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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발자국
게이조는 점심을 먹고 나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코스모스가 바람에 흔들리는 뜰을 내다보고 잇었다. 그때 마쓰사키 유카코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게이조에게 우편물을 전했다.
“고마워요.”
유카코는 말없이 고개를 까딱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딱딱한 표정으로 게이조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무라이가 복직한 지도 5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게이조에 대한 유카코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전에는 원장실에 올 적마다 뭐라고 말하고 싶은 듯한 눈치였다. 게이조의 책상 위에 꽃을 갈아 꽂는 것도 그녀였다.
무라이가 복직하고 나서 유카코는 단 한 번,
“원장님, 무엇 때문에 무라이 선생 같은 사람을 다시 데려왔어요?”
하고 나무라듯이 말한 적이 있었다.
“유카코 양에게 인사권은 없는 줄 아는데.”
하며 게이조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런데도 유카코는 얼굴을 붉히면서,
“죄송합니다.”
하고 뜻밖에 순순히 사과하고 방에서 나갔다.
그 후로 유카코는 사무적인 용건 외에는 일체 입을 열지 않게 ㅗ디었다.
‘무라이와 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 아가씨일까?’
하고 생각하면서도 게이조는 그것을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 지금도 그는 우편물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유카코의 태도를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무라이의 복직과 관련해서 가장 걱정했던 나쓰에에게도 그다지 신경쓰일 만한 일이 일어난 것 같지 않았다.
무라이는 복직 후 얼마 안 있어 감기가 원인이 되어 가벼운 신장염으로 2주일쯤 쉬었다. 그때 나쓰에는,
“폐결핵에 걸렸던 사람은 역시 약해서 쓸모가 없군요.”
하고 싸늘하게 말하면서 아무런 동정도 하지 않았다.
“집에도 좀 놀러 와요.”
하고 게이조가 말해도 무라이는 전과 같이 쓰지구치 집을 방문하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그다지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군.’
하고 게이조도 요즘은 마음을 놓고 있었다.
다만 나쓰에가 왠지 기운이 없어 보이고, 방에 꽂아둔 꽃이 시들어도 바꾸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깔끔한 나쓰에는 전에는 화분에 심은 난초 잎사귀에 먼지가 앉는 것도 참지 못했었다.
“어디 몸이라도 아프오?”
하고 물어도 잠자코 고개를 저을 뿐 말수도 적어졌다. 그래서 게이조는 유카코보다도 나쓰에가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만일 유카코의 사생활에 대한 내막을 알고 있었더라면 게이조도 무관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흠, 금년에는 교토에서 학회가 열리는군.’
게이조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나서 학회의 안내장을 다시 읽었다. 내과의 학회는 9월 30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게이조는 전쟁이 끝난 후에는 병원 경영에 온통 신경을 집중하여 내지에는 한 번도 가지 못했다.
게이조는 오랜만에 학회에 참석하기로 마음먹었다. 왠지 시무룩해져 있는 나쓰에로부터 잠시 떨어져 있고 싶기도 했다.
“9월말에 교토에 학회가 있소.”
집에 돌아온 게이조는 옷을 갈아입으면서 나쓰에에게 말했다.
“당신 가실 거예요?”
“응, 가을엔 병원도 좀 한가하니까.”
“그래요? 그럼 다녀오세요. 내지는 좋은 계절이고 하니까요.”
나쓰에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저도 데려가 주시지 않을래요?”
하고 덧붙였다.
“당신도?”
게이조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나쓰에 곁을 떠나 오랜만에 혼자 있고 싶었던 것이다.
“치가사키에 계시는 아버지를 찾아뵈려고 그래요.”
나쓰에의 아버지 쓰가와 박사는 정년 퇴직 후 치가사키에서 살고 있었다. 나쓰에의 큰오빠는 그곳에서 도쿄의 병원에 출퇴근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오루와 요코는 어떡하고?”
“참, 그렇군요. 쓰기코 부부에게 집을 봐 달라고 하죠 뭐.”
“쓰기코네도 사정이 있을 텐데.”
“그녀는 부탁하면 절대로 마다하지 않을 거예요.”
지금까지 나쓰에는 한 번 입밖에 낸 주장은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 게이조는 하는 수 없이,
“그럼 같이 가도록 하지.”
하고 말했다.
“정말 데려다 주시는 거죠?”
나쓰에는 오랜만에 밝게 웃었다. 그 얼굴을 보자 게이조의 마음도 자연히 누그러졌다. 그는 아내의 기분에 좌우되는 자신에게 정이 떨어져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인간이란 의외로 한 지붕 밑에 사는 사람의 영향을 이처럼 크게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햇다. 괴테인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우울은 최대의 적’이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유명한 대학자인 그도 ‘우울이란 놈’에게 무척 시달렸던 모양이라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그 ‘우울이란 놈’은 다름아닌 그의 아내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게이조는 약간 위안이 되었다.
나쓰에는 우울해지면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말을 건네면 짤막하게 대꾸는 했다. 말씨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점잖고 상냥했다. 그러나 자진해서 입을 열려고 하지 않는 나쓰에에게 게이조도 말을 건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쓰에로서는 그 우울증은 결코 정체 불명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고 싶은 말이 가슴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데 그것을 입밖에 낼 수 없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왜 사이시의 딸을 키우게 했지요?”
하고 묻고 싶었고, 도오루에게는
“요코는 루리코를 죽인 범인의 딸이야. 그런데 뭐 때문에 그렇게 귀여워하니?”
하고 말하고 싶었으며, 요코에게는
“그곳은 루리코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야. 그 옷은 루리코가 입어야 할 옷이야.”
하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무라이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어째서 당신은 그렇게 초라하게 변했어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쓰에는 무라이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어떤 말도 섣불리 입밖에 낼 수 없었다.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가슴속에 품고 있는 자기 자신이 누구보다도 가엾게 생각되었다. 그런 생각으로 우울해져 있는 나쓰에의 마음을 게이조는 알턱이 없었다.
나쓰에는 치가사키에 계신 아버지가 몹시 보고 싶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읜 나쓰에에게 아버지는 단순한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버지인 동시에 어머니이기도 했다. 그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 나쓰에는 여행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선물, 신발, 핸드백 등을 차례로 사들였다. 어쩐지 집안에 활기가 넘쳐흘렀다. 게이조도 지금은 아내와 함께 떠날 여행을 기쁨으로 여기게 되었다.
출발할 날이 이클 앞으로 다가왔다. 이날 나쓰에는 밖에 나간 김에 미장원에 들렀다. 미장원에서 왔을 때는 벌써 오후 네 시 반이 지나 있었다. 오랜만에 하는 여행을 눈앞에 두고 나쓰에는 약간 들떠 있었다. 아버지를 만난다는 생각에 소녀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나쓰에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커피라도 마실까?’
어제부터 쓰기코가 집에 와 있으니까 식사 준비에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는 전에 몇 번인가 남편과 들른 적이 있는 ‘치로루’에 들어갔다.
‘치로루’의 주인은 시인이었다. 그 시인다운 분위기가 다방 내부에도 물씬 풍기고 있었다. 좀 붐비기는 했으나 안은 조용했다. 나쓰에는 커다란 종려나무 그늘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나쓰에는 혼자 다방을 찾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어쩐지 낯선 거리에 와 있는 것처럼 신선한 느낌이었다. 때때로 나쓰에는 주위의 시선을 느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미소를 보내주고 싶은 대담성이 있었다.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게 못되는 구나.’
날라 온 커피에 밀크를 떨어뜨리려고 할 때였다. 검은 소프트를 깊숙이 눌러쓴 신사가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았다. 나쓰에는 그가 사람을 잘못 봤나 싶어서,
“저.......”
하고 말하려다가 깜짝 놀랐다. 그는 다름 아닌 무라이였다. 5개월 전 아사히가와 역에서 만난 후로 나쓰에는 한 번도 무라이를 만나지 않았다.
움푹 팬 검은 눈이 나쓰에에게 웃음을 던지고 있었다. 무라이는 말없이 담배를 물고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 모습은 5개월전의 그 초라하고 지친, 얼굴이 부석부석하던 무라이가 아니었다. 얼굴도 체격도 딴 사람처럼 탄력이 있고, 옛날보다 훨씬 의젓해 보이는 미남자 무라이였다.
“어머!”
나쓰에는 갑자기 말이 나오지 않았다.
흰 바바리 코트에 벨트를 꽉 조이고 검은 소프트를 쓴 무라이를 나쓰에는 놀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4월, 아사히가와로 돌아왔을 때의 무라이는 요양소에서 방금 나와서인지 운동 부족으로 뚱뚱해 보였었다. 게다가 신장염을 앓아 얼굴도 흉하게 부석부석했었다. 나쓰에는 그런 줄 미처 몰랐던 것이다.
“놀랐습니까?”
무라이는 약간 심술궂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설마 이런 데서 뵈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그래요? 전 병원에서 귀가할 때는 대개 이곳에 들러 커피를 마시죠. 맛있죠, 이 집 커피?”
나쓰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오늘은 퇴근이 빠르시군요.”
하고는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지금은 내과 부속의 안과 의사 노릇을 하고 있어 좀 편하지요.”
무라이는 약간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웃었다.
“몸은 완전히 나으셨어요?”
나쓰에의 말에 무라이는 흘끔 바라볼 뿐이었다. 무라이는 쓸쓸한 표정으로 멍하니 담배 연기를 눈으로 쫓고 있었다.
‘화를 내고 있는 것일까?’
나쓰에는 무라이를 역까지 마중 나갔을 때 자신이 보여준 쌀쌀한 태도를 상기했다.
‘하지만 그때의 무라이 씨는 정말 볼품없었는걸. 할 수 없었지 뭐.’
나쓰에 자신에게만 통하는 논리였다. 나쓰에는 추해 보이는 사람은 싫었다. 생리적으로 맞지 않았다. 추한 사람을 보면 자신의 용모가 침해를 받는 것 같아서 불안했다. 그것은 산모가 화재를 보면 붉은 반점이 있는 아기를 낳는다고 믿는 것과도 같은 감각이었다. 나쓰에는 추해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동정이 가지 않았다. 추한 것은 그녀에게는 악이기도 햇다. 그런 냉혹한 면이 없다면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을 그녀는 모르는 듯했다.
반대로 아름다운 것은 무조건 사랑했다. 아름답게 태어난 그녀는 자기 자신이 우상이었다.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것은 그녀에게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인지도 몰랐다.
나쓰에는 거울 앞에 앉기를 좋아했다. 거울 속의 자기 자신에게 반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거기에는 자화자찬이 따랐다. 그러나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자신에게 반하는 한, 타인에 대한 사랑은 생겨나지 않았다. 거울은 눈에 보이는 것밖에 비추지 못했다. 마음은 비출 수 없었다.
아무튼 나쓰에는 추해 보이던 5개월 전의 무라이를 사랑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그녀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은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쓰에는 눈앞의 무라이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무라이 앞에 커피가 날라져 왔다.
“원장님은 학회에 가시는 모양이더군요.”
무라이는 익숙한 솜씨로 커피 잔을 빙 돌리면서 말했다.
“네, 전쟁 이후에는 처음이에요.”
“26일에 떠나신다죠?”
“네, 마침 일요일이라서요.”
“함께 가십니까?”
“글쎄요, 어떡할까 생각 중이에요.”
나쓰에는 웬일인지 함께 간다고 말할 수 없었다.
“다녀오시죠. 이곳의 가울과는 다른 색다른 맛이 있을 테니까요.”
이렇게 말하고 무라이는 히죽 웃었다. 그 웃음에 나쓰에는 당황했다. 자기가 비웃음을 당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무라이 스스로 쓴웃음을 짓는 것 같기도 했다.
“어리석은 말을 했군요. 남의 부인이 주인 양반과 여행을 같이 가든 말든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이렇게 말하고 무라이는 다시 웃었다. 나쓰에는 그 말을 마음속으로 되씹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점점 괴로워졌다. 여행을 포기하고 싶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마주 않아 있었다.
‘만일 이곳에 남편이 나타난다면.......’
나쓰에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그때의 게이조를 보고 싶기도 햇다. 그리고 여행을 그만두고 게이조가 없는 동안 그를 배신하고 싶은 유혹도 느꼈다. 나쓰에는 자신이 두려웠다. 그녀는 문득 핸드백을 들며 말햇다.
“저, 실례하겠어요.”
무라이가 싸늘하게 웃으면서,
“도망치는 겁니까?”
하고 두 번째 담배를 입에 물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불을 붙이는 모습이 나쓰에의 마음을 끌었다.
“도망치다뇨? 그런.......”
“그럼 뭡니까? 만나자마자 왜 그렇게 급히 돌아가려는 거죠?”
무라이의 표정이 갑자기 흐려졌다.
“냉정하군요, 당신은.”
“...........”
“난 도야에서 돌아왓을 때 당신을 보고 ‘아, 아사히가와에 잘못 왔구나’하고 생각했었어요.”
“.........”
“도야에 가 있는 7년 반 동안 당신은 한 번도 문병을 와 주지 않더군요. 그건 뭐 그렇다고 해요. 연하장 외에는 엽서 한 장 띄워 주지 않았지요?”
“저, 죄송해요.”
“건강한 사람은 병자에게 참 냉정하더군요. ‘바쁘다, 일에 시달리고 있다. 때로는 병상에라도 누워 있고 싶다’고 말하기도 하죠. 그렇게 누워 있고 싶으면 늑골 대여섯 대 자르고 피 토하면서 7년이고 8년이고 누워 있어 보라지.”
무라이는 격렬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고는 부드러운 눈매로 덧붙였다.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닌데, 뭔가 당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 같군요. 사실은 나 의논하고 싶은 게 있어요.”
의논하고 싶다는 말에 나쓰에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결혼 말이 아닐까?’
“무슨 말씀인데요?”
“여기서는 좀.........”
하고 망설이는 듯하더니 담뱃불을 끄고 나서,
“나가실까요?”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오니 어둑어둑했다. 나쓰에는 무라이와 같이 걷는 것이 처음이었다. 나란히 서자 무라이가 무척 커 보였다. 나쓰에의 감각은 게이조가 기준이었다. 무라이는 나쓰에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걸었다.
어디선가 옥수수 굽는 냄새가 풍겨왓다. 길모퉁이의 옥수수 장수가 무라이를 향해,
“선생님, 늦으셨군요.”
하고 소리쳤다.
“네.”
무라이는 모자에 살짝 손을 대고 지나쳤다.
“환자예요.”
무라이가 말했다. 나쓰에는,
‘혹시 병원의 누구와 만나는 게 아닐까?’
하고 약간 불안해졌다. 한편 누구와 만나도 상관없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무슨 의논이죠?”
어느새 두 사람은 인적이 드문 길을 골라 걷고 있었다.
“2, 3일 안으로 의논하러 찾아뵙겠어요.”
‘2,3일 안으로? 나는 여행을 떠나고 없을 텐데.’
“안 될까요? 천천히 말씀드릴 것이 몇 가지 있는데요.”
“결혼 말인가요?”
나쓰에의 걸음이 느려졌다.
“.........”
무라이가 멈춰 섰다. 나쓰에도 문득 멈춰 섰다. 무라이는 예리한 눈초리로 나쓰에를 훑어보았다. 나쓰에는 그 눈에 응대하듯이 무라이를 쳐다보면서 여행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새로운 장난감을 보면 지금 갖고 있는 장난감을 미련 없이 내던져버리는 어린 아이들의 마음과 비슷한 것이었다. 자전거가 벨을 울리며 두 사람의 옆을 일부러 바짝 스쳐 지나갔다. 요리 배달을 하는 젊은 남자였다.
“언제든지 좋으니 오세요.”
나쓰에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때 무라이가,
“아차!”
하고 작은 소리로 외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곧 전화 드리죠. 갑자기 볼일이 생각나서. 이만 실례하겠어요.”
무라이는 몸을 홱 돌려 가 버렸다. 나쓰에는 어안이 벙벙하여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았으나, 무라이는 곧 길모퉁이를 돌아 자취를 감춰 버렸다. 무라이가 갑자기 유카코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뒤를 쫓은 것을 나쓰에는 알지 못했다.
나쓰에보다 한 걸음 늦게 게이조는 집에 돌아왔다. 마중을 나온 나쓰에가,
“저 여행 그만둘래요.”
하고 아양을 떨듯이 게이조를 바라보았다.
“그만두겠다고? 왜?”
처음에는 혼자서 여행을 가고 싶어했던 게이조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쓰에와 둘이서 하게 된 것을 차츰 즐겁게 생각했다. 그것은 여행을 같이하기로 한 후로 나쓰에가 다시 명랑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아이들의 일이 걱정스러워요.”
게이조는 시무룩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 오세요?”
식사 준비를 하던 쓰기코와 그녀를 거들고 있던 요코가 동시에 말했다.
“응, 수고하는군. 모처럼 쓰기코에게 부탁했는데, 나쓰에는 여행을 가지 않을 모양이야.”
게이조는 애써 부드럽게 말했다. 어쩐지 나쓰에에게 놀림을 당한 것 같아 화가 났다.
“어머, 정말이세요, 아주머니?”
“응, 아무래도 아이들이 걱정스러워. 미안해, 쓰기코.”
“저야 괜찮지만 아저씨가 서운하시겠어요.”
쓰기코는 안 됐다는 듯이 게이조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엄마, 같이 가시는 게 좋겠어요. 치가사키에서도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우리가 집 잘 볼게요. 그렇지, 요코?”
요즘 도오루는 요코의 이름을 편하게 부르게 되었다.
“뭐야, 여동생에게 ‘야’를 붙여서 부르고.”
하고 친구들에게 비웃음을 샀기 때문이었다.
“그래요, 집 잘 볼 거예요.”
“하지만 갑자기 떠나는 것이 걱정이 돼요, 만일 아이들이 병이라도 나면 어쩌나 해서요. 그만둘래요, 전.”
나쓰에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게이조는 어쩐지 아리송했다.
‘엄마라면 아이들의 일을 맨 먼저 걱정하는 게 당연하지. 그런데 뭐야, 이제 와서 걱정하다니! 정말 제멋대로야. 처음부터 가겠다고 나서지나 말일이지. 쓰가와 선생 같은 인격자에게서 어떻게 저런 제멋대로인 딸이 태어났을까? 부모와는 달리 요코와 같은 아이도 태어나니 인간이란 알 수가 없군.’
식사를 하면서 게이조는 마음속으로 마냥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런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게이조는 멋쩍은 듯이 도오루에게 말했다.
“도오루, 선물은 뭐가 좋을까?”
게이조는 아이들과 관계없는 일로 시무룩해진 자기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저요? 뭐든지 좋아요. 요코는 뭐가 좋아?”
도오루는 아버지가 요코에게 먼저 물어주었으면 했다. 그런 도오루의 심정이 게이조에게도 민감하게 전해져 왔다.
“요코에게는 큰 인형을 사다 줄까? 어때?”
게이조는 수저를 놓고 요코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나쓰에에 대한 부아가 요코에게 상냥하게 대하게 하는 것 같았다.
“고마워요.”
요코는 일부러 아버지 흉내를 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