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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스크랩 새벽설교 종합편9
주님의숲 추천 0 조회 129 16.11.22 18: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아비의 통곡   사무엘하 18장 31~33절



마하나임 성루로 올라가며 단장의 아픔을 토해내는 울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기에 그토록 피를 토하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가?

전쟁터에서 남편을 잃은 청상의 눈물인가?

사고와 질병으로 자식을 빼앗긴 어미의 눈물인가? 아닙니다.

여인이 아니라 사내의 눈물입니다. 어미가 아니라 아비의 눈물입니다.

가난한 민초의 눈물이 아니라 천하를 호령하는 왕의 눈물입니다.


자식이 무엇이고, 부모란 것이 무엇인가?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마지한 나와 여러분은 이 시간에 아버지 다윗의 통곡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다윗의 눈물에 담긴 아픔과 고통의 의미를 깨닫기를 원합니다.


Ⅰ. 성공한 다윗의 인생을 봅니다.


1. 그는 장군으로써, 왕으로써 성공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베들레헴 유다의 후손, 이새의 여덟 명 아들 중,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30세에 왕위에 오른 후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입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골리앗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을 구한 이후, 다윗은 평생 동안 수많은 전쟁을 수행하여 승리로 이끌었으며, 왕위에 오른 다윗은, 가나안 여부스

족속이 우거하던 예루살렘을 쳐서 평정하고 예루살렘에 다윗 성을 건설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도읍지로 정하고 람, 모압, 암몬, 블레셋, 아말렉, 소바, 에돔등 수만은 주변 국가들을 평정하여 통일 이스라엘을 건설한 임금입니다(삼하 5;7).

이 시대를 이스라엘의 최고의 전성기라고 일컬으며, 이스라엘 왕정의 기틀을 확립하고 다윗은 모든 국민들로부터 추앙받는 성군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모세 다음가는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받고, 지금도 이스라엘 국기의 별을 다윗의 별이라고 불리 울 만큼 자랑스러운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2. 다윗은 신앙인으로서도 성공한 사람입니다.

사무엘하 5장 10절의 말씀에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다윗과 함께 하셨는가?

그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만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블레셋 장수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면서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 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라”고 했습니다(삼상 17:37).

그는 아비의 양을 돌볼 때에도, 전쟁에 나아갈 때에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믿고 의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일평생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은혜를 입고, 일평생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나라가 안정되자 하나님 성전을 지을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네가 비록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나,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그러나 너는 그 전을 건축하지 못할 것이요 네 몸에서 낳을,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리라”고 하셨습니다(왕상5:3).

그것은 그가 군인으로서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이라고 성경 역대상 22장 8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전 건축을 위하여 오빌의 금 3천 달란트와(약100톤),

천은 7천 달란트(약 250톤), 수없는 철과 은을 중수를 알 수 없을 만큼 준비하고 전 안에 들여놓을 금 은 기명들을 수없이 준비했습니다(대상 29:4).

솔로몬 성전은 다윗이 준비한 물자로 솔로몬이 건축했습니다.

이토록 다윗은 일심으로 그는 수금을 다는 사울 왕궁의 악사였으며 다윗의 제례악을 창안한 음악가였습니다. 그는 탁월한 건축가였습니다.

“이 위의 모든 것의 식양을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그려 나로 알게 하셨느니라”(대상 28:19). 솔로몬 성전의 설계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다윗이 설계했습니다.

그는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토벌하러 온 사울의 옷자락을 칼로 베고는 “사울의 옷자락을 벰을 인하여 마음이 찔렸다”고 했습니다(삼상 24:5).

그는 밧세바 사건으로 인하여 나단 선지자의 질책을 듣고는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였나이다”라고 회개 하였습니다(삼하12:13).

겸손히 회개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사죄의 은총을 입은 사람입니다.

다윗은 너무나 찬란한 대 성공을 거둔 위대한 왕입니다.


Ⅱ. 실패한 다윗의 인생을 볼 수 있습니다.


1. 다윗은 자녀에게 그릇된 본을 보였습니다.

자식은 부모로부터 모든 것을 배우고 자랍니다.

그래서 부모를 “가장 훌륭한 스승”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부모에게 열 가지 장점이 있어도 자식은 부모에게 있는 한 가지 단점을

답습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타락한 본성이 나쁜 쪽으로 인생을 유도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남의 아내를 탐하여 탕자의 본을 보임으로 아들 암논은 이복누이 동생을

범하고, 압살롬은 형제를 죽이는 살인죄를 범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돌아왔으나, 회개하지 못한 자식들은 돌아 올 수 없었습니다.


2. 다윗은 자신을 다스리는데 실패했습니다.

성경은 “왕이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고,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에 미혹되지 말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신17:16-17).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외양간 4천을 세우고, 병거 1천 2백승과, 마병 6만을 소유했습니다(대하12:3). 다윗은 16명의 아내와 후궁들을 두고 19명의 아들을 두었습니다.

이것이 가정불화의 원인이 되고, 많은 형제들이 뒤엉켜 살다보니, 시기가 생기고, 형제간에 세력다툼이 생기고, 심지어는 근친상간의 끔찍한 범죄가 발생했습니다.


3. 다윗은 자식을 과도히 사랑했습니다.

성경은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 하나니, 매는 사람의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20:30).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 하느니라”고 또한 말씀하고 있습니다(잠13:24).

그런데 다윗은 죄를 범한 자식을 엄히 다스리지 못하고 초달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맹목적 사랑을 자식에게 쏟음으로 더 큰 죄를 범하는 자식으로 만들었습니다.


4. 다윗의 결정적 실수는 자신이 돌 볼 자식을 타인에게 맡긴 것입니다.

다윗은 출전하는 심복들에게 “제발 너그럽게 대하라”

“소년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하라”고 애걸 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압살롬을 용서하겠는가? 임금에 반역한 반역 죄인을 누가 용납하겠는가?

아버지를 배반한, 패역무도한 불효자를 누가 너그럽게 대해 주겠는가?

자식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해 줄 사람은 부모뿐인데, -자식을 지켜줄 사람은 아비뿐인데- 그 자식을 남의 손에 맡겼으니, 누가 그 자식을 지켜주겠는가?

그는 자식에게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왕자의 자리를 주었습니다.

장차 왕위도 줄 것입니다. 끝없는 사랑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식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는데 실패했습니다. 다윗은 통곡했습니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내 아들 압살롬아!” 하고

다윗은 자식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죄책이 자식에게 전가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윗이 뼈아픈 자책의 통곡함에는 참회와 회개가 있었습니다.

오늘 나는 성공한 아버지인가? 실패한 아버지인가? 자신을 돌아보는 어버이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   로마서 10장 9~17절



지금 우리는 지구 종말의 한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종말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무관심입니다.

다른 사람이야 어찌 되던지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하는 무관심이야 말로 가장 비참한 세상을 만드는 요소입니다.

만약, 예수는 그리스도요, 우리를 구하러 오신 구세주라고 하는 사실에 대하여 사람들이 무관심한다면 어찌 되었을까? 또 그 예수께서 죄인을 구하러 왔다고 하는데 - 죄인이 누구냐? 나는 아니다 - 라고 생각했다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러한 인간의 무관심을 완전히 뒤 바꾸고 있습니다.

무관심의 반대 개념은 관심입니다. 관심은 인간의 행동을 촉발합니다.

본문은, 영혼에 대한 관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좋은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얻도록 전파하는 사람들을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쁜 소식인 복음을, 전도의 미련한 방법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하도록 하셨습니다(고전1:21).

이것은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최선의 방법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선교 활동의 핵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 여러 세기동안 이 전도 방법을 통하여 당신의 택자들을 부르시고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일을 위하여 그가 세우신 모든 세계의 교회를 총동원시키시고 계십니다.

선교사역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냄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복음을 수용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Ⅰ. 보내는 자(파송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본문 15절에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선교(Mission)이란 말은 “파견” 혹은 “사명”을 뜻합니다.

이 말은 라틴어 “내가 보내다”(Mitto)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사도” 란 헬라어 “아포스텔로”라는 말도 “내가 보낸다”(I Sand)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선교사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셨습니다(요20:21). 예수님도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선교사인 동시에 오늘 세계선교 운동의 총재가 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최상의 선교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8~20절의 말씀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대 사명의 말씀”(Great commission)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에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예수님의 지고의 명령입니다.

이 사명의 말씀을 주시고, 우리를 선교의 현장으로 보내셨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고 사랑의 빚진 자된 성도는, 전도와 선교의 삶을 생의 우선순위로

설정하고 전도와 선교의 현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Ⅱ. 보냄을 받은 자 - 선교사(전도자)입니다.


본문 15절에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선교사역의 두 번째 요소는 “보냄을 받은 자” 또는 “전파자”입니다.


구원을 얻는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롬10:17).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였습니다(롬1017).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기고, 믿음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듣게 하기 위하여 전도자(선교사)를 보내십니다.

그래서 선교사(Missionary)란 이름이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선교사는 어떤 사람인가?

1.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본문 15절에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했습니다.

좋은 소식은 예수 구원 소식입니다(롬10:9).

예수 구원을 전파하는 말씀이 곧 복음입니다.

선교의 내용이 구원의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어떤 소식이 구원 받는다는 소식보다 더 좋은 소식이 있겠는가?

세상에 어떤 소식이 죽은 자가 산다는 소식보다 더 좋은 소식이 있겠는가?

세상에 어떤 소식이 천국 간다는 소식보다 더 좋은 소식이 있겠는가?

복된 소식,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선교사입니다.


2. 아름다운 발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말씀은 저들이 복음을 전하러 몸소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저들이 가야하는 것입니다.

저들의 발은 좋은 소식을 운반하는 기구입니다.


3. 살리는 입술을 가진 자들입니다.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롬10:8).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롬10:15), “우리의 전하는 바”(롬10:16) - 등은 모두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의 입을 말합니다.


4. 선교와 전도의 동기는 예수 그리스에 대한 순교적 충성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 했습니다.

로마서 14장 8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주의 전도 사역을 감당하는 사명자는 뚜렷한 생사관이 정립되어야합니다.


Ⅲ. 선교의 대상은 비기독교 세계입니다.


선교의 대상은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입니다(엡2:1). 죄인들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입니다. 경건치 않은 자들입니다(롬5:1~11).

이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모르는 자들입니다(엡2:12).

사망아래 있는 자들의 세계입니다(롬6:23).

저를 향해서 보내시고, 보내심을 받고,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결과 세상이

주의 이름을 부르도록 하는 것이 전도와 선교입니다(롬10:13~14).

오늘 교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전교인이 모두 전도와 선교의 부름 받은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가든지 보내든지 하라” - 모두가 전도자의 발이 되고 입이 되고 파송된 선교사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는 것입니다.


전천후 신앙인이 되자   욥기 2장 7~10절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마치 전기의 힘이나 기계의 힘같이 실제적인 능력과 에너지가 믿음입니다. 성경에는 “믿음으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다”고 했습니다(히11:29).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고 믿음으로 사자들의 입을 막았다”고 했습니다(히11:33).

“믿음으로 칠일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다”고 했습니다(히11:30). “믿음으로 사라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라고 했습니다(히11:11).

이처럼 믿음을 잘 활용하면 마치 태양이나 바닷물이 에너지원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나 기적을 우리 생활에 나타낼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관념의 세계가 아니고 실제적인 현상적 세계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나는 믿음이 없다” 혹은 “나는 믿음이 적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너희가 만일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17;20).

겨자씨는 눈에도 잘 보이지 않는 작은 씨앗입니다.

이렇게 작은 믿음도 산을 옮기는 큰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 믿음이 작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적은 믿음이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을 할 수 없는 것은 믿음의 유무가 아니라 믿음을 적절히

사용할 줄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 믿음을 잘 활용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창출하는 전천후 신앙인이 되는가?


Ⅰ. 잘되는 형통의 날에 하나님을 잘 섬기는 신앙인입니다.


모세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평생 동안 지킬 규례와 명령을 하셨습니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고 하셨습니다(신8:12~18).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기 어려울 때가 어느 때입니까?

전쟁이 나서 백성의 삶이 도탄에 빠져서 힘들 때 인가?

경제의 문제, 자녀의 문제, 건강의 문제로 어려운 때인가?


성경은 신앙의 위기를 환경에 두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도 했습니다(롬5:3~4).

찬송가 503장은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라고 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신앙이 변질되지 아니하고, 안전할 때, 평안할 때, 형통할 때

우리의 신앙이 나태해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전천후 신앙인의 귀감이 되는 욥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동방에서 가장 큰 자라”고 합니다(욥1:3).

양이 7천, 약대가 3천, 소가 5백 겨리, 암나귀가 5백, 아들이 일곱, 딸이 셋, 종들이 심히 많았다고 했습니다.

물질이 많은 것이 복일 수만 없지만, 욥의 물질은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또한 그는 자기의 자녀들이 연회를 베푼 후에는 행여나 부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았는가 해서 자녀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했다고 했습니다(욥1:5).


내 인생이 순풍에 돛단배처럼 형통할 때 하나님 잘 섬기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오늘 내 삶이 형통할 때 나의 콧노래가 나를 위한 찬가가 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한 찬양이 되길 바랍니다.


Ⅱ. 잘되지 않는 불통한 날에 하나님을 잘 섬기는 신앙인입니다.


참담한 지경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고 감사하는 믿음을 보여준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인생은 빵이 입에 들어가야 콧노래가 나오는 것은 어린 아이의 경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등불이 캄캄한 어둠을 밝히는데 필요하고, 지팡이가 험준한 산을 넘는데 필요한 것인데, 우리는 캄캄한 시련의 밤에 기도의 등불을 꺼버리고, 태산준령 앞에서 믿음의 지팡이를 버리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찬송가 455장)라고 입술로 다짐하고 열정을 내던 성도들이 질병의 밤에,

실패의 밤에, 환란의 밤에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볼 때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불퇴전의 신앙 용사가 있습니다. 바로 욥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에게 환난이 찾아옵니다.

수많은 우양과 노비들은 적군에 약탈당하기도 하고, 하늘에서 내리는 불덩이를 맞고 모두 죽었습니다.

십남매의 자녀들은 맏형의 집에서 연회를 즐기다가 지붕이 무너져 내려 모두 죽었습니다.


욥은 온 몸에는 악창이 나서 재에 꿇어앉아서 기왓장으로 몸을 긁고 있는 것입니다 평소 그를 따르던 친구들은 모두 그의 곁을 떠나고, 평생을 함께 살아온 아내도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불통의 날에 무엇이라고 욥은 고백했습니까?


“내가 모테에서 적신이 나왔사온 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욥1:21).


욥은 고난의 의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축복의 의미도 알고 있었습니다.

훗날 바울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롬14:7~9).


그렇습니다. 성도는 목적으로서의 예수, 수단으로서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고전10:31).

불통의 시간도, 형통의 시간도 주의 시간인 것입니다.


Ⅲ. 까닭이 없이도 하나님을 잘 섬기는 신앙인입니다.


사람이 전혀 사심이 없이 순수한 봉사와 희생을 하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랑의 이유에서보다 필요의 이유에서 서로 사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입시철이 되면 새벽 기도 시간에 성도가 많아집니다.

자녀들의 대학입시가 있기 때문입니다.

불황이 오면 기도하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사업의 문제, 직장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에 우환이 있고, 애정에 문제가 있으면 사람이 많아집니다.

질병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루심이 아니니이까?”라고 했습니다(욥1:10).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 욥이 잘 되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욥은 까닭이 없어도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욥의 신앙은 “불구하고”의 신앙이었습니다.

가난해도 불구하고, 병들었어도 불구하고, 자녀들이 모두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불구하고”의 신앙에 축복을 주십니다.


욥기 42장 12에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하시면서, 모든 소유를 배나 더하여 주시고, 아들 일곱, 딸 셋을 주셨는데,

그 딸들이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웠다고 했습니다.

욥은 140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4대를 보았다고 했습니다(욥42:16).


전천후 신앙인이 되어 전천후 복을 받으시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인생의 풍랑이 일어날 때   역대하 20장 1~4절



환난은 근심과 걱정과 재난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환난을 즐겨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환난은 어떤 형태로든 인생에게 찾아오곤 합니다.

환난은 나 자신의 과오로 인해, 혹은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인하여,

자연의 천재지변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환난은 우리에게 불가항력적으로 임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운명으로 치부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인은 이러한 환난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우선 환난은 인간의 삶에 필연적인 것입니다.

마치 예방주사를 맞아야 면역성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생명체란 얼마나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는가?

현대 의학은 이 생명체의 신비를 어느 정도 규명해내고 있지만, 아직도 생명은

신비한 베일에 쌓여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인간은 정신적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영혼은 어디 있는가?

만일 그 장소가 인간의 두뇌라면 두뇌의 어느 곳에서 이 영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러한 모든 사실은 인간 생명체의 고도의 정밀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 있는 생명체는 생노병사의 필연적 과정에 예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극히 복합적이며 필연적이며 또한 초자연적인 힘에 의하여 영향을 받고 있는 인간의 삶이 평탄함으로 일관되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욕심에 불과한 것입니다.

거기다가 인간은 평안하면 스스로 나태에 빠져 재난을 자초하는 속성까지 소유한 존재입니다.

환난이 이처럼 필연적인 것으로 이해된다면 인간에 있어서 환난을 피하기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면서 이것을 극복하느냐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내 인생에 불가항력적인 인생의 풍랑이 일어날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Ⅰ. 얼굴을 하나님께로 향해야합니다.


본문 3절에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낮을 향하여 간구했다.”고 했습니


여호사밧 왕 19년에 모압, 암몬, 마온 등 세나라 연합군이 유다를 침공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20장 12절에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구로하는 여인에게 해산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의인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방주는 3층으로 지었는데, 창문은 오직 천정에 하나만 내게 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 세상이 멸망하는 날에, 좌우를 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불 심판으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 받을 때, 롯의 처는 뒤를 돌아 본고로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방주의 창이 옆으로 낫다면 세상이 멸망당하는 그 때에 노아는 겁에 질려 죽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방주 천정에 창문을 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물위를 걸었던 베드로처럼, 내 인생에 풍랑이 일 때엔 하나님만 바라 봐야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했습니다(시121:1~2).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고, 잠재우지 못할 풍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Ⅱ. 자신을 돌아보고 죄를 씻어야합니다.


오늘 감당할 수 없는 노도 풍랑이 왜 여호사밧 왕에게 임했는가?


역대하 19장 2절에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약대하 18장 28절 이하에 북 이스라엘을 침공한 아람 왕을

여호사밧 왕이 아합 왕과 손잡고 아합 왕을 도와서 싸운 사건입니다.

아마도 아합 왕이 여호사밧에게 외적이 침입했으니, 동족이 손잡고 물리치자고

회유했을 것입니다.

물론 이방인들이 동족을 치러왔다면 당연히 동족을 도와서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동족이 어떤 사람인가? 가 문제입니다.


아합 왕은 역대 이스라엘 왕 중에 가장 하나님을 미워한 왕입니다.

더구나 그의 부인 이세벨은 하나님을 배척하고 이방신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예후의 예언처럼, 그 죄로 인하여 여호사밧에게 감당 못할 풍랑이 덮친 것입니다.

물론 모든 풍랑이 죄로 인하여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죄의 결과, 질병과 전쟁, 기근 등이 임한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갈 때, 풍랑이 일어서 요나가 바다에 던지움을 받았습니다(욘1:15).

마태복음 9장의 중풍 병자를 보시고는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의 병은 죄의 결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인생에 풍랑이 일 때, 우리는 이 풍랑이 어떤 연유에서 오는가?

자신을 돌아 보아야합니다. 이것이 역경과, 환난을 극복하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역대하 7장 14절의 말씀에서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그 땅과 그 백성을 회복시키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Ⅲ. 풍랑이 일 때 하나님께 기도해야합니다.


모든 인생의 풍랑은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신호입니다.

그래서 시편 50편 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풍랑이 몰아치는 환난의 날에! 내 인생에 노도 광풍이 몰아치는 날에 - 그리하여 내 소망이 풍전등화와 같이 깜박일 때 - 소망의 빛이 보이지 않고, 여기가 내 인생의 마지막이구나 - 할 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믿는 성도에게 주신 특권은 바로 이러할 때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 힘만 의지할 땐 패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면 승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방황하십니까?” -

기도는 하늘문을 여는 마스터키입니다.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여호사밧 왕도 이러할 때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했습니다.

본문 15절에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 지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 본문 20절에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 “할렐루야!”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가는 축복이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불황을 극복하는 신앙   민수기 11장 10~32절



인류 역사상 오늘처럼 풍족한 시대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대량생산 대량소비시대”라고 부르고 있는가?

예전에는 절약이 미덕이었는데, 이제는 소비가 미덕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내수부진”이란 말이 무엇인가? 쓰지 않아서 걱정이라는 말입니다.

소비자가 쓰지 않으니, 생산자가 생산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 인간의 삶은 한점공백도 없이 충만히 채워진 것처럼 보입니다.

이 땅에서 50년, 60년대의 배고픈 시절의 이야기는 아득한 옛날이야기가 돼버렸습니다.

백화점에 가도, 시장에 가도, 구멍가게에 가도 지난날의 가난의 흔적은 찾을 수 없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불황을 모르는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대 공황을 만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핍절하게 하고 있는가?


“홍수 때 마실 물이 없다” - 고 다 차고 넘치는데, 다 풍성한데, 왜 우리는 불황에 허덕이고 있는가?

내 인생에 불황이 찾아올 때, 우리는 어떻게 이 불황을 극복할 것인가?


Ⅰ. 창조주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B.C 1446년 1월 14일, 400년 동안 애굽의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백성들이 영광의 탈출을 했습니다.

출애굽기 12장 27절은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60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유아와 여자, 노인,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는 이방잡족까지 합치면 족히 300만이 넘는 한 민족이 애굽을 떠난 것입니다.

그들이 애굽을 떠날 때, 발효되지 않은 떡 반죽 그릇을 메고 서둘러 애굽을 떠났습니다.

출애굽 후 한달이 되어 신광야에 다다랐을 때 식량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민족이 경제적 불황을 만난 것입니다.

배고픈 백성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불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을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죽게 하는 도다”라고 했습니다(출16:3).

그렇습니다.

웃음도 기쁨도 즐거움도 최소한의 경제문제가 해결된 후의 이야기입니다.

절대빈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인간의 행복도 없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침마다 이스라엘의 진 곁에 작고,

둥글고 서리같이 세미한 것을 내려주셨습니다(출16:14).

“이것이 무엇이냐?” “만후” “wat is that?" 이것이 하늘양식 만나였습니다.

아침마다 내리는 만나는, 농사를 짓지 않고, 광야를 통과하는 나그네들의 길양식이었습니다.


출애굽한지 1년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베라”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또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민11:5~6)


먹는 것이 인간의 일차적 욕구라면, 먹고 즐기는 것은 인간의 2차적 욕구입니다. “백성의 온 가족들이 각기 장막에서 우는 소리를 모세가 들었다”고 했습니다(민11:10).

사막 한가운데서, 어디서 생선을 구하겠는가?

어디서 심지 않은 수박과 외와 참외를 구하겠는가? 모세가 기도했습니다.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가로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먹게 하라 하온즉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질수 없나이다”(민11:11~14).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만난 경제적 불황을 해결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대책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먹게 하실 것이라

- 코에서 넘쳐서 싫어하기까지 일개월간을 먹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민11:20).


모세가 가로되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60만명 이온데, 주의 말씀이 일개월간 고기를 주어먹게 하시겠다 하시오니, 그들을 위해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까”(민11:22)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 않는 것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종, 모세가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여호와의 손이 짧아 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게 되리라”(민11:23)고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전 이편, 저편 곧 진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약80㎞)되는 지면 위 두 규빗(약90㎝) 쯤에 내리게 하신지라”고 했습니다(민11:31)


불황이 닥쳐오면,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놋뱀을 바라보고 산 것처럼, 건강의 불뱀,

애정의 불뱀, 불황의 불뱀에 물린 사람은 놋뱀을 바라 봐야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해결의 열쇠가 됩니다.


Ⅱ. 긍정적 신앙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은 불황을 극복하는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탄식하고 원망하면 불행의 늪으로 점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을 정탐했던 정탐꾼들이, 부정적 보고를 함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는 우리가 다 죽게 되었다”고 울면서 소동을 피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입술의 시인대로 광야 40년 동안에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을 떠났고, 우리의 보호자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신다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고 했습니다(민14:9).

그들의 입술의 시인대로, 갈렙과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1930년대 세계 경제공황 때, 미국도 극심한 불황을 겪었습니다.

사실 미국은 경제공황을 겪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불황이다. 불황이다”

“큰일 났다. 큰일 났다.”하니까 사람들이 은행에서 모두 돈을 빼가므로,

은행이 문을 닫고, 은행이 문을 닫으니, 공장이 문을 닫고, 공장이 문을 닫으니

회사가 문을 닫는 것입니다.


이 때 루즈벨트 대통령은 라디오프로그램 “로변담화”에 출연하여 “루즈벨트 정부는 이 불황을 극복하고, 능히 이길 수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국민들의 신뢰감이 되살아나자, 은행에 돈이 몰리고, 은행이 문을 열고,

공장이 문을 열어서 불황을 극복했습니다.


불황이 닥쳐올 때, 성도는 모든 것에 능하고, 모든 것에 가한 하나님을 바라봐야합니다.

성경은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13:6)고 했습니다.


Ⅲ.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불황을 극복하는 길입니다.


이스라엘에 가장 큰 경제 불황이 온 것은 우상을 열심히 섬기던 아합왕 때입니다. 3년 6개월 동안 우로(비와 이슬)가 내리지 아니했습니다.


이 불황을 잘 극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가장 가난했던 사렙다 과부였습니다.

사렙다 과부는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과 함께 먹고 죽으려했던 떡 한 덩이를 선지자 엘리야의 말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종에게 바치고, 가뭄이 끝나는 날까지 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그 시대에 기름에 구운 떡을 배불리 먹은 사람은 사렙다 과부의 가족과

엘리야뿐이었을 것입니다. 불황 때 순종의 삶을 살아 축복을 체험합시다.


하나님은 이 불황의 때에 우리에게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여러분의 창고에 무엇이 비어 있습니까?

물질입니까? 건강입니까? 사랑입니까? 지혜입니까?

순종의 삶으로 빈 창고를 채우시는 복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승리의 비결   사무엘상 17장 31~49절



중국의 위요자가 말하기를 “무릇 전투에 있어서는 도로서 승리하는 자가 있고,

위로서 승리하는 자가 있고, 힘으로 승리하는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싸움에 만전을 기하고 적군의 강약허실을 잘 헤아려서 적군으로 하여금 싸움의 시기를 잃게 하고 적군의 힘을 쓰지 못하게 하여 이기는 것을 도에 의한 승리하고 했습니다.

아군의 군기를 확립하고, 상벌을 분명히 하며, 성능이 좋은 무기를 개발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위력에 의한 승리라고 했습니다.

또 적군을 격파하고, 적장을 살해하며, 적의 성문에 올라가 깃발을 꽂고 적을

무찔러 땅을 뺏고 전공을 세워 승리하는 것을 힘에 의한 승리하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했습니다(요일 5:4).

성경은 전쟁에서의 승리는, 도도 아니요, 위도 아니요, 힘도 아니고 전쟁의 승리의 원동력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초대임금인 사울 왕 때에 블레셋은 골리앗이란 거인 장수를 앞세우고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그의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296㎝), 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고, 목에는 어린갑을 입었는데 갑옷의 중수가 놋 5천 세겔(57㎏), 다리에는 놋 경갑을 차고, 어깨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으니 그 창자루는 베틀채 같고, 창날은 철 600세겔(680g)이며 방패든 자를 앞세웠더라”고 했습니다(삼상17:4~7).

이 거인 장수가 40일 동안 아침, 저녁 이스라엘 진 앞에 나타나서 욕하고 야유를 하나, 이스라엘 군사 중에 누구하나 그와 겨루기 위하여 나타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문 47절에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 물맷돌을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려지니라”고 했습니다.

완벽한 다윗의 일방적 승리를 짧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감당할 수 없고, 극복할 수 없는

골리앗 같은 대적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만나고 있는 경제적 불황도, 질병과 실패도 골리앗 같은 대적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만났던 유라굴로 같은 폭풍도, 요나가 만난 풍랑도 우리들의 대적일 수가 있습니다.

이것들을 물리칠 비결은 무엇인가?

다윗의 승리의 원인들을 살펴보면서 은혜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싸웠기 때문에 승리했습니다.


본문 45절에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싸우러 나간 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싸운 것이 아닙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싸운 것도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군대가 이방인에 의하여 모욕 받는데 공분을 느끼고 싸우러 나간 것입니다.


인간의 인간된 본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롬14:8).

고린도 전서 10장 31절엔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삶이란 무엇인가? 삶의 목표와 목적이 달라진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 세상에 있을 때의 삶은, 육신을 위한 삶이요,

정욕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육신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그것들을 추구하는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우상숭배니라”고 했습니다(골3:5).

그래서 바울은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롬13:12).


세상을 위한 삶을 살면 세상과 더불어 망하고, 정욕을 위하여 살면, 육신과 더불어 망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를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과 동기에서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할 때, 그 일은 실패를 하는 것 같아도, 성공하는 것이요,

망하는 것 같아도, 흥하는 것입니다.


Ⅱ. 평상시에 준비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승리했습니다.


본문 14절에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때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습니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중 하나 같이 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훈련 받은 군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비의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평상시의 삶은 어떠한 상황에도 대응할 수 있는 준비와 훈련을 쌓는 삶을 살았습니다.


① 그는 평상시에 사명에 충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곰이나, 사자가 양 새끼를 움키러 나타나면 도망하지 않고,

생명을 걸고 달려들어 그들과 싸우므로 목동의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② 그는 평상시에 강한 적과 싸울 수 있는 실력을 배양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나운 짐승들이 양을 덮치면 달려들어 그들의 수염을 움켜쥐고,

입을 벌리고, 사나운 짐승의 입에서 양 새끼를 구해내는 완력을 배양했습니다.


③ 다윗은 평상시에 싸워서 이기는 승리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을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사나운들, 사자처럼 사납겠는가 인간이 힘이 있은들 곰처럼 힘이 있겠는가? 맨손으로 사자와 곰도 잡았는데, 조금 크다고 사람을 이기지 못하겠는가?

다윗의 승리에 대한 자신감은 하나님의 능력과 합하여 위대한 승리를 성취했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일에 승리한 자에게, 큰 승리를 주십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준비된 사람을 들어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시길 바랍니다.

Ⅲ.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 37절에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가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능력이나 힘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를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주신 것을 믿었습니다.


누가 강할 수 있는가? 누가 승리자가 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이 강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신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쟁은 사람이 합니다. 전쟁은 무기를 가지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많고, 적음이, 승리의 조건이 아닙니다.

명마와 명검이 승리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무리로 알게하리라”(삼상17:47).고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지식이 필요합니다.

실력도 필요합니다. 간판도 필요하고, 물질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인생을 승리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함께 하는가? 누구와 함께하는 가?

오직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사람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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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을 상기하자   창세기 35장 1~8절



성경은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라고 했습니다(신32:7).


인간은 역사적 동물입니다. 인간이 한 세상을 살다간 흔적이 역사입니다.

개인이 한 세상을 살았든지, 민족이 한 세상을 살았든지, 인간은 역사위에 한 발자욱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6월은 우리들에게 아프고 잔인한 달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약이라고 50여년의 세월은 그토록 아프고 쓰라린 6.25 전쟁의 기억들을 차츰 차츰 희미하게 퇴색시켜가고 있습니다.

시대적 상황이 변하여 침략자 중공 오랑캐도 없어지고, 불우대천지원수 소련도

없어지고, 이 민족의 영혼까지 수탈해가던 왜구도 없어졌습니다.


이제 그들이 우리의 우방이요, 우리의 이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않 될 일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T.V를 통해서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이산가족들의 아픔이 있습니다.

징용이다. 정신대다. 슬픈 역사의 상처들이 아직도 상존하고 있습니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오늘 우리는 잊혀져가는 역사 속에서 역대의 연대를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 지난날을 잊어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야곱입니다.


형에서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빼앗고, 아버지 이삭의 축복기도도 속여 취한 야곱이, 에서의 눈을 피하여 하란으로 도망했습니다.

지팡이 하나 들고, 얍복강을 건넌 야곱은 20년 만에 수많은 노비와 양떼와 소떼와 네명의 아내와 열두 아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와 세겜에 안주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에게 일대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딸 디나의 강간사건과 르우벤과 시므온의 살인 사건은 야곱을 더 이상 그 땅에

머무를 수 없게 했습니다.

야곱과 그 일가족의 생명이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로울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에서의 낮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고 했습니다(창35:1).

이 하나님의 음성은 지난날을 잊어버린 야곱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야곱에게 닥친 위기의 의미와 이 위기를 극복할 길은 무엇인가?


Ⅰ. 지난날의 자신의 죄를 돌아 보아야합니다.


본문 2절에 “너희 중에 이방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고 했습니다. 야곱에게 닥친 삶의 위기들은 야곱의 죄악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20년 전 에서의 눈을 피하여 도망하던 야곱은 벧엘 광야에서 돌베개를 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 밤에 그는 하늘에 닿은 사다리위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희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창28:13~15).


야곱이 잠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나님의 문이로다”

하고 베개 했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하나님께 서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지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창28:18~22).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가 어느 곳에 가든지 그의 길을 평탄하고, 형통케 하셨습니다.

빈손 들고 하란에 간 야곱에게 네 아내와 열두 아들을 주셨습니다.

수많은 노비와 소떼와 양떼를 소유한 부자가 되게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어떠했는가?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도 잊었습니다.

20년 동안 맨손의 야곱이 거부가 되도록 하나님 앞에 약속한 제단도 쌓지 않고,

반드시 드리겠다던 십일조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잊어버린 야곱에게 어떠한 일들이 생겼는가?


삶의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처남과 라반의 질시! 에서와의 만남! 디나의 강간사건과 르우벤과 시므온의 살인사건 하나님께서는 환경을 통하여 야곱의 삶을 몰아가고 계셨습니다.


우리에게 닥쳤던 6.25사변도, 이 민족의 죄와 무관하지 않은 것입니다.

대대로 섬겨온 우상숭배! 일본시대에 자행된 신사참배, 궁성요배, 천황숭배,

성물공출, 해방 후 공산주의에 의한 교회탄압! 하나님을 잊어버린 개인이나,

국가나, 교회는 하나님의 징계와 간섭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Ⅱ. 극심했던 고난의 때를 기억해야합니다.


본문 3절에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고 했습니다.


환난의 때는 어느 때인가? 죽음이 두려워서 집을 나와 도망하던 때입니다.

20년 동안에 열 번이나 노임을 변개하던 인간적 고통이 있던 때입니다.

삶의 굽이굽이에서 만났던 위기와 절망스러운 환경이 있었습니다.

지상의 낙원이라는 덴마크 사람들은, 추수감사절이 돌아오면 맛없는 검은 호밀 빵과 맹물을 마시면서, 개척시대의 조상들의 고난과 오늘의 풍요로운 축복에 감사한다고 합니다.


Ⅲ. 하나님을 만나던 때를 기억해야합니다.


본문 1절에 “네가 네 형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고 했습니다.

위기와 고난에 직면했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구원 받던 때를 기억해야합니다.

실로 사렙다 과부처럼 “이제 이 떡 한 덩이를 구워서 먹고 자식과 더불어 죽으리라” “여기가 내 인생의 끝이로구나” 할 때 나를 지키고 도와주시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소는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부패한 자식이로다”라고 개탄하셨습니다(사1:3~4).

호세아 6장 4절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때의 감격을 길이 간직하고, 그 때를 상기해야합니다.


Ⅳ. 하나님의 축복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왜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야하는가?

야곱이 지금 번창하고 잘살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임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벧엘로 가라”고하십니다.


성군 다윗은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는 말씀을 듣고는(삼하7:8~9) 엎드려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평안하과 부요할 때에, 가정이 평안하고 자녀들이 잘 자라줄 때,

사업이잘 되고, 내 인생이 순풍에 돛단배처럼 형통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생각해야합니다.

신명기 8장 12~14절엔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고 했습니다.


풍요롭고, 평화로운 오늘! 역대의 연대를 생각합시다.

“아! 아! 잊으랴 어찌우리 이 날을 ....”

50여년전의 그 아픔을 상기하면서,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에 감사하는 성도가 됩시다.













축복의 그릇을 넓히자   역대상 4장 9~10절



사람의 마음이 좁아지면 바늘귀보다도 더 좁아질 수 있고, 넓어지면 우주를 담을 수 있을 만큼 넓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은, 다스림에 따라서 커질 수도 있고, 작아 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와 축복을 주실 때에도, 그릇의 크기에 따라서 채워주십니다.


열왕기하 4장의 선지생도의 아내는 엘리사를 찾아가서 하소연을 했습니다.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을 당신이 아시나이다. 이제 채주가 이르러 나의 두 아들을 취하여 그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엘리사가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 “계집종의 집에는 한 병 기름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라 빈 그릇을 빌되 조금 빌지 말고, - 너는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놓으라, 여인이 물러가서 그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저희는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오고, 그는 부었더니 그릇에 다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들이 가로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하니 기름이 그쳤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그릇을 사용하시고, 준비된 그릇만큼 축복하십니다.


작은 그릇을 준비한 사람에게는 작은 축복을, 큰 그릇을 준비한 사람에게는

큰 축복을 주십니다.

많은 그릇을 준비한 사람에게는 많은 축복을, 적은 그릇을 준비한 사람에게는 적은 축복을 주십니다.

야베스는 하나님께 아뢰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했습니다.

응답하시는 하나님 ! 구하는 자의 소원을 들어 허락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비결은 무엇인가?


Ⅰ. 소원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성경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빌2:13).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뜻을 행하실 때에, 먼저 우리 속에 뜨거운 소원을 주셔서 그 뜻을 성취시키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원이 정욕을 위한 소원이 아니라면 가능한 한 큰 소원을 가져야합니다.


시편 81편 10절은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소원의 그릇은 커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조카 롯을 소돔으로 떠나보낸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창13:14~17).

“꿈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이 약속을 든든히 붙잡고 승리하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Ⅱ. 마음의 폭을 넓혀야합니다.


사무엘 하 3장 10절에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고 했습니다.


왜 다윗의 집은 강하여지고, 사울의 집은 약하여 갔는가?

사울의 좁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고 개선했을 때, 여인들은 춤을 추며 창화하여 가로되 “다윗의 죽인 자는 만만이요,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라”고 했습니다.

이 때부터 사울의 마음이 좁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만만이요, 나는 천천이라면, 장차 다윗이 얻을 것은 나라가 아닌가?


“다윗이 장차 내 왕위까지 빼앗겠구나” - 이러한 악한 마음이 그에게 들어가니

그는 다윗을 죽이려는 마음을 먹고, 다윗을 추적하던 중,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그 아들 요나단과 함께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넓은 마음으로, 자신의 생명을 죽이려는 사울을 포용했습니다.

몇 번이나, 사울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사울을 살려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축복의 그릇을 넓히려면 이 시기와 질투심을 극복하고 버려야합니다.

시기와 분노는 마귀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욥기 5장 2절의 말씀에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마음을 넓혀야 축복 받을 그릇도 커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좁아지면 축복 받을 그릇도 좁아지는 것입니다.


Ⅲ. 하나님께 드리는 폭이 넓어져야 합니다.


“주라 그러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너희에게 안겨주리라”고했습니다(눅6:38).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받는 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한홉 두홉 드리면 한홉 두홉 받고, 한되 두되 드리면 한되 두되 받고, 한말 두말 드림변 한말 두말 받는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 했습니다(고후9:6).

후하게 심으면 후하게 받고, 인색하게 심으면 하나님의 축복도 인색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귀한 이삭을 드렸더니 물질의 축복을 받아 동방의 거부가 되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께서 그의 혈통을 통하여 이 땅에 오시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심는 것의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입니다.

심는 지경을 넓히고, 거두는 지경도 넓어지는 축복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Ⅳ. 기도의 폭을 넓혀야합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역사는 기차와 같다면, 성도의 기도는 기차 길과

같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기차가 힘이 있어도 철길 밖에서 달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성도의 기도 길을 따라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마18:18~20)

풀거나 매는 것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고, 땅에 있는 성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늘에서 매이게 하고, 또 땅에서 풀리게도 합니다.

그렇다면 기도야말로 하늘문을 여닫는 열쇠가 아닌가?

기도의 폭을 넓고, 깊고, 크게 하는 것이 축복의 그릇을 크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  시편 51편 17~19절



신명기 16장 9~12절의 말씀에 “칠 주를 계속할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칠 주를 계수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맥추절의 의미는 첫째는 처음 보리추수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고, 다음은 애굽의 종 된 삶에서 구원 받은데 대한 감사의 제사였습니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춘궁기의 보리 추수는 실로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서의

만나와 같은 것이었고, 절망적 시대에 나타나신 그리스도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30~40년 전만해도 “꽁보리밥” “보릿고개”라는 말이 우리에게 익숙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급속히 찾아온 산업화의 물결과 농업환경의 변화로 보리의 경작이 줄어들게 되고 맥추절의 의미도 차츰차츰 퇴색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의 역사적 의미를 오늘에 되새기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과거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도 유월절이 되면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는 것은 출애굽의 쓰라렸던 과거의 역사를 되새기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오늘의 축복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맥추절을 지키면서 가난했던 지난 날, 하나님께서 보리농사를 통하여 이 민족을 기아선상에서 구원해주시고, 오늘 이렇게 풍요로운 삶을 주심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창4:4~5)


하나님께서는 어떤 제사를 기뻐하시고, 어떤 제사를 열납하시는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받으시는 제사를 드리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Ⅰ. 회개의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본문 17절에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 왕이 나라가 부강해지고, 왕권이 굳게 서니 마음에 교만이 싹텄습니다.

그래서 군대장관 요압에게 명하여 전국에 있는 모든 장정을 계수하라고 했습니다(삼하24:1). 이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아니하셔서 다윗을 치시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갓을 보내셔서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마음대로 택하라 혹 3년 기근일지, 혹 네가 석 달을 대적에게 패하여 대적의 칼에 쫓길 일일지, 혹 여호와의 칼 곧 온역이 사흘 동안 이 땅에 유행하며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온 지경을 멸할 일일지 하셨나니 - 내가 무슨 말로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할 것을 결정하소서”라고 했습니다(대상21:12).

그때 다윗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시니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후 3일 동안 이스라엘 전역에 온역이 임하여 7만 명이 죽어 갔습니다.


이때 다윗이 깊이 깨닫고 장로들과 더불어 굵은 베옷을 입고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여호와를 위한 단을 쌓고 땅에 엎드려 회개했습니다.

“명하여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범죄하고 악을 행한자는 내니이다 이 양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집을 치소서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재앙이 그쳤습니다.

성경은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사57:15).

하나님께서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치 아니하십니다.


Ⅱ. 믿음의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드린 아벨의 제사를 기뻐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5:24).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가 되시고, 그의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나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다는 이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예배할 때 그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그 믿음의 그릇에 응답의 은혜가 있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늘 기억해야할 것은, 말씀도 믿음으로 듣고, 찬송도 믿음으로 부르고, 기도도 믿음으로 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히11: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맥추절을 지킬 것을 명하실 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신16:10).

그리고 신명기 16장 15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덴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복 주신 줄 믿고, 또 복 주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Ⅲ. 희생의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본문 19절에 “그때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라는 말이 희생이라는 말입니다.

올바른 제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희생의 제사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을 받고 100세에 얻은 아들이삭을 드린 곳이 모리아산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얼마나 기뻐하셨으면 그 장소에 예루살렘 성전을 짓게 하셨겠습니까?

아브라함이 그 제단에 제일 귀중한 것, 제일 아까운 것을 희생하여 제물로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축복의 조상,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열왕기상 17장의 사렙다 과부는 그녀와 그의 자식이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귀한 떡을 엘리야에게 공궤함으로 통에 가루와 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는 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두렙돈의 헌금을 보시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했습니다(막12:43~44).

올바른 제사, 응답받는 제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는 희생이 따라야합니다 시간도 희생하고, 물질도 희생하고, 세상의 즐거움과 세상의 향락도 희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막10:29~30).

귀한 것 희생하고, 귀한 것 받으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아모스 4장 12~13절



인간은 만남과 헤어짐의 관계 속에서 삶을 영위해 가고 있습니다.

어떤 만남은 소망과 기쁨 가운데 만나는 복스러운 만남이 있는가 하면,

어떤 만남은 만나면 안 될 사람이 만나고, 만나면 안 될 환경을 만나는 악연의

만남도 있습니다.

또 어떤 만남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선택할 수 있는 만남도 있고,

또 어떤 만남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기다리는 만남이 있습니다. 죽음 후에 찾아오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그것입니다.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히9:27).


인생은 누구나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 서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선악간에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죽음과 심판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사역하던 B.C. 793~753년,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 때의

사마리아는 태평성대의 시대였습니다.

북이스라엘에서는 드물게 여로보암 2세가 4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수리아와의 일전에서 승리함으로,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벧엘과 길갈에 황금송아지와 바알의 우상 신상을 세우고, 레위인이

아닌 보통 사람으로 제사장을 세우고, 8월 15일을 절일로 정하고 임의로 하나님께 제사했습니다.


종교가 타락하면 도덕이 타락합니다.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는데 몰두하고, 높은 산, 푸른 나무숲은 음란과 쾌락의 유희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라”고 통탄하셨습니다(호2:8).


이스라엘 온 천지가 풍성한 물질이 썩는 것과 함께 윤리와 도덕과 신앙이 썩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선지자를 통하여 “네 하나님 마나기를 예비하라”고 이스라엘의 심판을 예고하셨습니다.

Ⅰ. 왜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해야 하는가?


1. 개인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인류는 끊임없이 생명의 한계에 도전해왔고,

어떤 부분은 얼마만큼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지만, 아직까지 극복하지 못하고,

영원히 극복하지 못할 불가능의 벽이 곧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범한 아담에게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했습니다(창3:19).

바울은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롬5:12).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했습니다(벧후3:10).


성경은 여러 곳에 개인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을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12장 14절엔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자는 죽음 후에 하나님 만날 일을 준비해야합니다.


2. 우리의 죄 때문에 준비해야 합니다.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롬3:10).

아담의 타락 이래 온 인류가 범죄 했으니 하나님 앞에 의로운 인생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고 했습니다(요3:16).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요3:17).

성경은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라고 했습니다(엡1:7).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요일1:7). 베드로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벧전1:19).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그분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3. 우리는 잃어버린 상태에 있기 때문에 준비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인자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고 왔노라”고 하셨습니다(눅19:10).

“잃어 버렸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고, 하나님과 분리된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건강을 잃어버렸다고 가장 큰 손실이 아닙니다.

사람이 물질을 잃어버렸다고 가장 큰 손실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손실은 사람이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하셨습니다(요14“2).

그러나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를 예비하지 못한 사람은 그 곳에 갈수 없습니다.


Ⅱ. 어떻게 예비할 것인가?


1.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율법사가 시험하여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마22:37~39).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요, 둘째는 이웃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늘 관심을 가지시는 이웃은, 작은 자! 곧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였습니다.


2. 참된 신앙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본문 4절에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벧엘과 길갈은 어떤 곳인가? 이스라엘의 종교와 신앙의 중심지입니다.

그곳에 우상을 세우고, 여호와 하나님과 이방신을 겸하여 섬기는 종교혼합주의 죄

악에서 돌이켜야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보다 더 앞세우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유형무형의 우상을 제하여 버리고, 하나님 제일주의 순수 신앙을 회복하는 것입니


3. 회개하고 돌아서야합니다.

본문에는 “그런데 너희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씀이 6절, 7절, 9절, 10절, 11절에 계속하여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범한 이스라엘을 가진 방법을 동원하여 부르셨지만 그들은 돌아올 줄 몰랐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벧전4:7)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했습니다(고후6:2).

오늘, 지금 바로 이시간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잠시 후에 그 문은 닫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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