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토리오 데시카 감독(1902-1974)은 한국 관객에게 다소 낯선 인물이다. 장년과 노년층 관객이라면 소피아 로렌 주연의 <해바라기>를 기억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상실된 사랑과 가정을 아프게 담아낸 영화 <해바라기>.
소련에서 촬영되었고, 해바라기가 소련을 상징한다는 이유로 1980년대 들어서야 국내에서 개봉된 <해바라기>. 중국보다 더 중국답고자 했던 ‘소중화(小中華)’의 후예로 미국보다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리틀 아메리카’의 우울한 현주소.
각설하고 <해바라기>를 감독한 인물이 비토리오 데시카다. 그는 ‘네오 리얼리즘’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자전거 (自轉車) 도둑> (1948) 이전에 <구두닦이> (1946) 같은 영화로 전후 이탈리아의 현실을 냉정하게 들여다본 인물이다.
전후 (戰後) 로마 풍경 (風景)
실직과 구직의 어려움으로 고통 받지만 전후 로마 시민들은 살려는 의지로 충만하다. 모두 가난하고 실직 상태지만 그들의 눈빛은 형형하다. 살아야 한다는 열망으로 차고 넘치는 군중 속에 안토니오 리치가 있다. 그는 갓난쟁이와 여덟 살 남짓한 아들 브루노, 토끼처럼 귀여운 아내 마리아를 거느린 가장(家長)이다.
그가 오늘 기막힌 일자리를 얻었다. 안정적이면서 상당한 수입을 보장하는 벽보 바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 일에는 자전거가 필수 (必須) 조건이다. 이곳저곳을 기동성 (機動性) 있게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커다란 전단지와 풀 그리고 솔과 사다리 같은 비품(備品)도 자전거의 도움 없이는 해결할 수 없다.
그의 자전거는 지금 전당포에 있다. 2년 가까운 실직 기간에 먹고 살기 위해서 그들은 온갖 가재도구를 전당포에 넘겼던 것이다. 마리아의 얼굴이 밝아졌다가 일순 (一瞬) 어두워진 것은 자전거 때문이리라. 그녀의 결단은 침대보를 전당포에 저당하는 것이다. 새로운 물품을 저당하고 옛 물건을 되찾는 빈곤의 악순환.
비토리오 데시카 감독은 여기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안토니오와 마리아가 잡힌 침대보를 가지고 전당포 직원이 높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창고를 수직(垂直)으로 올라간다. 층마다 겹겹이 쌓여있는 침대보는 전후 로마 시민들의 생활상(生活相)을 한눈에 알아보도록 인도한다. 간결함의 위대한 승리다.
자전거를 잃어버린다는 것
출근 첫날 아침의 집안풍경은 따사롭기 그지없다. 식구들 모두의 얼굴에 웃음꽃이 환하다. 아버지의 자전거를 닦는 소년 브루노의 얼굴에도, 남편의 모자를 손보는 아내 마리아의 얼굴도 함박꽃이다. 팔다리를 버둥거리는 갓난쟁이도 행복해 보인다. 그렇게 안토니오는 브루노와 함께 출근(出勤)한다.
소년노동(少年勞動)이 전후 로마의 일상(日常)이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자전거를 통근 수단으로 삼은 부자가 저녁 퇴근시간의 만남을 기약(期約)한다. 그러하되 우리의 관심은 안토니오의 새로운 일자리다. 행복에 겨운 여배우를 전면에 내세운 커다란 전단지에 풀을 먹여서 벽에 바르는 지극히 단순한 일이다.
안토니오가 노동의 대가(代價)를 생각하기도 전에, 출근 첫날의 긴장과 은닉(隱匿)된 희열을 느낄 겨를도 없이 비극은 다가온다. 제목이 알려주는 것처럼 자전거를 도둑맞는다. 백주대낮에 자신이 있는 곳에서 생계수단 전부를 한순간에 상실하는 안토니오. 자전거 전문 도둑처럼 보이는 그들은 조직적으로 대응한다.
도둑맞은 자전거를 찾지 못한다면 안토니오 일가(一家)는 아무런 희망(希望)도 없다. 영화가 서사(敍事)의 긴장을 놓치지 않는 까닭은 객석과 공유(共有)하는 아픔과 연민 (憐憫) 때문이다. 망연자실한 남편, 눈물어린 눈의 아내, 두려움으로 가득한 커다란 눈망울의 아들. 이들 세 식구의 앞날을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가?!
군중 (群衆) 속의 고독 (孤獨)
자전거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친구를 동원하는 안토니오. 그들은 하나같이 어눌하고 남루하며 허술하다. 어설픈 인간들의 대열이 만들어진다. 감독은 화면 가득 자전거를 보여준다. 완성된 자전거뿐 아니라, 자전거 부품들로 화면을 가득 채우기도 한다. 안토니오에게 자전거가 얼마나 절실한지 보여주는 미학(美學)이다.
하지만 안토니오의 자전거는 어디에도 없다. 대체 그 넓은 로마 어느 곳에서 잃어버린 자전거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안토니오는 우연히 마주친 자전거 도둑의 공범(共犯)을 따라 성당에 들어간다. 거리에 차고 넘치는 노숙자들과 부랑자들과 거지들에게 점심식사를 제공하는 아름다운 성당과 우아한 숙녀(淑女)들.
안토니오 흉중에는 오직 자전거 밖에 없다. 거지노인을 겁박(劫迫)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성당에서 쫓겨나는 것이다. 점심도 자전거도 날려버린 안토니오를 찾아오는 것은 허망함과 배고픔과 자포자기(自暴自棄)다. <자전거 도둑>에서 설득력 있는 대목이 여기다. 안토니오가 브루노를 데리고 식당에 들어가는 장면.
영화는 자전거를 찾아 헤매는 부자(父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장활극을 희비극적으로 보여준다. 성당 사제들의 형식적인 제례의식, 호화롭게 식사하는 부르주아 가정의 식구들, 자전거 도둑이 구현(具顯)하는 발가벗은 가난과 간질발작, 허망하고 또 허망한 안토니오와 무관(無關)한 축구 관객들과 그들의 허다한 자전거.
안토니오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로마 시민들과 완전히 격리(隔離)되어 있다. 그는 거리에서 광장에서 온전하게 혼자이며 구원은 어디에도 없는 듯하다.
아버지와 아들
음악이 고조(高潮)되며 안토니오의 숨이 가빠온다. 모퉁이에 세워진 자전거에 자꾸만 눈이 간다. 자전거만 있으면 그와 가족은 풍족(豊足)하게 지낼 수 있다. 하지만 자전거가 없다면 그도 가족도 지탱할 수 없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욕망의 손길이 자꾸만 채근한다. “뭐 하고 있어?! 저걸 훔쳐 도망쳐. 그것만이 출구야!”
우리는 결말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 ‘네오 리얼리즘’은 감상(感傷)과 작별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가감 (加減) 없이 재현한다는 강점(强點)을 보여준다. 하지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는 것은 사진 찍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여기서 빛을 발하는 것이 비토리오 데시카 감독의 연출능력이다.
자전거 도둑을 잡으려 찾아 헤매다 자신이 자전거 도둑이 되어버리는 기막힌 현실. 안토니오를 둘러싼 시민들의 욕설(辱說)과 비난이 이어진다. 그를 구원하는 것은 자전거 임자의 말이다. “저 자를 놓아줘! 자식 잘 키운 줄 알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안토니오를 욕하고 주먹질하고 침을 뱉어도 아들 브루노는 아버지 곁을 지키고 있다. 아버지 곁에 꼭 붙어 서서 아버지를 용서해달라고 눈물로 호소(呼訴)하는 브루노.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은 군중들에게서 풀려난다. 어린 아들의 손을 꼭 잡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하늘을 보는 안토니오.
짧은 맺음말
우리는 안토니오 일가의 뒷일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가난과 범죄(犯罪)의 수렁에 빠져들었는지, 험난한 역경(逆境)을 이겨내고 빛나는 삶을 가꾸었는지 아무런 정보도 없다. 하지만 비관적(悲觀的)인 결말을 상상하는 관객은 많지 않을 것이다. 견고한 부자관계 확립과 이탈리아의 전후부흥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러하되 21세기 한국사회의 암울함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에 이른다는 2015년을 돌아보면 그러하다. 누군가는 넘쳐나는 부(富)를 주체하지 못하고, 누군가는 가난과 질병과 고독으로 삶을 마감한다. 송파구 세 모녀 자살사건은 현재 진행형이다. 우리는 여전히 자살공화국 시민이다.
‘세월호 참사(慘事)’가 일어난 지 1년이 훌쩍 지났지만, 사건의 실체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언론은 그만하자는 채근기사로 지면(紙面)을 채우고, 돈 먹었으니 이쯤하자는 대중의 눈빛은 차갑기 이를 데 없다. 연민과 동정이 실종돼버린 21세기 대한민국. 가족주의와 보신주의로 차고 넘치는 냉정한 염량세태.
<자전거 도둑>은 21세기 냉혹한 한국사회가 아니라, 연민과 동정에 기초한 세상을 꿈꾸는 이를 위한 따사로운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