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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욘4:1-11)-2021.10.3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과 다르고 하나님의 방법도 우리 방법과 다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55장8절과9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요.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깊고 높고 넓은 섭리를 무엇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감히 누가 하나님을 앞설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인간이 하나님을 잘 안다고 큰 소리를 쳐도 인간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조개껍질을 가지고 바닷물을 퍼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는 것과 다를 바 없겠지요.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저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범위 내에서 약간의 정보만 알 뿐이지요. 그것도 잘못하면 엉뚱한 정보를 가지고 사고치기 일쑤입니다. 그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요나 선지자입니다. 알다시피 요나는 아밋대의 아들로서 선지자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한 것입니다(1:1). 요나는 BC 8세기경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2세가 치리할 때 이사야, 미가, 호세아, 아모스 선지자 등과 함께 동시대를 사역했던 선지자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시대적인 미션은 니느웨 선교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외치라고 명하셨습니다. 한마디로 니느웨성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니느웨가 어디입니까? 니느웨는 당시 앗수르의 수도로서 교만함과 잔인함, 극도의 이기주의에 만연되어 있는 도시요, 악독이 심한 곳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철천지원수 같은 나라였지요. 실제로 이스라엘은 BC 721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하거든요. 그런 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라는 것은 정말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나가 순종하기 정말 어려운 미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을 칩니다. 완전범죄를 꿈꾸며 도망치던 요나가 배안에서 대풍을 만납니다. 그리고 요나는 하나님의 레이더망에 보기 좋게 걸려든 것입니다. 대풍의 원인이 요나로 인함이 밝혀진 것이지요. 결국 대풍의 문제가 요나로 인하여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지한 사람들은 요나를 바다 가운데 던져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린다는 사실을 요나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나를 바다에 던지매 거짓말처럼 폭풍이 잔잔해졌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큰 물고기 밥이 되고 말았지요. 요나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치러야 했던 것이지요.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삼야를 싸워야 했습니다. 요나는 당시 상황을 스올(무덤의 깊은 곳)의 경지라고 고백합니다(2:2). 이른바 지옥을 체험한 것이지요. 구속사적으로 보면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한 사흘 동안의 무덤사역을 예표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표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암시하는 거예요. 사실 예수님도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요나의 표적을 통해 자신의 부활을 설명하셨습니다. 마태복음12장40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고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요나서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최고의 교훈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랑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보편적인 사랑이요, 절대적인 사랑이며, 조건 없는 사랑이요, 끝없는 사랑입니다. 가장 완전한 사랑이에요. 하나님은 요나서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던 편협적인 생각을 깨뜨려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왜냐면 이스라엘은 지나친 선민사상으로 하나님의 본심을 이해하지 못했거든요. 그들은 온 세상에 미칠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의도적으로 왜곡했어요. 마치 하나님의 사랑의 빛, 은혜의 빛이 자기들에게만 비추는 줄 알았지요.
그래서 그들은 이방민족을 원수 취급을 했고, 이방인들의 멸망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치부해버린 거예요. 때문에 감히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빛이 비추리라는 상상은 결코 하지 못했던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선민의 우월주의를 철저히 파괴하고 온 인류에 미치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유대인의 우월주의를 깨뜨리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범우주적인 청사진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역의 중심에 요나 선지자가 있었던 것이지요.
요나서는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장에서는 요나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징계를 다루고, 2장에서는 요나의 회개 기도를 다룹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니느웨의 범국가적인 회개를 다루고, 4장에서는 요나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을 비교하여 보여주십니다. 결국 요나의 잘못된 마음을 공개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는 것이지요.
(1) 유대 민족주의 옷을 입은 요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여전히 요나의 잘못된 감정이 변화되지 않았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여러 번의 접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여전히 고집스런 자신의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과 요나의 마음이 상충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긍휼히 여기신 반면에, 요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반드시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에 변함이 없었던 거예요. 요나는 유대인입니다. 요나는 유대인들의 편협한 국수주의가 깨뜨려지지 않은 채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물론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도 요나의 생각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악독을 외쳐야 합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뼛속까지 유대인이요, 선민우월주의에 빠져있던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다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죽는 것보다 더 어려웠을는지 모릅니다. 사실 자신도 나중에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겠다고 불평을 토하거든요. 그만큼 니느웨 선교는 힘든 사역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도망을 친 것입니다. 니느웨 선교가 싫어서 말입니다. 결국 다시스라는 곳으로 도망치다가 하나님께 붙잡히게 되지요. 그리고 바다가운데 던져진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삼야 목숨을 건 기도를 하게 되지요. 그 때의 기도는 죽느냐 사느냐의 운명을 가르는 절박한 기도였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요나의 그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물고기에게 명하여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십니다(2:10).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요나에게 미션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두 번째 임한 것이지요(3:1). 그 미션은 1차 때와 같습니다.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이번에 요나는 두말하지 않고 니느웨 성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고 말입니다(3:4). 아마도 요나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폭풍 같은 말씀을 대언했을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의 반응은 아주 특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니느웨 성을 강타한 것입니다.
그들의 회개의 속도가 너무나 빠르고 진지했던 거예요. 온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합니다. 니느웨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백성이 무론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아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의 금식은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 같은 모든 생명체로까지 확대된 것입니다. 그들은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않고 금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회개도 철저했습니다. 사람만 회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짐승까지 외적인 회개의식에 동참시켰습니다. 짐승에게도 다 굵은 베를 입혔던 거예요. 그만큼 회개에 대한 그들의 의지가 강렬했던 것입니다.
니느웨 성에 하나님을 감동시킬만한 회개운동이 일어난 거예요. 그들의 회개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반응도 무척 빨랐습니다. 3장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마치 하나님이 기다리시기나 하신 것처럼 빠른 결정을 내리신 거예요. 회개도 빠르고 응답도 빨랐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이요,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기34장6절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심판보다 용서가 빠르십니다. 죄에 대한 심판보다 회개를 통한 용서를 더욱 기뻐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성 사람들을 사랑하실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회개하여 돌아올 기회를 마련해 주신 것이지요. 왜냐면 그곳에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들이 무려 십이만 여명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4:11절). 육축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추수 때 거두어야 할 열매들과 같이 예비된 영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나의 선포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온 백성이 하나님께 회개한 거예요. 그들의 회개의 속도가 얼마나 빨랐습니까? 마치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들풀처럼 일어났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속도도 빠를 수밖에 없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기를 결정하신 것입니다(3:10). 그들의 참되고 거짓 없는 회개를 하나님이 즉각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라도 회개하는 자를 거절하지 아니하십니다. 당연히 니느웨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2) 회개한 니느웨를 향한 요나의 반응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결정을 바라보면서 탐탁지 않게 여긴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선지자로 부르신 요나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결정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도 역시 하나님의 결정에 빠른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요나는 자신의 상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4장1절을 보면,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분노했습니다. 요나의 본심이 드러난 것이지요. 그는 니느웨에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결정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결정이 싫은 정도가 아니라 화가 치밀 정도로 성질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싫었던 이유를 기도라는 방식을 통해 하나님께 토설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기도라기보다는 하나님께 따지는 것이지요. 마치 하나님의 결정이 잘못된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자기에게 행하셨던 하나님의 성품을 거론하면서 따집니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하나님의 성품이 자기에게는 적용되는데, 남에게 적용되는 것은 안된다는 말입니까? 이른바 자기 민족에게는 해당되는데, 다른 민족이나 이방인에게 적용되면 안된다는 말이냐구요.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자주 사용하는 전형적인 내로남불이 아닌가요?
아직도 요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는 것이지요. 요나는 당연히 하나님이 니느웨를 심판하실 줄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그것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불쌍히 여기시냐구요. 그런 하나님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만일 니느웨가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드린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것이고, 자기 백성들에게 상당히 좋지 않을 영향이 미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실제로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예후가 통치하던 BC 841년에는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친 경험도 있구요.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을 당하거든요.
그러니 요나의 생각에 앗수르가 예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 앗수르에게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겠다는 결정에 화가 치민 것입니다. 요나의 생각에 이런 못된 인간들이 재앙을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공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는 반드시 니느웨 사람들은 죗값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일종의 요나만의 정의감일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대부분 그런 정의감을 갖고 있었지요. 자기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야 할 민족이지만 이방인들은 절대 그럴 수 없다는 묘한 민족주의 선민사상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것도 감히 니느웨 사람들이 용서받는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싫은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요나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심지어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내 눈으로 그런 험한 꼴을 보고 사느니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이게 선지자가 할 말입니까? 그는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선지자 요나의 수준입니다. 이렇게 무지한 사람을 선지자로 발탁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물론 이런 것은 요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모습이 바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요, 우리들의 수준입니다. 그래서 바로 ‘내가 요나’입니다. ‘요, 나가 요나’입니다.
알다시피 요나는 유대인입니다.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국수주의자요, 민족주의자입니다. 요나 생각에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용서는 자기 백성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런데 요나는 아주 특별한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도 관심을 갖고 계심을 본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도 사랑하시는 것을 본 거예요. 지금까지 요나는 하나님은 이방인에게 어떤 관심이나 사랑을 드러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거든요.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런 고리타분한 생각이 바뀌지 않은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시다니요. 그리고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다니요.
도저히 요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니느웨 성에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예요. 이것이 바로 선지자 요나의 본심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요나는 아직도 유대민족주의 율법의 옷을 벗지 못한 거예요. 그의 마음이나 생각, 신앙의 모든 것이 여전히 유대율법주의 틀에 갇혀 있었던 거지요. 한마디로 율법의 하나님은 안다고 할지 모르지만, 복음의 하나님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여전히 유대주의자요, 이스라엘 민족주의자에 불과했던 거예요.
그러나 그 율법의 옷을 벗지 못하면 절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비록 선지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는 거예요. 그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리는 것은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어야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거예요. 물론 구약 성도들에게 복음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믿는 것이요, 신약 성도들에게는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둘 다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어야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어요. 하나님의 마음은 복음 안에 있거든요. 예수님은 지금 내 안에 새 언약의 복음으로 계십니다. 복음의 선지자가 되어야 하나님의 본심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 유대인 선지자가 아니라 복음의 선지자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본심을 알 수 있다는 말이에요. 율법의 선지자가 아니라 복음의 선지자로 변화되어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거예요. 유대인 요나가 아니라, 선지자 요나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에 매어있는 요나의 옷을 벗기는 작업을 시도하시는 것입니다.
(3) 요나의 유대주의 옷을 벗기시는 하나님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군은 연약하고 미미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양육과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일군으로 만들어져가는 거예요. 물론 죽을 때까지 만들어 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일군이 만들어진 일군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찾고 고릅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절대 만들어진 일군들은 없습니다. 여전히 만들어져 가는 일군들이지요. 내 자신을 보면 금방 이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군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세움을 입어 거기에 합당한 일군들로 만들어져 가는 거예요. 그래서 완전한 일군은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 그런 일군을 기대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일군은 지금도 여전히 만들어져가는 중이거든요.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여전히 미숙한 우리들을 성숙한 자로 인도해 가시는 중이지요. 불완전한 우리를 그리스도의 완전함으로 이끌어 가시는 중이에요. 요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가 비록 선지자로 부르심을 입고 세움을 받았지만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지요. 그의 마음이나 생각, 그의 믿음이나 행동에 이르기까지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기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어요. 한마디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내려놓지 못한 거예요.
그런 요나의 율법주의 옷을 하나님이 벗기기 시작하십니다. 요나의 왜곡된 마음을 하나님이 보게 하시는 거예요. 그의 모난 부분을 말씀의 정과 끌로 다듬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선지자로 요나를 훈련하시는 것이지요. 당연히 요나가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한 선지자가 되려면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면 절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거든요. 그냥 직업적인 선지자 노릇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지자는 될 수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요나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교육하시는 것입니다. 요나의 마음을 깨뜨리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갖게 하시는 거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요나의 마음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나의 마음을 드러내게 하시는 것이지요. 요나를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준비하신 거예요. 하나님이 요나에게 질문하십니다. ‘왜 성질을 부리냐’(4절)고 말입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성질을 부렸거든요. 아예 죽는 것이 낫다고 투정을 부렸습니다. 철부지 어린애들이 징징거리듯이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마음을 갖지 못해서 그래요. 로마서9장20절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느껴보십시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하나님의 마음이 안되면 누구나 다 그래요. 선지자라도 다를 것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질문에 감히 요나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요나의 정곡을 찌른 것입니다. 요나의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신 거예요. 그만큼 요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던 거예요. 그냥 자기 마음이 원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했던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을 갖기 보다는 다소 엉뚱한 행동을 합니다. 니느웨 성 동편으로 가서 앉아서 자기를 위해 초막을 지었습니다. 초막을 지은 이유는 장차 그 성읍이 어떻게 되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5절).
진짜 하나님이 니느웨 성에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지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도 설마 하나님이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를 심판하시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을 갖고 그랬을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요나는 은근히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마음이 안되면 사악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이것이 요나의 본심입니다. 여전히 요나는 하나님의 마음과는 전혀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던 거예요. 요나는 끝까지 니느웨 성의 멸망에 집착한 것입니다.
요나는 혹시 니느웨 사람들이 위선적인 회개를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재앙을 당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편한 희망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그 사이에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켜 니느웨를 심판하실지 모른다는 선민의 기대감을 갖고 있었는지 모른다는 말이에요. 아무튼 요나는 유대주의 정의감을 가지고 니느웨 성의 결국을 지켜보기로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선지자적 정의감을 가지고 그랬을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사십일 동안 그곳을 떠나지 않고 지켜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불난 집에 불구경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누가복음15장에는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 비유는 유대주의적인 그릇된 정의감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집나간 탕자가 허송세월을 보내고 아비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는 죽었다가 살아온 아들로 인해 너무 너무 기뻐합니다. 돌아온 둘째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발에 신을 신겨줍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을 초청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풉니다. 그런데 그 일을 매우 탐탁지 않게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맏아들입니다. 그 역시 아버지 못지않게 기뻐해야 할 텐데 그의 반응은 시큰둥합니다. 시큰둥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를 가르치듯이 따집니다.
자기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기면서 말썽 한번 부리지 않았는데 염소새끼 한 마리도 잡아준 적이 없었는데 왜 집을 나가서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위해서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느냐는 것입니다. 일종의 자기만의 정의감으로 꼬라지를 부린 것이지요. 맏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교회는 이런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는 거예요. 지나치게 정의로움을 따지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거든요. 그들의 눈에는 사랑보다 정의가 더 크게 보인 거예요. 하나님의 마음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하나님의 마음을 갖지 못하면 사랑보다 공의와 정의를 더 앞세우지요.
물론 사랑도 하나님의 성품이고 공의도 하나님의 성품이에요. 둘 다 하나님의 마음이지요. 그런데 공의는 율법에 기초하는 마음이요, 사랑은 복음에 기초하는 마음이에요. 다만 두 성품의 성격이 달라요. 그리고 사용하는 용도가 다르지요.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사용할 권한이나 자격이 없어요. 어떤 인간도 하나님보다 정의로울 수 없고, 공의로울 수 없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어떤 사람도 함부로 공의나 정의의 칼을 사용하면 안되는 거예요. 지나치게 정의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위험한 거지요. 사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깊은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요나도 역시 정의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 성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 지켜볼 생각이었던 것이지요. 그의 생각은 과연 니느웨 성이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보고 싶었던 거예요. 하나님은 요나의 그런 마음을 요나로 하여금 보여주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시청각 교육을 하시는 것입니다(6절). 요나가 만든 초막은 머리가 벗겨질 정도로 뜨거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박 넝쿨을 준비하여 요나의 머리를 가리어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박 넝쿨로 인하여 요나는 심히 기뻐했습니다. 그 박 넝쿨은 하나님이 하루 만에 준비하신 소품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요나의 괴로움을 면케 해주신 선물이었지요.
그런데 요나가 박 넝쿨이 주는 혜택으로 기쁨을 누리고 있을 때 하나님은 요나의 기쁨을 빼앗아 가실 또 다른 프로그램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사용된 소품은 미생물 벌레였습니다.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벌레들로 하여금 박 넝쿨을 씹어 먹게 하신 것이지요. 그러자 박 넝쿨은 금방 시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7절). 그리고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은 또 다른 소품을 준비하셨지요(8절). 뜨거운 동풍입니다. 뜨거운 태양아래서 뜨거운 동풍까지 불어오매 요나의 머리가 불이 납니다. 요나는 혼곤한 상태에 빠진 것이지요. 요나의 마음이 다시 요동을 칩니다.
하나님이 인간 요나의 두 마음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나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던 더럽고 추한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비록 선지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갖지 못한 요나의 마음은 인간적인 마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그래서 금방 자기감정을 드러낸 거예요. 요나는 다시 하나님께 성질을 부립니다. 차라리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말입니다. 마치 불평이 습관이 된 것처럼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왜 성질을 부리냐고 하나님으로부터 지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요나는 같은 불평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마음이 바뀌는 것이 어려운 거예요.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 되지 않으면 신앙의 연륜이나 경륜, 직분과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이렇게 간사해요. 순간순간 자기감정에 따라 춤을 추지요. 상황에 따라 다른 얼굴로 나타나요. 그래서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에요. 사실 자신의 마음도 자기 자신이 모르거든요. 그러니 사람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깊고 심오한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요나의 마음을 수면위로 드러내셨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시고, 알게 하시고, 갖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투정을 부리는 요나를 향해 하나님이 다시 반문하십니다(9절).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고 말입니다.
요나가 자기감정을 감추지 않고 대답합니다. 정말 성질나서 죽을 정도로 화가 난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요나에게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10-11절). 그렇습니다. 사실 요나는 그 박 넝쿨을 위해 어떤 수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배양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자연의 혜택을 공짜로 누리고 기뻐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마치 자기가 주인이나 되는 것처럼 꼬라지를 부린 거예요. 어쩌면 앞으로 사십일 동안 박 넝쿨 없이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암담하고 열이 받아 그랬을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모든 인간들이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요나에게 전달하십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아꼈거든, 내가 니느웨 성읍에 있는 영혼들을 아끼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고 말입니다. 감히 어떤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깊고 높은 마음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부모의 마음과 자식의 마음은 근본이 다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이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은 지구촌에 거하는 모든 인간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이 세상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마음이지요.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각 나라와 족속의 모든 죄인이 하나님 앞으로 나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소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그런 마음을 미련한 우리가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자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판단하거나 왜곡하지 마십시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내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마태복음6장30절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탄식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보십시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모든 사람은 한 사람도 거절하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혹시 내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그리스도 우리 주안에 있는 마음입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으로부터 내안에 주님의 마음이 부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결코 신앙의 연륜이나 경륜이나 직분에 연연하지 마시고 내안에 주님의 마음이 되었는지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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