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쓴물을 치료한 나무
출 15: 22-26
출애굽과 홍해 사건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만도 못한 노예생활을 하던 애굽을 하나님의 10가지 재앙으로 치심으로 애굽을 떠나는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지긋지긋한 애굽을 나와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와 인도의 상징인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으며 광야 길로 가던 중 뒤에서 바로의 군대가 추격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앞에는 시퍼런 홍해가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진퇴양난의 위기를 당하였습니다.
이때 모세가 바다를 향하여 손을 내밀자 바다 물이 물러가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출14:21] 하나님이 바다 속으로 길을 내셨습니다. 260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다를 육지 같이 건넜습니다. 바로와 그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잡으려고 홍해 길로 추격해 왔습니다.
모세가 다시 손을 바다 위로 내밀자 새벽에 바닷물이
합쳐져 버려 모든 애굽 군대는 수장되었습니다.[출14:27]
이는 이스라엘을 사랑해서 애굽에서 구원한 10가지 재앙
이후 11 번째 기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신바람이 나서 하나님께 구원의 노래를 부르며 기쁨의 춤을 추었습니다.
마라에서 원망이 터져나옴
구원의 기쁨을 뒤로한 채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을 재촉하였습니다. 그러나 3일 길을 가는 동안 이스라엘은 전혀 물을 마시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나 목이타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목말라 죽겠다”고 백성들은 모세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원망=못된 성질, 비뚤어진 인격으로 모든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고 책임지고 해결하라고 화를 내며 달려드는 행동. 과거에 피해를 당하고 상처를 받은 사람이 그와 유사한 아픔이 있을 때 터뜨리는 이상 감정 행위.
이스라엘은 지난날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애굽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참으로 자기들을 사랑하고 도우려고 하는 동족 지도자 모세의 진의를 오해하여 툭하면 원망을 하며 공포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지도자의 고통이 여기에 있습니다.
백성들은 물을 얻지 못해 목마른 원인이 모세에게 있는 것처럼 화를 내며 아우성을 쳤습니다.
물이 없으면 물을 구할 방도를 찾을 노력은 하지 않고 지도자만 원망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홍해에서 체험한 구원의 기쁨을 3일을 넘기지 못하고 화를 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보낸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원망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교회의 목사도 하나님이 보낸 사람입니다. 목사를 이유 없이 원망하는 일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좋을 때는 좋다고 ‘해해’ 거리지만 좀 힘들면 쉽게 ‘원망’을 합니다. 참을성 없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우리는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1. 하나님께 기도한 모세[25]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대들며 화를 내며 원망하자 모세는 같이 화를 내지 않고 즉시 하나님께 엎드려 부르짖으며 기도하였습니다. 모세는 기도하는 지도였습니다.
그러나 모세 외에는 기도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기도가 없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원망과 원성만 터져 나왔습니다.
우리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이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먼저 내 뱃는 말은 원망과 원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려운 일을 만나더라도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하나님 앞에 엎드리세요. 기도는 원망을 치료하는 약이요 문제를 푸는 열쇠입니다.
기도하는 홍성교회
지금 우리교회가 첫 번째로 힘쓸 일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새벽기도, 저녁기도, 밤 기도, 24시간 불침번 기도, 개인 기도를 해야 합니다.
성전 건축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일이 순조롭게 잘되고 원망 할 일이 없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려울 때 기도하세요. 힘들 때 기도하세요.
큰일을 앞두고 큰일을 할 때 기도하세요.
기도하면 원망 병이 생기지 않고 일도 잘 됩니다.
[왜 나만 혼자 겪는 고난이냐고]
1절, 왜 나만 혼자 겪는 고난이냐고 원망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 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았을 지라도 당신만은 일어 나세요
힘을 내 세요 힘을 내 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2절, 왜 이런 슬픔 찾아왔는지 원망하지 마세요
당신은 잃은 것보다 주님께 받은 은혜
더욱 많음에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았을 지라도 당신만은 일어 나세요
힘을 내 세요 힘을 내 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잖아요
힘을 내 세요 힘을 내 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잖아요
2. 응답하신 하나님 [25]
모세가 부르짖으며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셨습니다. 그 나무는 잡목들과 석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기 전까지 모세는 그 나무를 몰랐습니다. 이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나무였습니다. 이 나무는 모세와 매우 가까운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문제 해결 방법은 매우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은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실 때 아브라함이 순종하여 아들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드리려고 할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참 믿음을 보시고 아주 가까이에 수양을 준비해 두셨습니다.[창22:13-14]
그래서 아브라함이 아들 대신 수양을 번제로 드렸습니다. 이것이 ‘여호와 이래’-의 복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들 가까이에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도우심은 우리들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어려울 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응답받고 도움 받고 구원받는 성도님들과 홍성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 나무 - 이름도 없는 나무였습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지 않으면 모세 곁에 있었어도 그 용도를 모르는 나무였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기도하자 하나님이 문제 해결 방법으로 이 나무를 사용하도록 지적해 주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홍성교회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고 베옷을 벗기고 기쁨을 주십니다.[시30:11]
3. 쓰임 받은 나무
그 나무를 꺾어서 모세는 쓴 물에 던졌습니다.
나무가 희생 되었습니다. 이 나무는 하나님이 그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준비해 놓으신 나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무를 사용하게 하셨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 하와가 선악과 나무 열매를 따먹는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나무를 사용하셨습니다. 그것을 가시나무요 십자가 나무였습니다.
구주 예수님은 가시관에 찔리셨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를 흘려 우리 죄를 씻어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한 나무처럼 하나님에게 쓰임 받읍시다.
우리도 한 나무처럼 교회 일에 쓰임 받읍시다.
하나님, 저를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힘있게 쓰임 받는 도구로 써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4. 쓴 물을 달게 한 나무[25]
물이 달아졌더라. 쓴 물에 나뭇가지를 던지자 즉시 - 먹지 못할 물- 화나게 한 물이 -> 단물-마실 수 있는 맛있는 물, 기쁨을 주는 물이 되었습니다.
한 나무의 희생으로 못 먹을 물이 먹는 물로 변화되었습니다.
나무- 물을 달게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들도 교회를 달게 변화시키는 성도가 됩시다.
우리들도 세상을 달게 변화시키는 성도가 됩시다.
그 나무는 이스라엘에게서 원망을 물러가게 했습니다.
나무는 고통 받는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우리들도 원망과 원성을 종식 시키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도 홍성교회 공동체에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됩시다.
결론;
교훈 -여호와는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다.[26]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앞으로 내 말을 귀담아 듣고 의롭게 살면 애굽 사람에게 내렸던 질병의 하나도 내리지 않겠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다. 앞으로는 물만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너희들의 병을 근원적으로 막아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 너희들- 내말 잘 듣고 순종만 하면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살게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쓴물이 치료되어 단물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원망 병을 치료 받았습니다.
모든 병을 막아내는 예방주사를 맞았습니다.
물이 없고 쓰디 쓴 광야와 마라 같은 세상을 사는 우리도 믿음으로 인내하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치료받고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나는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출 15: 22-26
1. 치료가 필요한 시대
현대는 영의 치료뿐만 아니라 정신과 육체 그리고 가정과 사회 등 총체적인 치료가 필요한 때입니다.
98년도 통계에 의하면 10쌍 중 3쌍이 이혼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어떤 책에서는 현대인의 95%가 약간의 정신병을 앓고 있다고 말합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과연 몇 사람이나 "나의 육체는 완전히 건강하며 어느 한 곳도 불편한 곳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치료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관련되어 있는 사회의 구석구석을 바라보십시오. 과연 부조리 없이 건강한 기구나 단체가 몇 곳이나 있을까요? 지금은 총체적인 치료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2. 홍해를 건넌 후에 만난 마라의 쓴 물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모세의 인도에 의하여 홍해를 건넌 후의 사건입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애굽의 압제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으로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넜으니 그들이 그 이후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걸었던 기대는 얼마나 컸을까요? 그런데 막상 홍해를 건너고 보니 먹을 물이 없었습니다. 물을 구하지 못하고 사흘 길을 행한 후 그들이 도착한 곳은 마라입니다. 다행히 마라에는 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물을 마셔보니 써서 마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원망하고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모세에게 한 나뭇가지를 지시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이 지시하신 나뭇가지를 던지자 쓴 물이 변하여 단물이 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믿으면 만사 형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이 내가 마음먹은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나의 착각이지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라가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은 결코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마라에 대한 마음의 대비가 되면 마라가 충격으로 다가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3. 쓴 물을 마셔야 할 경우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 3일 길을 행했으니 물이 쓰더라도 마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목말라 죽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마라의 쓴 물을 마셔야만 할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피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도 벌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마라의 쓴 물은 때로는 물질의 고통일 수도 있고, 환경의 문제나 인간관계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라고 자문해 보지만 해답은 없습니다.
이해가 안돼서 기가 막히는데 더 기가 막히는 것은 그 길을 성령께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을 누가 인도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보고 행진했습니까? 구름 기둥과 불기둥 아닙니까?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누구를 상징합니까? 성령님 입니다.
욥의 당하는 시험을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이루어진 것처럼 우리가 마셔야 할 마라의 쓴 물 앞에 나를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되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4. 치료하시는 하나님
그럼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라의 쓴 물 앞에 세우셨나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요 17:3에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알려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므로 영의 생명이 더 풍성해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럼 본문에서 계시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26절 하반절에 보면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라의 쓴 물에 한 나뭇가지를 던지게 하셔서 치료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말 4:2절에는 하나님은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여서 자기 백성들을 치료하시고 외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뛰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치료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치료하실 때 하나님의 사람을 쓰십니다. 본문에서는 모세라는 하나님의 사람을 스셔서 치료의 역사를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치료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을 쓰십니다. 가정을 치료하시고 사회를 치료하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치료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치료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상처를 째고 고름을 짜내는 작업입니다.
죄악을 드러내셔서 수술하시는 것입니다. 보통 이런 경우는 상습적인 죄악을 다르실 때 사용하십니다. 여러 번 경고하셨지만 고치지 않을 때 사용하시는 방법입니다.
② 약을 바르는 방법입니다.
필요한 말씀을 공급하시고, 성령의 기름을 바르시며 상처가 아물도록 영적인 약을 발라주시는 것입니다. 위로와 격려를 통해서 환자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입니다.
③ 시간의 흐름에 맡겨두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는 자생력이 있어서 웬만한 상처를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치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열왕기하 2장에서 엘리사가 여리고를 치료하신 사건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엘리사가 여리고의 물을 고칠 때 소금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마 5:13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소금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맛을 내는데 소금과 같은 그리스도인을 사용하십니다.
소금을 다른 의미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골 4:6에서는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는 성도의 언어생활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소금으로 비유합니다. 이 말씀과 위에서 말한 말씀을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치료하시는데 그리스도인을 사용하십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언어를 사용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소금을 고르게 쳐야 음식에 맛이 제대로 나는 것입니다. 소금을 많이 치면 짜서 먹을 수가 없고, 소금을 너무 조금 치면 싱거워서 음식 맛이 싱겁습니다. 짜도 먹을 수 없고 싱거워도 먹을 수 없습니다. 소금은 적당하게 쳐야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한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형제와 가정과 사회를 치료하기 원하십니다. 특별히 은혜로운 언어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치료는 시작됩니다. 지나치게 말이 많은 것은 음식의 맛을 짜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말이 없는 것은 음식의 맛을 싱겁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신자들은 언어생활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저희들에게 소금을 고르게 함과 같이 적당하게 지혜롭게 말하는 은혜를 주셔서 주님을 대신한 치료자들이 되게 하소서"
5. 부르짖어 기도하라
위기 상황에 처하면 그 사람의 신앙이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위기를 당할 때마다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했습니다. 본문에서도 마라를 만난 백성들이 모세를 다하여 원망합니다. 그런데 모세의 자세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백성들의 원망을 듣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즉시로 응답합니다. 모세는 나뭇가지를 물에 던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즉시 순종하여 쓴 물이 단물로 고쳐지는 기적의 주인공이 됩니다.
여러분은 제가 설교를 하면서 기도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저도 간혹 설교를 하다가 기도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기도를 계속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서 기도에 대해서 강력하게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도 모세가 쓴 물을 만난 위기 상황을 극복했던 비결은 기도였습니다. 세상에서는 좋은 말도 자주 들으면 실증이 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에 대해 강조하는 저의 설교를 들으시고 기도하는 것에 대해 실증내시는 분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기도에 대해서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6. 십자가의 능력으로 치료 받으라
모세가 부르짖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한 나뭇가지를 지정해 주셨습니다. 그 나뭇가지를 물에 던지자 쓴 물이 치료되어 단 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치료의 능력이 나뭇가지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이 나뭇가지를 통해서 치료의 역사가 나타났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를 통해서 치료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문둥병자 나아만이 요단강 물에 일곱 번 씻을 때 치료되었습니다. 왜 요단강 물이었을까요? 아람나라에는 요단강보다 더 좋은 강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해서 지명하신 강이 요단강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십자가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유일한 구원의 길 치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간혹 기도가 막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보혈 찬송을 부릅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확신하며 찬송을 부르면 기도의 능력이 회복되는 것을 자주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치료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의 능력을 사용하십니다.
7.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행하라
쓴 물이 단물로 변하는 사건이 있고 난 후에 하나님은 법도와 율례를 정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하면 애굽에 내린 질병을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변화시킨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중요한 말씀이 있다면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의를 행하며 여호와의 계명에 귀를 기울이고 여호와의 모든 규례를 지켜라"입니다.
세상 만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됩니다. 말씀에 따르면 보시기에 좋은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료가 일어납니다.
쓴 물을 단물로 바꾸라
출 15: 22-26
서론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의 400여년의 노예생활을 마치고 출애굽을 했습니다. 홍해
가 맨땅처럼 갈라지는 것을 그들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홍해에 이스라엘 모든 병
거와 군대를 다 수장시키시는 그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5장 1절에서 21절까지는 모세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모
세의 누이인 미리암은 기뻐서 춤을 추었습니다. 이들은 노래하고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자기들을 구원해 주신 그 놀라운 은총에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삼일 만
에 그 찬양이 원망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들은 홍해를 건너서 삼일동안 수르광야를 지
나왔습니다. 광야를 지나오는 동안 한 방울의 물도 얻지 못한 그들은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삼일 만에 도착한 곳에 물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기쁘
겠습니까? 그러나 물맛을 보는 순간 그 기쁨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 물을
마실 수 없을 만큼 쓴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백성의 원망이 시작됩니다. “우리
가 무엇을 마실까?” 모세를 대하여 원망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장소를 히브리말로
“쓰다”라는 의미를 가진 “마라”라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이처럼 외부환경에 따라서 수시로 변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가변적인 존재인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날씨가 맑을 때는 기쁘다가도 봄비가 좀
내리면 “나를 울려주는 봄비~” 하면서 쓸쓸해지지 않습니까? 시편 30편 6절 말씀에
도 “내가 형통할 때 말하기를 영원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사람이 좀 잘되면 영원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지만 잠깐 주께서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로 근심하게 하시면 기초
가 요동하고 흔들리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의 장모님이 86세에 소천을 하
셨는데 하루는 겨울에 날씨를 보고 계셨습니다. 아침에는 맑더니 오후가 되면 흐리고
밤이 되면 눈이 오고 추워지는 것을 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겨울날씨는
꼭 노인네 건강 같단 말이여, 오늘 건강해도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몰러... ” 저는 그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됩니다. 인간의 마음도 겨울날씨 같은 것입니다. 그러
나 아무리 우리 마음이 요동하고 변할지라도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향
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고 조금도 요동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마음이 슬프고 괴로울지라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사랑하시
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대신 죽게 하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사
실을 의지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이 마라의 스토리는 구원받은 하
나님의 백성이 당하는 첫 번째 시험의 예표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시험을 통해
서 성숙합니다. 시험을 거치지 않으면 우리 신앙이 얼마나 성숙했는지 우리의 영적인
실력이 얼마나 되는 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시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
나는 악의 시험입니다. 이것은 마귀가 시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혹(temptation)입
니다. 하나님은 유혹하지는 않으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런 악의 시험이 올 때에 시
험에 빠지지 말아야 하겠으며, 시험이 와도 승리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혹은 하지 않으시지만 때때로 시험을 하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영
적으로 성숙했는가? 우리가 죄성을 얼마나 잘 이겨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시험하십니다. 25절 맨 끝에 보면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
들을 시험하실 쌔(he tested them)”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시험이 올 때에
잘 준비해서 좋은 성적을 맞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학생들이 다 공부해
도 그 사람이 실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시험을 봐야 아는 것입니다. 제가 교수생활 할
때 시험문제를 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신학사상을 논하라” 그랬더니 어떤 학생
이 “이분은 훌륭한 분입니다. 이분은 너무나 중요한 분이십니다. 이분은 교수님이 강
조한 분이시기 때문에 꼭 공부해야 하는 분이십니다.” 쓸데없는 소리만 답안에 써 놓
은 적이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공부를 좀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실력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시험을 통해 우리의 영적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마라의
스토리를 통해서 우리의 영적인 여로에 오는 광야의 첫 번째 시험이 어떤 것인가 하
는 것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광야의 첫시험
이 첫 번째 시험은 보통 영적인 생활의 초기에 옵니다. 예수 믿고 구원을 받게 되면
처음에 얼마나 큰 기쁨이 옵니까? 죄사함을 받은 것이 기쁘고, 영생을 얻은 것이 기쁘
고, 부활의 소망을 갖게 된 것이 참 기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계속되지는 않습니
다. 그 기쁨이 지나고 나면 시험이 오게 됩니다. 그 시험이 마라의 시험입니다. 여러
분들 중에는 이 영적인 시험을 잘 이겨낸 성숙한 신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
은 이제 막 시험을 겪고 있는 초신자들을 잘 돌보아 주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
다. 룻에게는 나오미가 있었고, 바울에게 바나바가 있었듯이 예수 처음 믿은 초신자들
에게는 먼저 성숙한 신자들의 돌봄이 있어야 합니다. 영어로는 가르치는 사람을
teacher 혹은 mentor라고 부릅니다. teacher는 지식을 주는 사람이지만 mentor는 경험
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초신자가 시험이 들어 힘들어 할 때에 성숙한 신자가 “아 나
도 전에 그랬었는데 이런 것은 시간이 지나니까 이렇게 해결되더라, 믿음을 가지고
잘 극복해라” 하고 한 마디만 해주면 그것은 초신자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 믿고 성숙한 여러분들은 이제 막 침례 받은 초신자들에게 멘토의 역할을
잘 해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초신자들의 신앙 초기에 반드시 흔들림이 옵니다. 그러면 “아! 나일강의 물은 달았는
데, 애굽의 고기는 맛있었는데, 내가 예수 믿기 전에는 죄질 때에도 낙이 있었는데”
하면서 애굽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럴 때 먼저 성숙한 신자가 “애굽에
돌아가면 다시 노예가 되고 감옥에 갈지도 몰라 이 시험이 지나고 나면 단물도 오게
되는 것이야” 하는 것을 일러 줄 때에 초신자들이 그것을 배우고 극복할 수 있게 되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초신자들을 잘 도와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
원합니다.
이 시험은 여러 가지 형태로 옵니다. 여기 수르 광야에 삼일동안 방황할 때에는 물이
없는 것이 시험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라에서 물을 만났을 때에는 물이 쓴 것이 시험이
었습니다. 건강이 좋은 사람은 재산이 없고, 재산이 많은 사람은 건강이 나쁘고, 자식
이 잘하면 남편이 속 썩이고, 남편이 잘 하면 자식이 속 썩이고 또 잘 믿어보려고 하
면 먼저 믿은 성도가 자꾸 나쁜 소리 해가지고 신앙의 시험에 들게 합니다. 예수 처
음 믿은 사람들을 시험 들게 하는 말 하지 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치가들 때문에 시험을 들어서 신앙생활 못하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미국에 조지 부시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조지 부시가 싫어서 다른 나라로 이민 간
미국 사람도 있었습니다. 정치가 때문에 시험 들어서 신앙생활 제대로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우리는 옛날 철학자들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철학자
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치가들은 독재자들이다 독재자들은 모기와 같다. 한 독재
자가 와서 피를 빨아먹는다고 그 독재자를 쫒아내면 또 다른 배고픈 모기가 오는데 이
것은 지난번에 있던 배부른 모기보다 훨씬 더 많이 빨아 먹는 것이다. 고로 지금 배불
리 빨아먹은 독재자가 더 낫다.” 그 말도 좀 일리가 있는 것도 같습니다. 우리는 누
가 정치를 하든지 지금 정권을 잡은 정치가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정사
와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깨에 있습니다. 주님께 맡기시고 그런 일로 시험 들지
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시험은 형태도 다양합니다만 우리의 삶에 중요한 필수요소와 관련해서 옵니다. 이
스라엘 백성이 여기서 원망한 것은 물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물이 없다고 하는 것
은 인간의 삶에 가장 필요한 요소가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을 삼일 못 마시는
데 불평 안할 인간이 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시험이란 이처럼 인간의 필수요소와 관
련해서 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을 통해
서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쓴물의 시험을 극복해야 반석에서 나오는 단물도 먹
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쓴물을 맛본 사람이라야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요단강의 생수를 마실 때에 ‘아 이 물이 좋은 물이구나.’ 하며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 시험도 없이 축복을 받게 되면 그것이 축복인 줄 모릅니
다. 감사할 줄도 모르는 것입니다 축복을 축복으로 누리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어야 ‘아 이것이 축복이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광야의 쓴
물이 있어야 단물이 단물인줄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려움을 겪어야 생존력이 강해
지고 자생력이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광야의 시험을 하나님이 왜 주셨을까요? 그것은 광야가 영원한 안식처는 아니라고 하
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모래에서 나는 물은 쓰다고 합니다. 그것을 낙타
도 안 먹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쓴물을 마시게 하셨을까요? 광야가 이스
라엘 백성의 영원한 안식처는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두어야 할 비전은 가나안 땅
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우리
의 인생에 왜 가끔 어려움이 옵니까? 위대한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인생살이에 어
려움이 오는 것은 이 세상이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가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좀 와야 우리는 천국을 사모하게 되고 이 땅에 마음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 믿고 처음에 매일 성경읽고 매일 기도하고 예배 참석하고 은혜를 받았습니
다. 그런데 얼마 지나니까 마음이 뒤틀리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참
구주시고 살아계시는가? 내가 믿는 성경은 진리인가?’ 의심하지 않으려고 해도 의심
이 밀려왔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의심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계속 읽었습니
다. 그러다가 마태복음 11장 6절을 읽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침례요한이
보낸 사람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
는 복이 있도다.”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신앙생활 하다가 시험에 넘어져 실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족하지 아니하면 복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광야의 시험을 통해서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드러냅니다. 군대훈련을 받으면서
세 달 정도 같은 내무반을 써보면 그 사람을 속속들이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여행
을 같이 가보면 그 사람을 잘 알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려운 시험을 겪
을 때 자기의 본성을 가장 잘 드러냅니다.
2. 시험이 드러낸 인간본성
여기 이스라엘 백성이 드러낸 본성은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원망불평, 비난하는 것
입니다. 우리의 본성, 아담 때부터 내려온 죄성은 원망하고 불평하고 비난하는 것입니
다. 물이 없는 것을 가지고 모세를 향해 원망합니다. 모세가 물 전문가입니까? 모세
가 수로국장입니까? 왜 모세에게 물을 달라고 원망을 하는 것입니까? 모세가 쓴 물을
단물로 바꿀 능력이 있습니까? 모세가 그것을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면
서도 모세를 향해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불평을 하면 그것은 내 속의
죄성이 하는 것인 줄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입에
단 물이 들어와도 감사하고 쓴물이 들어와도 감사하는 것이 새 성품을 가진 사람이 하
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 24절에 기록
된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는 말씀은
‘하나님이 이 광야에서 무슨 수로 남자만 육십만 여자포함 이백만 대군이 먹을 수 있
는 물을 낼 수가 있겠느냐 하나님이 그런 능력이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의 능력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의 능력을 삼일 전에 체험한 사람
들이었지만 타락된 본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평과 불신앙은
우리의 타락된 본성이요 이런 본성은 예수 믿은 우리 속에도 들어가 있는 것을 아시기
를 바랍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옛 성품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신의 성품, 새 성품을 주
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새 성품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도 감
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어렵게 하시고, 개천에 빠뜨리시고 우리를 미말에 두셨다고
할지라도 감사하는 것이 새 성품 입니다. 욥 같은 사람은 자기의 열 자녀가 다 죽고
재산을 날렸어도 뭐라고 고백합니까? “주신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찌어다”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
런 욥에게 하나님을 결국 두 배의 축복을 내려주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
로 우리 속에 불평과 불신앙의 옛 성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 옛 성품을 따라서 살
지 마시고 감사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새 성품을 따라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쓴 물이 다 물로 바뀐 방편
여기서 이 쓴물은 어떻게 단물로 바뀌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주셔도 이스라
엘 백성을 목말라 죽게 하시려고 시험을 주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시험을 주시면 치료
책도 주십니다. 고린도 전서 10장 13절에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
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이 쓴 물의 시험을 어떻게 감
당했습니까? 25절 전반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부
르짖었다고 했습니다. 소곤소곤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모세
는 그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주여! 이 백성 여기까지 와서 목말라 죽게 하십니
까? 쓴물을 어떻게 마시라고 주셨나이까! 홍해를 가르신 주여 쓴 물을 단물로 바꿔주
시옵소서!” 조용히 기도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랬더니 여호와께서 한 나무를 지시하
셨다고 했습니다. 이 나무는 이미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예비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기도했을 때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쓴 물의 치료책은 그 쓴물과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른 것이지 하나님은 이미 치료책을 그곳
에 준비해 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영감을 주시고 치
료책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무를 쓴물에 던지면 그 쓴물이 단물
로 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대로 했고, 그 쓴물은 변했으며 백성들은 마
시고 해갈하게 되었습니다.
이 나무가 무슨 자연 치유력이 있는 것입니까?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
닙니다. 성경에 나타난 나무는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에덴동산의 나무요
하나는 골고다 언덕의 나무입니다. 에덴동산의 나무는 선악과입니다. 하나님은 그 실
과를 금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먹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 전체가 쓴 물을 뒤
집어쓰게 된 것입니다. 죄악이 오게 되고, 사망이 오게 되고, 고통이 오게 되고, 미
움, 시기다툼, 질투 분쟁이 인류의 삶에 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골고다 언덕의
그 나무는 이 쓴물의 치료책이 된 것입니다. 인류의 쓴물을 단물로 바꿔 준 것이 무엇
입니까?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나무인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는 그 자체로
는 쓰디쓴 나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형벌을 받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
겠습니까? 그것은 그 자체로 고통의 나무요, 쓴 나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쓴 나
무가 인생의 쓴물에 들어오게 되면 쓴물이 단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동족
요법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일반의사보다 동족요법 치료사가 아주 비쌉니다. 이
사람은 한 시간 상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사람
이 열 날 때 찬 물 먹습니까? 뜨거운 국 먹습니까? 이열치열입니다. 열날 때는 뜨거
운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뜨거운 음식을 먹어야 땀이 나면서 열이 가라앉게 되는 것
입니다. 열난다고 찬물을 먹으면 몸이 열을 더 내게 됩니다.
“우리 인생이 참 쓰다. 내 인생이 참 쓴 물이다.” 라고 느껴지실 때에는 예수 그리
스도의 십자가 나무, 그 쓰디쓴 십자가를 그 쓴물에 적용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인생이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가?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괴롭고 망하
게 되었는가?” 하는 사람은 오늘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쓴물이 단물로 변
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 믿었는데 어찌해서 이렇게 괴로운 쓴물 마라 앞
에 당도했는가?” 하는 사람도 역시 십자가 나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신의 삶
에 적용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인생은 시험도 없고 고난도 없고 싸
움도 없으면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고난과 고통, 배고픔과 어려움이 있어야 인생이
재미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통이 있어야 거기서 승리의 기쁨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
므로 이 고난에도 유익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고난당하고 쓴 물을 마실 때에는 십
자가 나무를 적용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내가 고난을 받아도 나를 사랑하신다. 나의 죄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게 십자가 형벌을 대신 지게 하셨다. 하나님은 죄를 두 번 처벌하지는 않으신다. 고
로 나는 형벌을 받을 이유가 없다.’라고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 믿은 사람은 벌 받
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삶에 마라의 쓴 물을 받은 것은 벌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서 우리가 받을 벌은 예수님이 다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의 고난은 시험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성숙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고난이 올 때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
하신 결과라고 믿으시고, 하나님께서 쓴 물을 통해 주실 유익을 바라보시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그 고난을 이겨내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내가 죽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이미 죽은 사람입
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성경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산자
처럼 살라”고 했습니다. 덤으로 사는 사람이 뭐 불평할 것이 있습니까? 나에게 쓴 물
이 좀 있다고, 하나님이 내 것을 좀 빼앗아 갔다고 불평할 것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인생의 쓴 물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적용하시기를 주의 이름
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 이름이 쓰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원래 이름은 나오미였습니다.
나오미는 즐거움입니다. 이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살다가 이스라엘에 흉년이 드니까 모
압 땅에 이민을 가서 10년을 살았습니다. 거기서 남편도 죽고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자신의 이름을 마라로 부르라고 합니다. 모압 땅에서 처절하게 실패
하고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가는데 며느리 하나가 끝내 따라붙는 것입니다. 그 며느
리는 어머니가 가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합니
다. 자기도 거기서 장사지내겠고 하면서 어머니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며느리의 이
름은 룻입니다. 이 며느리가 어머니 밥 먹인다고 보리타작마당에서 이삭줍기를 하다
가 보아스를 만나게 되었고 결혼하게 됩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이름을 마라라고 고치고 ‘인생이란 이렇게 씁쓸한 것이구나.’ 하
며 괴로워하고 있는데 그 따라붙은 며느리가 시집가서 애를 낳습니다. 나오미는 아마
도 애 기르는 재미에 살았을 것입니다. 그 아이의 이름이 오벳이요, 그 아들이 이새
요, 이새가 나은 아들이 다윗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볼까요? 다윗의 아버지는 이세
요, 다윗의 할아버지는 오벳이요, 다윗의 증조할머니는 룻이요, 다윗의 증조할머니의
시어머니는 나오미입니다.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의 가계에는 나오미의 며느리가 있었
던 것입니다. 마라로 이름을 바꾸었던 나오미는 인생 말기에 또 다시 나오미로 돌아오
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마라인 분이 계십니까? 내일은 나오미가 되시기를 주의 이
름으로 축원합니다.
치유 받으라
(출 15:22-26)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치유 받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광야를 횡단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첫 번째 만난 문제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결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흘 만에 물을 발견했는데 그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습니다. 이 때 백성들은 원망하고 모세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한 나무를 가리키시고 모세가 그 나무를 물에 던지니 쓴물이 변하여 단물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치료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쓴물을 만난 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쓴물을 치료하는 능력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죄악의 쓴물
아담 이후로 사람들 속에는 죄악의 쓴물이 있습니다. 이 죄악의 쓴물을 해결하지 않으면 사망의 독이 가득하여 크게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죄악의 쓴물을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죄악의 쓴물이 해결되지 못한 사람들은 죽어서는 영원한 지옥에 들어갑니다. 죄악의 쓴물을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신앙생활을 해도 기도의 응답이 없습니다(사 59:1,2).
죄는 죄를 해결하지 못하면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힘들게 만들고 심지어 하나님까지 힘들게 합니다. 자식이 병들면 자식만 아픈 것이 아니죠. 자식 못지않게 부모의 가슴도 멍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의 죄악으로 고통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사 43:24에 보면 “네 죄 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죄의 쓴물은 인간의 힘으로 달게 할 수 없습니다. 수양과 도덕과 선행으로 쓴물을 달게 할 수가 없습니다. 고행을 해도 이 쓴물은 달아지지 않고, 어떤 종교를 믿어도 이 쓴물은 달아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마라의 쓴물을 해결하시기 위하여 한 나무를 지시하셨고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그 나무를 쓴물에 던지자 쓴물이 단물로 변화되었습니다.
쓴물에서의 구원은 하나님의 방법 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악의 쓴물을 해결하는 방법은 인간의 노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신 길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이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가 짊어지신 십자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 즉 쓴물을 치료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4:6에 보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사 53:5)고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해서 말했습니다.
죄의 쓴물을 가슴속에 갖고 고통과 절망의 처하여 여러 번 자살을 기도한 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를 상담하던 목사님은 그 원인이 죄책감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홀로된 어머니를 모셨습니다. 어머니는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그 딸을 잘 키워서 훌륭하게 자라게 하고 시집을 보냈습니다. 시집간 딸의 남편은 돈을 잘 벌지만 자주 출장을 갑니다. 딸은 어머니를 모시기 때문에 남편이 출장 갈 때 따라가지 못하고 늘 집에 있었습니다.
한번은 남편이 멀리 출장을 가는데 그 어머니가 자꾸 말합니다. “얘야 따라가라 따라가라. 나는 혼자서 집에 있으면 된다. 따라가라, 걱정하지 마라.” 그래서 남편을 따라 출장을 갔습니다. 출장을 다녀와서 보니 어머니는 홀로 죽어있었습니다. 그 죽은 시체를 안고 딸은 몸부림치면서 울었습니다. “내가 어머니를 죽였다. 어머니를 두고서 남편을 따라 출장을 가 있을 동안에 어머니가 몸이 아파 병들어도 도와줄 사람 없이 죽고 말았으니, 내가 어머니를 죽인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장례식을 한 다음부터 그 죄책감으로 고통을 당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부인의 마음에 죄악의 쓴물이 가득한 것입니다. 이 부인은 속에서 올라오는 쓴물 때문에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녀가 겪는 정신적인 고통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여인의 고통이 죄악의 쓴물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십자가를 통한 죄 사함의 원리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부인은 믿음으로 십자가를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나 때문에 나의 이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려 죽으셨나이까? 주께서 날 대신 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벌을 받는 것은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주님이 저를 용서하셨으니 저도 저를 용서합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나니 희한하게 그 마음속에 죄책감이 사라지고 용서와 의와 영광의 단물로 변화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이후로 그 자매님은 밝아지고 남편을 잘 섬기는 아내, 자녀들을 돌보는 훌륭한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새기십시오. 내가 내 죄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나의 죄를 주님에게로 옮겨졌고 주님의 의는 나에게로 옮겨진 것입니다.
2. 미움과 분노의 쓴물
죄의 값은 사망인데, 사망의 독 중에 미움과 분노가 있습니다. 미움과 분노는 자기를 파괴하고 남을 파괴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담, 하와 이후로 타락한 그 연고로 미움과 분노의 쓴물이 마음속에 있어 항상 그 미움과 분노의 쓴물을 토해내고, 그 물을 마시는 것입니다.
19살에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된 토스카니니는 음악적 재능으로 위대한 지휘자로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는 음악적 재능뿐만 아니라 불같이 일어나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성격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오케스트라 합주 연습을 할 때 연주자가 실수하면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주변에 있는 물건을 보지도 않고 집어던지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합주 연습을 할 때 한 연주자가 눈에 띄는 실수를 하자 즉시 얼굴이 분노로 굳어졌습니다. 그는 갑자기 지휘대에 놓아두었던 자신의 비싼 시계를 집어서 바닥에 던져버렸습니다. 그 시계는 고칠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으로 깨뜨려지고 말았습니다. 위대한 지휘자인 토스카니니의 분노의 불길은 자기의 값비싼 시계를 잃어버리는 손해만 봤지만 분노는 종종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잃어버리게 한다.
분노는 인생을 파괴하는 병적인 요소란 것을 영국의 유명한 해부학자인 존 헌튼이 말했습니다. 그는 “분을 내는 자는 자살하는 사람이다. 분과 노는 남을 괴롭히기 전에 자기를 죽인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는 해부학회의에 참석했다가 다른 의사가 존 헌튼박사를 비평하고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분을 내지 말라고 외쳤던 존 헌튼 박사가 분노해서 상대에 대항하다가 그만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죽고 말았습니다. 분을 내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그가 스스로는 분을 품다가 심장마비로 죽고 만 것입니다. 미움과 분노는 이와 같은 치명적인 파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제가 몇 주 전에 소개한 예화입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이런 실험을 한 것을 발표하였습니다. 개를 묶어놓고 개를 개패 듯이 4시간동안 팼습니다. 눈을 쳐다보며 몽둥이로 약을 올리며 쳤습니다. 개는 바짝 독이 올랐습니다. 만약 풀어 놓으면 죽일 듯이 결사적으로 덤벼들 정도로 약을 올렸습니다. 개가 독이 올랐습니다. 주사기를 꽂아 그 순간 피를 모두 빼보니 피 속에 시안이라는 독이 생겼습니다. 한 마리 개에서 나온 독을 주사하였더니 개 80마리를 죽일 양의 독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시험이 있습니다.
사람이 독이 오르면 개보다 시안이라는 독이 1.3배나 더 나온다는 시험결과입니다. 그러니까 혈기를 부리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미움을 품으면 몸이 독 때문에 망가져서 일찍 죽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말하기를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고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미움을 십자가에서 극복하였습니다. 죄 없으신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눅 23:34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미움과 분노를 이기신 것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는 사람들은 미움과 분노를 이길 수 있습니다.
김용문이라는 여자 집사님의 간증을 소개하겠습니다. 남편은 도박에 빠져있고, 늘 술에 취해서 생활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인이 행상을 하면서 연명을 했습니다. 너무나 고생이 심해서 골반이 삐뚤어져서 절름발이로 18년을 지냈습니다. 골반 뼈가 옆으로 손바닥만큼 튀어나왔습니다. 왼쪽다리가 끌려서 발을 절게 되었습니다.
다리를 끌면서 머리에 바구니를 이고 장사를 하니까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육신의 고통이 심했지만, 남편에 대한 원한과 미움으로 눈물 속에 살다가 그 미움과 분노 때문에 심신이 병들어 버렸습니다. 그런 괴로운 삶을 18년 동안 살다가 견디다 못해서 나도 교회에 나가야 되겠다 생각하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는 중에 남편에 대한 모든 원한을 예수님 십자가 밑에서 다 회개하고 용서하고 미움을 청산하게 되었습니다. 분노와 미움을 처리 하고나니 몸이 치유되기 시작했습니다. 속이 시원해지고 그동안의 소화가 되지 않고 신물이 늘 가슴속에서 솟구쳐 올라서 속앓이 많던 것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성령도 받고, 은혜도 받고, 기뻐하며 신앙생활하는 중에 하루는 잠을 자고 일어나니 18년간 튀어나왔던 골반뼈가 싹 들어가 버리고 다리도 깨끗하게 나아버리고 말았습니다. 미움과 원한과 분노가 그 영혼을 병들게 하고 그 위장을 병들게 하고 속앓이를 가져오고, 골반 뼈가 튀어나오게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끌어않고 그 남편을 용서하고 미움과 분노를 삭이고, 사랑하자 마음도 몸도 고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제가 이번 주에 망운중앙교회 부흥회를 인도하러 갑니다. 그 교회에 전에 여전도회 회장님을 하셨던 분의 간증입니다. 집회 후에 치유 사역을 하는데 그분이 기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가슴에 혹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분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용서하지 못한 사람을 용서해라”고 하는 영감이 왔습니다. 그래서 기도해준 후 용서하지 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기도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감동대로 용서하는 기도를 한 후에 가슴에 혹이 사라져버렸습니다. 미움과 분노를 내려놓고 용서할 때 십자가의 능력이 그 집사님에게 적용 되면서 치유가 일어난 것입니다.
3. 불안과 공포의 쓴물
사람이 죄를 범하면 마음의 불안과 공포의 쓴물이 생기게 됩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 하자 두려움 마음이 생겨서 하나님이 찾아오시니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오늘 날 과학문명이 발달해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에는 불안과 공포의 쓴물이 과거보다 더 많이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과거보다 더 많은 죄악이 이 세상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예일대학의 존 도널드라고 하는 교수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을 일곱 가지로 분석했습니다. 첫째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요, 둘째는 이성에 대한 두려움이요, 셋째는 자기 약점이 드러날까 하는 공포에서 오는 자기 방어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넷째는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요. 다섯째는 생각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요. 여섯째는 말하는 것에 실수가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요. 일곱째는 홀로 있기가 두렵다는 것입니다. 그것 뿐 이겠습니까? 경제적인 두려움, 관계의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 수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성경은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 말이 사실입니다. 두려움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 예화를 들어보겠습니다.
옛날 스페인에 페르디난도 5세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점을 쳤으며, 또한 그 점괘를 전적으로 신뢰했고 그 점괘를 가지고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하루는 왕이 점을 쳤는데 점쟁이가 "'마드리칼'에 절대로 가지 마십시오. 그곳에 가면 대왕마마는 반드시 죽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때부터 왕에게 있어 '마르디칼' 이라는 곳은 더없이 두려운 장소가 되어버렸습니다.
페르디난도 왕은 21년 동안 마르디칼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0여 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왕은 전국의 여러 지방을 순시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이름 모를 지방을 지나던 왕은 무심코 신하에게 "여봐라, 도대체 이곳이 어딘고?"하며 지역의 이름을 물어보았습니다. 신하는 "네. 이곳은 '마드칼레' 입니다."라고 지명을 이야기하니까, 왕은 부들부들 떨면서 "이곳이 마드리칼이라고? 마드리칼에 가면 내가 죽는다고 했는데." 이렇게 혼자 속삭이면서 떨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점쟁이가 말한 '마드리칼'하고 지금 왕이 방문하고 있는 '마드칼레'하고는 다른 지명이고 단지 비슷한 발음의 지명을 왕이 혼동한 것입니다. 왕은 '마드리칼에 가면 내가 죽는다고 했는데'하는 공포심 때문에 즉시로 몸져누워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신하들이 서둘러 유명한 의원들을 불렀으나, 왕은 이삼 일이 못 되어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으로 죽은 미국의 청년의 수가 30만 명인데, 그 아들과 남편을 전쟁터에 내보내구 염려 불안 공포 때문에 심장마비로 죽은 미국 시민은 백만 명이 넘었습니다. 불안과 공포는 살인자입니다. 전쟁에 나가 총에 맞아 죽은 군인수보다 그들을 보내놓고 염려와 불안으로 심장마비로 죽은 가족이 세배나 많았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테니스 선수였던 짐 길버트는 그가 다섯 살 되던 해에 어머니를 따라 치과병원에 가서 어머니가 치료받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치료를 받던 그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고 말았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린 길버트의 마음은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그가 자라서 유명한 테니스선수가 되었으나 그는 여전히 치과병원에 대한 공포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되게 되자 치과병원에는 가지 않고 자신의 주치의를 집에 모셔서 치료를 받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입에 치료기가 닿는 순간, 그도 역시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고 말았습니다.
죽음의 공포는 엄청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죽음의 공포보다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죽음의 공포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두려움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워싱톤에 가면 링컨이 애용하던 성경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 속에 손때에 이겨져 눌린 손가락 자국이 있습니다. 여러 번 같은 장소를 손가락으로 눌러서 생긴 자국입니다. 그곳은 시편 34편 4절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링컨은 전쟁과 관련된 모든 두려움을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은혜 안에서 이겼던 것입니다.
4. 좌절과 절망의 쓴물
우리는 마음속에 좌절과 절망의 쓴물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 좌절과 절망의 쓴물은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들은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부터 마음속에 좌절과 정말을 느낀 것입니다.
마음속에 좌절과 절망의 쓴 물이 가득하면 인생이 고통스럽게 되어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심하면 죽음을 선택하게 됩니다. 경북 포항시에 살던 32세 된 한 주부는 남편이 시어머니 살림솜씨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자주 야단을 치자 절망했습니다. 어느 날 두 아들을 죽이고 자신은 목메달아 죽었습니다. 주부의 유서에는 ‘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당신은 집에만 들어오면 고함을 치니 시어머니 빈자리를 채우기에 너무 부족한 사람 먼저 갑니다.’ 라고 써있다고 합니다. 안타가운 일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이해하고 십자가의 능력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산소망이 생기기 때문에 어던 절망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벧전 1:3-4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십자가를 통해서 거듭나게 하시고 산 소망 즉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에 속한 소망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독인의 유명한 신학자인 위르게 몰트만 박사는 희망의 신학을 말하는 분입니다. 그 배경을 잠간 소개하겠습니다. 그가 17세 때 2차대전 때 독일의 군인으로 징집되어서 전쟁에 나갔다가 포로가 되어서 영국에 포로수용소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당한 좌절과 모욕과 고통에서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자기의 고향 함부르크가 완전히 폭격으로 다 망해버리고 가족들이 폭격을 당해 다 죽었다는 말을 듣게 되어 완전히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멸시와 모욕을 당하며 살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고는 목을 매어 자살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어떤 목사님이 성경책 한권을 주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는 중에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왔는데, 세상이 하나님의 아들을 인정하지 못하고, 선을 베푸는데 선을 받은 자, 치료 받은 자, 은혜를 입은 자들이 일어나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고, 제자들도 다 도망쳐 버리고, 가장 외롭고 처절하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장면을 보고 자기의 절망과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지 사흘 만에 사망과 음부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장면이 몰트만 박사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가장 절망적인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보자 ‘나에게도 부활이 있을 수가 있구나, 나의 가슴속에 그리스도를 모시면 이 절망에서 부활이 일어나고, 그 파멸된 우리 독일이 다시 부활할 수 있고, 무너진 함부르크가 부활할 수가 있고, 나의 잃어버린 가족이 다시 나를 통하여 새로운 부활의 생명을 얻어 나도 가족을 이룰 수 있겠구나!’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는 소망의 주님, 부활의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프로수용소에서 무릎을 꿇고 예수를 구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 후 몰트만 박사는 그 어둡고 캄캄한 절망이 주님을 믿는 믿은 안에서 광명한 빛으로 변화되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이 희망, 이 희망을 어디에서 발견된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분의 부활입니다.
절망 중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십시오. 십자가를 통해서 공급되는 주님의 소망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예화 하나를 들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미국 켄터키 주립 정신병원에 캐롤이란 30대 후반의 여자가 입원을 했습니다. 이 여자의 병명은 ‘광기 우울증'입니다. ‘광기 우울증'의 증세는 평소에는 얌전하다가 한번 발작을 시작하면 성격이 거칠어져 물건을 집어던지기도 하고 칼을 들고 설치기도 합니다. 그리고 깊은 우울증 때문에 도저히 일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직장을 다니다가 쫓겨나고, 남편한테 이혼 당하고 결국은 정신병원 장기환자로 입원을 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녀를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고, 그녀가 언제 발작을 일으킬지 겁이 나서 옆에 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평소 다정했던 그녀의 친구 가운데 아주 믿음이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와 성경을 읽어주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의지하라. 십자가를 붙잡아야 질병과 싸워서 이길 수 있고,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고 말하며 그녀를 붙잡고 간절히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하고 반대하던 그녀도 찾아오는 사람이 그 친구 밖에 없고, 일주일에 한 번씩 꼭 찾아오니까 고마워서 그 친구가 하는 말을 조용히 들었습니다. 부활절이 다가오자 그 친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의 사건을 얘기해 주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사망권세를 이겼으므로 너도 이길 수 있다’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절 아침 그녀는 ‘내가 이겼으니 너도 이길 수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그 음성을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자신감이 생기고 마음에 용기와 기쁨이 넘쳤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고, 예수님만이 나를 이 질병에서 고쳐 주실 수 있고, 나를 승리하게 하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나도 광기 우울증을 이길 수 있다’고 계속해서 외쳤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입으로 시인할 때, 그녀의 증세는 서서히 사라지고 정상적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예수님께서 모든 질병을 고쳐주시고 승리의 기적을 허락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놓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나오는 신비한 능력이 우리 속에 있는 죄악의 쓴물, 미움과 분노의 쓴물, 불안과 공포의 쓴물, 좌절과 절망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줄 것입니다. 2008년은 쓴물이 단물로 변화되는 해가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