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5일 째 : 열차 숙박 후 진강. 양주의
수서호. 최치원 기념관, 개원 관광
열차 속에서 잠을 잤는데도
그런대로 몸의 컨디션을 좋은 편이다. 술 먹고 떨어져 그래도 푹 잔 까닭이리라.
진강역에 도착했다. 중국에서 가장 긴 장강과
수나라 때 파놓은 대운하가 교차하는 유서 깊은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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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강역에 도착, 그래도 컨디션은 좋은
편이다. | 진강역에 도착해 아침은 역 바로 옆의 부페 같은데서 아침을 먹었다. 꽤 비싼
듯한 음식점이다. 종업원들로 아름다운 중국 스타일의 제복을 입고 있었으며 얼굴도 이쁘다. 메뉴는 중국사람들이 아침으로 잘 먹는다는 빵과
야채 종류이다. 그런대로 맛있게 먹고 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몇 사람이 부채를 들고 운동을 하는 것 같다. 아마도 중국의 전통무술인
태극권의 자세를 연습하는 지도 모른다. 중국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겠다. 그런 운동은 공기도 좋은 공원에서나 하지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역
광장에서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들 전통의 허세나 자기 과시욕이 있어서 그런가????
진강역에서 자동차를 타고 수서호로 이동을
했다. 수서호에 도착 많은 사람들의 인파에 놀랐다. 아침 8시가 조금 지나서 수서호 매표소에 도착했는데, 사람들로 북적댄다. 아무리
연휴라고 해도 이렇게 일찍부터 사람들이 많으니 한국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 인 것 같다. 한국에서는 외국 관광객만 깃발을 따라가며
설명을 듣는데, 이곳 중국에서는 중국 내국인의 경우에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빨간 제복을 입은 휴대용 마이크를 착용한 가이드와 깃발이
여기저기 눈에 뜨인다. 그래도 여기에 놀러 온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중류 이상 정도는 될 것 같은 생각입니다. 중국에서 상위 5%의 부자들은 이런
곳에 오지도 않고 외국으로 관광을 간다고 합니다.
중국의 평균 1인당 국민소득은 1천 달러 정도이니 부자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연
소득은 1만 달러가 넘는 사람이 6천5백만 명 이라고 하며 바로 중국에서 상위 5%에 드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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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강역 광장에서 부채를 들고 태극권을 연습하고 있는
중국인 |
우리나라 상류층보다는 부유층에 대한 기준이 좀 낮은 편이지만 우리나라의 1인 당
국민소득과 맞먹는 사람들이 6천5백만 이니까 우리나라의 인구보다도 많은 것 입니다. 더군다나 중국은 우리보다 물가가 훨씬 쌉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누리는 생활은 우리나라에서 1만 달러 버는 것보다 훨씬 부유한 생활을 하는 것이지요. 중국에서 1만 달러가 넘는
부유층 사람들은 아파트도 60평 이상에서 살고 고급 외제차에 웬만한 일반 사람 3년치 월급에 맞먹는 56인치 프로젝션 TV등 고급 가전 제품들을
다 갖춰 놓고 삽니다. 참고로 여기에서 우리나라 고급 가전 제품들이 인기라고 합니다. 또 중국은 아이를 1명 밖에 낳을 수 없기 때문에
상류층의 자식에 대한 투자와 애정은 우리나라보다도 더한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중국에선 아이들을 "소황제"라고 한답니다. 또 그
"소황제"를 잡기 위한 우리나라를 비롯, 전세계 기업의 마케팅 역시 활발하다고 합니다. 실로 중국의 13억 인구의 위력을 실감케
합니다.
수서호는 양주에 사는 염상(소금을 파는 대상)들이 청나라 건륭제를 접대하려고 파놓은 위락 단지였다고 한다. 옛날
양주성을 보호하려고 강을 파 놓았던 것을 개조했다고 하며 건륭제가 와 낚시를 하는 정자는 금색을 칠해 표시를 해 놓았으며 낚시를 할 때면 아부를
하기 위한 신하들이 물 속에 들어가 낚시 바늘에 금붕어을 달아 놓아 황제를 즐겁게 하여 오래토록 머물게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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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기념관 입구에서. |
호수에는 우리의 나룻배와는 다른 기와 지붕 형태의 천정을 한 배가 다니고
있었고, 시간이 있으면 뱃놀이를 하며 술 한 잔 먹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많은 사람들 속에서 가이드를 잊어버려 헤메일 것을 생각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특히 3호 차의 가이드 춘향이는 깃발을 꽂을 깃대를 가지고 오지 않아 나뭇가지를 꺽어 깃발을 맨 것이 특이해서 알아보기
쉬웠다.
수서호의 넓이가 얼마가 되는 지는 모른다. 여하튼 큰길을 가로 질로 24교 등 옛 사연이 있는 유적들을 걸어온 것
같은데, 가이드 설명도 시원치 않고 그저 몇 장의 사진만 찍었을 뿐이고 수서호 후문으로 나왔을 때에는 전부 피곤해 여기저기 주저앉아 쉬고
있었다.
다음 관광지는 양주 최치원 기념관이다. 옛날 양주성의 지도를 보니 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성 주위를 강을 만들어
놓았다. 신라 말 3최라 하여 최언위, 최승우와 함께 천재라 일컬어 지던, 고운 최치원 나이 열 세살에 당나라에 유학 가서(869년)
18살에 빈공과에 합격(874년) 선주 율수현위를 시작으로 승무랑시어사 내봉공까지 승진한 최치원은 885년에 귀국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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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서호의 전경. 대청호보다는 작지만, 아기자기
하다. | 당시 중국 정세가 어수선했던 시기에 “토황소격문”으로 이름을 날렸던 최치원은,
아마도 무인 이었다면 어지러운 당시를 평정 했겠지만, 문인인 그는 뜻을 펼치지 못하고 신라로 귀국을 하였으나 당시 신라도 최치원의
신분은6두품으로, 골품제의 사회였기에 많은 제약이 있었고, 간신들의 농간에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인사로 들어가 종적을 감추었던 인물로 기록
된다.
아직 최치원의 기념관은 한국에 있는 최씨의 문중 재산으로 현재 건설 중에 있으며 내년에 완공 예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관람료는 중국에서 받으니 구경하면서도 뭔가 께름직한 면이 있다.
최치원 기념관에서 가까운 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양주 땅은 볼거리도 많지만, ‘양주볶음밥’과 ‘사자두’도 유명하다고 한다. 사자두는 70%는 비계이고
30%는 살코기인 돼지갈비로 완자를 만들어 작은 불로 삶은 요리이며 익으면 완자표면의 비계는 대체로 용해 되어 녹지만 완전히 녹지 않아 살코기가
삐쭉삐쭉 돋아나와 사람들에게 털이 부숭부숭한 감을 준다고 하는데 완자가 크고 표면이 부숭부숭하기에 사자머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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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낙시를 하던 황금빛 정자가 오른쪽에
보인다. | 그런데, 가이드에게 설명은 듣지 못했지만, 이 요리를 먹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식사를 하고 들른 곳은 사대 정원중에 하나인 개원이다. 개원은 1818년 대부호였던 황지균이 지었다는 정원이 있는 개인
집인데 지금은 공산당의 재산이 됐다는 곳이다. 중국의 정원의 건축은 산이나 연못으로 골격을 이루고, 꽃이나 나무와 일체가 되어 정원의
풍경을 만든다고 한다. 따라서 그 곳은 놀이와 휴식을 위한 장소일 뿐 아니라 풍경을 관상하는 곳이라 한다. 나름대로의 주방,
여주인이 손님을 접대하는 방 등, 정원과 대나무 숲이 아름답게 어울러져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허지만 가산(假山)을 표시하기 위해 서산의
태호석으로 만들어 놓은 각종 조형물과 미로는 전부 세멘트로 부착을 시켜 놓아, 당시의 만들어 놓았다기보다는 후대에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주어
고고학적인 면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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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의 흉상 | 개원을 보고
연운항을 향해 다시 버스를 탔다. 버스 속에서 가이드는 중국의 고사를 들어가며 여러가지를 이야기 해 주었지만,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나는 몇 가지가 있다면 상해의 거지 이야기다. 해방일보 기자가 거지 행세를 하며 거지들을 밀착 취재한 결과, 상해의 거지가 중국
시골의 농부보다 훨씬 잘 산다고 한다. 거지 대장의 월 수입은 무려 4,000위안까지 된다고 한다. 초창기 상해의 많은 거지들은 없애기
위해 정부는 공안을 동원하여 거지를 일제 소탕하여 몇 천 킬로 떨어진 중국의 변방에 정착시키려고 풀어놨다고 한다. 그런데, 공안이 상해에
돌아와 보니 자기가 잡아간 거지가 벌써 상해에 와 있었다고 한다. 거지는 가지고 간 돈으로 택시를 잡아 타고 상해에 돌아오고 공무원인
공안은 스케줄에 따라 기차를 타고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상해의 거지들이 돈 버는 방법은 어린 아이들을 사와 앵벌이를 시키고, 고급
술집이나 호텔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상대로 그 앞에서 장미꽃을 파는 일을 시킨다고 한다. 꽃을 사주지 않으면 말로 행패를 부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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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정원였다는 개원. | 우리들의
마지막 지정된 곳은 연운항 리조트. 연운 시내에서 항구 쪽으로 한참을 가서야 도착했다. 왜 그리 멀리 잡았는지 모르겠다. 숙소를 시내에
가깝게 잡으면 자유시간에 시내구경도 할 수 있어 좋으련만….
저녁을 먹고 우리 일행은 크게 두 팀으로 갈라졌다. 재래 시장 구경
팀과 마사지 팀 이다. 그런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사람이 모여 시내로 가려 하는데, 가이드들이 택시를 불러 준다고 했다가 안 된다고
하고, 버스를 부르는데도 대절료를 턱도 없이 올려 불러 나중에 가까스로 네고를 했다고 한다. 여행객들을 위해서 차량을 불러주는 것에서도
그들의 마진을 붙여 먹으려고 하는지 서비스 정신이 눈곱만큼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지금까지 틈틈이 써 두었던 여행기를 정리하려고 호텔에
남았지만, 2시간을 노트북을 보고 나니 내일이면 중국을 떠나는데,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시내에 나갔던 사람들을 찾아
보았다.
호텔 주변을 돌아도 한가한다. 바닷가 쪽 나무 계단 쪽을 가니 몇몇 중국 사람들의 말 소리 밖에 들르지 않는다. 더
내려가 귀를 기우리니 한국말 소리가 들린다. 순간 반가운 마음에 그 쪽으로 다가서서 말을 건넸다. “합류해도 되겠습니까?” “네,
앉으세요.” 기꺼이 받아 주었다. 그런데, 이게 웬 소리??? 내가 앉자마자 자기소개를 하고 노래 두 곡을 부르라고
한다. 순간 당황을 했지만, 소개라야 별로 할 것도 없어서 안양에 살고 여기에 온 경유 등 너스레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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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버들이 늘어지 양주 수서호의 24교. | 어떤 사람이 나이를 묻는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소개도 나이도 안
들었는데, 혼자만 발가벗는 느낌을 받았지만, 여기에 낀 이상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말했다. “오십대 입니다.” 아마도
구체적으로 몇 살 이냐고 물었다면 그 자리를 일어섰을지도 몰랐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없어 그제서야 앞에 있는 사람들을
보았으나 달빛을 뒤로 하고 있어 얼굴이 보이질 않는다. 이미지가 본 듯도 한 여자분이라 적이 안심이 되었다.
나는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몇 마디 말을 했지만, 처음부터 먹은 사람들의 술 좌석에 끼는 것은 역시 한계가 있음을 느꼈다. 그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웃는 정도였지만, 그 중에서 입담 좋은 한 사람의 이야기와 “벌바송”은 오랜만에 들어보는 걸쭉한 노래였다. 내 기억에 대학
다닐 때, 술 먹고 취해 불렀던 노래였기 때문이다. 그 노래는 ‘벌바~~, 벌바의 매력을 알아볼까…. 얼씨구 좋다, 기화자 좋다.~~.’로
시작되는 술 먹은 남자들만의 고상하다고는 할 수 없는 노래다. 또 다시 입담은 오가고,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한 술 좌석의 음담패설이
오가니 한 사람, 두 사람이 자리를 뜬다. 이 모임도 파장에 접어 드는 것 같다. 나도 일어설 때가 된 것 같아 인사를 하고 일어났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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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마지막 밤을 보냈던 연운항 리조트
전경 | 호텔 방의 술 판이 벌어진 듯한 방을 열린 문틈으로 살짝 보니 반갑게도
대구 팀이 술 판을 준비한다. 구세주를 만난 듯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반갑게 맞아 준다. 그런데, 방이 좁아 보여 우리 방으로
옮기자고 제안하고 술 판을 벌렸다. 술은 먹다 보니 맥주가 모자라다. 술을 사러 리조트 내의 가게를 가보니 12시가 넘어 문을 닫아
버렸다. 다들 술을 더 먹고 싶은 눈초리지만, 술이 없으니 어쩔 방도가 없다.
12시가 넘었는데, 시내까지 술 사러 나갈
수도 없고….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일생의 한 번 뿐인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청하기로
했다. |
첫댓글 재밌습니다. 같이 여행했지만 모르는 것도 많았구요.. 책 내시면 사드릴게요^^
아이고, 황송한 말씀 다 하시네요? 책을 쓰다니요. 빠진 것도 많지만, 그저 잊고싶지 않아서 적은 낙서인데... ^^
추억의 현장속에 가끔 등장한 저도 기억을 더듬어보며 즐겁게 읽었습니다
멋지십니다!!! 연재(?)하신 글 잘읽었습니다..식사중 여권보여주셔서, 제 옆에 계신분이 젊어보이신다 했는데, 생각은 더 더 젊으신 분^^
ㅎㅎㅎ, 식사중에 여권을 보신 분이시군요? 저보다 출입국 도장이 더 많은시다는 분이시지요? 저야 놀러가는 관광은 황산이 처음이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