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스타샤의 울음
정민디
플리트비츠 호수의 아름다운 마력을 뒤로 하고 ‘자다르(Zadar)’에 왔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양이 있는 항구’라고 극찬한 곳이라 기대가 있었다. 자다르는 크로아티아 북서부 아드리아 바닷가에 접한 도시이다.
인구 450만의 크로아티아는 대한민국 면적의 55% 크기에 다뉴브 강과 아드리아 해 사이에 위치한 초승달 모양의 국가다. 슬라브 족이 대부분인 이 나라는 유고 연방을 유지하려는 세르비아와 전쟁을 거치며 이전의 탄탄한 경제가 쇠락했다. 종교는 87%가 가톨릭이다. TV프로그램 「꽃보다 누나」를 통해 이 아름다운 지역이 한국 사람들에게도 널리 소개되어 이 나라 경제에 적지 않게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한다.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자 우리의 인솔자인 최 팀장은 “자, 다같이 ‘아들이야, 아들이야’라고 외쳐볼게요.” 한다. 영문을 모른 채 모두 따라 했다. 드디어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 왔고 그것은 ‘아들이야’와 비슷한 발음이라는 것이었다. 과연 한 번 외치고 보면 이 바다 이름이 쉽게 기억은 되겠다. 최 팀장은 아들 없는 사람이 포세이돈 신에게 아들을 점지해 주십사고 부탁해볼 만한 곳이라고 싱겁게 얘기했다. 딸이 없어 늘 아쉬움이 있는 내가 따라 할 필요는 없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지중해 아드리아 바닷가로 걸어갔다. 바닷바람이 얼굴을 때릴 때, 크게 파도가 칠 때마다 바다는 컹컹 울음소리를 냈다. 음울한 감정이 잡히면서 그 울음의 정체가 궁금했다. 이 도시에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작은 떨림으로 다가왔다. 낯선 상상적 경험을 느끼고 싶어 호기심이 절로 났다. 몇 번의 여행에서 ‘아우라’라는 것을 많이 생각했고 그리고 느꼈다. 풍경 또는 풍속의 속살을 만나 이야기를, 바람을, 빛을 느끼는 여행은 아우라를 보러 가는 것이리라. 벤야민(W. Benjamin)은 외부 세계와 내면 의식의 순간적 통일성, 세계의 근원이나 자연 사물과의 순간적 합일을 “아우라(Aura)의 경험”이라고 말했다.
최 팀장은 아무래도 식후경을 먼저 선택했다. 점심 메뉴가 ‘달마시안 스테이크’라고 한다. 아니 특식이라더니 그 점박이개의 고기라고? 눈이 휘둥그레진 우리들을 보고는 얼른, 이 도시가 달마티아 지역의 주도(州都)이고 실제로 그 점박이 개가 달마티안(달마시안) 토종개라고 한다. 오늘 점심고기가 ‘개’가 아니고 ‘소’라 했는데도 먹으면서 혹시 까만 점이 있나 살펴봤다.
달마티아 관문에 자리한 자다르는 3000년 고대 도시다. BC 1세기 이후로 로마제국의 지배에 들어가면서 발전을 거듭했다. 시저는 이곳을 점령하자 바로 요새를 건설하였고 그 뒤를 이어 로마제국의 최초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이곳에 견고한 성벽을 쌓았다. 자다르는 아드리아 해의 다른 도시들과 달리 6~7세기 사이 로마 전역을 폐허로 만들었던 아바르( Avar) 유목 민족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아바르 족은 로마 도시들을 침공하면서 수많은 교회와 사원들을 파괴했다.
1204년 베네치아 공화국은 제4차 십자군전쟁의 운송비를 마련하지 못한 십자군 측에 도시를 하나 달라고 제안하는데 그곳이 다름아닌 자다르였다. 과거 자다르는 달마티아 해안에서 가장 중요한 곳으로 상선과 여객선이 자주 드나드는 주요 기항지였다. 결국 3년간의 치열한 전쟁 후 자다르나 아드리아 해안을 손에 넣은 베네치아는 약 800년간 이곳을 다스린다.
크로아티아 달마티안 지역 자다르는 14세기말 최초의 대학이 세워진 도시이자 고대 로마제국의 유물이 가득한 곳이다. 이런 연유로 자다르는 ‘지식인의 도시’라고 불린다. 유럽인들이 선정한 2016년 유럽 최고 도시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이 작은 도시가 얼마나 옹골차게 역사와 자연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로마제국 멸망 이후 파괴되고 또 파괴되어 상처투성이였던 자다르지만 크로아티아 인들은 다시 만들고 어루만져 매력 넘치는 도시로 재탄생시켰다.
점심 후 본격적으로 도시를 순례했다. 비수기에 여행하게 되어 더 많은 감성을 누릴 수 있을 거라고 최 팀장은 재차 강조했다. 성수기에 오면 긴 줄서기로 시간에 쫓겨 허둥지둥 뭘 보고 갔는지도 모를 정도라 했다. 과연 그랬다. 어딜 가나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코리언도 아예 없었다. 이번 여행은 EU 회원국인 체코,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일정이었다. 여행 중 많은 도시를 방문하였으나 가장 인상적으로 남은 도시가 자다르였다. 유럽인들이 뽑은 가장 아름다운 도시가 맞았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유로로 다 통용됐는데 크로아티아만이 아직 유로를 쓰지 않고 ‘쿠나’라는 화폐로 환전해야 했다. 관광 산업에 의존하는 나라라서 그런지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영어를 잘해서 편리했다. 나로드니 광장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안드레아 보첼리’의 노래 소리가 울려 퍼졌던 광장 앞에는 죽기 전에 꼭 가 보아야 한다는 세계 건축물에 오른 자다르의 상징 ‘성 도나투스 성당’이 있다. 4세기 초반 육각형 모양의 이 성당은 높이 20미터 지름 23미터의 아치가 로마 양식의 기둥을 받치고 있다. 성당은 중세초기 정치적 종교적 압력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어 가치가 높다. 성당 앞 광장은 매년 여름 음악회가 개최되는데, 유수의 음악가들이 오고 싶어하는 곳이라고 한다. 곧이어 성당 정면에 아름다운 두 개의 장미창이 보이는 아나스타샤 성당으로 이동했다.
아나스타샤의 울음
성 아나스타샤 성당은 달마티아 지방의 가장 큰 성당으로 4~5세기 건축, 11세기 십자군에 파괴, 12~13세기 로마네스크 방식으로 재건, 1943년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파괴, 1989년 복원되는 과정을 거쳤다. 정면에 보이는 두 개의 장미 문양 창이 독특하다. 아나스타샤는 자다르의 수호성인으로 기독교를 박해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신앙을 버리지 않아 화형 당한 로마 귀족 여성이다. 후에 비잔틴과 자다르 사이의 화해의 표시로 도나트 주교가 그녀의 유해를 자다르로 옮겨와 성인으로 봉헌했고 성당에는 대리석 석관과 유품이 있다.
성당 옆에는 심상치 않은 ‘수치심 첨탑’이 서 있었는데, 무심히 걸어가던 최 팀장이 갑자기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고 뒤돌아섰다. 역시 얘기는 야사(野史)가 최고지. 나는 울고 있는 바다의 궁금증을 완성시켜야 했다. 많은 여행자를 인솔해 크로아티아에 오는 최 팀장이 역사의 진위고 뭐고 동네에 전해오는 얘기를 들은 것이 사실이지 아무렴.
“제가 이 사실(?)을 깜빡하고 지나칠 뻔했습니다. 성 아나스타샤는 흑사병이 창궐할 때 동방에서 많은 약초를 가져와 병자들을 치료하였는데 이방인이고 이교도 여인이라고 마녀로 취급되었습니다, 조금 전 본 첨탑에 발가벗겨져 매달렸다가 참수되었다는 슬픈 얘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나중에 로마 가톨릭에서 동방의 여성 성인에게 매우 드물게 봉헌한 성당이랍니다.” ‘수치심 첨탑’이 1840년까지 계속 유지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울음이 있었을까. 그래 바닷가에 다시 가서 울음소리에 정체를 밝히리라. 정녕 그 소리가 아나스타샤의 울음이란 말인가.
바다 오르간(Sea Organ)
과연 이 바닷가의 비통한 소리는 이교도 여인의 울음소리였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세르비아와의 전쟁의 상흔, 부침이 많았던 상처투성이의 역사, 억울하게 죽은 순교자들이 토해내는 울음을 예술로 승화시켜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바다가 토해내는 이 오르간 소리를 울음으로 느꼈다면 많은 사람의 공감대를 울리는 데 성공한 것이 아닐까.
세계 유일의 바다가 연주하는 파이프 오르간. 해변을 따라 만든 75미터의 산책로에 넓고 길게 계단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계단 하나의 35개의 파이프가 작은 구멍 안에 설치되어 있다. 파도의 크기, 속도, 바람의 세기에 따라 바닷물이 공기를 밀어내며 구멍 사이로 소리를 내는데 그 영롱함이 마치 파이프 오르간 소리와 비슷하다. 이 구멍은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커다란 피아노 건반을 연상시키는데 계단 위 구멍에 발을 대고 있으면 떨림도 느낄 수 있다. 출렁대는 파도와 교묘한 구조물이 빚어낸 바다 오르간은 건축가 ‘니콜라 바시츠’가 2005년에 만든 작품이다. 섬마을에서 자란 그는 파도가 칠 때 절벽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파도에 부딪치는 빗소리를 듣고 자랐고 그 소리가 바로 바다 오르간은 만들게 한 원동력이다.
바다의 오르간이 있는 그곳에서 또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태양의 인사(Sun Salutation)’다. 이 또한 니콜라 바시츠의 작품이다. 태양부터 명왕성까지 태양계를 크기와 거리의 비례에 맞춰 배열해놓은 300개의 태양열 집열판은 낮에 모아둔 태양열을 이용해 매일 밤 시시각각 멋진 빛의 공연을 펼친다. 이 설치 작품은 낮에는 물론 밤에도 태양은 지속된다는 주제를 가졌다. 자다르는 큰 전쟁을 여러 번 겪으며 철저히 파괴된 슬픔을 가진 도시다. 우울하고 암울했을지도 모르는 이 도시가 이토록 낭만적이고 생기 넘치게 된 것은 밤이면 빛의 향연을 펼치는 이 작품의 활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바다 오르간’과 ‘태양의 인사’가 없었다면 여느 유럽과 비슷한 중세 도시로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셰익스피어가 이곳에도
처절한 아름다움을 가진 섬과 자다르 시에 여러 문호들이 관심이 없을 리 없었다. 셰익스피어 역시도 놓치지 않았다. 대표 희곡 「십이야」는 1600년대 이탈리아 설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으로 쌍둥이 남매 세바스찬과 비올라가 탄 배가 일리리아 섬에 난파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고 있다. 일리리아는 자다르 근교의 코르나티(Kornati) 군도의 한 섬인데, 작품의 배경이자 꿈과 낭만이 가득한 곳으로 묘사되어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또 다른 작품 「베네치아의 상인」에 나오는 사악한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돈을 갚지 못하게 된 안토니오에게 말했다. 이제 너의 속살을 내게 달라고 속삭이듯, 그의 십자군들 뱃삯 대신 그토록 갈구하던 ‘자다르’를 정복해 넘겨줄 것을 거래 조건으로 내걸었다. 유구한 역사와 풍광이 버무려진 이곳에 문학 또한 당연히 깃들어 있었다. 현재는 지중해에서 약 147개의 가장 많은 수를 가진 이 섬은 상주인구는 없고 올리브, 포도과수원 등을 가꾸는 사람들이 오고 갈 뿐이다. 극작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신들이 자신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마지막 날에 눈물과 별과 바다의 생명으로 만든 곳이 코르나티 군도”라고 찬사를 바쳤다. 코르나티 군도는 각양각색 365여 개의 작은 섬들을 지칭하는데 그중 150개는 매우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아드리아 해의 푸른 빛 바다와 보라(Bora: 국지풍)의 향취가 어우러진 코르나티 군도는 지중해의 요트 천국이라 불리며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점심 후 자유 시간이 많이 생겼다. 축구 강국답게 슬라브 민족의 남녀들이 장대한 키를 자랑하며 도시를 누비고 있었다. 월드컵 경기에서 인상 깊게 본 빨간색과 흰색 체크무늬의 유니폼이 크로아티아 국기에 있다. 이 체크무늬가 상징하는 것은 승리와 영광이라고 한다. 10세기말 베네치아의 총통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2세는 부를 차지하기 위해 크로아티아를 침공했다. 크로아티아의 왕 스테판 드르지슬라프를 포로로 잡았다. 총통은 체스가 취미였는데, 왕도 체스가 수준급이라는 것을 알고 승부욕이 발동하여 내기를 했다. 체스를 이긴다면 풀어주는 조건이었다. 훗날 이 승리를 기념하여 체스 판의 무늬를 민족을 상징하는 체크무늬로 삼았다고 한다.
무심하고 무뚝뚝해 보이는 슬라브 족 키다리들이 걸어가는 길을 요리조리 피하며 걸었다. 뭘 먹어서 그렇게 용맹하고 장대한지 레스토랑의 메뉴라도 열심히 보았다. 그리고 자다르 시의 고풍스러운 골목골목을 먹이를 찾는 고양이처럼 흘러다니며 형형색색의 집을 훔쳐보았다. 날이 계속 흐려서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없었던 게 아쉬웠다.
이번 여행은 삶이 꽃이 되는 순간이었다. 아드리아 바다의 울음으로 손수건을 적시며 수도 자그레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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