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학회역사 원본출처 한국sgi 회원서비스
1991년1월1일 세이쿄신문과 『대백연화』1월호에 법주의 「신년인사 」를 게재. 1991년1월6일 제37회 본부 간부회를 개최. 1991년1월14일 명예 회장,중국의 양진아 주일 대사와 회담. 1991년1월15일 제1회 관동 기념 총회,제3회 전국 여자부 간부회 개최. 1991년1월 『승려 문제의 본질』을 작성. 승려 문제의 본질 1,전통 불교 교단인 일년정종과 ,근대 사회에 적합한 이름과 형태를 가지고 출발한 창가학회와의 ,조직·활동론의 차이에서 오는 구조적 긴장. 일련정종은 ,종조 니치렌 대성인으로부터 혈맥 상승을 계승했던 법주상인을 존경하고, 법주상인과의 사제 협의의 원리에 근거하는 역직과 조직을 유지하는 전통적 불교 교단이다. 또,같은 원리로 말사구조를 조직으로 유지하고,각말사에 주지와 사원을 유지하기위한 신도 조직으로서 「강」을 유지관리하고,이것 또한 전통적인 사단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승려의 이와 같은 조직 구조는 ,근세의 에도막번 체제하에서의 단가제도 아래에서 전통 불교 교단이 우선적으로 받아들여,확립했던 공통의 조직 구조이다. 이 구조는 ,근대 이전의 농업을 주산업으로 했던 인구의 이동이 적은 촌락 사회에 있어서,장례 등의 사람들의 종교적 니즈에 영향을 주고,정주를 문화적 종교적으로 촉진하고,촌락구조나 그의 생활을 안정되게 하기위해 적합한 이름이었고 또,교단으로서 ,그 교의를 포함하는 전통을 엄연하게 계속하여 지키기 위해, 적합하게 필요한 조직 구조이였다. 그러나,근대에 들어와서,특히 전후의 급속한 산업화,도시화가 진전되는 사회 상황에 있어서는,사람들의 도시에의 이동이 급격하게 진보,또는 도시 생활에에서 볼수있는 익명적 상황이 출현하고 ,상기의 조직구조는 그 신도를 장악하고 계속하기에는 불가능 해졌다.기성불교단체가 ,전후 쇠퇴했었던 사회적 요인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창가학회의 조직구조는 ,절복했던사람·됐던사람,신심의선배·후배의사람간의 관계의 결합의 원리로 했던 피라밋동심원형 조직이 기본이 되고 발전했었다. 이것은 사원 단위의 강 조직을 넘어선 횡적인 기동성이 높은 조직이다. 유동 성이높은 근대 사회속에서,이동을 계속하는 회원,신도를 언제라도 격려하고, 지도하는데 있어서 ,적합한 조직이다. 이와 같은 조직을 기반으로 하여,다른 방향,운동형태의 면에서는 ,좌담회를 거점으로 했하는 절복 활동이 전개되었다.좌담회는 일방적인 위에서의 설법 형식과 달리,모였던 사람들의 고민이나 근심을 함께 나누고 염려하면서 신앙인으로의 해결을 찾아내고,함께 격려해 가는 일종의 정신적 공동체의 운동이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신앙에 따라서 생활의 고난을 극복했던 체험을 나누고 신앙의 선배나 리더에게 교리를 배우고,일상에서의 생활 윤리로 하고 실천해 가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그뿐만 아니라,거기에서는 가정에서도 이야기할 수 없는 고민을 공유하고 이해해주는 동료도 찾아내는 것이 가능하고, 격려하고,위로하고「상호 교류」라는 커뮤니케이션의 고리가 형성되고, 또 일상생활에서의 불만이나 불안의 해소의 기능도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대체 공동체」가 잠재적으로 형성되는 기능이 있다고 생각 하는것이다. 이상과 같은 창가학회의 조직 구조와 활동 형태는 ,전후 일본 사회의 변동 기에 극히 적합했던 것이고,그에 따라서 크게 발전하고,광선 유포의 진전에 크게 공헌하고 있었던 것이다.승려의 발전도 ,창가 학회가 있어야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고,창가학회가 없다면,다른 전통 교단과 동일하게,점차 쇠퇴의 일로를 걷고, 아직도 약소 교단으로 있었을 것이다.따라서 승려로서는 언제나 창가학회에 의존하지 않으면 현상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며, 그 냉엄한 사실을 인식하지 않는곳에 이 문제의 기본적인 구조적 원인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현재도 변하지 않고 성직자 중심 주의의 사고방식밖에 가지지지 않은 승려는 , 전회의 승려 문제 이후,승려로서는 어떻게 창가 학회에 의존을 줄이고 공양만을 취하는 방침으로서 ,법화강의 정비육성에만 전력을 다해 왔었다. 그것을 전망할 수 있었던 단계에서 ,이번의 고자세행동으로 나왔다고 할수있다. 2,이념의 전개에서 교조주의와 생활규범화의 대립은 이상과같은 조직 구조와 활동 형태에서 승려와 창가학회의 차이는 , 교리와 이념의 전개,해석에 있어서도 차이가 생기는것이 피할수 없는 점에 있다. 이것은 창가학회의 운동이 ,승려 중심이 아니고,재가 불교 운동으로서 전개 된 것과도 관련되고 있다. 창가학회의 운동이 ,불교 사상 큰 의의를 갖는 것은,기본적으로는 석존 이래 출가자나 성직자 중심의 종교이였던 것을,민중 불교,특히 재가 신도의 운동으로서 전개했던 것에 있다.라는 것은 ,이념의 전개에 있어서 일반의 사람들의 생활의 규범으로서 불교가 전개되고,동시에 그것이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이것은 일반적으로 ,전통적 종교문화의 재 활성화, 전통적 종교이념이나 의례의 활성화(revitalization )의 운동이라고 말할수 있는 것이다. 대 성인의 불법에 창가학회의 해석이나 전개는 ,일반의 생활인의 니즈에 응하고 전개되어 왔던 것이고,역으로 그 니즈에 영향을 주어졌기 때문에 ,힘있는 이념으로서 사람들의 생활의 지주가되고,사는 목표를주고,넓게 받쳐줄수 있기 때문이다.양자의 관계는 ,바로 변증법적 관계의 발전이고 일생성불,인간혁명,왕불명합,생활혁명,가정혁명,총체혁명,기록화혁명 등의 용어로 전개됐던 이념이 바로 그것이다.이것들은 ,최근에 명예 회장이 전개하는 세계문화운동 등이 ,불교 이념의 현대에서 살아있는 전개이다.소화 30년에 니치준 상인이 언급했던「시대상응의 포교가 곤란」은 , 이 전개가 용이하지 않는 것을 깊이 이해하시고 말하신 발언이였다. 이러한 전개가 있었던 장소야 말로,오늘의 세계에 유례가 없는 불교의 발전을 보기에 이르었던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승려 교학은 「전통교의의엄수」를 지상명제로 삼고 교의를 현대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생활규범으로서 전개하려는 의욕도 현대의 제 문제에 영향을 주어 가려고 하는 노력도 없었다.게다가,성직자 중심주의 라고 말하는 구태 의연 했던 의식에서도 나오지 않고 있다.본래라면 이와 같은 의식레벨의 교단은 ,현대사회를 만나면 무정부주의자 이외의 무엇도 아니고,존재할수 있지 않는 것이다.다른 기성교단은 ,자신들의 현대상황에 대응하면서 살아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구태의연하게 있어지는 원인도 충분히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하나의 원인은 ,전항에서 논거했던 승려의 창가학회에의 의존 관계에 있다. 창가학회가 외호단체로서 승려를 외계에서의 압력에서 차단하고 있기 때문에, 본래라면 교단기구의 민주화나 교리가 현대적 전개에 부응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에서,승려자체가 직면하는 점을 ,회피하고 있는 것에 있다. 이와같은, 관계는 어디에선가에 끝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3,승속 관계에 관계하는 기본적 인식의 차이 니치렌 대성인에서의 출가와 재가와의 관계,즉 정치 사단관계에서의 특징의 하나는 ,신심에서의「승속일치」「승속평등」의 사상이고,출가와 재가를 불문하고 문하생으로서 본질에 있어서는 완전히 차별이없음이라고 하는 점에 있다.종래의 불교 교단이 승속의 전통에 따라 출가를 불도 수행의 불가결인 동시에 중요한 방법이라고 간주하고,양자를 본질적인 차별의 근본으로 삼고 있던 것과는 크게 다른것이다. 그것은 니치렌대 성인의 어서의 대부분이 재가에 대하여 주어졌던 것,그것들 의 분류에 있어서「니치렌의 제자단나 등」이라고 자주 나란히 칭하고 동등하게 부르든 모습과 사실상,무엇보다도 본문 계단의 대어본존의 원주 및 대고중으로 재가 신도를 갖고 있었던 사실등에 따르고 있습니다 . 「구원실성의 석존과 개성성불도의 법화경과 아등 중생과의 세개가 완전히 차별 없음을 묘호렌게쿄 라고 하고 생사 일대사의 혈맥이라고 하느니라, 「대체로 니치렌의 재자단나등 자타 피차의마음이 없이 수어의 생각을가지고 이체 동심으로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바를 생사 일대사의 혈맥이라고 하느니라, 「말법에 있어서 법화경을 수지한 남녀의 모습외에 보탑은 없느니라, 말법에 있어서는 어 본존에 향하여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는 것으로 개개가 보탑의 몸이 된다.그리고 자타 피차없이 광선 유포 에 힘쓰도록 설명하여 졌던 것이다. 제 2의 특징은 「승속 화합」의 정신이다.대 성인은 상기의 승속 일치·승속 평등의 원리에 입각하면서,양자의 본분과 역할을 살렸던 이체 동심의 싸움 이야 말로 소중하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이들 대 성인의 가르침은 일련정종에 연면히 계승하여지고 있는 것이고, 『유사화의초』의 제일 항목에도 이 사단 관계에 관한 니치유 상인의 가르침이 전해지고 있다. 이 승속 일치·승속 평등의 사상,승속 화합의 정신이 대승 불법의 사단 관계의 전통이고,뛰어난 특징이다.승속은 본질적인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고,역할의 차이에만 있는 것이다.이것들의 원리에 근거하여 일련정종의 신도 조직도 형성되어 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신도 조직 자체를 어떤 구성으로 만들까,어떻게 운영해야 하는 가는 대 성인은 반드시 명언 하고 있지 않다.그것은 오히려 신도가 늘어왔던 단계에서 ,그 시대,사회 의 상황과 필요에 따라서 형성·발전하여 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일련정종이 취하고 있는 승려·성직자 우위의 사고방식은 , 대성인의 기본의 정신에서 나온것이 아니라,후세에 있어서 닛코문류가 교단을 형성하여 가는 단계에서 확립되어 왔었던 사고방식에 지나지 않다.이 승려의 성직자 중심주의,특히 법주의 권위를 강조하는 사고방식과 , 창가 학회가 본원적으로 추구하는 승속 평등주의의 강조가 ,승려문제의 근저에 흐르는 근본 문제이다.
4,성직자 중심주의,특히 법주의 지위의 권위주의화는 ,왜 일어나는 것인가. 종조 니치렌 대성인의 이념에 있어서는,본래 승속평등 주의이였던 것이, 그 뒤의 교단체제의 확립에 따라, 왜,승직의 권위주의화가 일어나는 것인가. 1)역사적 유래로서 말할수 있는것은 ,닛코상인의 미노부 이산의 단계에서 닛코상인만이 「이개상승」에 따라 니치렌대성인 으로부터 부촉을 받었던「유수일인의 혈맥 부법의상승」이고,닛코문류만이 유일 정통이라고 말하는 입장을 강조했었던 것에있다.나아가 홍안이년의 대어본존이 대석사에 존재한다 라는 사실이 ,문류의 유일 정통의식과 다른 종파에의 배타의식을 높인 것으로 되었고, 니치렌문류 전체속에서 일련정종은 언제나 소수파 이였던것은 , 이 의식을 배증하고 가는 사회적 요인이였다. 2)이와 같은 정통 의식은 ,닛치칸 상인의 교학의 체계화에 따라 사상적인 근거를 갖게 된다.본불 니치렌 대성인에 따르고 닛코상인이 부촉을 받고,그것을 대석사 대대의 법주가 적적상승 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하는「유수 일인의 혈맥상승」론에 따라,유일절대의 정통성의 논리를 확립하고 있다. 이 논리와 인식은 ,다른 종파나 타종에 대하여 배타성을 강화했던 이유가 아니고,법주에게 모든 권위가집중되고,법주를 중심으로 하는 승려의 권위가 무한하게 높아지는 결과를 불렀다.게다가,본존으로서도 혈맥 상승으로서 「상징 론」이 아니고,사실로서 , 또는 실체로서의 그것이 되기위해 , 법주가 니치렌 대성인 그 자체의 환생이다 라는 기본 논리와 의식이 생기는 것이다.본존의 필사·수여의 권한,교의의 해석권이나 법론의 제정권 을 법주만이 인정하고 있는 점이나 ,법주가 동시에 승려 행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관장직과 총본산 대석사의 주지를 겸하고,전 승려승속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은 ,그러한 논리의 귀결이다. 3)일반적으로,이와 같은 종교적 권위와 후계자의 지위를 절대 동화하여 가는 과정은 ,종교 사회학으로는 「카리스마의 일상화」 또는 「카리스마의 제도화」 로서 되어 있고,일련정종과 많은 종교가 그 체제를 확립 하고 있는 과정속에서,넓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카리스마란 ,막스·웨버가 정식 동화했다고하는,특정의 개인적 사건으로 ,특수한 초자연적,초월적 힘이나 자질이 사람에 따른다는 자질의 승인에 따라 이루어지는 현상이다.종교적 정치적 지도자,예언자,개교자 등이 그 전형이라고 말한다.이 카리스마의 사람이 돌아가고,카리스마적 지도자의 후계의 문제를 계기로서 ,이 칼리스마의 힘이 예외적 비일상적인 개인에게 의존하는 것에서 , 특정의 개인의 인격에 의존하지 않는 것으로 변질되어 가는것을 ,카리스마의 일상화의 제도화라고 말한다. 그리고,카리스마가 특정의 개인의 인격에 고유의 특질로서는 없고, 혈연에 따르는것(세습 카리스마),특정의 관직에 의존하는 것(관직 카 리스마),은 특정의 의례나 교육에 따라 획득되는 것이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법주의 권위화는 ,상기의 경우에 들어맞는 케이스이다.니치칸상인의 교학은 ,바로 카리스마의 제도화의 과정에서 ,그것을 보완하고 정상화하기위한 이유로서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1991년1월19일 해외및 국제부의 대표 연수 「신주쿠 구내」개최. 각부 대표 연수회 개최. 1991년1월22일 세이쿄신문 제4 면에 『후지의 청류는 탁류와 동화한 것인가 . C 작전,승려의 모략 체질을 폭로』 1991년1월23일 제15회 전국 부인부 간부회를 개최.. 1991년1월31일 SGI 회장,홍콩에서 행해졌던「SGI 아시아 회의 총회」의 석상에서 전쟁을 국제연합(UN) 주도로 해결을 제안하는『긴급 호소』를 발표,채택 1991년2월3일 오키나와·세계 평화 기원 근항회 개최. 1991년2월5일 제1회 오끼나와 현 총회·제6회 장년부 간부회를 개최. 1991년2월6일 오키나와·쿠니가미권 기념 근행회 개최. 1991년2월17일 제4회 남자부 간부회를 개최. 1991년2월22일 전국 현장 회의를 개최. 도쿄의 본부장회를 개최. 수도권 학생부 간부회를 개최. 1991년3월4일 간사이 도다 기념강당에서 ,제1회 간사이대표 간부회·제39회 본부 간부회. 제16회 전국 부인부 간부회를 개최. 1991년3월8일~9일 파리 교외에서 확대 유럽 회의를 소집. 1991년1월9일 창립 70주년 기념 제1회 중국 총회를 개최. 1991년3월12일 3·16 기념 전국 청년부 간부회·제6회 중부 총회를 개최. 1991년3월18일 창대·창가여자 단기 대학 졸업식. 1991년3월20일 미국 달라스 문화 회관 개관. 1991년3월27일 4·2 기념 오오타·시나가와·메구로·카와사끼 합동 간부 회. 1991년3월30일 『C 작전』발표. 1991년4월2일 4·2 기념 제2도쿄 제1회 기념총회를 개최. 1991년4월7일 책임 임원회,제 30회 중앙 회의를 개최. 1991년4월10일 제40회 본부 간부회,제17회 부인부 간부회를 개최 . 1991년4월19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회담. 1991년4월20일 명예 회장,제1회 SGI 필리핀 대표자 회의에 출석 . 1991년4월22일 명예 회장,필리핀의 아키노 대통령을 마라 게 안 궁전에 표경.필리핀 대학의 J·V·총장,F· R·P·로 메로 평의원과 함께 약30분 간에 걸치고 회담. 1991년4월25일 4월 도 전국 현장 회의.제41회 본부 간부회. 1991년5웡1일 『대백연화』5월호 발행. 1991년5월2일 창가대학에서 SGI 대표자 회의를 개최. 1991년5월3일 창대 이께다 기념 강당에서 『창가학회의 날』기념 식전을 개최. 교학 사범·준 사범의 인정서를 대표에게 수여. 1991년5월7일 명예 회장,창가국제우호회관에서 소련교육 위원회 야고진 의장과 회담. 1991년5월12일 청년부「대학교 사무국장회」를 개최. SGI 회장,시나노정의 SGI 국제 회의 회관에서 해외 대표 멤버와 협의회. 1991년5월14일 제32회 중앙 회의. 1991년5월16일 본부 연수회 시작. 1991년5월17일 제42회 본부 간부회·제7회 장년부 간부 회. 1991년5월23일 세이쿄신문 창간 40주년 축하기념회. 1991년5월24일 권 사자 지구 활동자회. 1991년5월25일 창가국제 우호 회관에서 제18회 부인부 간부회.(전국각 회관에 위성중계) 1991년5월27일 제40회각부 대표자 회. 1991년5월30일 6월도 전국 현장 회의. 1991년5월31일 전쟁과 평화 전(SGI,국제 연합(UN) 군축국,소련평화 위원회 등 7단 체 주최)의 모스크바전을 개최. 1991년6월1일 청년부 특별 연수(제1일 ). a)마키구치·도다양 회장의 「사신 홍법」의싸움, b)총본산의 신찰 받어라 인수요청에 반대, c)장례·피안·회향·계명·위패·탑파의 역사적 경위, d)「이번의 문제의 경위와 저류」「승려의 문제의 포인트」, e)삼보에 대하여· 제 43회 본부 간부회. 1991년6월1일 『대백연화』6월호 발행. 1991년6월2일 청년부 특별 연수회(제2일 ).내용은 제1일과 같음 . 9:00 근행(언론 회관) [재경 멤버는 9:30 집합 완료] 9:45 제3회연수담당:미야가와부회장 10:50 휴식 11:10 제4회연수담당:다하부 남자부장 12:00 식사(B2 식당)·휴식 13:45 언론 회관 집합 완료 13:50 제5회연수담당:마사끼 청년부장 14:40 휴식 (여자는 여자 회관에 이동) 15:10 부별 토의 16:00 종료 17:00 해산 예정 1991년6월4일 명예 회장,유럽 지도에 출발. 1991년6월6일 독일·오스트리아 합동의 SGI 최고 회의를 프랑크푸르트 시 교외에서 개최(현지 시간5일 오후6시 ). 독일 문화 회관에서 ,마키구치 초대 회장 탄신120 주년· 유럽 의 날 10 주년을 기념하는 독일 청년 대표자회를 개최. 1991년6월8일 명예 회장,독일 문화 회관에서의 독일 광포30 주년 기념 총회 1991년6월9일 지부의 장년부근항회및 질문 회. 1991년6월12일 제34회 중앙 회의. 명예 회장,독일의 아이츠제 카 대통령과 회담. 1991년6월16일 SGI 회장,남불·토레츠의 유럽 연수 도장에서 제13 회 S GI 총회(제2 일째) 스피치. 「우리들은 니치렌대성인의 분부대로,어서의 분부대로 수행하고 있다. 이길이야 말로『부처가 되는 대도』이다」라고 말함. 1991년6월17일 유럽 연수 도장내의 유럽 문화 센터에서 ,제1 회 SGI아프리카 최고 회의. 1991년6월23일 SGI 회장,영국최고협의회에서 스피치. 1991년6월24일 SGI 회장,영국 대처수상과 재회. 1991년6월25일 SGI 회장,영국 기념 총회에서 스피치. 1991년6월26일 SGI 회장,영국의 메이져 수상을 표경. 1991년6월29일 SGI 회장,영국 청년부 기념 총회에서 스피치. 1991년7월2일 소개장 등산 방식이 된다. 1991년7월3일 「7·3」을 기념하는 총회를 각지에서 개최. 1991년7월5일 명예 회장,창가국제 우호 회관에서 제44회 본부 간부회에서 스피치. 1991년7월1일 전국 현장 회의.카나가와,오사카,교토, 효고,북해도, 히로시마에 36 분 현 신설. 창가대학,제20회 다키야마제. 1991년7월8일 「퇴전자 명부」을 발표. 1991년7월14일 결성40주년 기념 청년부 총회. 1991년7월19일 명예 회장,태국 왕국에서 「일등 왕관 훈장」수여받다. 1991년7월20일 카와사끼·나까하라구의 본부 연수 회. 1991년7월21일 제31회 중앙 회의.8/15의 「세계 평화 기원 전국 전몰자 추선 근행회」,9/15의 「경로의 날」행사,9/23의 「창가 학회 추계 피안 근행회」등을 결정. 1991년7월22일 8월 도 전국 현장 회의. 1991년7월24일 『대백연화』8월호 발행. 세이쿄신문 제1면에 ,교학부 임용 시험의 일정·출제 범위를 발표. 『창가학회의 역사와 확신)』이 출제 범위. 도야마 현「제1회 지구부장 회」. 1971년7월25일 각지의 연수 도장에서 「하계 연수 회」. 이시카와현「기념 지구 부장 회」. 1991년7월26일 명예 회장,「나가노 부인부의 날」기념 연수회스피치 . 1991년7월27일 명예 회장,기리가미네·제3 연수회 스피치. 1991년7월28일 지부 간부회「신문 계몽 추진」 강조. 명예 회장,나가노 청년 연수 도장의 제4회 미래부 총회에서 스피치. 대백연화 쇼와 41년1월호 게재의 닛다스상인의 어 지도를 인용하고 학회를 선지식으로하여 ,「위대한 인격」을 갖춘다 . 1991년8월1일 카나가와현의 구·권장회. 1991년8월1일~8월15일 하계 우호 주간. 1991년8월2일 명예 회장,소련에 암 위원회에서 「평화의 전사 상」을 보내오다. 1991년8월4일 「91 지방·구 하계 연수」의 위성 동시 방송. 나가노 연수 도장에서의 일미 기념 합동 연수회. 1991년8월9일 제1회 군마현 총회. 1991년8월11일 광포40주년의 사이타마 현 기념총회. 1991년8월14일 카나가와 문화 회관에서 ,현 부인부 본부장 회. 1991년8월17일 하코다테 연수 도장에서의 홋카이도 하계 연수회. 1991년8월18일 명예 회장,제4회 홋카이도 총회 지방·구 대표 간부회 스피치. 『「악」을 꾸짖지 않으면 자신도 「악」이 되고 만다. 「악」에 이기는것에「선」은 증명된다.「정의의 사람」이란 「대복운」의 사람이며「성불」의 길을 크게 여는것은 틀림없다. 1991년8월24일 명예 회장,제 45회 본부 간부회 스피치. 1991년8월25일 홋카이도 문화 회관에서「해외·각부 대표 협의회」. 1991년8월25일 명예 회장,홋카이도 문화 회관에서의 유바리 대회34주년 기념스피치. 1991년8월27일 각부 대표자 회. 『대백연화』9월호 발행. 1991년8월28일 제37회 중앙 회의. 1991년8월29일 9월 도현장 회의. 본부 담당 창가반의 결단식. 1991년8월30일 사이타마 이께다 문화 회관에서 사이타마6 분현의 지부 장회. 1991년8월31일 오오타 이께다 문화회관에서 제2회 오오타 기념 문화음악제 지바 문화 회관에서 치바6분현의 지부장회. 1991년1월1일 창대 이께다 기념 강당에서 아성회 대학 교6기생 대회. 『현재,승려는 ,드디어 외곡된 실태와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 법주는 계단의 대어본존과 「불이의 옥체」라고 있다. 결국 예하와 계단의 대어본존은 동일 존재이고,이「근본의 2개」 에 대한 신심은 「절대」가 아니면 안된다고 말하는 법주본불론이 말해지고 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법즉인의 본존은 말법의 어본불·니치렌대성인,인즉 법의 본존은 계단의 대어본존이고,근본으로서 존숭해야 하는 본존은 , 이 인법일개의 본존 이외에 없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이 법주본존 론은 , 절대의 신심을 갖고 존숭해야 하는 근본을 또 하나 세우는 것이고, 이「2개의 근본」의가르침은 ,오늘까지의 일련정종의 역사라고 보았던 종지의 근본을 개변하는 것이다 . 이러한 가르침은 당연,어서에도 없고, 본래의 일련정종과는 완전히 다른것이며 신 종파의 설립이라고 착각하는 것뿐이다 . 처음,법주 본존론의 실수에 관하여는,66세 닛다스예하가 쇼와 52 년 5월의 사족 동심회에서 다음과 같이 지도하시고 있다. 「일련정종의 삼보는 ,어본존이 법보,대성인이 불보,닛코상인이 승보이고 그것에 대해 니치모쿠상인은 좌주이다……니치모쿠상인의 뒤는 ,모두 그것을 계승하는것에 지나지 않다……그러니까 대대의 법주가 니치렌대 성인이 아니다.대 성인 그 자체라고 틀리게 쓰여지는데서 문제가 나온다는것을 분명히 하고싶다」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대대의 대사를 니치렌대성인과 동일시하는 것을 , 엄하게 금했고 법주본불론은 ,예하를 불보라고 하는것이며, 일련정종 본래의 삼보가 세운것과는 완전히 다르다,이것은「삼보 파괴」의 사도인 것이다. 1991년9월3일 명예 회장,학생 부·교육부 합동 총회에서 스피치. 도쿄 도다 기념강당에서 도쿄여자부의 부장회. 1991년9월6일 도쿠시마·고찌에서 제1회 지구부장 회. 1991년9월8일 중국 총회,미야자키현 기념 총회·합창제를 개최. 창대 이께다 기념 강당에서 창가반 대학교15기생 대회. 1991년9월11일 명예 회장,학회의 최고 간부 500인을 모으고,「다쓰노구찌의 법난」 을 기념하고,근행·창제. 회장의 스피치를 게재. 제38회 중앙 회의. 1991년9월17일 제46회 본부 간부회·제19회 부인부 간부회. 1991년9월19일 명예 회장,각부 대표 합동 협의회에서 스피치. 1991년9월20일 명예 회장,청년부·교학부 대표 합동 협의회에서 스피치 . 1991년9월21일 명예 회장,부인부·청년부 합동 협의회에서 스피치. 1991년9월22일 SGI 회장,아메리카 지도에 출발. 1991년9월26일 SGI 회장,아메리카의 하버드 대학에서 , 『소프트 ·파워의 시대와 철학. 새로운 일미 관계를 열기 위하여 』기념 강연 . 1991년9월27일 SGI 회장,보스톤 회관에서 스피치 . 1991년9월29일 SGI 회장,아메리카 SGI 제1회 총회에서 스피치. 1991년10월1일 아메리카 SGI 제1회 청년 연수 회. 『대백연화』10월호 발행. 1991년10월5일 아메리카 SGI,시애틀 문화 회관 개관. 1991년10월6일 수도권 학생부 대표 부원회. 1991년10월7일 제40회 중앙 회의. 1991년10월10일 명예 회장,제1회 오다와라 기념 음악제및 사가현 기념총회 스피치. 1991년10월12일 코가네이(도쿄) 본부 연수 회. 1991년10월13일 제2회 야마나시 문화총회.4천명이 「환희의 노래」합창 . 동북 연수 도장 본관 오픈. 1991년10월16일 제13회 간사이 총회·제5회 효우고현 총회. 1991년10월20일 중부 문화 우호 제. 1991년10월21일 제14 회 SGI 총회·제7회 중부 총회·제47회 본부 간부회. 소설「인간 혁명」제11권의 세이쿄신문 연재를 종료. 1991년10월22일 명예 회장,SGI 대표자들과 정본당 상여어본존에근행 . 1991년10월23일 제41회 중앙 회의. 1991년10월24일 시부야구의 본부 연수회. 각부 대표자 회. 1991년10월27일 전국 청년부 간부 회. 1991년10월28일 권 지부 활동자회. 1991년10월30일 지부 간부 이상을 모으고 긴급 위성 중계.명목은「지부 장회」. 「C 작전」의 최종 단계 돌입이 닛켄의 초조와 불안으로 급변 』 시즈오카현 에서 닛켄의 퇴석 요구 서명을 개시 . 1991년10월31일 각지에서 현지 간부의 회합. 1991년11월1일 『대백연화』11월호 발행. 1991년11웡2일 승려에게 『통고』를 송부. 1991년11월3일 창가교육 동창의 모임. 장년부 간부 회. 제2회 도쿄문화 음악제·총회. 1991년11월6일 제42회 중앙 회의. 제25회 총무회.신총무35명 ,신총무 보61명을 임명. 1991년11월7일 전국 현장 회의.부회장15명 ,교학부 신사범 47명을 추가. 종문이 저녁때,학회에 『해산 권고』의 문서를 발송. 긴급 지부 장회·부장 회. 『닛켄법주 퇴좌 요구서』의 서명을 시작한다. 긴급 지구 부장 회·지구 리더 모임. 1991년11월10일 여자부 제작으로 칭하는 비디오 『후지의 탁류』. 1991년11월16일 긴급 위성 방송.(지바 문화제) 1991년11월18일 창가학회 창립 기념 근항회, 제4회 도쿄 총회의 위성 중계. 1991년11월20일 제43회 중앙 회의. 1991년11월23일 본부 간부 회,시나가와·메구로구 합동 제1회 「창가르네상스 문화 음악 제」의 위성 중계. 1991년11월28일 승려 창가학회에 파문장을 송부. 1991년11월30일 창가르네상스 대승리 기념 간부회(현구대표 간부모임)의 긴급 위성 방송. 1991년12월1일 『대백연화』12월호 발행. 1991년12월5일 제44회 중앙 회의. 1991년12월6일 12월 도 전국 현장 회의. 1991년12월8일 제49회 본부 간부회·제3회 사이타마 총회. 홍콩 SGI 총회.오스트레일리아 SGI 제1회 총회 . 1991년12월10일 세이쿄신문 제1면에 『내년1월 대망의「인간 혁명 」11권 발간』의 기사. 1991년12월15일 명예 회장,제 1회 카와사끼 문화 음악제 스피치. 1991년12월18일 제 45회 중앙 회의. 1991년12월27일 12/27일부로『퇴좌 요구서』를 대석사에 송부했었던 것을 발표. 동시에 1600만명분의 퇴석 요구 서명부를 공개하고,이것을 본산에 송달하다. 1991년12웡28일 12/27 날짜의 퇴석 요구서를 즉시 받도록 『최고서』를 승려에게 송부.매스컴에 발표한다.
다음은 1992년 이후의 창가학회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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