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군산에 가면 우리가 잊고 지냈던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낡은 판잣집 사이로 철길이 지나고, 지키는 이 하나 없는 간이역이 그것. 이번 주말에는 인적조차 드문 철길마을과 간이역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더듬어 보자.
필자가 군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방이 어둑어둑해진 밤이었다. 거리는 조용했고, 네온사인은 겨우 밤 10시를 조금 넘었을 뿐인데도 다 꺼져있었다. 군산의 밤은 우물처럼 고요하다 못해 평화롭기까지 했다. 항구도시의 시끌벅적함과 번잡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언제 왔는지 모르게 조용히 곁으로 다가와 어깨를 툭 치고 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 쿡 하고 수줍게 웃어주는 그런 사람 같았다.
정적을 뒤로 한채 경안동으로 향했다. 이마트 건너편에, 철길마을이라는 곳이 있다. 참 묘한 풍경을 지닌 곳이다. 양편으로 판잣집이 늘어서 있고, 비좁은 판잣집 사이로 기찻길이 시냇물처럼 흘러간다. 가로등이 달빛 대신 철길을 비추고 있다. 철길은 필라멘트처럼 반짝거린다. 철길을 서성인다. 여행이라는 게 결국 서성대는 것 아닌가. 그러다 담 너머에 뭐가 있나 하고 궁금해 하고, 그러면서 내 삶을 흠칫 뒤돌아보는 거다.
경안동 근처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른 아침 철길마을을 다시 찾았다. 그제서야 철길마을이 오롯이 보인다. 낡은 집들이 양편으로 늘어서 있고 그 가운데로 철길이 놓여있다. 딱 1970년대 풍경 그대로다. 벽에는 빨래가 걸려있고 문 밖에는 시든 화분이 우두커니 서 있다. 누군가 버리고 간 자전거도 벽 한쪽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다. '이런 풍경이 아직도 남아있다니!'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철길은 경암사거리에서 시작해 군산경찰서와 구암초등학교를 지나 원스톱 주유소에 닿는다. 이 철길의 이름은 '페이퍼코리아'선이다. 1944년 4월4일 개통됐다. 군산시 조촌동에 소재한 신문용지 제조업체 '페이퍼코리아'사의 생산품과 원료를 실어나르기 위해 만들었다. 군산역과 페이퍼코리아 공장 사이에 놓인 철로의 총 연장 거리는 2.5㎞. 이 가운데 기차가 낡고 오래된 살림집들 사이를 통과하는 구간은 경암사거리에서부터 군산경찰서와 구암초등학교를 지나 원스톱 주유소에 이르는' 1.1㎞ 정도다.
철길을 따라 늘어선 집에는 실제로 사람들이 살고 있다. 1970년대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철길 옆으로 모여들었고, 자연스럽게 마을이 이루어졌다. 손녀를 학교에 바래다준다던 한 할머니는 "떠나려고 해도 갈 곳도 없는데다 이제는 정이 들었다"며 "사람이 못 살 곳이 어디 있냐"며 웃었다.
기차는 하루 평균 두 번 다닌다. 오전 8시30분~9시30분, 오전 10시30분~낮 12시 사이에 마을 사이를 지난다. 때론 이 시간대를 벗어나기도 한다. 어떤 날에는 1회 더 운행한다. 오전에 이어 오후 3시 전후 군산역을 출발했다가 오후 5시 무렵 되돌아 나오기때문이다.
철길마을을 지나는 기차는 5~10량의 컨테이너와 박스 차량을 연결한 디젤기관차다. 시속 10㎞ 정도의 속도로 운행한다. 차단기가 있는 곳과 없는 곳 모두를 합쳐 건널목이 11개나 되고, 사람 사는 동네를 지나야 하니 빨리 달리지 못하는 탓이다. 기차가 달리는 동안 역무원 3명이 기차 앞에서 호루라기를 불고 고함을 쳐대며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기차가 지나는 사이 주민들은 화분이며 강아지 등을 집으로 불러들인다. 이 모든 광경이 주민들에게는 익숙한 풍경이지만, 외지인들에게는 이색적인 광경일 뿐이다.
주민들은 기차가 지나다니지 않는 시간에는 철로에 고추나 나물을 말리기도 한다. 벽에는 빨래가 햇빛에 말라가고 있다. "위험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기차 시간을 대충 아니까 알아서 치운다"고 대답했다.
요즘은 디카족들의 출사 여행지로 인기가 높다. 주말이면 카메라를 멘 사람들이 철길을 담기 위해 몰려든다. 하지만, 사진을 찍을 때는 조심스러워야 한다. 주민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 사전에 미리 양해를 구하는 것이 좋다. 철길마을에서 임권택 감독이 영화 '천년학'을 찍기도 했다.
군산에는 또 다른 볼거리가 있다. 바로 임피역이다. 임피역은 지난해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1924년 지어진 후, 지난해 11월 무인역으로 바뀌었다. 역 앞에 커다란 은행나무가 서 있는데 곧 노랗게 물들 것이다.
서너 평 남짓한 대합실에는 초록색과 빨간색으로 페인트칠 한 벤치가 놓여있고, 벤치 위에는 열차시각표와 벽시계가 쓸쓸하게 붙어있다. 아들 병수발을 하러 간다는 이명선 할머니는 "십년 전까지만 해도 명절이면 서울에서 내려오는 자식들 표 사러 사흘 전부터 자리를 펴곤 했는데 이제는 그럴 일이 없다"고 아쉬워했다.
때마침 익산으로 가는 기차가 들어왔다. 문이 열리자 몇 사람이 내렸고, 황급히 뛰어온 몇 사람이 탔다. 기차가 떠나가자 역은 다시 조용해졌다. 텅 빈 역에는 구름그림자만 조용히 머물고 있다.
/여행수첩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동군산IC로 나와 26번 국도를 탄 후, 고속버스터미널과 군산경찰서를 지나면 이마트가 나온다. 이마트 주차장에 주차하고 길을 건너면 철로변 살림집 뒤로 곧게 뻗은 페이퍼코리아선 철길이 보인다.
▶잠자리= 군산 시내에 잠자리를 정하는 것이 낫다. 스위스모텔(063-463-6222)이나, 하이파크(063-452-4664) 등 나운동 일대에 시설이 깨끗한 모텔들이 많이 있다.
▶맛집= 군산역 앞 '할머니 해장국집(063-442-4777)'에서 2000원짜리 시래기해장국을 먹어보자. 깍두기와 함께 나오는 국밥에 마음까지 따뜻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