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멋쟁이 김동길 교수 ♣
지난 4일 소천한 김동길 박사는 ‘멋쟁이’로 유명했어요
“이게 뭡니까”라는 유행어를 남긴 보수 원로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는
언제나 단정한 양복에 색색깔의 나비넥타이를 매고
가슴엔 손수건(행커치프)을 꽂는 것이 트레이드 마크였지요
그는 1928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나
1946년 분단 후 월남하여 연세대 영문학과를 졸업했어요
미국 유학(에반스빌대 사학과 석사, 보스턴대 철학 박사) 후 연세대로 돌아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본격적으로 현실 정치를 향한 비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지요
군사정권 시절 비판적인 글을 쓰다가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아 대학에서 해직됐어요
이내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후 복직했지만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며
다시 한번 해직됐지요
이후 민주화운동과 거리를 두며 보수 쪽으로 기운 김 교수는
1991년 강의 도중 ‘강경대 구타치사 사건’에 대한 폄하 발언으로
학생들의 반발에 부딪혀 결국 스스로 강단을 떠났어요
그런 그는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현실 정치인으로 활동하기도 했지요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1992년 창당한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14대 국회의원이 된 고인은
“이게 뭡니까”라는 유행어를 낳으며 대중적 인지도를 얻었어요
이때부터 늘 길렀던 콧수염과 매고 다녔던 나비넥타이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지요
그러나 신민당과 자유민주연합 등에서 활동하다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탈당하며 정계 은퇴를 선언했어요
그뒤 말년에는 보수 논객으로 활동했지요
방송과 언론 기고 등으로 논평을 했던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 생전에
“국민에게 사과하는 의미에서 자살이라도 해야 한다” 등의 글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려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어요
지난해까지 유튜브 채널 ‘김동길 TV’를 운영했고
올해 초에는 안철수 당시 국민의당 대선 후보 후원회장을 맡기도 했지요
평생 독신으로 지낸 고인의 시신은 생전 서약에 따라 모교인 연세대 의과대학에 기증됐어요
서대문구 자택은 누나인 고 김옥길 여사가 총장을 지낸 이화여대에 기부됐지요
유족으로는 누이인 옥영·수옥씨가 있어요
그런데 TV 방송에 ‘월요일의 논객’으로 불리던 김동길 박사는
지팡이를 집고 느릿느릿 등장한 노신사가 대본 혹은 메모지 한 장 없이
특유의 유머와 직설로 시청자를 사로잡는 모습은 실로 감탄을 자아내게 했지요
나비넥타이만 이삼백개가 있다는 김동길 교수는 ‘낭만논객’으로 큰 사랑 받았어요
김동건 아나운서와 가수 조영남씨가 티격태격하면 이를 중재하기 위해
위트와 너털웃음을 동원하던 김동길 교수의 여유와 수완은 남 달랐지요
평생 독신이었지만 “여성 곁을 떠나본 적이 없다”는 짓궂은 답변처럼
김동길 교수는 중장년 여성 팬들을 몰고 다녔어요
어떤 왕팬 중 한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품격을 잃지 않는 최고의 신사”라며 좋아 하였지요
어떤 여인들은 멋진 콧수염의 그를 할리우드 배우 '말런 브랜도'에 견줄 정도였으니
그 인기는 실로 대단 하였지요
그런 그가 ‘낭만논객’에서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했을때는 가슴이 뭉클 했어요
노다지를 찾겠다며 집 떠난 아버지 대신
남의 집 빨래하고 삯바느질하며 생계를 이어간 어머니는
가난한 형편에도 딸 김옥길을 공장 대신 학교를 보내 총장으로, 장관으로 키워낸 여장부였어요
“나이가 구십이어도 삶의 이 모퉁이 저 모퉁이에서 어머니가 그리워진다”던
김동길 교수는 어머니를 품에 안고 운명하는 모습을 지켜봤던 이야기를 들려 주었지요
“고통을 다 끝내고 마지막 숨을 길게 내쉬었을 때 어머니 얼굴에 감돌던 미소를 잊을 수 없어요.
평생 가난과 싸우다 자식들이 성공하니 또다시 병마와 싸워야 했던 어머니의 미소는
‘나는 인생을 승리한 사람이다’라는 뜻으로 읽혔지요.”
그는 이제 그토록 그리워하던 어머니 품으로 돌아 간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김동길 교수는 서양문화사 강의를 연세대 강의실이 아니라 강당에서 했어요
2000명이 넘는 수강생을 수용할 강의실이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출석부가 77쪽에 달했어요
아니 출석 체크가 불가능했지요
그래도 결석자는 적었어요
청강생이 더 많이 들어와 강당 정원을 초과할 때가 많았지요
그의 강의는 힘이 있었고 유머가 넘쳤어요
김 교수를 흉내 낸 최병서의 개그보다 그의 강의가 더 재미있고 위트가 있었지요
엄청난 재능과 인기의 연속이었어요
글과 말에서 동시에 달인은 드물지요
김 교수는 실로 드문 사람이었어요
타고났기 때문만은 아니었지요
그는 20여년 동안 매일 아침 6시 미국 한인 방송을 통해 강연을 했어요
방송국 사정 때문에 갑자기 결방 소식을 들은 날에도 마이크 앞에서 그냥 강연했다고 하지요
글도 200자 원고지 석 장씩 매일 썼어요
김 교수는 “혼수상태가 될 때까지 글을 쓰겠다”고 했지요
실제로 병석에 들기 직전인 지난 설날까지 글을 올렸어요
그는 덩치도 컷지만 강골이었지요
대학 때 도봉산으로 단체 친목회를 갔다가 깡패들을 만났어요
가진 것을 내놓으라고 협박당했지요
그러자 감히 누구를 협박하느냐며 김 교수 혼자 다 때려눕혔어요
당시 유일한 여학생이던 고(故) 심치선 교수의 생전 증언이지요
그런분이 하루 한 끼만 드셨어요
그러나 자택에서 식사를 함께 해보고 의문이 풀렸지요
그릇 크기가 대단했고 양도 상당했어요
김교수의 비상한 기억력도 유명했지요
시 300수를 외웠다고 하지요
누군가가 몇 편 암송을 부탁 하자
시마자키 도손, 윤선도,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3편을 순식간에 암송했어요
그런 그는 “키를 눌렀는데 시가 안 나온다? 그때가 인생 끝나는 때”라고 했지요
손윗누이인 고 김옥길 선생처럼 그도 사람을 좋아했어요
대문을 열어 놓고 살았고 종종 자택에서 냉면 모임을 했지요
많은 식객이 신세를 졌어요
그 가운데 부하까지 몰고 와 냉면을 가장 많이 먹고 간 사람은
5공때 김 교수를 가장 많이 핍박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다고 하지요
50여명을 데리고와 100그릇 넘게 먹고 빈대떡까지 싸갔다고 하는데
김교수의 진면목을 알고 난뒤 부터는 가장 존경하는 교수로 예우했다 하지요
노년엔 여든 넘은 지인들과 함께 100세 클럽을 만들었어요
멤버였던 백선엽 장군과 김병기 화백이 백 살을 넘기고 세상을 떴났지요
김형석 교수와 김창묵 선생은 여전히 건재하지요
11년 전 생일,
김 교수는 세브란스병원 의료원장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내가 죽으면 장례식, 추모식은 일체 생략하고
내 시신은 의과 대학생들의 교육에 쓰여지기 바란다”고 했지요
그리고 “누가 뭐래도 이 결심은 흔들리지 않는다”며 도장까지 찍었어요
그는 일생 자유민주주의를 전파하면서 살았지요
그래서 그런지 가는 길도 자유인이었어요
-* 언제나 변함없는 녹림처사(일송) *-
▲ 사진은 1995년 당시 민주당 조순 서울시장 후보 유세에 지원을 나선 김동길 교수의 모습.
▲ 보수진영 원로 인사인 김동길 연세대 사학과 명예교수가 지난 4일 별세했어요
향년 94세. 사진은 1992년 통일국민당 시절 김동길 명예교수의 모습.
▲ 올해 1월 당시 국민의당 대선 후보였던 안철수 의원의 새해 인사를 받는 김동길 명예교수의 모습.
첫댓글 거인 이죠
그래요 맞아요
거인중에 거인 이었지요 ~~
네 ~
김교수님의 윗트와 구수하고 멋진 모습을 뵐수없어 아쉽습니다
김옥길 총장님과 함께 기독교문학을 공부 했던 그리움도 추억으로 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셨군요
그래요 교수님은 다방면에 능통하셨지요 ~~
2019년 6월 1일 기준으로 안짱병조심합시다^^
훌륭하고 멋을 아는 분인 것 같습니다
많은 것을 남기고 가셨네요
조은 글 감사 드립니다
그래요 맞아요
근래에 보기힘든 석학이면서도
조국을 많이 사랑하셨지요 ~~
김동길교수님 당당하시고 멋진 삶을 사시고
선한영향력 많이 남기고 잘 가셨습니다. 샬롬
그래요 맞아요
다시 뵐수 없어 넘 안타깝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