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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성령이 맺게 하시는 열매들8-온유의 열매
오늘은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중 여덟 번째 열매인 온유에 대하여 들어보고자 합니다. 계속해서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성령의 열매가 순서적으로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는 마치 하나의 둥그런 구 안에 아홉가지가 뒤섞여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삶의 선한 열매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만난 상황이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이 열매가 보이기도 하고 저 열매가 보이고도 하지만 결국 여러분들의 안에 성령이 계심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온유 역시 다른 나머지 여덟가지 열매들과 동일하게 중요합니다. 우선 오늘 본문을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온유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따뜻하고 부드럽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온유는 그것을 넘어 관대함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관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디도서 3장 2절을 보면 온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온유한 사람은 남을 비방하지 않으며, 다투지 않으며, 관용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 5-7절은 온유함을 나타내는 관용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말씀을 보면 온유한 행동을 드러내는 관용이나 온유 자체는 관계적임을 알게 됩니다. 자비가 가난하고 없는 사람, 고통당하는 사람을 향한 연민으로 인해 나누어주고, 베풀어주는 자선의 의미가 강하다면, 온유는 받아들여 주고, 품어주고 함께 경험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비가 높이 있고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낮은 자리에 있고 갖지 못한 사람에게 공급하는 것이라면 온유는 동등한 입장으로 다가가 함께 안아주고 손을 잡아 주고 함께 동반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자비는 마치 물과 같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만, 온유는 옆으로 퍼져나가는 따스한 봄바람과 같습니다. 성령은 성령받은 성도를 통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시며, 또한 온유함을 보이셔서 하나님이 온유하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온유하며 겸손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면 다 가지고 오라고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오기만 하면 누구든지 다 받아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리고 이어서 29절은 이렇게 말씀을 게속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은 온유하심으로써 믿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온 여러분들을 쉬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온유와 겸손을 예수님께 배우는 사람의 마음을 쉬게 해주십니다.
여러분들이 성령의 열매인 온유한 삶을 산다는 것은 예수님의 온유하심을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왜 이것이 가능합니까? 온유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의 온유함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 제자들은 충성된 사람들이었지만 한 편으로 매우 모난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도 뱃사람 특유의 급한 성격을 가졌지만, 야고보와 요한 역시 불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빌립은 약간 극단적이며 계산적이었고, 도마 역시 극단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로마에 항거하던 열심당 출신의 시몬도 있었고, 세리 출신인 마태도 있었습니다. 나다나엘도 역시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도 역시 극단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다양하고 모난 제자들을 예수님은 삼년 반동안 데리고 다니시면서 동거동락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얼마나 온유하신 분이신지를 배웠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보고 배웠다고 하서 금방 변화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그렇게 충성스럽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성령을 받기 전에는 그 모난 성품을 바꿀 수가 없었습나다. 그런데 성령을 충만히 받고 나서 성령이 주시는 성품으로 인해 온유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온유한 사도들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의 기도를 놓는데 쓰임을 받았던 모세 역시 온유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온유했는지 민수기 12장 3절을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온유하다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충성됨과 온유함에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억울함을 사람에게 풀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사랑하셔서 직접 그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왜 직접 찾아가서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려고 합니까? 하나님이 해결해주실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에스더의 사촌 오빠인 모르드개는 하만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상황에서 하만과 힘겨루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하소연을 왕에게 아뢰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베옷을 입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것을 본 에스더는 무슨 일인가 알고자 했고 모르드개는 일어난 일 곧 하만이 자기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에스더가 왕 앞에 나아가 지금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이야기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두 마디를 덧붙입니다. 첫째는 “네가 왕비가 된 것이 이 때를 위함인지 어찌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가지는 “네가 왕비 자리에 있다고 해서 너만 화를 면하리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왕비가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 에스더 역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를 볼 때 사람이 온유하다고 해서 지혜까지 없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조건 참아야 하는 것만이 아니라 때로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과 길을 알고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에스더는 오라비의 말에 순종했고 하만은 죽고 모르드개는 나라의 이인자가 되어 백성들을 구원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온유한 사람의 행동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온유한 자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실까요? 먼저 시편 37편 11절을 보면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가 싸웁니다. 나라와 나라끼리 싸우고, 지역과 지역기리 싸우고, 개인과 개인끼리 싸웁니다. 평택시와 아산시가 서로 바다를 놓고 자기네 바다라고 싸웠습니다. 일본과 우리 나라가 독도를 모두가 자신들의 땅이라고 우기는 이유는 해상권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다에서 나오는 엄청난 이익이 있기 때문에 나라 안에서도 싸우고 나라 밖에서도 싸웁니다. 이러한 싸움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서로가 땅을 차지하려고 무력을 써가면서 싸웁니다. 개인과 개인의 싸움은 서로 소송을 해서 차지하려고 싸웁니다. 그런데 국가와 국가는 해답이 안나옵니다. 중국과 베트남이 땅과 바다를 놓고 싸웁니다. 중국과 인도가 땅을 놓고 싸웁니다. 중국와 일본이 바다를 놓고 싸웁니다. 중국과 북한이 백두산을 놓고 서로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합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서로 자기네 땅이라고 싸웁니다. 이것은 유엔에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 서로가 역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재판을 해서 판결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쩔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최후의 승자는 온유한 자들의 것입니다. 온유한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에수님 안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 안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되어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년왕국은 온유하신 예수님과 구원받은 온유한 성도들이 들어가서 받게 될 거룩하고 아름다운 땅입니다. 그래서 시편 37편 11절에서는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하면서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폭력이 아니라 화평입니다.
사람이 땅을 사고 등기를 올린다고 해서 그 땅이 영원히 자기들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땅은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으로 계속해서 명의가 변경됩니다. 인간 중에 영원한 땅 주인은 없습니다. 오직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들에게 왕의 직분을 맡기시면서 천년 동안 다스리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것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라 이 땅에서도 역시 온유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포함됩니다. 사무엘하 22장 36절을 보면 다윗의 시가 나옵니다. “주께서 또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 온유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크게 하십니다. 열 두제자를 보십시오. 그들의 출신은 그 당시 사회에 그렇게 뛰어난 신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이 땅에서가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서 높은 신분들이 될 것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6절입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그런데 이 은혜가 누구에게 있다고 합니까? 예!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둘째 사망의 권세아래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 있음으로 인해 사망을 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을 하게 됨은 물론이고 영생을 선물로 얻게 됩니다.
온유하신 하나님의 가슴은 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잘못한 일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대하여 잘못한 일을 용서해주십니다. 온유함은 관용함으로 인해 나타나는 사랑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심으로 인해 관용하십니다. 온유하신 하나님은 급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과 같이 수시로 상황에 의해 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을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신 날부터 여러분들과 함께 동행하시면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자라도록 관용하심으로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완전하지 못하다고 해서 여러분 스스로를 정죄하지 마십시오. 또한 여러분들이 죄에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약함을 가졌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여러분들을 향하신 사랑을 변합없이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이 남자 저 남자의 품을 찾아다니면서 간음했던 여인인 고멜과 결혼함으로써 증거하였던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호세아 6장 3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언제나 어두움이 지나가고 나면 찾아오는 새벽 빛같이 온유하신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지은 죄로 인해 슬퍼하며 회개할 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다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온유하셔서 여러분들에 대하여 부드럽고 따뜻하며 너그럽게 대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시편 18편 35절을 보면 온유하신 하나님을 경험했던 다윗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또 주께서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주님의 구원하시는 방패를 주셔서 대적들의 모든 공격에서 구원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여러분들을 대적하는 마귀는 매순간 여러분들을 참소하며 공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매순간 여러분들을 지켜주십니다. 예수님은 이 승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경험하셨습니다. 마귀는 40일 금식하신 예수님을 세가지 시험으로 공격하였지만 예수님은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마귀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과 율법사들을 통해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시도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그 모든 시험들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구원의 방패는 바로 아버지께서 주신 진리의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을 온유하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모든 날 동안 읽게 하시고 듣게 하시고 묵상하게 하셔서 마귀를 대적하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여러분들의 말씀에 의지해서 가지고 적들의 공격을 막는 믿음의 방패를 잘 활용하시길 축복합니다.
또한 온유하신 하나님은 여러분들과 동행하시면서 주님의 오른 손으로 여러분들을 붙들어 주십니다. 주님의 오른 손은 강한 손을 의미합니다. 그 손에서 여러분들을 빼앗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온유하신 하나님 안에서 안심하십시오. 또 하나 온유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일어나는 일은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큰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크게 하심으로 인해 마귀와 세상은 여러분들을 크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그리고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면서 위대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의 마음에서 나온 위대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위대한 일입니다. 이것을 알고 믿고 따르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로써 말구유에 태어나게 하시고 나사렛의 동네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또한 인생의 큰 꿈을 꿀 수 없는 어부들을 부르셔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유대땅을 벗어나보지도 않았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경작해야할 땅이었습니다. 그들은 온유하신 예수님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과 함께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허황된 공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겠다”고 하신 예수님이 자신들과 항상 함께 하시면서 하나님의 위대한 복음으로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시면서 자신들을 매개체로 하여 위대하신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시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온유하시다고 해서 가만히 계시기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시편 25편 9절을 보면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약속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리스도인인 여러분과 교회를 통해 이루어가십니다. 이것은 결코 하찮은 일이나 작은 일이 아닙니다. 위대하시며 온유하신 하나님이 떠들썩하게 이루시는 일이 아니라 누룩처럼 소리없이 온 세계 가운데 이루어가시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여러분 안에서 하나님의 온유하심의 열매를 맺으면서 이 일을 이루어가게 하십니다. 겸손하시며 온유하신 예수님을 통해 온 세계 모든 민족의 구원을 이루고 계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겸손하고 온유하심으로 세상을 구원하시 기위해 세상을 정죄하거나 심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십자가에 산 제물로 내드리기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만물위에 높이셔서 모든 만물의 주인으로 삼으셨습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 다는 것은 결국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품으며 따뜻한 사랑으로 관용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에게 하나님은 영원히 다스릴 영역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기쁨을 허락하십니다. 시편 37편 11절입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하나님이 온유의 열매를 맺으시는 여러분들에게 주시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땅과 그 땅위에서 누리는 화평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통치 아래에 있는 세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성령을 따라 온유함의 열매를 맺은 여러분을 높이시고 크고 귀한 상을 주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상을 받으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