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아들이 영훈국제중학교에 '사회적 배려대상자' 전형으로 합격하였다. 사회적 배려대상자 전형이 경제적 배려대상과 비경제적 배려대상자로 나뉘고, 비경제적 배려대상에 '한 부모 가정 자녀'가 포함된 때문이다. 국제중 전형의 허점이 드러난 대목이다.
그런데 국제중 졸업자 대부분이 특목고에 입학을 하고, 명문대 입학생 대다수가 특목고 출신이며, 국제중과 특목고 학생의 상당수가 강남 출신이라고 한다. 부모의 소득에 기초한 사회적 차별이 그에 부합하는 교육제도를 매개로 후대에 영속(永續)될지도 모르는 기로에 섰다. '정당(正當)한 불평등(不平等)'과 '용인(容認)할 수 없는 불공정(不公正)'
"절대적인 사회적 정의에 대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무의미하다. 절대적인 사회적 정의는 없다"고 에르하르트 에플러(Erhard Eppler)는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의 수준에서 대부분이 공감하는 공리(公理)를 끌어낼 수 있으며, 그 공리를 기반으로 새로운 논의를 이어갈 수는 있다.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뉴시스
예컨대 '완전한 평등', 즉 모든 종류의 노동에 대해 동일한 보상이 주어지는 것은 정당하지 않으며, 경제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는 일반적인 동의가 존재한다. 그래서 성과가 동일하면 동일한 대우를, 성과가 다르면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 불평등을 정당하게 받아들인다. 또한 '기회의 평등', 즉 '출발조건의 평등'이 보장된다면 그 이후에 나타나는 소득과 지위, 그리고 다른 영역에서의 불평등은 정당한 것이 된다.
문제는 기회의 불평등이다. 타고난 재능의 차이, 성별의 차이, 부모의 가능성의 차이, 교육과 직업훈련 경로의 차이에 따라 기회의 불평등이 만들어진다. 불평등한 삶의 여건이 '개인의 의지'와 '노력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국가의 개입'은 정당하지 않다. 그러나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는 것이 불평등의 원인이라면 국가는 이를 시정하기 위해 개입하여야 한다.(<복지국가와 사회민주주의>(알렉산더 페트링 외 지음, 조혜경 엮음, 한울 펴냄) 28~42페이지 참고)
사교육과 특목고는 국가가 '기회의 불평등'을 조장하는 것
이전 세대는 '공부는 때가 있어, 예전에 내가 공부를 안 해서 지금 이렇다'라는 말을 해 왔다. 그런데 우리의 자식들 세대는 '부모가 가난해서 학원을 제대로 못 다녀 내가 이 모양 이 꼴이다'라고 말할 처지가 되었다.
강남 8학군이나 분당·평촌 등지의 신흥 도시는 명문대 입학률을 자랑하는 명문 고등학교의 입지 말고도 명문 학원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40년 전 찢어지게 가난하지만 호롱불 밑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해서 서울대를 들어갔던 고학생(苦學生)의 신화는 이제 없다. 명문학원에 더하여 명강사들의 고액과외까지 받은 아이들이 서울대에 들어간다. 혼자서 참고서와 EBS 교재만으로 공부한 아이는, 고액과외 선생이 출제한 문제를 미리 연습한 강남 아이를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 국제중 졸업자 대부분이 특목고에 입학하고, 특목고 출신 거의 다가 명문대에 들어가며, 국제중과 특목고 학생의 대다수가 강남 출신인 것이다.
기회의 평등, 즉 출발조건의 평등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교육기회의 평등'이다. 교육의 차이는 직업의 차이를 낳고, 직업의 차이는 소득의 차이를 낳기 때문이다. 즉 현재의 만연한 사교육과 국제중·특목고는 부모의 소득에 기초한 사회적 차별을 후대(後代)로 승계시킨다.
과연 '사교육'과 '국제중', '특목고'는 존재의의가 있는가? 없다. 서울대를 들어가기 위한 입시도구에 불과하다. 어떤 고등학생이 조금 더 난해한 수학문제와 물리문제를 풀었다고 국가경쟁력이 부양되는가? 실제로는 대학 수준의 문제를 학원에서 미리 배웠기 때문에 푸는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진정한 국가경쟁력은 '대학에서의 학습'에 달려 있다.
'대학의 서열화'는 극복되어야 한다. 각 대학이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명문대를 없애서는 안 된다. '서울대 폐지론'은 '완전 평등론'의 아류이다. 만약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었다면 '더 노력한 자'의 성과는 인정되어야 한다. 프랑스에서 68혁명 이후 '파리 1대학·2대학 등'으로 국립대학을 통일하였지만, 인재양성의 문제로 '그랑제꼴'인 파리고등사범학교를 존치시켰던 것이 그 예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서울대에 들어가지 못했어도 늦게라도 다시 노력해서 성과를 인정받을 수 있는 '패자부활 시스템'을 활성화 시키는 것이다.
사교육 대책에 절충은 없다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초등·중등·고등교육에서의 '기회의 평등'이다. 이것은 '공교육의 정상화'로만 달성된다. 도대체 '공교육의 정상화'는 어떻게 달성되는가?
'사교육 철폐'가 그 답이다. 학원업계는 극단적인 처방이라고 격렬하게 반발할 것이다. 그러나 사교육 대책에는 '절충'이 있을 수 없다. 예외를 두는 순간 '곰팡이'처럼 다시 번식할 것이다. 도대체 세계 어느 나라에 우리처럼 다섯 살 때부터 수학·과학·미술·음악(피아노+1)·영어·태권도를 보내는 곳이 있을까? 평균적인 공교육이 이를 대체해야 한다. 다만 사교육의 철폐는 사회적 동의를 얻어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이행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초등·중등·고등교육에서는 '평준화(平準化)'를 원칙으로 해야 한다. 지금은 아이가 한 번 공부가 처지면 다시는 재기할 수 없다고 한다. 뒤늦게라도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아이가 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국제중'과 '특목고'처럼 '향후 상류계급의 모태(母胎)'가 될 집단을 국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거기에 '대학등록금 후불제'는 '교육기회의 평등'을 더욱 보완할 것이다. 실력만 있으면 대학에 다닐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교육기회의 대가는 취업한 후에 지불하면 된다. 그래야만 교육기회가 부모의 소득 차이에 의존하지 않게 된다. 나아가 '등록금 후불제'로 대학을 정비한다면, 자본증식의 수단으로 전락한 병든 사학(私學)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노력의 차이'로만 결과가 달라져야 한다
한 아이가 '어떤 교육에 접근할 수 있느냐(approachable)'는 결국 성인이 되었을 때의 소득과 지위를 결정하는 문제이다. 그 아이의 '노력의 차이'로만 결과가 달라져야 한다. '부모의 소득 차이'로 결과가 달라진다면, 이는 '사회적 계급의 영속화'에 다름 아니다.
많은 이들이 공감하면서도 '과연 사교육을 철폐할 수 있을까'라고 회의(懷疑)한다. 그러나 바꾸어야 한다. 교육은 계층의 이동을 활성화시키는 사다리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부모의 소득 차이'에 따른 교육기회가 고착되면, 동시에 계급을 고착시키고 차별을 강화시킬 것이다. '경제적 계급 사이의 강화된 차별'은 결국 '정의를 향한 굶주림'을 가속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