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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8월 6일) 의미와 유래
주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하느님의 아들’ 선언하고 드러내
교회는 8월 6일에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낸다. 높은 산으로 올라가신 주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보는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고 엘리야와 모세와 이야기를 나눈 사건(마태 17,1-9; 마르 9,2-10; 루카 9,28-36)을 기념하는 날이다. 주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에게 구세주로서 자신의 신원을 명확하게 보여줌으로써 당신께 대한 제자들의 믿음과 확신을 더욱 확고하게 하셨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맞아 이 축일의 의미와 유래를 소개한다. 내용은 「가톨릭교회 교리서」와 「주석 성경」,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나자렛 예수」 등을 참고했다.
베드로의 고백과 초막절
마태오와 마르코, 루카 복음서에 따르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이 있기 전 베드로 사도가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서 주님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마르 8,30; 루카 9,20)라고 고백합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다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엿새 뒤 주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오르셔서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십니다. 이 세 제자는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시기 전 올리브 산에서 번민 중에 기도하실 때 다시 한 번 주님과 동행합니다. 이런 이유로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예시하는 두 이정표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특별히 가까이 모실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에서 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공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나자렛은 산동네입니다. 주님께서 세례 후 유혹을 당하고, 참행복을 선언하며, 거룩한 신성을 드러내 보이시고, 밤새워 기도하며, 십자가에 매달렸던 곳 모두 산이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주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신 장소는 ‘타보르 산’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일련의 두 사건은 언제 일어났을까요. 학자들은 유다인의 두 축제에 주목합니다. ‘속죄일’(욤 키푸르)과 그다음 엿새 뒤에 한 주간 동안 계속되는 ‘초막절’(수콧) 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속죄일에 있었다고 합니다. 일 년에 단 한 번 속죄일 때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서 대사제가 “야훼” 하느님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한 베드로의 고백은 이 속죄일을 배경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합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속죄일 엿새 뒤 거행하는 초막절과 관련돼 있습니다. 초막절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시고 40년 광야 생활 동안 지켜주신 은혜를 기념하며 장차 오실 주님을 마중하는 희망의 축제입니다. 이 축제 동안 주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고 거룩하게 변모하신 것은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완성하고 모든 피조물이 서로 화해할 것임을 보여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풀이할 수 있겠습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이제 복음서가 전하는 주님의 변모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살펴봅시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기도 중에 일어납니다. 아버지 하느님과 말씀을 나누는 동안 일어난 일이 세 제자의 눈에 보이게 나타난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이 우리에게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것은 바로 기도의 중요성입니다. 주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당신의 구원사업을 이끌어 나갔습니다. 특별히 어떤 중대한 일을 행하기 전이나 어떤 위기에 처했을 때 주님은 반드시 아버지와 대화하는 시간을 따로 가졌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2)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 9,29; 마르 9,3 참조) 세 복음서가 전하는 거룩하게 변하신 모습입니다. 빛은 주님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나온 빛입니다. 주님은 빛에서 온 빛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빛에서 온 빛이신 것은 아버지 하느님과 같은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변모 때 하얗게 빛나는 주님의 옷은 우리의 미래를 예시해 줍니다. 흰옷은 하늘에 있는 존재, 곧 천사들과 하느님께 선택받은 이들이 입는 옷입니다.(묵시 7,9.13 참조) 그래서 세례성사 때 영세자는 흰옷을 입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주님과 함께 빛을 옷 삼아 입게 되었고, 우리 스스로 빛이 된 것입니다. 흰옷을 입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으며 또 바뀌어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은 창조된 우리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 일이자, 지금 여기서 이미 시작된 우리의 현실이며, 부활 때 충만하게 누릴 구원 은총을 미리 맛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주님의 부활과 세상 마지막 날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그리스도인의 영광을 미리 보여줍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
주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실 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라는 소리가 났습니다. 구름은 하느님 현존의 표징입니다. 구름 속에서 난 소리는 주님의 세례 장면을 떠올립니다. 그때도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구약에서는 천사,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의 왕들을 지칭해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는 말이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주님의 세례(마태 3,17) 때와 거룩한 변모 (마태 17,5) 때에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소리가 들려왔고, 니코데모와의 대화 중에 예수께서 자신을 “하느님의 외아들”(요한 3,16)이라고 하시면서 당신의 신성을 선언하시고 믿음을 요구하십니다.(요한 3,18) 또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고서 백인대장이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마르 15,39) 했고,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신성을 증거하는 말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씁니다. “거룩한 신성으로 말하자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신 분입니다.”(로마 1,4)
이처럼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도래한 하느님 나라의 권능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 두 구약의 증인들과 말씀을 나누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고난의 길이 영광에 이르는 길임을 알려주십니다.(루카 24,26-27 참조) 세 제자는 이 장면을 목격하면서 주님을 통해 진정한 초막절, 곧 메시아 시대가 왔음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순 제2주일 복음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에 관한 내용인 것도 이러한 이유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이야기는 세 제자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루카 9,36)는 설명으로 끝이 납니다. 제자들의 침묵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 내리신 함구령을 그대로 지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함구령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 풀립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곧 메시아로 선포하기 시작한 것은 성령 강림 이후부터라고 합니다.(사도행전 2장 참조)
왜 8월 6일인가
교회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 14일) 40일 전날에 지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서방 교회에서는 9세기 중반 나폴리와 독일, 스페인 지역을 중심으로 이 축일을 처음 기념했고, 10세기부터 로마와 프랑스 등지로 급속히 퍼져 나갔습니다. 이후 1457년 갈리스도 3세 교황이 전례력에 도입해 보편 교회가 이 축일을 지내게 됐습니다.
[전례] 성모 승천 대축일(8월 15일)
성모님은 하느님을 상대로 피조물 중 가장 탁월한 형태로 가까움을 누리는 은총을 입은 분이시다. 하느님을 상대로 한 이러한 탁월한 가까움을 표현하는 신학적 연장선상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 바로 성모 승천(Assumptio Mariae) 교리이다(1950년 비오 12세의 회칙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 성모님 지상 생애가 무염시태(Conceptio Immaculata)로 시작된다면, 그 마지막이 승천으로 마무리되며, 처녀수태(Parthenogenesis)가 신학적 중심을 이룬다. 이렇듯 하느님을 상대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누리는 특별한 가까움이 마리아에게서 ‘모자관계(천주의 모친)’ 내지는 ‘부녀관계(하느님의 충실한 딸)’로 표현된다. 성모님은 하느님을 상대로 어머니이시며 동시에 딸이시다. 이 신비가 성모님 지상 생애 마지막에 승천으로 드러난다.
정교회 전승에 따르면, 성모 승천은 우선적으로 ‘트란지투스 마리애’(Transitus Marae: The passing of Mary)나 ‘코이메시스 테오토쿠’(Koimesis Theotokou: 라틴어로 도르미시오 Dormitio) 등으로 표현된다. 이는 마리아가 죽음과 함께 옮겨졌거나 잠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 에피파니우스(기원후 367~403년)나 5세기 말엽 시리아에서 저술된 것으로 간주되는 <트란지투스 마리애>(Transitus Muriae) 등이 알려지지 않은 성모님 죽음에 대해 언급하며 상상력을 자극했다. 죽었던 사도들도 소생되어 가브리엘 천사에 의해 성모님의 임종 순간에 다시 소집되었으나, 토마스 사도는 빠졌다. 유다인들에 의해 훼손되거나 소실될 것을 우려하여 성모님의 시신이 천사들에 의해 아무도 모르는 동굴 또는 ‘잃어버린 낙원’에 숨겨졌다. 토마스 사도가 합류했을 때, 사도들이 다시 그곳에 모였지만, 성모님의 육신은 영혼과 함께 이미 하늘로 들어 높여져 발견되지 않았다. 성모님의 영혼뿐만이 아니라 육신마저도 죽음에도 불구하고 끊김 없이 하느님 가까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성모님의 죽음은 깊은 잠을 의미하는 ‘도르미시오’(Dormitio: 그리스어로 Koimesis)로 이해되었다. 동방에서는 크리스마스 직전에 지냈던 천주의 모친 축일과 함께 다른 몇몇 성모님 축일들이 교황 세르지오 1세(687-701년)에 의해 로마교구에 도입되었고, 그중 하나가 8월 15일에 지내는 성모 영면 또는 승천 축일이다.
마리아의 죽음이 ‘깊이 잠든 상태로 하늘로 들어 높여진’ 것으로 이해된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그녀가 부활 후 성자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부활 후 승천(Ascension)한 성자의 육신은 마리아의 그것과 무관할 수 없다. 성부의 영원한 로고스가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마리아는 성부의 충실한 딸로서, 성자가 영원히 그러했듯이(요한 1,18ㄴ의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은 직역하면, “아버지의 품안에 있는 외아드님”이다), 마지막 순간에 성부의 품에 ‘아기’로서 편안히 잠들었다. 아기의 특징이 ‘놀고 배우는 것’과 더불어 ‘자는 것’이다. 이 모두가 특별한 친밀함과 신뢰감을 전제한다. 성자께서 성부의 ‘영원한 아기’로 머무신 신비(잠언 8,30 비교)에 무엇보다도 성모님께서 우선적으로 참여하신다는 사실에 대해 폰 발타사르(H.U. von Balthasar)는 강조한다. 성모님의 아들이 먼저 성부의 아드님이어야 했듯이 그녀 역시 아기로서 아버지의 딸이어야만 했다. 성모님이 지혜 자체이신 성부의 영원한 로고스를 위한 자리, 곧 ‘상지의 옥좌’(Sedes Sapientiae)나 성전 또는 계약의 궤 등에 비견되는 것도 같은 맥락에 속한다. 아기가 부모에게 무조건적으로 의존하고 부모의 친밀함을 필요로 하듯이, 성모님 역시 성자와 더불어 성부를 상대로 그리고 성자를 상대로 어머니이자 딸로서 끊김 없는 무조건적 친밀함을 향유한다.
[성모동산의 꽃과 풀들] 꽃으로 보는 성모님의 생활소품들
미나리아재비, 성모님의 자물쇠 그리고 그릇
미나리아재비는 우리나라 전역의 산과 들, 특히 햇볕이 잘 들고 습기 있는 곳에서 흔하게 자라는 여러해살이 야생식물이다. 줄기는 50~70cm까지 곧게 자라고 전체에 흰털이 나며, 줄기의 윗부분에서 가지가 여러 개로 갈라진다. 그리고 5~6월에 줄기의 끝에서 작은 잔 모양의 노란색 꽃이 피고, 익어도 껍질이 갈라지지 않는 열매들이 덩어리를 이루며 모여 달린다. 이 식물은 독성이 있지만 생약으로도 사용되고, 연한 순은 식용으로 쓰이기도 한다.
미나리아재비는 그 종류가 400여 종에 이를 정도로 다양한데, 흔히 ‘미나리아재비’라고 할 때는 기는미나리아재비, 왜미나리아재비, 산미나리아재비 등 미나리아재비과 미나리아재비속의 여러 식물들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으로 알아들어도 무방할 것이다. 미나리아재비는 중국, 타이완, 일본에도 분포하고, 아시아 이외의 지역에도 분포한다.
북아메리카의 북서쪽 태평양 연안 일대에서는 미나리아재비가 ‘코요테의 눈’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지역에서 이런 이름으로 불리게 된 곡절을 말해주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코요테는 북아메리카에 서식하는 개과의 포유류 동물이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에 코요테 한 마리가 자기의 두 눈알을 빼내어서는 공기놀이 하듯이 공중으로 던졌다가 떨어지는 것을 잡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독수리가 날아와서는 그 눈알들을 낚아채어 갔고, 그리하여 앞을 볼 수 없게 된 코요테는 미나리아재비의 꽃을 따서 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북아메리카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그리스도인들은 미나리아재비를 보면서 그 생김새며 특성들에서 성모님과 연관되는 점들을 연상했다. 그러고는 성모님과 관련된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미나리아재비의 한 종류인 산미나리아재비는 ‘성모님의 자물쇠’(Our Lady’s Locks)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또 다른 종류의 미나리아재비는 ‘성모님의 그릇’(Our Lady’s Bowl)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여기서 ‘그릇’은 주발이나 사발 또는 큰 잔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프리뮬러, 성모님의 열쇠
우리나라 산과 들의 물가나 풀밭의 습지 등 곳곳에서 널리 자라는 여러해살이풀 중에 그 어린 싹은 나물로 먹기도 하고 또한 꽃은 아름다워서 관상용으로 기르기도 하는 앵초가 있다. 앵초는 앵초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잎과 줄기에 흰 털이 많이 나 있고, 7월이면 자홍색 꽃을 피우며, 익으면 갈라져 터지는 원추형의 열매를 맺는다.
우리나라에는 큰앵초, 설앵초, 좀설앵초 등 30여 종류의 앵초가 분포한다. 그리고 앵초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시베리아 동부에도 분포하고 또한 유럽에도 분포한다. 특히 일본에서는 앵초의 자생지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기도 한다.
앵초는 이렇듯 세계 여러 지역에서 서식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식물을 부르는 이름이 다소 애매하다. 이를테면 같은 앵초과 식물임에도,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것에 대해서는 흔히 ‘앵초’라고 부르고, 주로 관상용으로 재배되는 외래종에 대해서는 서양의 속명(屬名)을 그대로 써서 ‘프리뮬러’(primula)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앵초는 대개 자홍색 꽃을 피우는데, 서양의 프리뮬러 중에는 노란색 꽃을 피우는 종류도 있다. 노란색 꽃을 피우기에, 굳이 우리말로 옮기자면 ‘황산앵초’ 또는 ‘황화구륜초’라고도 불리는 이 식물은 유럽의 온대 지역과 서아시아에 주로 분포한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이 식물이 흔히 프리뮬러라는 속명 또는 학명보다는 카우슬립(cowslip)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카우슬립은 옛 영어에서 소의 배설물을 뜻하는 단어였다. 그러니까 이 식물이 목장에서 배출된 소의 분뇨가 널려 있는 곳에서 무리 지어 자라는 것을 본 사람들이 아마도 그런 이름을 붙였으리라고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식물은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는데, 그중에는 ‘베드로 풀’, ‘열쇠 꽃’, ‘천국의 열쇠’라는 이름들이 있다. 이 이름들과 관련해서 서양 사람들이 굳게 믿어 마지않는 전설이 하나 있다.
이 전설에 따르면, 예수님께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받은, 그래서 천국의 문지기라고 일컬어지는 성 베드로가 하루는 좋지 않은 소문을 들었다. 자신이 지키는 천국의 정문을 거치지 않고 비밀의 문을 통하여 천국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것이었다. 몹시 화가 난 베드로는 그만 천국 문의 열쇠를 땅에 떨어뜨렸는데, 열쇠가 떨어진 자리에서는 이내 그 열쇠처럼 생긴 풀 한 포기가 돋아났다. 열쇠를 닮은 그 풀, 곧 프리뮬러와 거기에 달린 꽃송이들을 발견한 사람들은 그것들을 열쇠 삼아서 더욱 더 뒷문을 통하여 천국에 스리슬쩍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인들은 프리뮬러를 성모님의 열쇠(Our Lady’s Keys)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어차피 ‘성모님의 자물쇠’라는 이름의 식물이 있다면, ‘성모님의 열쇠’라는 이름의 식물도 있어야 했을 테니까.
디기탈리스, 성모님의 장갑
디기탈리스(Digitalis)는 질경이과의 쌍떡잎식물이며 두해살이풀 또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줄기는 1m 정도까지 곧게 자라고, 7~8월에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종 모양의 꽃을 피우는데, 꽃의 색은 빨간색, 분홍색, 주황색, 흰색 등 다양하다. 헝가리, 루마니아, 발칸 반도 등 유럽이 원산이며, 약용 또는 관상용으로 재배된다.
디기탈리스는 여우의 장갑(foxglove)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이 이름은 16세기에 독일의 식물학자 레온하르트 푹스(Leonhard Fuchs)에 의해 기록되었는데, 이 사람의 성씨인 푹스(Fuchs)가 영어로는 팍스(fox), 곧 ‘여우’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나중에 만들어진 설화는 여우가 먹이를 사냥할 때는 사냥감을 속이기 위해 앞발을 한 종류의 꽃으로 위장하여 가렸다고 말하는데, 이로써 어원적 기원은 더욱 모호해졌다.
한편, 디기탈리스라는 이름은 라틴어로 손가락을 뜻하는 디기투스(digitus)에서 유래했다. 그러니까 서양 사람들은 기름한 종처럼 생긴 디기탈리스의 꽃이 장갑에서 손가락을 감싸는 부분과 닮았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디기탈리스를 성모님의 장갑(Our Lady’s Gloves)이라고 일컫기에 이르렀다.
전례 탐구 생활 (19) 대영광송 – 말씀의 모자이크 ①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사제나 선창자가 대영광송을 시작하면 이제 전례의 분위기는 참회와 청원에서 기쁨 가득한 찬양으로 바뀝니다. 대영광송의 첫 소절은 베들레헴 들판에 울려 퍼진 천사의 노래에서 왔습니다. 천사는 목동들에게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이렇게 알렸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모든 미사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가 또다시 펼쳐지므로, 미사를 시작하면서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잘 맞아떨어지는 일입니다. 2천 년 전 아기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서 세상에 드러났기에, 모든 미사 때마다 제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축성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현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베들레헴의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알렸을 때 울린 찬양의 노래를 똑같이 따라 함으로써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대영광송의 나머지 부분도 성경에 나오는 표현들로 가득합니다. 사실 초기 그리스도교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기도문은 성경에 담긴 하느님의 호칭들과 찬양의 표현들로 이루어진 한 편의 모자이크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대영광송의 구절마다 들려오는 성경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실로 대영광송을 바치는 신자는 구원 역사를 관통하는 위대한 남녀 인물들이 심지어 하늘의 천사와 성인들까지 하느님의 구원 업적과 그분의 영광을 두고 바치는 찬양 노래에 결합하는 것입니다.
대영광송은 삼위일체 신비를 따라, 먼저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이자 “하늘의 임금님”이라는 말로 성부께 찬양을 드리며 시작합니다. 이 두 가지는 성경에 나오는 일반적인 하느님 호칭입니다. 성경 이곳저곳에서 하느님을 “전능한 하느님”(창세 17,1: 탈출 6,3)이나 “전능하신 주님”(바룩 3,1: 2코린 6,18), 아니면 그냥 “전능하신 분”(시편 68,15: 91,1)이라고 부릅니다. 묵시록에서 하늘의 천사들과 성인들은 거듭거듭 “전능하신 주 하느님”(묵시 4,8; 11,17; 15,3; 19,6)을 찬양합니다.
마찬가지로 대영광송도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일컬으며 하늘의 임금님이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하느님은 왕(시편 98,6; 99,4; 이사 43,15), 이스라엘의 왕(이사 44,6), 영광의 왕(시편 24,7-10), 심지어 모든 신들의 왕(시편 95,3)으로 소개됩니다. 대영광송에서 하느님을 하늘의 임금님이라고 부름으로써 우리는 그분을 왕 중의 왕이신 분으로 인정하고, 우리 삶을 다스리시는 분으로 받아들인다는 믿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그분께서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사실과 함께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단지 전능하신 임금님일 뿐이라면, 우리는 그분을 자기 마음대로 권위를 펼치기만 하는 독재자처럼 여길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아버지로서 전능”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270항). 좋은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권능은 우리에게 좋은 것과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을 추구하는 그분의 사랑과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그래서 대영광송은 하느님을 “주 하느님, 하늘의 임금님”이자,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이라고 부릅니다. [2020년 8월 2일 연중 제18주일 가톨릭제주 3면, 김경민 판크라시오 신부(성소위원장)]
전례 탐구 생활 (20) 대영광송 – 말씀의 모자이크 ②
대영광송의 둘째 부분은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시작하여, 우리 구원을 위한 그분의 죽음, 승리의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는 구원 업적에 관한 이야기를 1인 3역의 드라마처럼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역할’은 “외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이자 “성부의 아드님”입니다. 신약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요한 5,17-18; 10,30-38; 2코린 1,19; 콜로 1,13; 히브 1,1-2 등). 그 가운데 특히 요한 복음은 처음부터 성부와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분을 통해 생겨난 영원하신 말씀에 대한 아름답고 시적인 묵상으로 시작합니다(요한 1,1-4 참조). 이 묵상의 정점에서 요한은 놀랍게도 이 거룩하고 영원하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고 선언합니다(요한 1,14).
그러므로 대영광송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외아들”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그분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교사, 선포자 혹은 예언자로 보는 관점을 훌쩍 뛰어넘어, 성 요한과 하나 되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신 영원한 말씀이라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역할’인 “하느님의 어린양”에 해당하는 대영광송의 대목에서 이야기의 흐름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명으로 옮겨갑니다. 이는 죄와 사탄을 물리친 어린양의 승리(묵시 5,6-14; 12,11; 17,14)와 하늘의 천사와 성인들이 어린양께 드리는 예배(묵시 5,8.12-13; 7,9-10)라는 묵시록의 주제를 되울립니다. 대영광송에서 이 호칭으로 예수님을 부르면서 우리는 묵시록에 나오는 이린양께 드리는 천상 예배와 결합됩니다.
대영광송은 또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세례자 요한이 한 예언의 말을 반복하는 것입니다(요한 1,29 참조). 이 말은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당신 생명을 바치신 새로운 파스카 어린양임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이집트의 파스카 밤에 희생된 어린양처럼, 예수님은 온 인류를 죄로 인한 죽음의 저주에서 구원하기 위해 골고타에서 희생되신 새로운 파스카 어린양이십니다.
마지막으로 대영광송은 우리를 예수님의 “세 번째 역할”, 곧 천상에 오르신 예수님의 새로운 권위로 안내합니다.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 주님”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마르 16,19)는 마르코 복음의 이야기를 떠오르게 합니다. 성경에서 오른쪽은 권위를 행사하는 자리입니다(시편 110,1; 히브 1,13 참조). 대영광송에서 우리는 하늘과 땅, 그리고 영원히 이어질 왕국(다니 7,14)은 다스리시는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또한 우리는 그분께 겸손되이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기도드립니다.
대영광송에서 우리의 찬양은 이렇게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신 성부의 “외아들”에서 시작하여, 몸소 희생되심으로 세상의 죄를 없애신 “하느님의 어린양”에 대한 경배를 거쳐 죄와 죽음을 물리치시고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 분에 대한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실로 구원 역사의 진정한 핵심이 대영광송 안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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