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트 인 더 인드, 캔자스/최승자
창문 밖, 사막, 바라보고 있다.
내세의 모래 언덕들, 전생처럼 불어가는 모래의 바람.
창가에서 이십 년 전쯤 처음 만났던 노래를 들으며
찻잔을 훌쩍이다가, 나는 결정한다.
이제껏 내가 먹여 키워왔던 슬픔들을
이제 결정적으로 밟아버리겠다고
한때는 그것들이 날 뜯어먹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 자신이 그것들을 얼마나 정성스레 먹여 키웠는지 이제 안다.
그 슬픔들은 사실이었고, 진실이었지만
그러나 이젠 저 창 밖 풍경, 저 불모를 지탱해주는
눈먼 하늘이 흰자위,
저 무한으로 번져가는 무색 투명에 기대고 싶다
더스트 인 더 윈드, 캔자스
<시 읽기> 더스트 인 더 인드, 캔자스/최승자
최승자 시인이 요즘 아프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생물학적인 아픔도, 심리적인 아픔도, 사회적인 아픔도 또 그 어떤 아픔도 아픔이 정도가 너무 심하면 안 됩니다. 아픔이라는 통점痛點이 너무 커지거나 깊어지면, 그것은 존재의 삶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임계점이 찾아오기 전에 우리 자신을 따뜻하게 돌보며 너무 아프지 않게 생의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그동안 최승자 시인이 그의 시를 통하여 보여준 자학에 가까운 자기점검은 그의 진정성과 언어를 늘 신뢰하도록 만드는 원천이었지만, 그가 감내해야 할 통증은 적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의 이러한 시를 가리켜 ‘죽음과 상처의 시’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견딜 만한 것이어야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않을 때 시인은 너무 아프고, 그 아픔은 그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최승자 시인이 위 시가 수록된 『여인들』에 오면서 빛과 긍정과 생기가 있는 쪽으로 방향전환을 하기 시작하는 징후를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제 자신의 일처럼 무척이나 기쁘고 다행스럽게 생각되어 그가 이후에 어떻게 세상과 화해 혹은 타협을 해나가는지 체크하듯 살펴보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이 시집의 후기 형태인 <시인이 쓰는 시 이야기>에서 이 『여인들』이라는 시집이 나오기 이전의 5년 정도는 ‘죽음이 죽음’, 즉 죽음이라는 의식이 내 속에서 죽는 과정이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이전이 내 의식이 얼마나 많은 죽음의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던가라고 스스로 반문하며 그 터널을 빠져나온 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무척 무거웠습니다.
위 시의 제목을 보면서 미국 대중음악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금세 팝가수 구룹 캔자스Kansas’가 부르는 노래 <더스트 인 더 윈디Dust in the Wind>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리고 애잔한 분위기의 발라드곡인 이 노래의 가사도 함게 떠올릴 것입니다. 그 노래와 가사를 떠올리지 않아도 위 시의 이해와 감상은 그 나름으로 가능하지만, 그것을 떠올릴 때 우리는 더욱 더 깊이 이 시의 한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곡은 여러분 각자가 들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 글의 자연스러운 전개를 위하여 가사를 적어보겠습니다.
눈을 감으면
잠시 동안이지만 그 순간도 금방 흘러가버립니다
내 모듬 꿈들은
내 눈 앞에서 사라져 가요
이상하죠
바람 속의 먼지
모든 것이 바람 속의 먼지일 뿐이에요
언제나 같은 옛 노래
끝없는 바다 속 한 방울의 물처럼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땅에 부딪혀 부서져버리죠
우리는 그런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지만
바람 속 먼지
우리는 모두 바람 속 먼지일 뿐이에요.
매달리지 말아요
땅과 하늘을 제외하고는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없어요
그냥 빠져 나가버리죠
당신이 가진 돈을 모두 합해도
단 일분도 살 수가 없어요
바람 속 먼지
우리들은 모두 바람 속 먼지일 뿐이죠
바람 속 먼지
모든 것은 바람 속 먼지일 뿐이에요
위 시의 제목과 같은 캔자스의 위 노래가사를 마음에 품고 시의 본문 속으로 들어가봅시다. 위의 시의 본문 첫 부분은 화자가 창문 밖의 사막을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사막을 바라보면서 화자는 “내세이 모래 언덕들”을, “전생처럼 불어가는 모래의 바람”을 봅니다. 내세도, 전생도, 우리의 존재와 삶의 지평을 무한으로 확대시키게 합니다. 그러므로 위 시의 첫 부분에서 우리는 사막을 바라보면서 화자가 무한을 상상하고 인식하며 느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한의 등장은 언제나 우리를 놀라움에 빠뜨리고 맙니다.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근시로서의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에 좀처럼 무한을 일상 속에서 의식하며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끔씩 찾아오는 이 무한에의 인식은 존재의 거처를 재인식하게 만듦으로써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안내합니다. 그 새로운 세계의 내용이란 한편으론 막을 수 없이 밀려오는 허무감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무한 속에서만 맛볼 수 있는 편안함입니다. 그러니 허무함과 편안함은 동전의 안팎과 같은 관계입니다.
위 시의 화자는 지금 그 무한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이 만든 역사의 시간표를 넘어서 우주가 그려내는 무한의 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무한과의 만남 속에서, 위 시의 제2연으로 가보면 그는 앞에서 가사를 적어 보인 캔자스의 <더스트 인 더 윈드>를 듣고 있습니다. 이 노래의 핵심은 우리들 모두가 무한 혹은 우주 속의 먼지와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오직 영원한 것은 하늘과 땅으로 표상되는 무한이라는 존재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위 시의 화자는 그의 삶을 지배했던 ‘슬픔’의 문제에 대해 생각합니다. 슬픔이란 무엇인가요? 무수한 욕망 혹은 소망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비롯되는 감정이지요. 그 욕망과 소망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거창한 것에 이르기까지, 인간사에서부터 자연사에 이르기까지, 현실적인 것에서부터 관념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그 진폭이 대단히 큽니다. 그러나 슬퍼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도 인간적인 순수한 소망과 꿈 그리고 아픔을 느낄 만한 감정의 세포가 살아 활동한다는 뜻이지요. 그런 점에서 슬퍼할 수 있는 것은 아름답기도 하고, 그런 능력이 있을 때까지 지극히 인간적인 삶의 드라마에 온몸으로 참여한다는 의미가 될 수 있겠지요.
위 시를 보건대, 최승자 시인의 시쓰기는 바로 그 슬픔을 원동력으로 삼아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예수의 말처럼, 그는 슬퍼할 수 있는 마음과 능력을 가진 복된(?) 시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지나친 슬픔은 그에게 얼마나 큰 아픔을 느끼게 한 것인가요? 참으로 약은 사람은 시를 쓸 수 없을지언정 절대로 지나치게 슬퍼하지 않는 법, 그러나 약기보다 진지한 최승자 시인은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진 예수처럼 슬픔의 짐을 끝도 없이 지고 시의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고자 한 것입니다.
이런 슬픔 앞에서 그는 위 시를 빌려 투정을 하는 것입니다. 이 무거운 슬픔이란 짐을 아예 짓밟아버리겠다고…… 그리고 가만히 따져보니 그 슬픔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정성스레 먹여 키워왔던 것이라고…… 그러니 그 책임은 바깥에 있지 않고 나에게 있다고…… 그러니 그 책임은 바같에 있지 않고 나에게 있다고……. 그러나 이런 그의 말을 들으면서 그가 외부와의 순정한 싸움에서 물러서고자 하는 것은 그의 무모하리만큼 커다란 자신의 순정을 돌아다보는 것일뿐 그가 진정으로 외부세계를 용납했다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스스로의 순정성을 대상화시켜 바라다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그가 맹목에 가까운 순정을 발산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부분입니다. 최승자 시인은 위 시에서 더 이상 슬픔의 짐을 질 수 없을 것 같은 엄청난 통증을 느끼며 그런 자아진단을 스스로 해보는 데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발전입니다. 그가 자신의 슬픔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게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그의 슬픔이란 무거운 짐 아래서 신음하듯 아파하는 그 자신을 조금씩 구해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너무나 진지한 것도 탈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진지함도 집착의 다른 이름일 때가 많습니다. 캔자스가 부르는 <더스트 인 더 윈드>의 노랫말처럼 모든 것이 무한 속에서 먼지와 같은 것으로 존재할 때. 슬픔조차도 먼지와 같은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분명 그 슬픔은 지금이 나를 아프게 만드는 실존적이며 현실적인 것이고, 최승자 시인이 위 시에서 말하듯이 “사실이었고, 진실이었지만” 그런 사실과 진실조차도 이 앞에서는 먼지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먼지와 같이 존재할 때, 그것은 무상함을 느끼게 하면서 동시에 무욕의 가벼움을 선사합니다. 그러니까 그때의 먼지는 아주 무거운 것이자, 지극히 가벼운 것입니다. 그 무거움과 가벼움의 이중주가 여기에 숨어 있습니다.
최승자 시인이 인간사에 기초하여 슬픔을 느낀 것도 매우 의미 깊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인간사의 슬픔을 무한과 우주사에 기대어 넘어서려고 하는 것도 의미 깊습니다. 인간사의 유한성에 이처럼 우주사의 무한성을 끌어들일 때, 슬픔은 무턱대고 과장되거나 경직되지 않고, 양자 사이를 넘나들며 넘치지 않게 조율됩니다.
최승자 시인이 위 시를 통하여 “저 창 밖 풍경, 저 불모를 지탱해주는” “저 무한으로 번져가는 무색 투명에 기대고 싶다”고 말했을 때 우리가 안도감과 해방감까지 느끼는 것은 그의 인간적인 슬픔이 더 이상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사를 사랑하는 것과 무한을 함께 아는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인간적인 슬픔에 맹목적 헌신이라 부를 만큼 몰입하고 투신하였을 때, 그것도 빛나는 시를 창출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그러나 무한을 인식하고 그 속에서 인간적 슬픔을 함께 바라다볼 수 있을 때, 그것은 또다른 측면에서의 빛나는 시를 잉태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저는 최승자 시인이 사막으로 표상되는 무한과의 만남을 가진 것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그것은 그가 지나친 아픔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계기이며, 그이 시적 반경을 넓힐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계기이자 기회일 뿐, 그가 어떻게 그를 사로잡은 슬픔을 더 잘 발효시키고 승화시킬지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이와 같은 무한과의 만남 속에서 조금씩 슬픔의 무거운 물기를 거두어내고 있었지만 그가 지금 몹시 아프다고 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가 위 시의 수록 시집인 『연인들』의 뒤표지에서 김정환이 말한 예술가의꿈, 즉 “자기 내부와 궁극의 우주를 일치시키”는 일에 온전히 성공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그 성공에의 꿈을 조금 낮추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전자와 같은 성공이 어렵다면 꿈을 낮추는 일이 현명할 터이니까요.
‘자기 내부와 궁극의 우주를 일치시키는 일’, 그것은 너무나도 매력적입니다. 그 지점은 늘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밥을 굶는다면 당연히 시집을 팔아야 하듯이, 슬픔으로 몸이 너무 아프다면 꿈을 낮추거나 시쓰기를 쉬는 일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시집도, 시쓰기도, 생존에 비하면 사치이자 잉여일 뿐이며, 시집보다는 밥이, 시쓰기보다는 몸이 먼저임을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밥과 몸은 시집과 시쓰기의 토대인 것입니다.
시도 좋고, 예술도 좋지만, 허열과 과열 속에서 너무 몸이 아플 정도로 그에 투신하지는 맙시다. 그리고 세상과 삶과 인생 때문에 너무 슬퍼하지 맙시다. 시도, 예술도, 인간사도 이렇게 흘러왔고, 또 그렇게 흘러가고 있으니까요.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