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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43-5 라반이 야곱에게
본문에서 모세는 마침내 야곱과 라반 사이에 다시 화목하게 되는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본문 43절은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떼는 나의 양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날 내 딸들과 그 낳은 자식들에게 어찌할 수 있으랴” 입니다.
이제 라반은 이전과는 판이한 태도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한계를 따라서 자기와 관련해서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는 더 이상 분쟁할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그는 이것을 확신하고 모든 투쟁을 묻어 버리면서 평온하고 다정한 말투로 옮겨갑니다. ‘우리 사이에 모든 일이 늘 그대로인 터에 내가 너를 적대시 할 이유가 무엇이냐? 내가 내 자신에게 분노하랴? 이는 네 아내와 자식은 다 내 혈육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 모두가 내 일부인 듯이 너희에게 애정을 품어 마땅하다’ 고 말합니다. 라반은 이제 존귀한 자처럼 묻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적인 정은 갑자기 그의 가슴 속 어디에서 솟아나는 것입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야곱을 파멸시키려는 일념으로 옳고 그른 것을 안중에 두지 않은 채 허겁지겁 달려 왔습니다. 이제 라반은 야곱이 성실로써 자기를 봉사해 왔고 자기에게 신실하게 행동해 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몰래 탈출할 계획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렇게 뒤늦게나마 이런 방식으로 알게 된 것은 그가 완전히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는 증거였습니다.
우리는 도저히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철면피한 자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정연한 논리에 압도되어서 할 말이 없으면서도 상식이하의 저돌적인 억설로 좌충우돌 하는 자가 많습니다. 이런 자들을 많이 볼지라도 우리는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비록 탐심과 다른 죄스러운 애욕이 건전한 판단력을 마비시킨다고 하더라도 인간 영혼에 새겨진 진리 지식은 남아있다고 추리할 수 있습니다.
이 지식을 불러 일으키면 희미한 빛을 발산하여 천지에 만연한 타락의 승리를 방지합니다. 이보다 앞서 누가 라반에게 ‘라반이여, 이 무슨 행동인가? 자기 소생에게 노를 발하다니 이 무슨 금수같은 것인가?’ 라고 말했더라도 그 충고가 귀에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완고하였습니다. 또 그는 격렬한 분노로 불타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라반이 다른 사람에게서 묻고 싶지 않던 말을 자기 입으로 선언하고 자발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공의의 빛이 그의 마음 벽을 부수고 나와 비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 빛이 그의 가슴 속에서 질식당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 눈을 어둡게 만드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사랑 뿐 일 때 입니다. 개인적으로 이해 관계가 걸리지 않은 일에서는 누구나 다 올바른 판단을 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일시적으로 당황하는 입장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때에 우리는 이성과 정의가 제시하는 양심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어느 누구라도 악에 빠져서 완악하게 되면 그 사람 내부에 감춰져 있는 지식이 그 마음 속에 새겨진 채 남아 있어서 그를 정죄하게 될 것입니다.
2. 본문 44-46절은
“(44) 이제 오라 너와 내가 언약을 세워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45) 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46) 또 그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 하니 그들이 돌을 취하여 무더기를 이루매 무리가 거기 무더기 곁에서 먹고” 입니다.
라반은 여기서 죄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으레이 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죄를 의식하는 자들은 복수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싶을 때 이런 말과 행동을 병행합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전율과 불안은 그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당연한 결과입니다. 더욱이 악인들은 항상 자기 심정을 기준으로 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일 수입니다. 이렇게 하여 악인들은 사면팔방에서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방비책을 씁니다. 모세는 앞에서 아비멜렉이 이삭과 언약할 때에도 다소 비슷한 본을 기록했습니다(26:26-33).
그러므로 우리가 평온한 마음을 소유하고 싶다면 우리 이웃 사람들에게 성실히 행하고 피해를 주지 않도록 보다 큰 주의를 기울여야 됩니다. 그러는 동안 모세는 야곱이 얼마나 유순하며 얼마나 쉽사리 회유에 응하는지를 묘사합니다. 그는 그 동안 아주 억울한 많은 일들을 참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을 다 잊고 스스럼없이 좋은 뜻으로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권리를 방어하는데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라반이 먼저 돌을 취해 기둥으로 세울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편 34편 14절에서 명령받듯이 신속히 화평을 받아들이고 부지런히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에게 어울리는 태도입니다.
돌무더기를 쌓는 것은 어떤 의식으로 쌍방 계약을 견고하게 하는 관례였습니다. 그 돌무더기는 그들 의식에 맞는 언약을 후손에게 기념물로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야곱이 이 행사에 참여 한 것은 그가 화평 지향적인 마음을 가진 자라는 증거였습니다. 그는 불평을 해야 할 때에는 거침없이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화평을 도모해야 할 시기가 오자 자기가 앙심을 깊이 간직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모세는 그 다음에 그들이 돌무더기 곁에서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사건 순서를 주목하지 않고 있습니다. 쌍방은 잔치를 즐기기 전에 언약 조건에 동의하고 언약 성립을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3. 본문 47-48절은
“(47)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칭하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칭하였으니
(48) 라반의 말에 오늘날 이 무더기가 너와 나 사이에 증거가 된다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갈르엣이라 칭하였으며” 입니다.
야곱과 라반은 그 돌무더기에 각각 자기 언어로 명칭을 부여하는데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라반은 헤벨(또는 에벨; 헤버; 창10:21, 삿4:11, 눅3:35) 족속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가 아랍 방언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조금 앞에서 그는 두 번씩이나 아랍 사람이라고 불리웠습니다(20, 24절).
모세는 그를 히브리인에게 멀어진 타락자로 묘사하려는 듯이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앞에 나온 기사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라반의 딸들이 자기 아들들 이름을 히브리 식으로 지었다는 것을 읽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문제 해결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 두 언어 간에는 유사한 점이 많아서 단어 변용이 용이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만일 야곱의 아내들이 유순했다면 야곱의 언어를 습득했을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그리고 야곱도 당연히 이 문제를 중요시했을 것은 자기 가족이 다른 민족과 구별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갈르엣이란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예상 가능한 어법을 쓰고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 시대를 위해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서슴지 않고 일반적으로 용납되던 명칭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여기서 의례와 의식이 쌍방 간에 합의를 보아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을 가리켜야 한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규칙은 또한 성례전에 적용되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는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말씀이 제거되면 아무 소용없는 죽은 상징만 남습니다. 그것이 미사입니다.
4. 본문 49절은
“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 피차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감찰하옵소서 함이라” 입니다.
라반은 그들 중 어느 한 쪽이 상대방 부재시에 그에게 어떤 죄를 범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판결에 그 복수를 맡기고 있습니다. 그는 마치 ‘내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침해의 소식이 비록 내게까지 이르지 못하더라도 여호와께서는 무소부재하신 분이기에 그 일을 주목하실 것이다’ 라고 말하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그 다음에 ‘우리와 함께 할 자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너와 나 사이에 증거 하시느니라’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자기 기분을 보다 명백히 표현합니다. 그가 이 말씀으로 나타내려고 하는 의미는 비록 세상에 그 사건을 결정할 재판관이 없더라도 하나님께서 모든 악에 대해 준엄한 복수자가 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만일 우리들 안에 경건한 신앙이 번창하고 있다면 우리는 인간들이 관찰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에서 더 큰 영향을 받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의 눈만 중시하는 현상은 금수같은 우리 육신의 우매성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증언에 의해서 유죄를 선고받지 않으면 벌을 면하기라도 하는 듯이 인간의 눈을 의식함으로써 항상 살아 계신 하나님을 조롱합니다. 만약 그 때에 인간에게 공통된 이 자연스런 감정이 사람들에게는 은폐된 기반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라반에게 가르쳐 주었다면 지금 복음의 빛을 향유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자기 잘못에 대한 은신처를 찾으려는 노력을 진심으로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여기에서 맹세의 합법적 사용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도가 히브리서에서 공언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들의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판결에 호소한다는 것입니다.
5. 본문 50-52절은
“(50)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취하면 사람은 우리와 함께 할 자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너와 나 사이에 증거 하시느니라 하였더라
(51) 라반이 또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너와 나 사이에 둔 이 무더기를 보라 또 이 기둥을 보라
(52) 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않을 것이라” 입니다.
라반은 야곱이 만약 다른 아내를 취하면 그것은 일종의 위약이 될 것이라고 공언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야곱에게 가장 저질적인 중혼을 강요한 것은 바로 라반 자신이었습니다. 라헬 대신 레아를 교묘히 바꾸지 않았던들 야곱이 어떻게 한 아내 이상을 두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라반은 아비된 순수한 감정에서 자기로부터 출발된 중혼의 잘못을 정죄합니다. 비록 한때 탐욕에 눈이 어두워 그런 악행을 조장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아버지다운 순수한 감정으로 돌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 세상에서 결혼 언약보다 더 신성한 것은 없습니다. 만일 그 약정이 파괴된다면, 인간 사회 전체가 틀림없이 쇠퇴하고 부패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일부다처제를 옹호하려는 광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에게는 달리 재판관이 필요 없습니다.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라반이 곧 그들에게 심판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심판관이시라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6. 본문 53절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 하매 야곱이 그 아비 이삭의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고” 입니다.
1) 라반이 하나님 이름으로 야곱에게 간청한 것은 참으로 올바르고 적절한 행동이었습니다 쌍방이 다 인정하는 하나님께 위약을 벌하지 않고 용납하시는 일이 없도록 호소하는 것은 언약을 확증하는 행위인 까닭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라반은 공통점이 전혀 없는 참 하나님과 우상을 혼용하여 죄를 범했습니다. 이와 같이 미신에 빠진 사람들은 신성한 것과 속된 것, 또 참 하나님과 우상을, 그리고 택하신 자들의 하나님과 보통 세상이 말하는 하나님을 섞어버립니다. 또 인간이 만들어 낸 것과 참 신을 뒤죽박죽으로 혼동하는데 익숙합니다. 라반은 마지못해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약간의 영광을 돌립니다. 그렇지만 우상 숭배에 오염된 자기 버릇은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는 자기 신앙이 더 악하게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오랜 세월로 집약된 이상한 보호색을 띠고 있습니다. 참으로 모호하여 어른거리는 색깔입니다. 그는 신을 자기 아버지의 하나님이라고 부름으로써 이 신이 자기 선조들로부터 전해진 하나님이라는 것을 자랑합니다. 한번 뭉뚱거려서 거슬러 올라가 보십시요. 쓸만한 인물을 몇이나 만나겠습니까?
2) 반면에 야곱은 미신적인 방식으로 맹세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서 야곱은 정확하게 구별하고 있습니다. 이는 야곱이 ‘이삭의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했다고 모세가 분명히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야곱은 자기 장인이 말한 부자연스러운 형태의 맹세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악인의 호감을 사려고 그들과 같은 종교에 속하는 것처럼 가장하는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유일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일단 알게 되었을 때 진리의 빛으로 모든 오류의 구름이 흩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진리를 악하게 억압하고 있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진리를 억압하는 것은 곧 그분을 억압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죄입니다.
7. 본문 54절은
“야곱이 또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형제들을 불러 떡을 먹이니 그들이 떡을 먹고 산에서 경야하고” 입니다.
야곱은 자기를 학대하였던 자들을 자기 친족으로 그리고 빈객으로 정중히 맞습니다. 그리고 이로써 야곱은 자기 친절을 증명했습니다. 이제 성자 야곱을 파멸의 위협 속으로 몰아넣던 극히 두려운 폭풍이 지난 뒤 평온과 청명이 갑자기 빛을 발하였습니다. 모세는 이것이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잇달아 나오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라반은 우호적인 방식으로 떠났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놀라웁게도 늑대 입에서 잃어버린 양을 건져내듯이 야곱을 구출하셨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여호와께서는 자기 종의 수호자이라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명시하셨습니다 참으로 라반의 맹렬한 분노가 가라앉았습니다. 그것 뿐 만이 아닙니다. 그가 마치 새로운 사람으로 탈바꿈한 듯이 부성애까지 발휘하였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 하신 결과입니다.
8. 본문 55절은
“라반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그들에게 축복하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더라” 입니다.
1) 우리는 여기 라반을 통해서 나타나는 인간 품성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라반은 진정한 경건에서 부터 타락하였습니다. 그리고 잡스럽고 악한 태도를 소유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축복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로써 악인의 마음에도 신적 지식의 어떤 원리가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악행을 무지의 소치로 돌릴 수가 없습니다. 복을 선언하는 관습은 인간의 확신에서 비롯합니다. 즉 인간은 모든 선한 것을 창조하시는 자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교만하게도 마음에 드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제 공로인 것처럼 자칭합니다. 그렇지만 올바른 정신으로 돌아올 때는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모든 선이 하나님께로부터만 나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어떻게 할 수 없어서 그렇게 합니다. 그럴찌라도 그의 정신만큼이나 그가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으로 취하여 고백하고 예배하는 하나님은 늘 흐릿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지자에게서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가 늘 귀동냥을 해서 얻어 듣고 자기와 사람들의 생각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2)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에게 자기를 계시하실 때 판명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선지자들을 두십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리십니다. 그들 안에서 돋아나는 오류를 늘 제거해 주십니다. 따로 구별해 놓으십니다. 좋은 제도와 직분들을 주십니다. 각종 하나님의 은혜의 혜택을 주십니다. 하나님 자신의 부요를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일생을 감사히 살게 하십니다.
출처: 예장 서울노회 원문보기 글쓴이: 최정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