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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생명의 공통점―십이연기의 순환
불교에서는 우리에게 목격되는 생물 가운데 인간을 포함한 짐승, 즉 동물만을 생명체로 간주한다. 식물은 불교적 의미의 ‘중생[Sattvaⓢ]’*이 아니다. 생명체가 윤회하는 현장인 육도 중에도 식물의 세계는 포함되지 않는다. 식물 역시 동물과 마찬가지로 생로병사하지만, 생명체의 본질인 ‘식(識)’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경우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 식(識)’의 육계(六界)로 이루어져 있지만, 식물의 육계는 ‘지, 수, 화, 풍, 공, 시(時)’로 마지막의 식(識)이 시(時)로 대체되어 있다.
불교의 가르침 가운데 많은 부분이 생명체에 대한 분석에 할애되어 있다.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설에서는 ‘DNA에 기반을 두는 물질적 육체’인 ‘색’에 ‘수, 상, 행, 식’의 네 가지 정신 활동을 덧붙인다. 육계설에서 말하는 식(識)이 오온에서는 수, 상, 행, 식으로 세분된다. 무정물(無情物)인 식물의 경우는 ‘씨앗 → 싹 → 잎 → 마디 → 줄기 → 봉오리 → 꽃 → 열매’의 순서로 그 생장이 이어지는데, 유정류(有情類)인 중생의 경우는 그 어느 것이든, ‘무명 → 행 → 식 ↔ 명색 → 육입 → 촉 → 수 → 애 → 취 → 유 → 생 → 노사’의 과정을 거치며 생사(生死)를 되풀이한다. 이러한 십이연기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현대 학자들 간에 이견이 많지만, 단적으로 말하면 ‘모든 생명체가 겪게 되는 생존방식의 공통점’이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곤충이든, 물고기든 모든 생명체는 ‘출생했다가 늙어 죽는다(생 → 노사)’는 점에서 공통된다. 생명체의 탄생 방식의 경우, 인간이나 포유류와 같이 자궁에서 어느 정도 자란 후 탄생[胎生]하는 것도 있지만, 조류나 파충류, 물고기와 같이 알을 낳은 후 부화하여 탄생[卵生]하는 것도 있고, 거미나 지네와 같이 습한 곳에서 탄생[濕生]하는 것도 있다. 또 우리에게 보이진 않지만 지옥중생이나 천신과 같이 한 순간에 몸을 갖추고 탄생[化生]하는 것도 있다고 한다. 여기서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화생(化生)은 논외로 하더라도 태생이든 난생이든 습생이든 우리가 아는 모든 생명체는 ‘출생했다가 늙어 죽는다(생 → 노사).’
모든 생명체는 정자와 난자가 만난 수정란에 식(識)이 결합하면서 시작한다(名色). 그 수정란은 어미의 자궁 속에서든, 알 속에서든 분화를 거듭하며 성장하는데, 어느 시점이 되면 눈, 귀, 코, 혀 등의 감각기관이 형성되기 시작한다(六入). 그리고 출산을 통해서든, 부화를 통해서든 세상으로 나오게 되면 앞에서 형성되었던 여섯 감관(六入)을 통해 외부 대상을 접하게 되고(觸), 괴로움과 즐거움 등을 감수하며(受) 살아간다. 음식의 섭취를 통해 그 몸이 어느 정도 자라면 2세를 생성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벌레든, 물고기든 성적(性的)으로 성숙하는 시기이다. 인간의 경우 이를 사춘기라고 부른다. 이때가 되면 이성(異性)을 향한 강력한 욕망이 발생한다(愛). 그리고 그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取)을 추구하며 평생을 살아간다(有). 그러다 죽은 후 ‘다시 태어났다가(生) 늙어 죽는(老死) 과정’을 끝없이 되풀이한다.
암술과 수술의 만남으로 씨앗(열매)이 생기면서 이어지는 식물의 생장 과정과 정자[精]와 난자[血]가 만나서 수정란[名色]이 생기면서 이어지는 동물[중생]의 생장 과정은 외견상 유사해 보일지 몰라도 전자와 달리 후자에는 ‘식(識)’이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식’은 ‘간다르바(gandharvaⓢ, 香陰)’나 ‘중음신(中陰身)’이라고도 불리는데, 남방 상좌부 전통에서는 어떤 생명체든 임종의 순간에 그 몸[死陰]에 있던 그 마지막 식(識)이, 다른 곳에서 새롭게 생성된 수정란[生陰]으로 이어진다고 보는 반면, 동아시아와 티베트를 포함하는 북방불교 전통에서는 수정란 이후 죽을 때까지 우리 몸에 부착되어 있던 식(識)은 사망[死陰] 후 최대 49일 동안 중음의 몸[中陰身]으로 떠돌다가, 남녀 혹은 암수의 교미하는 모습을 보고서 그때 만들어진 수정란[生陰]에 부착한다고 가르친다. Digha Nikaya의 “Mahanidanasutta”에서도 십이연기에 대해 설명하면서 “식이 어미(matu)의 자궁에(kucchismim.) 들어간다(okkamissatha)”는 표현을 사용한다.
해탈하지 못한 이상, 열반을 얻지 못한 이상 모든 생명체의 식(識)은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계속 새로운 몸에 부착 또는 반영되면서 생사윤회를 되풀이한다. 우리가 죽은 후 중음신이 되어 나의 새로운 몸이 될 수정란을 찾고자 할 때, 지구상에서 형성된 수정란 가운데 인간의 수정란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성체의 외형은 천차만별이지만, 참으로 희한한 것은 코끼리든 쥐든 개미든 인간이든 사마귀든 그 출발점인 수정란들은 크기와 외형에서 거의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불전에서 가르치듯이 중음신 역시 오감을 갖는다면, 그의 눈에 보이는 수정란은 축생의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지구상에서 남녀의 교미를 통해 매일 형성되고 있는 인간의 수정란을 모두 합한다고 해도 다른 생명체의 수정란을 모두 합한 수에 비하면 옛날 쌀가마에 섞인 ‘피 이삭’의 수 정도도 안 될 것이다. 그것도 다른 수정란과 전혀 구별되지도 않는 모습으로 여기저기 산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은 후 다시 인간의 몸을 찾아 태어나기는 그야말로 ‘맹구(盲龜)가 우목(遇木) 하기’보다 더 힘들지도 모른다. 이런 통찰이 생길 때, “다시 태어나서는 안 되겠구나.”하는 염리심(厭離心) 또는 출리심(出離心)이 더욱 강화된다.
우리의 식(識)이 자신의 시체에서 벗어나 새롭게 형성된 수정란으로 전이(轉移)하는 과정에 대해 용수(龍樹, Nagarjuna: 150~250 C.E.경)는 《인연심론송(因緣心論頌)》에서 다음과 같이 비유한다: “①마치 스승의 낭독을 듣고서 제자가 그 내용을 그대로 암송하듯이, ②한 등불의 불꽃이 다른 등불로 옮겨 붙듯이, ③어떤 사물의 영상이 거울에 비치듯이, ④도공이 찰흙에 자국을 내듯이, ⑤태양빛이 돋보기를 통과하여 불을 내듯이, ⑥씨앗이 변하여 싹이 되듯이, ⑦시큼한 매실을 보고서 입에 침이 고이듯이, ⑧소리를 지를 때 메아리가 생기듯이.” 이런 여덟 가지 모두, ‘이쪽에서 저쪽으로 무언가가 건너가지는 않지만, 이쪽에 의해 저쪽의 사건이 발생하는 예들’이다. 앞의 사건과 뒤의 사건의 관계는 불일불이(不一不異), 불상부단(不常不斷), 불래불거(不來不去)로 연기적(緣起的)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전생에 죽는 순간의 마지막 식(識)’이 새로운 수정란에 반영되어 다음 생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죽을 때의 ‘식의 마지막 흐름’이 그대로 내생으로 이어지기에 좋은 내생을 맞이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죽는 순간의 마음을 잘 조절하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불전에서는 만일 내생에 좋은 곳에 태어나고 싶다면 죽는 순간에 몸이 아프고 괴롭더라도 ‘현생에 몸[身]과 입[口]과 생각[意]으로 지었던 자신의 선행(善行)’을 떠올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해탈하지 못한 이상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수행을 통해 아라한의 지위에 오른 자의 경우 그가 생을 마치는 순간의 마지막 식(識)은 더 이상 수정란에 부착하지 않는다. 내생이 없는 것이다. 윤회를 마치는 것이다. 아라한이란 모든 번뇌를 제거한 성자를 말한다. 그의 마음은 번뇌(行)를 일으키지 않는다. 근본 무명(無明)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명 속에 사는 다른 모든 중생들은 번뇌에 속박되어 계속 새로운 삶을 희구하며 생사윤회를 이어간다.
이상에서 보듯이 십이연기란, 모든 생명체에게 공통된 생사윤회의 원리이다. 인간은 물론이고 들짐승이든, 날짐승이든, 곤충이든, 어류든 십이연기의 과정을 거치며 탄생과 죽음을 되풀이한다. 그 몸의 생김새나, 사는 모습이나, 죽는 과정에서 인간은 짐승과 크게 다를 게 없고, 짐승은 인간과 다를 게 없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모두 DNA에 기반을 둔 몸을 갖고 있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먹어야 산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배설을 하며 산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약육강식의 지배를 받는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교미를 통해 2세를 생산한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고통을 싫어하고 쾌락을 좋아한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모두 생로병사 한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모두 ‘가련한 중생’일 뿐이다. 인간은 원래 짐승이다.
2. 약육강식을 대하는 상반된 태도―폭력과 자비
서구 불자들의 채식주의―폭력성에 대한 반발
참으로 특이한 점이 있다. 근현대 들어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한 서구의 경우 불자들 가운데 채식주의자(Vegetarian)가 많은 반면, 전통적 불교권인 아시아에는 불자 가운데 채식주의자가 그렇게 많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우 사찰 내에서는 철저하게 채식 식단을 운영하지만, 사찰 밖의 식사에 대해서는 육식에 대해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조계종 종립대학인 동국대학교조차, 수차례에 걸친 뜻있는 분들의 건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별도의 채식식당을 운영하지 않고 있다.
육식이 채식과 다른 점은 ‘살생(殺生)’을 통해 음식물을 마련한다는 데 있다. ‘우리와 똑같이 고통을 느끼고 죽음을 싫어하는 다른 생명체’를 살해해야만 육식문화가 계속 유지될 수 있다. 동서의 음식문화를 전체적으로 비교하면, 서구의 육식 인구의 비율은 아시아의 그것에 비해 월등히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불자들 가운데 채식 인구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혹자는 서구 불자들의 채식주의가 ‘원칙에 충실한 서구인들의 생활방식’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하면서 그들의 ‘인격적 우월성’에 대해 감탄하기도 하지만 그게 아니다. 서구인의 불교 입문 과정이 아시아인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인에게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로 비쳐진다. 이와 달리 서구인들이 불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불교가 ‘비폭력의 종교’이기 때문이었다.
근대 이후 서구문화의 부정적 측면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폭력성(Violence)’이다. 1, 2차 세계대전과 6·25동란, 그리고 월남전 참전으로 이어지면서 근 70년간 계속되어 온 서구문화의 ‘폭력성’에 대한 반발로 1960년대 말 이후 서구사회에서 ‘평화와 사랑’을 기치로 내건 대항문화운동(혹은 反-문화운동, Counter-culture movement)의 불길이 일어난다. 서구의 기성세대들은 대항문화운동에 앞장섰던 젊은이들을 Hippie, New Age, Flower children 등으로 불렀다. 이들 중 많은 수가 ‘비폭력의 종교’인 불교에 입문하였다. 아시아의 불자들과 달리 서구 불자들 가운데 채식주의자가 많은 이유는 이들을 불교에 입문하게 만든 동인(動因)이 ‘서구 문화의 폭력성에 대한 반발’이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다윈의 진화론
콜럼버스 이후 신대륙 수탈과 식민지 경영을 통해 서구사회에 막대한 부가 유입되면서, 그 과정을 주도했던 상업인이 사회의 중추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1776년 아담스미스의 《국부론》 출간과 함께 시작된 자유방임적 국가 운영, 상업인이 그 중심에 있었던 1789년의 프랑스대혁명, 혁명 주도 세력인 상업인의 이익을 대거 반영한 나폴레옹법전의 편찬(1804년)과, 이런 일련의 사건과 수반하여 진행된 산업혁명(1760~1840년)을 통해 서구사회에 자본주의적 경제체제가 뿌리를 내린다.
그러나 자유방임적 자본주의는 순탄할 수 없었다. 그 내적 모순으로 인해 1873년 대공황이 초래되었고, 그 탈출구를 모색하면서 ‘무자비한 식민지 쟁탈전’인 제국주의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1859년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를 발간하면서 공표된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저자의 의도와 달리 약육강식의 제국주의를 미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였다.
다윈 이전에도 그리스의 자연철학이나, 라마르크의 용불용설(用不用說)과 같이 진화에 의해 생명체의 변화를 설명하는 많은 이론들이 있었지만, 다윈의 진화론은 현장답사를 통한 정밀한 관찰과 분석을 통해 발견된 이론으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과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합리적 원리에 의해 생물종의 분화와 발달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갖는다. 환경에 적합한 종만이 살아남는다.
생명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약한 놈은 잡아먹히고, 강한 놈은 잡아먹는다. 철저한 우승열패(優勝劣敗)의 원리에 의해 생명체의 존속과 쇠멸을 설명한다. 강자의 지위에 오른다고 하더라도 이는 일시적일 뿐이다. 모든 생명체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지 않을 수 없기에 강자 역시 시간이 지나 노쇠해지면 약자로 전락한다. 결국 모든 생명체는 무한 경쟁의 고통 속에 허덕이다가 목숨을 마치고 만다. 다윈이 발견한 생명세계의 진상은 비정한 것이었다. 근대의 서구인들은 이런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강자의 길을 추구하였으며, 그 수단은 군사적 폭력이었다.
생명세계의 비정함 대한 싯다르타 태자의 통찰
그런데 다윈과 마찬가지로 비정한 생명세계의 진상을 목격했지만, 약육강식의 지배를 받는 생명체의 겉모습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현장에서 모든 생명체가 받는 내적 괴로움에 주목한 분이 있었다. 바로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였다. 싯다르타 태자는 어린 시절 아버지인 정반왕과 함께 농사짓는 모습을 참관한다. 뜨거운 햇볕에 온몸을 드러내고 흙먼지로 뒤범벅이 되어 일하는 깡마른 농부의 모습, 쟁기질할 때마다 흙덩이 사이로 벌레들이 꿈틀대면 온갖 새들이 날아와 다투며 벌레를 쪼아 먹는 모습을 본 태자는 마치 자신의 가족이나 친척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처럼 큰 슬픔을 느꼈으며, 모든 생명체에 대한 크나큰 자애(慈愛)와 연민의 마음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아! 아!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크나큰 고통을 받는구나. 그것은 출생과 늙음, 그리고 병듦과 죽음이다. 이와 더불어 갖가지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지만 거기서 벗어나질 못하는구나! 어째서 이런 모든 고통들을 버리려 하지 않는가? 어째서 이런 모든 고통을 넘어선 적멸의 지혜를 추구하지 않는가? 어째서 이런 모든 고통의 원인인 생로병사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가?
그 후 인근의 염부수(閻浮樹) 그늘에 앉아 모든 생명체가 받는 생로병사 등의 고통[苦]에 대해 면밀히 생각하면서 자비(慈悲)의 마음을 내자 마음이 편안해지면서[定] 모든 욕망과 악에서 벗어났으며 욕계(欲界)의 번뇌가 다 소진되고 색계(色界) 초선(初禪)의 경지에 들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 29세에 출가한 싯다르타 태자는 6년간 다양한 수행 체험을 한 후 35세에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 앉아 어린 시절의 바로 이 추억을 되살려 수행에 들어간 후 궁극적 깨달음을 얻는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짐승 사회를 지배하듯이 우승열패(優勝劣敗)의 법칙이 인간 사회를 지배해 왔다. 불교가 발생하기 전까진 그랬다. 불교가 전파되지 않은 지역에서도 그랬다. 다윈의 진화론을 포함한 현대 생물학에서 그리는 생명의 세계 역시 비정한 곳일 뿐이다.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에게 비친 생명의 세계 역시 비정한 곳이었다. 그런데 불교의 독특한 점은 이렇게 비정한 생명의 세계에 ‘자비와 평화의 길’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약육강식과 우승열패라는 동물의 법칙이 지배하던 인간 세계에 반(反)동물적인 가르침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인간으로 하여금 동물성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쳤다. “살생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음행하지 마라. ……”에서 보듯이 그분이 가르친 계율이 그랬다. 빼앗고(貪) 싸우는(瞋) 것이 동물의 삶이라면, 빼앗는 마음 내지 말고, 싸우는 마음 내지 말 것을 가르쳤다. 일체개고(一切皆苦)인 동물의 세계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의 길을 제시했던 것이다.
3. 자유의지가 있다면 윤회는 가능하다
중생과 무생물의 차이―식(識)의 유, 무
생명세계에 대한 부처님의 통찰 대부분은 다윈의 진화론을 포함한 생물학의 조망과 크게 상충하지 않는다. 인간의 몸은 본질적으로 짐승의 몸과 다를 게 없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그저 중생일 뿐이다. 십이연기의 가르침에서 보듯이 인간의 생장 과정은 짐승의 생장 과정과 큰 차이가 없다. 아울러 인간 사회는 본질적으로 약육강식과 우승열패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이 현대의 생물학 이론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양자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된다.
① 생물학에서는 식물 역시 동물과 다를 게 없는 생명체로 간주하지만, 불교에서는 동물만을 생명체로 간주한다.
② 생물학에서는 동물이든, 식물이든 ‘식(識)’의 유무에 대해 거론하지 않지만, 불교적으로 조망할 때 인간을 포함한 동물은 그 몸에 ‘식(識)’이 부착되어 있다는 점에서 식물과 차별된다.
③ 생물학적 견지에서는 ‘동물이든 식물이든 한 개체는 2세를 산출할 뿐 그 자체가 사멸하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보지만, 불교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동물은 죽은 후에 그 식(識)이 다시 새로운 수정란에 반영되어 내생의 삶을 시작한다.’고 본다.
요컨대 불교적 의미에서 ‘중생[有情]’과 ‘무생물[無情]’을 가르는 기준은 ‘식(識)’의 유무에 있다. 칼루파하나에 의하면 초기불전에서 식(識: vinnana ⓟ)의 용례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다. 첫째는 심(心: cittaⓟ), 마음(mind), 의(意: mano ⓟ), 생각(thought)과 동의어로 통상적인 정신을 의미하고, 둘째는 인식활동을 의미하며, 셋째는 전생과 현생을 연결하는 결생식(結生識: pat.isandhi-vinnana ⓟ)이다. 이러한 식(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무언가를 보고, 듣고 할 때 안식(眼識), 이식(耳識)으로서 작용하고 있고, 모든 것이 찰나 생멸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식(識)의 작용으로 인해 앞 찰나에 보고 들은 것을 뒤 찰나에 재인할 수 있으며,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는 이 몸을 벗어나 다음 생의 출발점인 새로운 수정란에 반영되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의 식은 1차원적인 흐름이다
인간이든 지렁이든 “찰나 생멸하는 1차원적인 식(識)의 흐름이 그 몸을 훑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입체는 3차원, 평면은 2차원, 선(線)은 1차원이다. 입체 속에서 한 점의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서는 세 개의 좌표점(x, y, z)이 필요하고, 평면에서는 둘(x, y), 선에서는 하나의 좌표점(x)이면 된다. 우리의 감각 대상 가운데 순전히 1차원적인 현상의 예로 ‘소리[聲]’를 들 수 있다.
소리는 넓이나 부피를 갖지 않고 1차원적인 강약, 고저(高低)의 흐름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의 식 역시 1차원적인 흐름이다. 마치 TV 브라운관의 주사선과 같이 1차원적인 식의 흐름이 뇌의 내부를 훑음으로써 그에 대응하는 평면과 입체의 영상을 그려낸다. 한 점 불씨를 재빨리 돌리면 불 바퀴(旋火輪)가 나타나듯이, 1차원적인 식의 흐름이 체험의 부피를 만들어 낸다.
지렁이와 인간의 차이는 그 몸의 차이일 뿐이다. 그 속에서 주의력의 흐름에 따라 훑고 있는 식(識)은 지렁이에서든 인간에게서든 모두 1차원적으로 명멸(明滅)한다. 모든 생명체의 식은 1차원적인 흐름일 뿐이지만, 어떤 식은 지렁이와 같은 하등동물의 몸속에서 요동하고 있고, 어떤 식은 인간과 같은 고등동물의 뇌 속에서 요동하고 있다. 현생에 인간의 몸에 부착하여 살아가던 식이라고 해도, 내생에 다시 인간의 수정란에 부착한다는 보장은 없다.
현생에 자신의 식의 흐름을 잘 조절한 사람만이 내생에 다시 인간의 몸을 받든지, 더 나아가 천신의 몸을 받는다. 이런 조절이 계(戒), 정(定), 혜(慧)의 순서로 이루어지는 불교수행이다. 인간의 뇌 구조는 본능(Instinct: 그림1-1), 감성(Emotion: 그림1-2), 사고(Reasoning: 그림1-3)의 순서로 진화적 위계를 갖는다. 계정혜 삼학 가운데, 계학(戒學)이란 나의 식(識)의 요동을 [동물적] 본능의 영역[1]이 아닌 이성의 영역[3]에 묶어두는 수행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정학(定學)이란 이런 식의 요동을 정지시키는 훈련이며, ‘내 주의력의 이동에 수반되어 1차원적으로 흐르는 식(識)’의 내용을 매 찰나 주시함으로써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자각케 하는 수행이 위빠사나(Vipassana)의 혜학(慧學)이다. 혜학이 무르익으면 식은 뇌의 차원을 벗어난다. 이계과(離繫果)인 열반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나의 식이 나의 뇌 내부를 훑고 있다고 말할 수 있고, 주관적으로 보면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체험되는 모든 현상에 나의 식(또는 나인 식)이 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앞 찰나에 체험했던 내용을 뒤 찰나에 지각된 내용과 비교함으로써 의미가 발생한다. 앞 찰나에 체험했던 모든 것이 토대가 되어 다음 찰나에 체험한 것의 의미가 만들어진다. 《구사론》에서 말하듯이 우리의 모든 인식의 토대가 되는 의근(意根)은 바로 그 앞 찰나의 육식(六識)이다. 매 찰나의 동일한 마음이 육식이 되기도 하고 의근이 되기도 한다. 이는 A에게 아들인 B가 C에게는 아버지가 되고, 가을의 열매가 봄에는 씨앗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른 비유를 들면 수학자가 미분(微分: differential)을 통해 속도 등의 변화를 계산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사물이 이동할 때 앞 찰나의 위치와 뒤 찰나의 위치의 차이에 의해 속도라는 ‘의미’가 계산되듯이, 매 찰나 명멸하는 1차원적인 식의 흐름에서 전과 후의 비교를 통해 모든 의미가 만들어진다. 거시적(巨視的) 비유를 들면 같은 온도의 동굴 속이라고 하더라도 겨울에는 바깥과의 비교를 통해 따뜻하게 느껴지지만, 여름에는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과 같다. 어떤 것이든 고정된 의미는 없다. 앞에 체험한 것과의 비교를 통해 의미가 만들어진다. 식에서 매 순간 미시적(微視的)으로 의미가 만들어진다.
지렁이나, 개구리나, 송아지나, 인간 등은 그 진화 방식의 차이로 인해 몸의 크기와 모양은 다르지만 이렇게 1차원적인 식의 흐름이 그 몸(또는 뇌)을 훑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이들의 몸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세포나 수정란의 크기나 모양 역시 큰 차이가 없다. 현생의 출발점에서 수정란에 부착되었던 식이 그 몸을 통해 희로애락을 느끼며 살다가 그 몸이 노화하면, 임종 시 그 몸의 마지막 세포에서 떠나 다시 새로운 수정란에 부착한다. 즉 세포에서 세포로 식이 이동하는 것이다. 환생하는 것이다. 윤회하는 것이다.
뇌과학의 유물론과 증명 불가능한 자유의지
그런데 ‘식의 흐름’에 대한 이상과 같은 조망 가운데, 다른 것은 몰라도 윤회에 대한 설명은 ‘믿음’의 차원에서 수용할 수는 있어도 증명할 수는 없는 내용들이다. 우리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우리의 몸이 죽으면 우리의 마음도 사라진다. 불전은 윤회를 당연시하면서 ‘윤회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지만, 그 누구도 윤회를 증명한 적이 없다. 윤회가 사실이 아니라면 불전의 많은 가르침은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최근 눈부신 연구 성과를 내고 있는 뇌과학에서는, 윤회를 부정함은 물론이고, 종교적 신비체험 모두 뇌의 작용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신(神)의 모습을 본다든지, 소리를 듣는 등의 종교적 신비체험 대부분은 측두엽 간질(Temporal Lobe Epilepsy)의 증상일 뿐이라고 해석한다.
뇌과학의 연구 성과가 보편화될 경우 종교는 물론이고 철학, 심리학, 사회학 등 지금까지 인류가 이룩한 다양한 학문적 성과 대부분이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라고 한다. 불교는 뇌과학의 냉철한 분석과 비판을 비껴갈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답하기 전에 우선 뇌의 구조를 개관해 보겠다. 불전에서 가르치듯이 윤회가 사실이고 전생에서 이어져 온 식(識)이 생명체의 몸에 반영 또는 부착되어 있다면, 그런 식이 직접 작용하는 곳은 인간의 신체 기관 중 뇌(腦)일 것이다. 그런데 신장이나 간장, 위장 등 신체 내의 다른 기관과 비교할 때 뇌의 미세구조는 단순하다. 뉴런(Neuron)이라는 신경세포를 최소 단위로 하는 신경망이 종횡으로 얽혀 있는데, 감각기관(Sense organ)에서 보내온 ‘자극(Stimulus)의 전기신호’를 해석한 후 운동근육(Skeletal muscle)으로 ‘반응(Response)의 전기신호’를 내보내는 중개 역할을 하는 곳이 뇌일 뿐이다[그림2].
대뇌의 중앙 상단에 좌우 방향으로 패인 중심고랑(Central sulcus)을 기준으로 대뇌피질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구분할 경우, 앞부분은 근육운동과 사유 등 ‘능동적 행위’를 담당하고, 측두엽을 포함한 뒷부분은 신체감각과, 시각, 청각 등 ‘수동적 감각’을 담당한다[그림3].27)
뇌과학과 신경의학은 철저한 유물론이다. 뇌과학이나 신경의학의 견지에서 보면 뇌의 모든 활동은 기계적이다. 객관적으로 연구하다 보니, 유물론적이고 기계론적인 결론만 도출된 것이기에 뇌과학에 대해 반종교적이라거나 천박한 학문이라고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감각신경을 통해 어떤 자극이 뇌로 전달되면, 다소 복잡하긴 하지만, 선험적 방식이든, 경험적 방식이든 그것이 해석된 후, 그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 운동신경을 통해 근육에 전달될 뿐이다. 그런 과정의 틈새에 ‘자유의지(Free will)’라든지, ‘식(識)’을 개입시킬 필요는 전혀 없다. 철두철미한 기계론적 해석이기에 결국 숙명론, 결정론적 세계관을 피할 수 없다.
뉴턴 물리학에서 가르치듯이 거시적 물질의 세계는 기계적으로 작동하는데, 뇌과학을 포함한 생리학에서 설명하듯이 우리의 신체가 오직 기계적으로 작동할 뿐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자유로운 행동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태어난 순간, 아니 수태(受胎)된 순간부터 그의 미래는 결정되어 있어야 한다. 그가 체험하는 모든 것, 그가 행동하는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결정되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당구 게임에서 스리쿠션을 칠 때, 공을 때리는 순간 큐(Cue)의 방향과 힘의 강도에 따라, 최종적으로 공이 안착할 곳이 결정되어 있듯이, 뇌가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탄생 후 우리가 평생 짓는 행동과 평생 겪는 체험은 모두 결정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난국을 피하기 위해,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를 도입하여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모색하기도 하지만, 불확정성 원리는 뉴턴 물리학의 거시적 ‘결정론’을 미시적 ‘우연론’으로 대체하는 것일 뿐이며, 그것이 ‘물질적 뇌신경과 별개인 식(識)’이나 ‘자유의지’의 존재를 증명하는 근거로 쓰일 수는 없다. 아무리 객관적 분석을 시도해도 ‘자유의지’를 증명할 수 없다. 칸트(Kant)가 말하듯이 ‘자유의지가 있다거나 없다는 생각’은 우리의 이성(Reason)이 빚어내는 이율배반적 사유의 두 축일 뿐이다.
그러면 식이나 자유의지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식’이나 ‘자유의지’ 모두 객관이 아니라 주관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식’이나 ‘자유의지’는 객관 대상이 아니기에 우리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생각 속에서 ‘개념’으로서 떠올릴 수는 있어도, 실제로 그 존재가 확인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의 눈과 같다. 나의 눈에는 여러 가지 사물들이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보려고 해도 나의 눈만은 보이지 않는다. 거울에 눈을 비추어 보아도 그것은 진정한 눈이 아니라 눈에 비친 대상이다. ‘나의 눈’은 능견(能見)이고, ‘보이는 대상’은 소견(所見)인데 능견은 결코 능견을 소견의 세계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식’과 ‘자유의지’의 양자 모두 매 순간 주관[能] 측에서 작용하고 있기에 그것을 객관[所]화하여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이다. ‘왈가왈부’하는 행위 그 자체가 ‘식’과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며, 반성적 사유에 의해 그것을 대상화할 경우 그것은 진정한 ‘식’과 ‘자유의지’가 아니다.
따라서 뇌와는 별개인 ‘식’이 존재하는지 아닌지, 그런 ‘식’에 자유의지가 있는지 없는지, 증명할 방법은 없다. 윤회에 대한 증명은커녕, 식의 존재와 자유의지의 유무 역시 증명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불교 역시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뇌과학의 유물론 앞에서 백기(白旗)를 들어야 하는 것일까?
가언명제(假言命題)에 의한 윤회의 논증
이제 치밀한 분석에서 시선을 거두고, 우리의 ‘현실적 느낌’으로 돌아와 보자. 당신은 당신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느끼는가, 아니면 일거수일투족이 기계적으로 작동된다고 느끼는가? 대부분 전자를 지지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선택의 기로에 선다. 무엇을 먹을까? 어디로 갈까? 최종 결정을 할 때까지, 순식간이긴 하지만 뇌의 신경망에서는 종합적 검토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최선의 행동을 결정한다.
무엇이 좋겠다고 판단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반대의 결정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결정이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고,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우리는 나에게 자유의지가 있으며, 나의 미래는 열려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착하게 살아라.”든지 “남을 도우며 살라.”는 등의 윤리, 도덕적 훈계는 자유의지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러면 이런 자유의지와 뇌신경망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인체의 장기 가운데 뇌에 대한 연구가 가장 더디고 어려운 이유는 그 활동을 측정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뇌에 대한 연구는 ‘질병’이나 ‘사고’로 뇌의 일부가 손상된 환자의 증례를 수집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간질 발작을 줄이기 위해 뇌량(腦梁)을 절단한 환자의 증례, 사고로 전두엽 부위가 손상된 환자의 증례 등을 수집하여 역으로 뇌의 각 부위의 기능을 추정해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1929년 독일의 한스 베르거에 의해 뇌파측정기(EEG: electro-encephalogram)가 개발되었지만 그 용도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뇌의 혈류 속의 산소 양의 변화를 탐지함으로써 특정부위에서 일어나는 신경활동 정도를 측정하는 ‘기능적 핵자기공명장치(fMRI)’가 개발되어 뇌에 대한 연구는 괄목할 진전을 보게 된다[그림4].
이런 측정기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의식 내용에 수반하여 그에 해당하는 부위의 뇌신경 활동이 활발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눈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을 때에는 뇌의 후두엽(Occipital lobe) 부위가 활성화되고, 눈을 지그시 감고 무언가를 듣고 있을 때에는 측두엽(Temporal lobe) 부위가 활성화된다. 깨어 있는 동안에는 항상 무언가가 들리고 보이고 느껴지겠지만, 그 모든 감각이 우리에게 체험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주의력’이 머무는 대상만 체험된다. 즉 우리의 주의력이 머무는 대상에 해당하는 뇌신경만 활성화되고 그것만이 유의미한 의식체험으로 남아 신경회로에 각인된다.
‘뇌신경의 활동’과 ‘의식체험’의 관계에 대한 이상과 같은 통찰에 근거하여 ‘식’과 ‘자유의지’와 ‘윤회’의 문제에 대해 조망해 보자. 현생의 출발점인 수정란에 부착되었던 식은 그 수정란이 자라나 성체가 되면, 성체의 뇌 속에서 활동할 것이다. 만일 그 성체가 나라면, 내 주의력이 외부대상의 이곳저곳으로 이동함에 따라 나의 ‘식’은 그에 해당하는 뇌 속의 신경세포의 이곳저곳으로 이동할 것이다.
주의력의 이동은 대부분 조건반사와 같이 수동적으로 이루어지며, 이런 수동적 이동은 기계적인 것이지만, 만일 나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그런 자유의지가 작용하는 경우에 한해, 나의 식은 뇌신경의 기계적 흐름과 무관하게 능동적으로 이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식’이 이쪽의 신경세포에서 저쪽의 신경세포로 비약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뇌 속의 식이 한쪽의 신경세포에서 다른 쪽의 신경세포로 비약하는 것이 가능하다.” 앞에서 논의했듯이,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는지 없는지 증명할 수 없다. 불전에서 가르치듯이 설혹 뇌를 포함한 우리의 몸과 무관한 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만일 자유의지가 없다면 그런 식은 뇌신경의 전기적 흐름을 거역할 수 없으며 외경(外境)과 뇌의 상호작용으로 체험되는 모든 일들을 그저 관조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고 우리의 삶은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만일 결정론, 숙명론이 사실이라면 이러한 분석도 무의미하고 뇌에 대해 논의할 필요도 없고 학문도 필요 없고 윤리, 도덕도 모두 무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체험적으로 우리는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느낀다. 불전의 가르침 모두 자유의지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뇌 속에서 작용하는 식(識)이 신경세포와 신경세포 사이를 비약할 수 있어야 한다. 식과 신경세포, 그리고 자유의지의 관계를 하나의 가언명제(假言命題: Hypothetical proposition)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가언명제1―만일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우리의 식(識)은 뇌 속의 한 신경세포에서 다른 신경세포로 비약할 수 있다.
이제 윤회의 문제로 넘어가자.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뇌 속의 식은 어느 한쪽의 신경세포에서 다른 쪽의 신경세포로 건너뛸 수 있고, 그때 의식 내에서는 주의집중의 대상이 바뀌는 일이 수반될 것이다. 뇌는 그 크기가 전후, 좌우, 상하 모두 20cm 내외로 몇 조(兆)의 신경세포로 이루어져 있는 단백질 덩어리다. 식이 신경세포 간을 건너뛴다고 해도, 그런 비약은 이런 20cm 이내의 공간의 한계 내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뇌(腦)의 내부일지라도 이렇게 ‘식의 세포 간 비약’이 가능하다면, 더 먼 거리라고 하더라도 식이 한 세포에서 다른 세포로 비약하는 것이 불가능할 까닭은 없을 것이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불전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곳에서 죽는 순간의 마지막 찰나의 심신[死陰]이 다른 곳에서 형성된 수정란[生陰]에 부착하면서 윤회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곳에서 죽는 순간에 몸이 시체로 변하면서 모든 감관이 닫히고 신경 활동의 작용이 끊겨 꿈의 환영(幻影)도 나타나지 않아 뇌 속이 칠흑과 같이 어두워지면 뇌 속의 어느 ‘신경세포’에 머물던 마지막의 식(識)은 그곳을 벗어나 먼 곳 어딘가에 형성된 다른 ‘수정란 세포’로 비약한다는 말인데 이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런 조망을 앞에서 제시했던 ‘가언명제1’과 종합할 경우 다음과 같은 가언명제 역시 가능할 것이다.
가언명제2―만일 식이 뇌 속의 한 신경세포에서 다른 신경세포로 비약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죽는 순간의 신경세포에서 새롭게 형성된 수정란 세포로 비약하는 것도 가능하다.
여기서 “죽는 순간의 신경세포에서 새롭게 형성된 수정란 세포로 비약한다.”는 것은 환생을 통해 윤회하는 과정에 대한 묘사이기에 ‘가언명제2’는 다음과 같이 바꿔 쓸 수 있다.
가언명제3―만일 식(識)이 뇌 속의 한 신경세포에서 다른 신경세포로 비약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윤회는 가능하다.
그리고 이 ‘가언명제3’의 전건(前件)인 “식(識)이 뇌 속의 한 신경세포에서 다른 신경세포로 비약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문장은 앞의 ‘가언명제1’의 후건이기에‘가언명제1’과 ‘가언명제3’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가언명제가 만들어질 수 있다.
가언명제4―만일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윤회는 가능하다.
윤회를 논증해 보았다.
4. 뇌의 허구를 폭로하는 반야중관학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는 물론이고 어류, 파충류, 조류는 물론이고 곤충이나 갑각류 등 대부분의 동물에게 뇌가 있지만, 모든 동물이 뇌를 갖는 것은 아니다. 아메바나 짚신벌레와 같은 원생동물에게는 뇌가 없다. 지렁이와 같은 하등무척추동물의 경우에는 앞부분에 신경 덩어리가 있긴 하지만, 이는 뇌라기보다 혀[舌]에 해당하는 ‘잘 발달된 화학탐지기’일 뿐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위한 것이다. 일체중생을 위한 것이다. 불교의 제도 대상에는 인간뿐만 아니라 육도중생 모두가 포함된다. 그런데 지렁이 등의 하등동물에서 보듯이 뇌는 모든 생명체에게 공통된 필수 기관이 아니다.
모든 생명체의 공통점은 탄생했다가 고생하다가 죽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인간의 경우 뇌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뇌에 기반하는 언어를 구사하며, 언어에 기반하여 갖가지 생각을 한다는 점에서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체와 차별된다. 이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일반 생명체 탄생 → 고생 → 죽음
인간 언어, 생각
탄생 → 고생 → 죽음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체는 약육강식의 세계 속에 태어나 시달리다가 늙고 병들고 죽는다[生老病死]. 그리곤 다시 태어나서 시달리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해탈하지 못한 이상 이런 윤회는 영원히 계속된다. 부처님은 이런 윤회의 진상[苦]과, 이런 윤회의 세계에 태어나게 되는 원인[集]과, 다시는 윤회에 시달리지 않는 깨달음[滅]과, 그런 깨달음을 얻는 길[道]을 제시하였다. 고, 집, 멸, 도의 사성제다.
이런 윤회의 세계에 태어나지 않으려면, 이런 윤회에 세계에 대해 맺힌 것이 없어야 한다. 맺힌 것이란 바로 ‘탐, 진, 치의 삼독 번뇌’다. 이 삶의 세계에 무언가 하고 싶은 것이 남아 있을 때 죽는 순간의 식은 삶에 대한 그런 애착 때문에 다른 수정란에 달라붙는다. 윤회하는 것이다. 윤회의 진상인 무상(無常), 무아(無我), 고(苦)에 대한 통찰을 통해 ‘탐, 진, 치’의 번뇌를 모두 없앨 경우,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아라한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단순하고 분명한 초기불전의 가르침이었다.
그런데 불멸 후 오백여 년 지나 난삽한 아비달마 교학이 발달하였다. 단순, 명료했던 초기불교였는데, 인간의 언어와 생각으로 인해 번쇄해짐으로써 치심의 번뇌만 더 증장되었다. 이를 단칼에 쳐버리는 것이 바로 반야중관학의 공사상이다. 《반야경》에서는 언어로 표현된 불교의 가르침 모두가 허구일 뿐이고, 도구일 뿐이라고 선언하고, 중관학에서는 치밀한 분석을 통해 그런 선언을 논증한다. 언어로 언어를 버리는 것이다. 생각을 통해 생각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뇌의 허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뇌를 제거하라!” 반야중관학의 법공(法空) 사상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의 허구를 자각하는 것이 불교수행의 끝이 아니다. 깨달음이 아니다. 언어와 생각의 허구를 자각한 후에는 다시 초기불교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 삼독심을 제거함으로써 이 윤회의 현장에 맺힌 한을 모두 풀어버려야 한다. 다시 태어나지 않을 수 있도록 남은 번뇌를 모두 녹여야 한다. 반야중관학에서는 후대에 덧붙여진 아비달마 교학의 군더더기를 털어내기만 할 뿐이다. ■
김성철 / 1957년생. 1982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졸업. 1997년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 학과 박사 과정 졸업(철학박사). 현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교수. 저서 및 역서로 《중관사상》, 《원효의 판비량론 기초 연구》, 《중론》, 《회쟁론》 등이 있고, 논문으로 〈역설과 중관논리〉외 50여 편이 있다. 현재 본지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