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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0장 야곱 가문의 번성
아브라함과과 이삭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축복이 야곱의 대에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 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장이다. 특히 야곱의 12아들의 출생의 기록의 계속이면서 야곱이 라반에게서 독립할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한 재물을 가지게 된 배경을 보여준다.
야곱의 일부다처와 축첩의 왜곡된 결혼으로 많은 가정의 분쟁을 겪으면서도 후손이 번성하였으며, 재물을 두고 속고 속이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신적 축복이 어떻게 부를 이루어 나갔는지 보여 준다.
1. 레아와 라헬의 출산 경쟁
비록 야곱의 첫 아내였으나 남편의 총애를 받지 못했던 레아에게 네 명의 아들을 허락하신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돌보심이었다. 그러나 영적의 눈이 어두웠던 라헬은 인간적인 질투심에서 아들을 얻고자 했고 그 방법으로 자신의 몸종을 남편에게 주어 아들을 얻고자 했다.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이스라엘 가정에 있어서 자녀가 없는 것은 큰 불행이었다. 이것은 여인에게 슬픔과 수치를 안겨 주었으며 특히 메시야를 대망하는 일에 큰 장애라고 생각했다. 사실 혈통을 잇고자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이며 자녀 출산은 분명히 행복이며 기쁨이었다.
특히 영생의 개념이 희박했고 그들의 자손을 통해 자신들의 삶이 영속되는 것으로 믿었던 히브리인들은 다산을 큰 축복 중의 하나로 생각한 것이다.
*시127:3-5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잠17:6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히브리인들의 이 같은 후손에 대한 생각은 순수한 혈통 보존과 여호와 신앙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문화적인 배경 속에서 남편의 사랑은 독차지하였으나 자식이 없었던 라헬은 치욕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렘31:15-1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라마’라는 지명의 의미는 ‘높은 곳’인데 이스라엘과 유다 국경지대 베냐민 영토에 있는 곳으로 사무엘 선지자가 살았으며 이곳에서 순회하며 나라를 다스렸다. 삼상 10장 2-3절에 따르면 라헬의 무덤이 이곳에 있었다고 전한다.
야곱은 죽기 전에 요셉에게 유언할 때에 라헬의 무덤이 베들레헴 에브랏 길에 장사했다고 했다.
*창48:7 내게 대하여는 내가 이전에 밧단에서 올 때에 라헬이 나를 따르는 도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 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아직도 먼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 (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라)
이 두 말씀이 서로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확한 말씀이다. 라헬이 죽은 위치는 야곱이 벧엘에서 예배를 드린 후 헤브론에 계시는 아버지 이삭에게 가기 위하여 베들레헴 쪽으로 내려오는 도중 라마를 지나면서 죽었고 라마와 베들레헴 사이에 장사된 것이다.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산후통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 즉 ‘슬픔의 아들’ 이라고 불렀으며 이는 그 아들이 죽을 것을 염려하여 그녀가 크게 슬퍼하고 통곡했다는 말이다. 이것을 라헬의 라마의 통곡이라고 부른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의 귀환을 선포하면서 자식들의 죽음과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통곡하는 어머니들을 라헬의 통곡에 비유하면서 그 통곡에 대한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을 마태는 베들레헴에서 헤롯이 예수의 탄생을 저지하기 위해 두 살 아래의 어린 아들들을 다 살해한 사건에 적용하여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에게 더 큰 보상 즉 메시야의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선포했던 것이다.
*마2;17-18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그 당시 라헬이 자식이 없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자식 출산을 보류한 것일 뿐 훗날 축복의 아들 요셉을 허락하신 것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라헬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바라며 인고함으로써 기도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남편을 더 의지했으며 질투와 불평으로 일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언니를 시기했다.’ 라는 이 말은 ‘붉다’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의 얼굴빛이 마치 성난 사람처럼 붉어졌고 얼굴에 핏발이 설 정도로 흥분하고 질투했다는 말이다. 이것은 라헬의 투기가 은밀한 것이 아니라 노골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문에는 ‘내가 죽겠노라.’ 라는 말이 서두에 나오는데 비탄에 잠긴 나머지 화를 참지 못하고 안달복달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마치 야곱이 언니에게는 아들을 낳게 하고 자신에게는 불임을 조장한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레아가 한 아들도 아니고 4명의 아들을 잉태하고 순산하는 것을 바라보는 라헬의 마음은 심장이 터지고 찢어질 정도로 아팠을 것이다. 사실 야곱은 그의 본 남편이 될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농간과 언니의 협조에 따라 자신은 야곱의 두 번째 부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도 참기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자신의 남편의 씨마저 빼앗겨버린 그녀의 가슴은 불화산 같았을 것이다. 언니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방해하고 가로막고 빼앗아 갔다고 오해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했던 것이다.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는 결혼한 지 20년 동안 잉태하지 못해도 기도와 간구로 주의 뜻을 찾았으나 ‘자식은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이라는 신앙을 망각하고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에게 의지하는 라헬의 처사는 불신앙의 행위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하다.
*시146:3-5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러나 젊은 라헬의 신앙이 어찌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겠느냐’
직역하면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있느냐’ 이다. 라헬의 불신앙에 대한 야곱의 책망으로 야곱은 라헬과는 달리 인간의 모든 문제를 위해 간청해야 할 대상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인식한 것이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아내의 태를 닿아 성태하지 못하게 하신다고 주장했다. 태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그의 견해는 생명의 문제는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라헬은 단지 수치를 모면하고 언니에게 지지 않겠다는 일념에서 당시의 관례대로 자신의 몸종을 남편에게 주어 후사를 얻으려고 했다. 이 일은 아브라함 가문에 두고두고 분쟁의 불씨가 되었던 하갈의 사건과 동일한 경우였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며 인간의 고집이 주(主)가 되는 가정에는 항상 불화와 갈등이 상존하게 마련이다. 라헬에게는 먼저 자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식을 허락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필요했다.
이처럼 인간은 신앙 그 자체보다도 신앙의 부속물인 축복이나 평안에 집착하고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놓쳐버리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고대 사회에서 노예제도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히브리인에게도 이 제도가 보편화 되었다. 이러한 노예들은 자유가 완전히 박탈된 주인의 소유물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노예에 대하여 엄격히 규정하고 있다.
6년 봉사 후에 해방시킬 것, 종교 활동의 자유를 보장할 것, 생명의 존엄성과 사유 재산을 인정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들은 좀처럼 노예들을 해방시키거나 자유를 주지 않았으며 이방인과 같이 노예를 하나의 재산으로 간주하였다.
라헬과 레아는 자신들의 몸종들을 출산 경쟁의 도구로 사용했으며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 범죄 행위에 해당된다.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비록 야곱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신앙을 있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실상 그의 마음은 무자한 아내 라헬을 향한 동정심과 그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인간적 수단에 동조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레아와 라헬에 이어 세 번째 여인을 얻음으로 하나님의 창조 규례를 거스리는 죄를 범하고 만다. 야곱이 레아를 얻고 뒤 이어 라헬을 취한 것은 자신의 의도라기보다는 라반의 책략에 속은 것이며 불가항력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라헬의 말을 듣고 빌하를 취한 것은 누구의 부탁이나 주선이 아니라 그 자신이 스스로 범죄한 것이다.
이것은 죄의 속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한 번 범죄하면 계속적인 범죄 행위를 유발시키는 것이다.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빌하는 부부의 사랑의 열매로 자식을 낳은 것이 아니라 남녀 간의 애정도 없이 단순한 씨받이로 사용되어 아들을 낳아 라헬의 무릎에 두어 라헬의 자식으로 입적되었다. 그러나 빌하의 자식이 끝까지 야곱의 자식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는 것은 굉장한 고무적인 일임에 틀림이 없다.
과거에 아브라함의 서자 이스마엘은 사라의 양자로 입적되지 못하고 버림을 받아 쫓겨났기 때문에 그 일이 오늘 날까지 원한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다나니’ 라는 말은 ‘공평하다’ ‘심판하다’ 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공의를 베푸셨다.’라는 뜻이다. 라헬은 자신의 그릇된 방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출산하게 하심으로 억울한 마음을 변호해 주셨다는 것이다.
두 자매는 모두 자식을 바라는 절실한 기도를 드려온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레아는 하나님이 응답하셨지만 라헬은 응답을 받지 못하다가 이제야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은총을 베푸셨다는 것이다.
라헬은 아들의 이름을 ‘단’ 이라 지었는데 그 뜻은 ‘판단하다.’ 라는 말로 억울한 처지에 있는 자에게 공의로운 판단을 함으로써 그 사정을 명쾌히 해결해 주셨다는 뜻이다. 라헬의 상처받은 마음이 조금은 위로가 된 듯하다.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아들을 낳았으며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라고 하여 아들의 이름을 ‘납달리’ 라고 하였다. 라헬과 레아는 서로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경쟁을 하였는데 라헬이 ‘이겼다.’라고 하는 말은 레아에 대하여 승리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이겼다.’ 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레아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도 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납달리’라는 말은 하나님과 경쟁하여 이긴 것을 말하며 곧 하나님이 자기의 편이 되었음을 은근히 자랑하는 말이다.
레아는 이미 출산이 멈추었지만 빌하는 계속해서 두 아들을 낳았으므로 지금은 자신이 은혜를 받는 때라는 것을 기념하여 아들의 이름을 ‘납달리’라고 한 것이다.
레아는 라헬의 교만하고 도전적인 경쟁에 대해 자극이 되어 자신도 몸종 실바를 통해 라헬과 다시 경쟁하기로 했다. 아내들의 시기와 질투, 다툼과 경쟁은 야곱에게 험악한 세월을 보내게 되는 가정불화를 초래했다.
그러나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승화시켜 이삭과 맺은 언약을 성실히 실천해 나가고 계셨다. 레아의 시녀 실바가 아들을 낳으니 레아가 ‘복되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갓’ 이라 하였다.
‘복되도다’ 이 말은 ‘행운이 있으라.’ 라는 의미로 미래의 번영과 축복에 대한 기원이다. 실바가 또 아들을 낳으니 레아가 ‘기쁘도다’ 라고 하며 그 이름을 ‘아셀’이라 했으며 그 뜻은 ‘기쁨’ 이다
이 두 아들 역시 모두 레아의 아들로 입적되었으며 야곱의 아들로 살아가게 된다. 레아는 현실적으로 매우 만족하고 그가 거느린 많은 아들로 인해 여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겨울 우기가 지나고 5월이 되자 보리농사를 추수하는 시기가 되었다. 이 시기는 ‘만드라고라’라고 하는 식물의 열매가 익는 때인데 이 열매는 임신을 촉진시키는 일종의 최음제로서 향긋한 냄새가 나는 노란색의 열매이다.
레아의 맏아들 르우벤이 들에 나가서 ‘사랑의 과일’로 불리는 합환채를 따서 그의 어머니에게 드렸다. 이때 르우벤의 나이는 6-7세가량 되었을 것이다. 야곱이 84세에 결혼을 하고 91세에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을 낳았으니 일 년에 한 명 꼴로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이 합환채 사건은 자식을 많이 낳아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려 했던 레아와 라헬의 경쟁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 준다. 라헬은 언니의 합환채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자식을 많이 낳으면 남편이 자기를 사랑해줄 것으로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야곱의 사랑은 라헬이 독차지했기 때문에 레아는 남편을 동생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만약 라헬이 이 합환채로 인해 남편의 사랑을 완전히 독차지한다면 큰 낭패일 것으로 생각하여 단숨에 라헬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다.
이와 같이 남편을 두고 부인들 사이에 사고, 파는 흥정을 벌일 정도로 야곱의 가정은 성적으로 문란하고 무질서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자식들의 눈에 잘못 비추어져 훗날 르우벤이 서모 빌하와 통간하는 불상사를 낳고 말았다.
라헬은 언니의 합환채를 받는 대신 그날 밤에 남편과 공식적으로 동침하는 것을 허락했다. 제한된 시간이나마 레아가 야곱과 함께 지낼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 것이다. 야곱이 타작마당에서 돌아오자 레아는 자신의 침실로 야곱을 불러들였다.
자신이 정당한 대가를 치루고 남편을 샀다고 주장하며 남편은 자신과 동침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야곱이 레아의 청을 받아들여 레아의 침실로 들어갔는데 이는 야곱이 레아를 평소 싫어했다기보다는 라헬의 눈치를 보느라 레아를 멀리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으므로’
아들을 4명을 낳고도 레아는 여전히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녀를 긍휼히 여기시고 은총을 베푸셨다는 말이다. 이 말은 합환채의 효력 때문에 잉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 때문에 레아가 잉태한 것을 의미한다.
장차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이룰 야곱의 아들들은 그 기원을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들이 야곱 한 사람의 자식으로 나지 아니하고 여러 형제들 사이에서 태어났다면 과연 12지파를 이룰 수 있었을까.
레아로서는 5번 째 아들이며 야곱의 9번 째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 이름을 ‘잇사갈’ 이라 하였으며 ‘값’ ‘보상’ 이라는 뜻으로 레아가 시녀 실바를 야곱에게 첩으로 준 대가와, 합환채를 라헬에게 포기한 대가로 하나님께 보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이름 속에는 여인의 불타는 시기심과 그릇된 욕망이 들어 있다.
레아가 다시 임신하여 6번 째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 그 이름의 뜻은 ‘거한다’ 라는 말인데 이제는 남편의 사랑을 받아 야곱과 함께 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소망하고 기대한다는 뜻이다.
레아가 다시 딸을 낳고 그의 이름을 ‘디나’라 하였으며 ‘판단’ ‘재판관’이라는 말로 야곱에게는 다른 딸들이 있은 듯하지만 나중에 디나의 이름이 여기에 나오는 것은 강간 사건의 당사자가 되는 여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께서 장구한 세월 동안 라헬에게는 무자의 서러움을 체험하게 하심으로 그녀에게 엄숙한 교훈을 베푸셨다. 그것은 곧 인간의 모든 소원의 성취는 사람의 능력이나 수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섭리와 뜻에 달려 있으므로 믿음과 인내로서 때를 기다려야 함을 가르치신 것이다.
하나님이 라헬의 태를 여신 것은 그녀의 결혼 후 약 7년 정도 시간이 흘렀다. 이는 합환채를 사용한 후에도 그녀가 계속하여 임신하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여기서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은 이 7년 동안에 레아는 7명의 자녀를 생산하였고 빌하와 실바 역시 각각 두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레아는 1년에 자녀를 1명씩 출산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러한 일이 정말 가능했을까. 그렇다면 레아는 시녀를 야곱에게 주었을 때에도 임신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라헬을 위한 7년의 계약 기간이 만료된 직후 야곱의 나이는 91세였으며 이때 요셉이 잉태되었고 출생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야곱이 라헬을 위해 7년을 봉사한 후에 아들을 얻은 것이다.
‘요셉’ 이라는 이름의 뜻은 두 가지 인데 첫째는 수태하지 못한 라헬의 수치를 하나님께서 완전히 제거해 주셨다는 뜻과, 둘째는 다른 아들을 더해달라는 의미이다.
라헬의 이 소원은 베냐민을 낳으므로 성취되었다. 야곱이 84세에 레아와 라헬 두 여인과 결혼하여 91-92세가 될 때까지 7-8년 동안 아들 11명과 여러 명의 딸들을 낳았다는 것은 자식이 귀한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특별한 일이었다. 이때는 가나안 땅을 떠나온 지 14년이 흐른 뒤였다.
2. 야곱과 라반의 계약
‘나를 보내어 내 고향으로 가게 하시되’
‘나를 자유하게 하다.’ ‘나를 해방시키다.’라는 의미로 아내를 얻기 위하여 종살이한 신분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 라반의 속임수로 속박 당했던 세월에 대한 강한 거부감과 떠나온 고향을 향한 야곱의 귀소 심리가 표출된 것이다.
야곱은 ‘내가 가겠다.’라는 결단을 표시했으나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동안 부양해야 할 가족은 4명의 아내와 10여명의 자식들로 대가족이었으나 재물은 전무한 상태였고, 고향으로 돌아와도 좋다는 어머니의 전갈도 없었으며, 형의 보복이 상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곱이 귀향을 선언한 것은 그가 비록 허물 많고 실수 많은 사람이지만 그에게는 언약의 후계자로서 자부심과 언약의 땅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야곱은 이제야 벧엘의 언약을 상기하며 안일한 예속으로부터 독립을 담대히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아직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었다. 훗날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주인이 주어 아내를 얻은 히브리 종살이 기간이 만료되어 해방될 때에라도 처자는 주인에게 남겨 두어야 했다.
그러나 종이 처자와 헤어지기 싫어하면 그는 계속 종의 상태로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야곱의 경우는 이와 별개의 문제이나 라반이 한 말에서 ‘딸들은 내 딸이요, 내 자식이요’ 히는 그의 주장은 어느 정도 이런 사상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불투명한 상태에서 야곱은 자신의 견해와 요구를 관철시키려고 쐐기를 박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를 말미암아 내개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실제로 밧단 아람 사람들은 여호와를 여러 신들 중에서 하나의 신으로 알고 있었다. 라반이 여호와의 신명을 거론하는 것은 단순히 야곱의 비위를 맞추려는 행위였다. 그가 예전에 엘리에셀에게도 이와 같은 화법을 구사한 적이 있었다.
*창24;31 라반이 이르되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여 들어오소서. 어찌 밖에 서 있나이까. 내가 방과 낙타의 처소를 준비하였나이다.
라반은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자기의 축복이 된다는 사실을 여러 징조를 살펴본 결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까지 야곱에게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설파한 것이다. 사실 라반이 야곱을 붙든 것은 야곱의 능력이나 수완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의 축복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임기응변과 처세술에 능한 라반의 능란한 모습이 다시 나타난다. 라헬 대신에 레아를 주고 다시 7년 동안 야곱을 종으로 부린 그의 책략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한 것이다. 봉사의 기간이 지났으니 사유 재산을 주겠다는 제안은 야곱을 붙잡아 두기 위한 모략이었다.
왜냐하면 이날 이후에도 라반은 열 번이나 야곱의 품삯을 속였기 때문이다. 야곱은 계약 기간 동안 단순히 의무상 라반의 양떼를 돌본 것이 아니라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 일했다. 이로 볼 때 야곱은 실수와 허물만 많은 사람이 아니라 대단히 성실하고 약속을 지키며 근면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야곱의 발걸음이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라반에게 복을 주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남의 식솔로서 안일하게 지내기보다는 한 가장으로서 독립하여 약속의 땅에서 축복된 언약의 가문을 일으키기를 바라는 말이다. 야곱에게는 자신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다. 그는 가나안 땅에서 약속된 축복대로 번성하는 언약의 가문을 반드시 세워야만 한다.
라반은 야곱을 내어 보내는 것보다는 자기 곁에 붙들어 두는 것이 여러모로 유익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야곱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야곱의 의중을 물었다. 이에 라반에게 번번이 속아온 야곱은 더 이상 속지 않을 만반의 준비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과 자신의 목자적 재질에 근거하여 자신에게 현저히 불리해 보이는 듯한 계약 조건을 제시하여 라반으로 하여금 흔쾌히 승낙하도록 했다.
야곱은 지난 14년 동안 가축의 번식의 시기에 적절한 환경과 조건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외형상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실제로는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을 내세운 것이다. 여기서 야곱의 지혜롭고 영특한 면모가 나타난 것이다.
라반의 탐심과 간교함을 익히 알고 있었던 야곱은 일을 하고 일정한 액수를 월급으로 받는 고용자가 되기보다는 조건부 비율 분배 방식을 제안하여 동업자의 자격으로 자신의 몫을 정했던 것이다.
야곱이 라반의 제안대로 자신의 품삯을 정하여 1년에 얼마를 받았더라면 그는 영원히 라반의 종살이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같은 것이 내 품삯이 되리이다.’
야곱이 자신의 품삯으로 요구한 내용은 첫째, 양떼 중에서는 순백을 제외한 양, 둘째, 염소떼 중에서 순흑을 제외한 염소이다. 곧 아롱진 양, 점 있는 양, 검은 양 그리고 점 있는 염소, 아롱진 염소들이다.
그러나 동양의 정상적인 양의 털은 모두 흰색이다. 그리고 염소는 검은 색이다. 그러므로 점 있는 것이나 아롱진 것은 유전상 열성에 속하며 열성에 속한 새끼가 나올 확률은 아주 희박하다.
*시147:16 눈을 양털 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 같이 흩으시며..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따라서 검은 양 새끼와 얼룩진 점박이 양이나 염소를 달라고 한 것은 실상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야곱이 이 같은 조건을 제시한 것은 일차적으로 욕심 많은 라반을 순순히 계약에 응하게 하고, 이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만 자신의 것으로 받겠다는 믿음과 확신 때문이었다.
‘나의 의가 나의 표징이 되리이다.’
나의 정직함이 조만간에 나의 정당함을 증거하고 대답해 준다는 말이다. 야곱은 이 계약이 윤리적으로나, 법적 관계에서나 하자가 없도록 할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정정당당히 지키겠다는 서약을 하였다.
라반은 평소와는 달리 야곱의 제안을 흔쾌히 승낙하고 즉시 실천에 옮겼다. 이는 라반의 양심적 약속이 아니라 그의 약삭빠른 이기주의적 결정이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어리석은 제안을 한 야곱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번복하기 전에 결말을 짓기 위함이었고, 둘째, 혹시라도 야곱에게 미칠 영향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라반은 친히 양떼를 둘로 구분했으며 검은 양과 얼룩무늬 있는 것은 자기 아들들의 손에 맡기고 야곱에게는 흰 양과 검은 염소만 맡겨 서로의 거리를 사흘 길이 되도록 격리시켰다. 혹시라도 두 떼 사이에 있을 어떤 교미 행위도 이루어질 수 없도록 완전 격리를 시킨 것이다.
라반은 가까운 혈족이요 자신의 사위인 야곱에게 불신과 의혹의 골짜기를 두고 있었다. 참으로 간교하고 영특한 두 사람의 대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 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 떼가 물을 먹으려 왔다가 교미를 할 때 알록달록한 가지를 봄으로 그 어미의 영상에 무늬가 스며들게 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암양은 수태 시 자극을 받으면 그 여파를 새끼에게 전하는 감응력이 강한 동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대 과학에서는 동물의 생식 행위를 자극하여 의도한 종자를 얻으려고 한 야곱의 방법은 생물학적 지지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근거가 불명확하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하나님의 벧엘 언약의 성취라는 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는 훗날 야곱이 자신이 양떼를 많이 얻게 된 원인을 하나님의 초자연적 섭리로 돌린 고백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것이다.
야곱은 자신의 양떼를 늘리는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첫째, 나무껍질 앞에서 교미하게 하여 점박이를 얻고,
둘째, 점박이와 흰 양을 교미하게 함으로써 또 다른 점박이를 얻으며,
셋째, 튼튼한 양은 교미를 할 때 가지를 앞에 두고 약한 양이 교미할 때는 가지를 두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약한 것은 라반의 양이 되게 하고 튼튼한 것은 자기의 양이 되게 한 것이다. 양은 1년에 두 번 배태하는데 대체적으로 봄 생산보다 가을 생산이 더욱 튼튼하다. 야곱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을 생산 시에 나뭇가지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방법을 라반의 아들들이 똑 같이 했더라면 반드시 실패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나뭇가지의 효능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불과 6년 만에 야곱의 재산은 심히 풍부해졌다. ‘매우 번창하여’ 이 말의 히브리어 ‘파라츠 메오드 메오드’를 직역하면 ‘매우 매우 증가했다.’ 이다. ‘매우’라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므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 ‘파라츠’라는 말은 부의 근원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출1;12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사54;3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 하늘의 신령한 복과 아울러 세상의 부요도 함께 허락하신다. 결국 야곱은 부친 이삭의 재물을 유산으로 한 푼도 받지 못했지만 아브라함이나 이삭처럼 거부가 된 것이다.
야곱이 이렇듯 부를 누리게 된 원인은 그의 성실함과 인내심이 이룬 결과이기도 했으나, 나아가 인간의 탐심에 반응하고 다툼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재물은 하나님의 축복임을 믿고 하나님의 지혜로 대응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성실히 이행한 결과였던 것이며 또한 벧엘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축복의 성취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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