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 투항' 강제동원 해법…한국민에 굴욕 안긴 '외교 참사'
[시민언론민들레 | 이유 에디터] 2023.03.06 15:30
한국기업 돈으로 대신 변제…일본 전범기업 면죄부
강제동원 피해자 "1엔도 낼 수 없다는 일본의 완승"
시민사회단체 "일본 사죄·배상 없는 해법 인정 못해"
미국 "역사적 발표" 환호…한국민 정당한 요구 외면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한 컨퍼런스 빌딩에서 한일 정상 약식회담에 앞서 인사하고 있다.2022.9.22. 연합뉴스
윤석열 정부가 6일 공식 발표한 일제 강제동원(징용) 피해자 배상 해법은 “대승적 결단”이라고 포장했지만, 일본에 백기 투항해 한국민에 굴욕을 안긴 ‘외교 참사’로 기록되게 됐다. 박진 외교부 장관이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한 강제동원 배상 관련 ‘윤석열 해법’은 △ 제3자 대신 변제 △ 한‧일 양국의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발전적 계승, 두 가지다. 불법 행위를 저지른 일본 전범 기업(미쓰비시중공업‧일본제철)의 사과와 배상 참여는 온데간데없었다.
2018년 한국 대법원의 배상 확정판결을 얻어낸 피해자들이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몇 푼의 돈이 아니라 자신들의 청춘을 망가뜨렸던 일본 정부와 전범 기업의 진심 어린 사과와 그 진정성을 믿게 할 수 있는 배상 참여였다. 그러나 윤 정부는 그들에게 면죄부만 준 꼴이 됐다.
6일 오후 대전 서구 둔산동 보라매공원 노동자상 앞에서 지역 시민단체가 결성한 평화나비대전행동이 일제 강제동원 피해 배상 문제에 대한 정부의 발표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2023.3.6. 연합뉴스
피고 전범기업 대신 한국 기업이 판결금 지급
윤 정부가 공개한 ‘제3자 대신 변제안’을 보면, 한국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재단)이 피고인 전범 기업을 대신해 확정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에게 “판결금(위자료)과 지연이자”를 지급하겠다는 것이다. 미쓰비시중공업 2건, 일본제철 1건이 해당된다. 또한 현재 계류 중인 소송들도 피해자들의 승소가 확정될 경우 같은 방식을 적용하겠다고 했다.
재원 조성은 “민간의 자발적 기여” 등을 통해 마련하겠다는 게 윤 정부의 설명이다. 피해자들에게 지급할 판결금 규모는 40억 원 수준이다. 현재로선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의 혜택을 받은 포스코와 한국전력 등 한국 기업들의 기부금만으로 조성하는 방안이 유력하다. 한국 기업이 돈을 대고 한국 재단이 판결금을 대신 갚게 되면 일제 식민지지배의 피해자인 한국 정부와 기업이 불법 행위의 책임을 떠맡는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이 6일 기자회견에서 한국 정부의 강제징용 해법 발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의견을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 정부 ‘성의 표시’ 요청에도 일본 요지부동
윤 정부는 한국이 먼저 피해자들에 대한 판결금 변제를 시작하면 일본 기업의 자발적 기금 출연 등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을 기대했으나 일본은 요지부동이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정부는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강제동원과 군대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일제 과거사 문제는 법적으로 모두 해결됐다는 ‘일관된 주장’에서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회견에서 박진 장관은 향후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을 기대한다는 뜻을 내비쳤으나 지금까지 보여온 일본 정부의 완강한 태도로 볼 때는 피해자들에겐 ‘희망 고문’일 뿐이다.
강제동원 피해자측 법률대리인인 임재성 변호사(법무법인 해마루)는 SNS 글을 통해 “한국 기업 돈으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채권이 소멸되는 꼴”이라며 “강제동원 문제에는 1엔도 낼 수 없다는 일본의 완승”이라고 윤 정부의 ‘저자세 굴욕 외교’를 질타했다.
사과 형식에도 문제가 있다. 불법 행위에 대한 일본 정부와 피고 전범 기업의 구체적인 사과는 없이, 윤 정부는 기시다 정부와의 조율을 통해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1998년 10월 8일)의 발전적 계승을 다짐했다.
공동선언을 통해 당시 오부치 게이조 총리는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지배로 인하여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면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거론했다. 그러나 손해 배상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6일 오전 광주 서구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사무실에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가 '제3자 변제'를 골자로 한 정부의 징용 피해배상 문제 해결 방안 발표를 지켜보고 있다. 2023.3.6. 연합뉴스
미국·중국·대만 피해자들엔 사과…한국만 외면
특히 전범 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이 2015∼2016년에 걸쳐 미국과 중국, 대만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돈을 지급했으면서도 한국 피해자들만 외면해온 셈이다. 이와 관련, 기시다 총리는 이날 오전 참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해 “역사 인식에 관해서는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해 왔고, 앞으로도 이어갈 것”이라고만 말하고 명확한 답변은 피했다고 연합뉴스가 전했다.
윤 정부의 '제3자 대신 변제안'은 피고 일본 기업의 참여가 배제됨으로써 피고 기업에 위자료(판결금) 지급을 명령한 한국 대법원의 판결 취지와 배치된다. 윤 정부가 한국의 사법주권 무력화에 동조하는 모양새다. 이날 외교부 고위당국자는 '제3자 변제'로 인한 일본 피고 기업에 대한 '구상권' 행사는 상정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완전한 면죄부가 아닐 수 없다. '제3자 변제안'을 거부하는 피해자들과 관련해 윤 정부는 아직 정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다만 일각에서는 윤 정부가 피해자들을 계속해서 설득하되 그렇지 못할 경우 채권을 '공탁'할 가능성도 큰 것으로 보고 있다. 그 경우 공탁의 유·무효를 다루는 소송이 불가피하다.
한편 정의기억연대, 민족문제연구소, 민주노총 등 611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은 이날 서울 외교부 청사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피해자를 향한 사죄와 배상이 없다면 그 어떤 해법도 인정할 수 없다”며 윤 정부의 '제3자 변제안’ 철회를 요구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일(현지시간)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열린 민주당 하원의원 연찬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민주당의 입법성과를 강조하며 반도체법을 언급했다. 2023 03 01.연합뉴스
한편, 미국은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에 대한 윤 정부의 ‘제3자 변제안’이 일본 전범 기업의 사과와 배상 참여를 배제함으로써 피해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묵살한 방안인데도 불구, 조 바이든 대통령과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까지 직접 환호하고 나서 한국민의 반발을 예고한다.
바이든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오늘 한국과 일본의 발표는 미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 간의 협력과 파트너십에 신기원적인 새 장을 장식할 것"이라고 평가했고, 블링컨 장관도 “역사적 발표를 환영한다"고 격찬했다고 연합뉴스는 전했다. 대중국 봉쇄를 위한 한‧미‧일 3자동맹 구축에 매몰된 정치공학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미국 스스로 더 큰 논란을 자초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