1972년 주스웨덴 대한민국 대사로 파견되어 1973년 주그리스 대사관 대사, 77년 4월 주브라질 대사관 대사 등을 역임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주브라질 대사로 재직 중 박정희의 서거 소식을 접했고, 1981년 5월 주브라질대사를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삶과 추억 : 중앙일보] 초대 주월남 한국군사령관, 예비역 중장 별세 2013.11.26 미군도 탄복한 '게릴라전법' 채명신, 하늘의 별이 되다.
김일성의 손을 뿌리치고 월남한 열혈 반공주의자, 박정희와 손잡고 5·16 군부 쿠데타에 가담했지만 유신에 반대하며 직언을 마다하지 않은 소신파군인 베트남전쟁(1960~75년) 당시 초대 주월남 한국군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으로 맹활약했던 채명신 예비역중장이 25일 오후 3시 숙환으로 별세했다. 87세. 1926년 황해도 곡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해방 직후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평안남도 진남포 소학교(현재의 초등학교)에서 잠시 교사로 일했다. 당시 “공산주의는 착취하는 사람이 없고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다”는 선전에 솔깃해 공산주의를 한때 좋게 생각했지만 곧 공산주의의 폐단과 한계를 간파하고 월남한 반공주의자였다. 김일성 손 뿌리친 반공주의자 생전에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반공주의자가 된 계기를 고백한 적이 있다. 교사 시절 친하게 지내던 소련군 대위가 술을 마시면서 그에게 “공산당에 계급이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공산당에 들어가지 마라. 너도 집안도 나라도 모두 망한다”는 말을 듣고 고민에 빠졌다. 결국 진남포의 소련군 부대에서 계급별로 1~6등급으로 나눠 철저히 차별해 식사를 배급하는 실상을 보고 계급 없이 모두가 평등하다는 공산주의에 대해 심각하게 다시 생각했다고 한다. 이런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에 46년 2월 8일 군사정치학교인 평양학원 개교식 때 만난 김일성이 “젊은 동무가 필요하다”며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지만 노모를 핑계대고 뿌리칠 수 있었다고 한다. 47년 월남한 그는 49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 5기로 졸업하고 이듬해 6·25전쟁에 소위로 참전했다. 한국전쟁은 그가 혁혁한 무공을 세우는 무대였다. 그는 국내 최초의 특수유격전(게릴라전) 부대였던 백골병단을 지휘해 야전군인으로 명성을 쌓았다. 특히 이 시기에 북한의 카운트 파트에 해당했던 대남유격부대 길원팔 총사령관을 생포한 일화가 유명하다. 5·16 핵심 … 유신 땐 반대 직언 6·25전쟁의 진실을 젊은 세대가 잘 모른다고 안타까워 한 고인은 생전에 한국안보문제연구소 초청 강연에서 6·25전쟁의 교훈을 세 가지로 압축한 적이 있다. 첫째가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였다. 둘째는 동맹국인 미국과의 관계를 올바르고 굳건하게 해야 하고, 셋째는 내부의 적을 경계하라는 것이었다. 고인은 53년 미 육군보병학교를 졸업했다. 육군 5사단장 시절이던 61년 박정희 소장이 일으킨 5·16 쿠데타 당시 1개 연대를 빼내 서울에 입성함으로써 5·16의 공신이 됐다. 5·16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핵심세력인 이른바 5인위원회 멤버였다. 그러나 쿠데타 성공 이후 고인은 박정희 대통령과 다른 길을 걸었다. 고인은 “국민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부대를 원대 복귀시켰고 박 당시 대통령이 세 차례 정계입문을 권유했으나 뿌리쳤다고 한다. 특히 유신 이후에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비판적 직언으로 눈밖에 나는 바람에 끝내 대장 계급을 달지 못했다. 베트남전쟁은 고인이 무인으로서 걸출한 능력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한때 ‘미군의 용병’이란 이유로 베트남 참전을 반대했지만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그를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자 명령을 따랐다. 65년부터 69년까지 4년8개월간 현장을 지휘했다. 전장에서의 일화도 많다. 당초 미군은 파병된 한국군에 별도 작전 지휘권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고인은 미군 측에 자신이 생각한 승전 비법을 직접 설명해 독자적인 작전권을 확보했다. 고인이 창안한 ‘중대전술 기지전략’은 당시 웨스트 모얼랜드 파월 미군 총사령관이 탄복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원거리에서 사격을 하지 않고 완전히 근접하도록 베트콩을 유인한 뒤 공격하는 전법이다. 이를 통해 당시 우리군의 피해는 줄이고 적군에 큰 타격을 가해 무수한 전과를 올렸다. 전투모만 쓴 채 전장 누빈 강골 김희상 한국안보문제연구소(예비역 육군 중장·정치학 박사) 이사장은 “베트남에서 게릴라전법으로 혁혁한 무공을 세우면서 특수전 분야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전략가”라고 고인을 높게 평가했다. 홍성민 안보정책네트웍스 대표는 “베트남에서 미군들은 게릴라전을 무시해 실패했다”며 “백선엽 장군이 6·25전쟁에서 유명해진 것처럼 고인은 베트남전에서 미군들로부터 군신(軍神)으로 불렸고 세계 전사에 소개됐다”고 말했다. ‘전우신문’ 소속의 베트남전 종군기자였던 김진석(77)씨는 “나에겐 철모가 필요없다”며 평생 철모를 쓰지 않고 천으로 만든 전투모만 쓴 채 부하들을 용맹하게 지휘했던 군인으로 고인을 기억했다. 베트남전 이후 고인은 육군 2군사령관을 거쳐 72년 중장으로 예편했다. 공로를 인정받아 태극무공훈장·충무무공훈장·화랑무공훈장·을지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전역 이후에는 스웨덴·그리스·브라질 대사를 거치며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대한태권도협회 초대 회장, 월남전참전자회 명예회장, 베트남참전 유공 전우회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베트남 전쟁과 나』 『사선을 넘고 넘어』 등이 있다. 유족은 부인 文貞仁 여사와 1남2녀가 있다. 장례는 육군장으로 치러졌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실. 발인은 11월 28일 오전 7시. 02-3010-2631. 故 채명신 장군이 장군 묘역이 아닌 사병 묘역에 안장되고 있다. 주월남 한국군 초대 사령관을 지낸 예비역 중장 故 채명신 장군.
6·25전쟁 때 소위로 참전했던 고인은 1961년 5·16군사쿠데타에 주도적으로 가담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떠올랐다. 65년 8월부터 69년 5월까지 총탄과 포탄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장병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다. 하지만 그는 72년 박 전 대통령이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단행한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채 장군은 “각하, 이러다 제명에 못 돌아가십니다”라는 직언까지 했다고 한다. 목에 비수가 들어와도 바른말은 한다는 참된 군인정신을 보여준 것이다. 10·26사태 소식을 듣고는 자신의 직언이 마음에 걸려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일화는 고인의 따뜻한 품성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주월 사령관으로 근무할 당시 귀국할 때마다 베트남에서 전사한 장병묘역을 찾아가 오열한 모습은 많은 군인들에게 진정한 지휘관의 길을 깨닫게 했다. 이런 삶을 유지했기에 ‘월남전의 영웅’이 8평인 장군묘역을 마다하고 1평인 사병묘역을 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권오성 육군참모총장이 이날 서울현충원에서 거행된 ‘육군장’에서 조사를 통해 ‘불멸의 군인’ ‘영원한 지휘관’ ‘시대의 거인’이라고 흠모한 것은 고인을 기리는 데 조금도 손색없는 추모사다.
채 장군이 정치군인의 길을 걸었다면 그의 앞에는 대장 진급에 이어 탄탄대로가 열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역사와 민족 앞에 떳떳한 길을 선택했다. 그 길이 진정 국가와 군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리라. 국가의 안위와 미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전투구를 일삼는 정치권, 영토 수호에 허점을 드러낸 군인들, 사리사욕에 눈먼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고인의 숭고한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 - 중앙일보 논설
양구 전선에서 난공불락의 적 고지를 공격했던 전투기이다.
그냥 읽어보면 평범한 전투 회고담의 하나이지만 나는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다고 믿었기에 여기에 소개한다.
6·25 전쟁의 후반기는 고지를 두고 공격과 방어가 되풀이 된
산악 전투의 연속이었는데 나는 6·25 전사에서 이런 창의적인
고지 공격전술을 거의 보지를 못했다.
바뀌는 비운을 겪었다. 연대장 징크스가 있던 부대였다.
동기생들인 육사 5기중 가장 빠른 진급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 26살이었다.
바위가 톡 튀어나온 고지였다.
별명으론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지형이 북으로 향하는 산줄기의
북진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징크스도 없애버리자"
임표는 모택동 전략의 실제 개발자이며 인해 전술의 창안자이기도 하다.
며칠씩 목표물을 몇 번이고 방문해서 여러 번 정찰을 했던
현장 중시 작전으로 유명했고 독일의 명장 에르빈 롬멜도
진격하는 기갑 부대의 선두에서 항상 유동하는 전황을 놓치지 않고
순간적인 작전판단을 했다. 순간중시의 전투지휘라고
감시 초소와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철저히 감시했었다.
고지 점령을 위해서 단단히 봉쇄한 적의 거점 고지의 우회 접근로인
옆의 문등리 계곡으로 72전차 대대를 동원하여 압도적인 화력으로
강습 돌파하고 적의 10킬로 후방으로 진출하자 고지의 적은
급히 철수했다.
도 아니고 미군처럼 막강한 화력도 없어서 불가능했던 듯하다.
전략의 기본에 채장군은 충실했다.
며칠 동안 고민한 나는 경사가 심하지만 정면 돌파하기로 결심했다.
지형이 워낙 험하고 노출 된 지점이라 병력이 많으면 손해다
아예 소수 정예만 뽑아 습격하는 수 밖에 길이 없다.
점령하기 위해서 좁은 지형에 지나치게 많은 병력을
투입해서 성공도 못하고 지나친 병력 손실을
입었던 작전 실패가 6·25 전쟁중에 종종 있었다.
참전했던 노장이었다.
하지 않아 적으로 하여금 우리의 진짜공격을 예측치 못하게 하는
D 데이를 잡은 우리는 거의 1주일 간에 걸쳐 포탄을 엄청나게 쏘아댔다.
물론 보병 공격은 전혀 하지 않았기에 적은 분명
"아하, 놈들은 포만 쏘지 공격은 하지 않는구나."하고
생각을 했을 것이었다.
연속된 포격은 적을 기만하면서도 적의 수면을 방해해서
피로로 곤핍하게 만드는 2차적인 목적도 있었으리라고
갱도전술이 자리를 잡지 않았을 때였다.
공산군은 항공력과 지상화력의 열세를 고지 후면에서 전면까지
미군은 대형 8인치 포를 고지 정상으로 끌고가
갱도 입구를 직접 사격으로 함몰하게 하는 포병전술을 썼었다.
추격해 다음의 조그만 고지까지 아예 점령했다.
진지 구축작업이다.
증강해서 반드시 역습을 해왔고 한국군은 적의 역습을 성공적으로
방어하기도 하고 패퇴 당하기도 하였다.
적도 맹렬한 포 지원 하에 그날 밤 두 번이나 공격해 왔다,
국군은 참호 속에 수류탄이 가득 담긴 마대부터 준비하고
방어 전투에 임했었다.
그리고 5연대는 연대장이 사고나 전사로 수시로 교체되는
징크스가 없어졌으며 패전부대라는 오명도 벗었다.
태평양 전쟁시 중국에서 중대장을 역임했던 한 일본 자위대
장군은 그의 저서에서 일본 패망의 기본적인 원인중 하나가
일본 장군들이 독서하지 않고 연구하지 않는 정신구조였다고 말하였다.
전투 정신을 가진 우수한 파이터들이었지만 장군들은
실패한 공격을 '꼭 같은 장소에서 꼭 같은 공격'을 되풀이해서
부하들이나 떼죽음 시키는 바보 같은 지휘관들이라고 혹평한
일화가 상당부분 증명해준다.
위에서 소개한 대로 보병 지휘관인 채장군이 포병을
창의적으로 사용한 지휘 방식은 그 반대의 사례를 보여준다.
6·25전쟁 후반 고착된 전선에서 전투는 고지를
해군에는 백구부대가 있었다. LST나 LSD로 메콩강을 오르내리며 전투지역에 탄약을 나르는 우리의 해군 함정인데 임무교대를 할 때 마다 미군이 한국군에게 지급한 각종 무기 (M16)와 장비를 아꼈다가 배에 실어 고국의 전방부대의 무장을 시키고 중장비는 건설현장에 사용하게 했던 선각자이셨다.
"월남전 당시 장병들이 김치를 먹고 싶어 했다. 그런데 고국에서 온 김치 깡통을 따자 핏물이 나왔다. 기술이 없어서 녹이 슬었던 거다. 나는 '여러분이 이걸 안 먹으면 2주 뒤 일본 김치가 도착할 것이고, 김치 값은 일본 사람 손에 간다'고 했다.
그러자 장병들이'
핏물이라도 먹겠다. 고국의 부모형제에게 돈이 가게 해 달라'고 했다. 나도 울고 장병들도 다 울었다. 박 대통령께 이 사연을 적어 보냈다. 그러자 기술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질 좋은 김치 통조림과 군화, 군복이 공수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런 애국심으로 일어선 민족이다.
- 채명신장군-
마이다스의 손 박정희 그는 손대는 산업마다 성공시켰다.
미국의 세계적인 석학 '키신저' 가 박정희를 평가한 내용중 가장 완벽한 평가가 생각난다.
-박정희의 선택은 항상 옳았다.
연평도 포격사건 직후의 인터뷰
월남전 주월한국군 사령관, 맹호부대 부대장이었던 채명신 장군을 만나
잘 감시하고 있다가 도발할 기미가 있으면 즉시 타격 해야지.
그래서 이렇게 대만으로 쫓겨난 거요’라고 고백하는 거야.
1969년 5월 4년간의 주월 사령관 임무를 마치고 2군사령관으로 명령받아 임무 중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그는 10월 유신 선포를 앞에 놓고 박 대통령과 나눈 대화의 일단도 언급했다.
1951년 강화도에 도착하고 보니 상륙결사방위소년단이란
젊은이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설쳐.
얼마전 고인이 된 채명신 장군은 1965년부터 4년간 초대 주베트남 한국군사령관을 지냈다. 베트남전에 따라붙는 음울한 꼬리표 때문에 그의 이력이 달리 평가되기도 하지만, 당시 그는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국민 계도용으로 극장에서 영화 상영 전 보여주던 ‘대한뉘우스’는 항상 월남전 소식을 별도의 꼭지로 다뤘다. 덕분에 장군은 전장을 독려하는 영웅의 모습으로 수시로 대중과 만났다. 당시 초등학교 다니던 기자도 골목싸움을 할 때 “나는 채명신이다”며 뛰어다녔던 기억이 난다.
장군은 지난달 28일 국립현충원 병사묘역에 안장됐다. 예비역 육군중장인 그가 장군묘역이 아니라 병사묘역에 묻힌 것은 당신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그는 생전에 “전우들 곁에 잠들게 해달라”고 입버릇처럼 말했고, 가족들이 그의 유지를 따랐다고 한다. 그가 말한 ‘전우’는 자신과 같은 장성들이 아니라 전장에서 생사를 함께했던 사병들이었던 것이다. 현충원의 장군 묘지는 공간이 26.4㎡(8평)로 사병 묘지의 8배나 된다. 봉분을 올릴 수도 있고 더 큰 비석을 세울 수도 있다. 지금까지 스스로 이 특전과 예우를 거부하고 병사들 곁에 묻힌 장군은 없다.
그의 장례식에 60~ 70대 사병 출신 예비역들이 대거 참석한 것은 생전에도 부하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음을 반증한다. 그는 6.25때 중대 단위 유격부대를 만들어 지휘했다. 한참 전투 중에 철모를 잃은 소대장에게 자신의 철모를 내준 일화는 유명하다. 대대장으로 진급해 타 부대로 발령이 나자 부하들이 헤어질 수 없다며 한사코 놓아주지를 않았다. 부대에 남아 싸우게 해달라는 장군의 간청을 꺾지못한 사령부가 할 수없이 그의 중대를 대대급으로 승격하기도 했다.
그는 30대에 별 둘을 달고 파월 사령관을 지냈으며 40대 초반에 중장이 됐지만 대장 계급장을 달지는 못했다. 화려한 경력에 대통령의 총애까지 받았던 그가 끝내 대장 진급에 실패한 것은 유신과 장기집권에 반대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대통령이 사석에서 집권 연장 의사를 내비치자 “3선 개헌때 마지막이라고 눈물까지 흘리지 않았느냐”며 반대했다고 한다. 두 차례나 대통령의 면전에서 과욕을 버리라고 직언했던 그는 얼마후 승진 대신 대통령이 친필로 쓴 전역 명령서를 받는다. 대장 승진대신 충언을 선택한 충성의 대가였다.
그는 부하들에겐 다감하고 관대했지만 상관에게는 소신으로 도리를 지켰던 인물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 대신 그를 거부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린 염치와 기품있는 인물이었다. 대치와 충돌로 날을 지새우는 작금의 마비된 정국에서는 이런 리더십도, 참모관도 보이지 않는다. 주변을 맹종자들로 채우려는 오만한 권력과 그 언저리에서 눈치와 감언을 주특기 삼아 기생하는 사이비 위정자들만 넘쳐난다. 권리는 용량을 초과해서 닳아없어질 때까지 철저하게 누리는 소비재가 돼버렸다. 자제하고 내려놓으려는 시도는 보이지않는다. 그래서 ‘업무추진비’로 포장한 세금을 아내 생일날 용돈쓰듯 사용한 장관 후보자는 당당하다. 그의 몰염치는 일치단결해 그를 비호하는 또 다른 정파적 몰염치와 조우하며 국민의 도덕관을 희롱한다.
이북 태생에 3성장군 출신이고 군을 떠나서는 참전단체 회장을 역임했던 채명신은 이력만으로도 골수 보수주의자이다. 진보다운 진보보다 보수다운 보수가 더 절실한 시기, 특권을 마다하고 부하의 곁에서 안식에 들어간 한 군인의 죽음이 긴 여운을 남긴다.
영웅 채명신 장군(英雄 蔡命新 將軍)
명장(名將) 채명신(蔡命新, 1926년 11월 27일~2013년 11월 22일. 향년 88세) 장군(將軍)은 6.25 참전과 베트남 전쟁 참전의 우리국군의 산 역사의 증인이시다.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으로 공무원,·정치인,사회기관 단체인이기도 하다. 특히 베트남 전쟁 당시 파월 한국군 사령관으로 유명하다. 황해도 곡산군 출생으로 자유 대한민국에 월남하여 육군사관학교 5기 졸업생으로 호국의 정신이 투철한 이름하여 백선엽 장군과 더불어 대한민국을 지킨, 살아 계시는 가장 위대한 명장이라 하겠다. 육군중장으로 예편, 외교관직을 수행하였다.
다음은 장군의 회고록 "베트남 전쟁과 나"의 책머리에 쓰인 글이다. 장군은 일생을 통하여 호국의 정신으로 점철된 애국 애족의 거인이라 칭할 수 있는 진정하고도 뚜렷한 만인이 존경드리는 애국자이시다.
<조국과 군 그리고 베트남>
얼마전 나는 부산을 가기 위해 서울 역을 찾았다. 현대식으로 말끔히 새 단장한 역사(驛舍)를 보면서 개찰구를 지나 플랫폼에 다다르니 날렵한 고속 열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6.25 전쟁 당시의 참상이 내 머리 속을 스쳤다.
당시 부산행 열차와 오늘의 KTX 고속열차가 오버랩 되면서 지난 세월이 주마등 같이 지나갔다.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장면 장면이 되살아 나면서 숨져 간 전우들을 상기했다.
나만 호사하는 것 같은 송구스런 마음을 가지며 숨져 간 전우들 덕택에 오늘의 번창한 조국이 있음을 깨달았다.
열차에 승차한 지 얼마되지 않아 정시가 되었다. 순간 미끄러지듯 조용히 열차가 발차하자 이어서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차창 밖을 바라보면서 변화무쌍한 발전된 새 모습에 절로 감탄사가 튀어 나왔다. 스쳐 지나가는 현대식 도시 빌딩은 말할 것도 없고 중소도시와 농촌까지도 옛 모습과 달리, 새롭고 현대 감각의 한폭 그림처럼 정겹게 보였다. 정말 자랑스러웠다.
내가 베트남 전선에서 돌아온 다음해인 1970년만 하더라도 가난이 찌든 흉한 모습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완연히 다른 새로운 조국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감동적인 전경에 나는 센치멘탈에 젖어 갔다.
열차가 목적지를 향해 힘차게 달리듯 나 또한 조국과 군을 위해 열심히 달려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 목적지 마지막 정거장 정거장 가까이 와 있음을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사랑하는 아내 문정인과 결혼 540주년을 기념하는 금혼(金婚)도 작년에 지났고, 이제 팔순(八旬)에 도달했으니 무언가 허전한 생각이 들었다. 순간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역사적 사명감이 남아 있음을 깨닫고는 긴장했다.
작년, 그러니까 2005년 11월 17일 국방부 국사편찬 연구소 주관으로 실시된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학술회의에서 김진선, 한홍구 등의 주제 발표를 듣던 그때 그 장면이 되살아 났다.
분명한 역사의 왜곡이며 참전전우에 대한 모독이었다. "강대국 미국이 약소국 베트남을 침략하기 위한 전쟁에 왜 한국군이 말려들어야 되는가?" 라는 대목에서는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가 치밀었다. 계속 이어지는 주제발표자의 뜻밖의 발언은 이곳이 대한민국 국방부 산하기관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할 정도로 궤변과 이적발언으로 이어졌다.
이래서 나는 회고록 집필을 결심했다. 글을 쓰다가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어도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이 대한민국 역사에 한점 부끄러움이 없었다는 정당성과 당위성을 국민과 후대에 알려야 되겠다고 마음을 굳힌 것이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이 조국과 군을 위해 젊음을 바쳤고, 베트남 전쟁 참전을 통해 오늘의 대한민국으로 성장발전 할 수 있었음을 고백하는 심정으로 증거하고 싶다.
베트남 전쟁에서 험준한 정글을 헤치며 젊음을 불태운 사랑하는 전우들과 지금까지도 고엽제 후유증으로 신음하는 전우들을 떠 올리면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이 있다. 더구나 정글에서 전사항 전우들 생각이 미칠때면 눈물이 앞을 가려 함께 죽지 못했음을 부끄러워 자책한다.
전우들이여!
전우들이 겪은 이역 땅 베트남 정글에서의 피 맺힌 과거가 조국을 위해 자랑스러웠다는 새 인식이 역사에 각인 될때까지 나느 모든 것을 바칠것이다. 내 명예와 생명까지도.
2006년 5월에
한강변에서
蔡 命 新
장군께서는 이렇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조국을 사랑하며 사랑하는 부하들을 당신의 명예와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아끼시는 분이시다.
이 아침 나는 대한의 5000년 역사상 가장 훌륭하신 박정희 대통령의 명을 받아 조국의 수호와 발전과 세계 자유민주주의 평화 수호와 자유 우방국에 대한 6.25의 은혜갚음과 공산사회주의와 맞서 싸우신 그리고 보리고개의 가난을 몸소 극복하는데 목숨을 바쳐 용감히 동참한 베트남 참전 모든 용사들과 그 유족과 가족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채명신 사령관님의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쓰신 조국사랑의 위대한 글을 위정자들과 전국민에게 다시 한번, 조국의 발전과 우리후손의 영광된 미래를 향한 장도를 생각하며, 열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상을 통하여 자랑스럽게 또한 떨리는 가슴 억누르며 채명신 사령관에 얽힌 또 한가지 일화를 아래와 같이 자랑스럽게 소개한다.
<여기 최전방 파월 장병은 모두 나의 아들 딸이다>
월남 최전방 작전사령관 공관
8월 초순 아드님과 면회간 사모님 말씀
속보!
전선 정글 아군 주둔지에서 적군 기습 통지 보고
헬리콥타 출동준비
다급히 명령후 출동하는 채명신 사령관
사모님이 말하였다.
'여보 아들과 내가 왔는데
적진 상황 알아보고 출동하시지요'
채명신 사령관이 출동하며 한마디 남기고 적진으로 떠났다
'무슨 소리야~!'
'여기 모든 애국장병 다 내 아들이고 딸들이오!'
'당신과 아들만 소중한것 아니오.'
'여기 내 아들 딸들이 당신과 이 아이보다 더 소중한 것 모른단 말이오?"
한마디 일갈하며
황급히, 신속하게 적진으로 출동하는 사령관 채명신 장군.
훗날 사모님이 증언하였다.
'장군은 나와 우리 가족을 제일 사랑하는 줄 알았더니
알고보니 섭섭하게도
나보다 아들보다 전방의 부하가 더 소중하다 하였다.
한마디 남기고 부하들 독전하려 적진으로 출동한 채명신 사령관.'
채명신 사령관!
장군에겐 가족도 명예도 그 무엇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
'오직 조국수호와 나라 지킴'
2011년 5월 5월 12일 정오 남산에서
85세인 장군께서 71세인 나에게 껄껄 웃으시며
그리고 엄숙한 표정지으며 말씀하셨다.
'김작가! 당신은 젊으니 앞으로 할 일이 많아~!
'오래 오래 건강해야 돼~!'
'어떻게 지킨 대한민국인데~!'
진정한 애국자 채명신 사령관.
그는 진정 조국수호신이요
이땅 현대전의 제일가는 참군인 명장이었다.
2011. 9. 3.(토)
춘천대첩의 고장 소양강변에서
화곡 김찬수(華谷 金燦洙) 識.
고인의 계급은 장군이었지만 베트남 전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전우들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장군 출신 묘역이 아닌, 사병 출신 묘역에 안장됐다.
장군 출신으로 장군 묘역 안장의 혜택을 포기하고, 사병 묘역에 안장이 된 것은 채 장로가 처음이다. 장군 묘역은 26.4㎡(8평)를 사용할 수 있지만, 사병 묘역은 3.3㎡(1평)만을 사용할 수 있다.
묘비 역시 장군들은 높이 90cm, 가로 36cm의 묘비를 세울 수 있지만, 사병들은 높이 76cm, 가로 30cm 정도의 묘비만 세울 수 있다.
권위나 의전에 연연하지 않는 채 장군의 이런 정신은 생전에 보여준 일화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베트남 전쟁 당시 장교 숙소를 거부하고, 소대원들과 함께 막사에서 지내 후배 군인들의 귀감이 되기도 했다.
또 베트남 전에서 대민작전을 나간 소대원들에게 '베트콩 1백 명을 죽이는 것보다 한 명의 주민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 일화는 지금까지 군에서 회자되고 있을 정도다.
군에서 제대한 뒤에는 베트남 선교협회 초대 회장을 맡는 등 우리나라가 수교를 맺기 전부터 베트남 선교를 위해서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채 장군이 군인으로서는 물론 일반 삶에서도 타인의 귀감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신앙도 한몫 했다.
영결식에서 기독교 예식을 거행한 김태식 목사(육군 군종실장)은 "신앙과 삶이 일치하기가 쉽지 않은데, 故 채명신 장군이야 말로 일치했던 분"이라며 "정말 나라를 사랑하셨다"고 말했다.
황해도 출신인 채 장군은 목회자가 되고 싶었지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던 공산주의자들을 보고, 군인이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전쟁에 참전하면서 수 십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채 장군은 지난 2002년 CBS TV 새롭게 하소서에 출연해 "목사가 되려고 했다가 군인이 된 것도, 수 십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뜻"이라고 간증하기도 했다 .
채 장군은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에 참여하긴 했지만, 유신독재를 반대해 군복을 벗을 정도로 강직한 군인이었다. 비록 故 채명신 장군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정신과 삶은 길이길이 남아 있을 것이다.
첫댓글 채명신 장군님의 휼륭한 업적이 길이 빛 날것입니다.
영웅중에 영웅이시구나! 우리국민이 역사적으로 영웅을 만드는데 세계에서 가장 인색한 국민이라는 평가를 받은 기사를 수년 전에 읽었읍니다. 많은 영웅을 우리 역사에 낭기도록 노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