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 "명량"이라는 영화가 연일 관객 동원의 신기록 행진 중인데
여기에서 조선군의 배가 12척의 배라고 나오는데 역사적 사실은
12척이 아닌 13척이기에 이 기회에 바로 알아보자고
2년 전에 써 뒀던 글인데 사료 원문을 추가해 이 글을 다시 올립니다.
명량대첩(鳴梁大捷)당시 의문점의 진실과 울돌목
우리 군선은 12척? 13척?
거북선은 있었나?
왜군의 군선은 133척? 333척?
울돌목이라 하면 우리 진도사람들에게는 남다른 애착이 가는 곳이고 우리나라 모든 사람들에게도 명량대첩의 전승지로 각인된 친근한 이름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북산 용샘에 도굿대(절굿공이)를 넣으면 3일 만에 울돌목으로 나온다는 구기자 노인 전설과, 울돌목 인근 벽파정 당할아버지의 전설들을 “옛날에 깐날에 호랭이 담부 먹든 시절에…….” 함시로 시작되는 우리 함씨의 이학(이야기)을 들으면서 자랐고, 조금 더 큰 뒤부터는 진도읍 뒷산인 북산(철마산, 망적산)에 자주 올라 거기 망대(望臺) 아래 있는 용샘에 놀러다녔으며 또한, 강강술래, 노적봉, 백토물 이야기 등 이순신 장군과 얽힌 이야기와 함께 임진왜란과 명량대첩에 관한 얘기들을 많이 들으며 자랐습니다.
명량해협(鳴梁海峽)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사전에는
명량해협(鳴梁海峽)『지명』전라남도 해남군 화원 반도와 진도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 ≒노돌목ㆍ명량02(鳴梁)ㆍ울돌목. 이라고 등재 되어있고,
또 한국학중앙연구원(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편수 편찬하는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 나온 명량해협(울돌목)의 설명을 보면
명량해협(울돌목)[정의]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과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
[개설]명량해협은 울돌목이라고도 한다. 명량해협은 이충무공의 3대 해전 중의 하나인 명량대첩지로 잘 알려진 서해의 길목이다. 전라남도 해남과 진도 간의 좁은 해협인데, 바다의 폭은 한강 너비 정도의 294m 내외이다. 물길은 동양 최대 시속인 11노트에 이르며 젊은 사나이가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물소리가 크고, 거품이 일며 물이 용솟음쳐 배가 거스르기 힘든 곳이다.
[명칭유래]명량해협은 바다라기보다 홍수 진 강물로 보일 정도로 물길이 소용돌이쳤다가 솟아오르면서 세차게 흘러내려 그 소리가 해협을 뒤흔들 정도이다. 거기에다 어느 때는 아주 깊은 음정으로 크게 우는 소리를 내는데, 이를 두고 사람들은 “바다가 소용돌이쳐 운다.”고 말한다. 이로 인해 ‘울돌목’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 명량해협은 ‘울돌목’의 한글 표기를 대신한 한자 표기이다.
[자연환경]명량해협은 한반도 남쪽 땅 끝인 해남과 섬지역인 진도 사이에 끼여 있는 좁은 바다를 말한다. 바다 폭이 평균 500m에 불과하다. 행정구역으로는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와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사이의 바다 폭이 가장 좁다. 그 폭은 평균 300m 안팎이다.
명량해협은 가장 좁은 지점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팔 모양처럼 점차 넓어진다. 그래서 이 지점은 명량해협의 물목이 된다. 명량해협은 폭이 좁을 뿐 아니라 해구가 깊은 절벽을 이루고 있어 흐르는 물살이 여기에 부딪쳤다가 솟아올라 물소리가 우렁차다. 바닷물은 해협을 하루에 네 번씩 교차하는데, 아침 무렵에는 남동쪽인 완도 방면에서 목포 방면인 북서쪽으로 흐른다. 라고 나와 있으며,
또한, 유속에 대해서는 “수심 평균 5.5m/s, 바다 표층은 최대 6.5m/s 에 달하고 하루 두 차례 밀물과 썰물이 한길 넘게 차이가 나고 거품이 인다.” 로 기록 되어 있습니다.
그 외 울돌목의 이름에 대한 기록들을 보자면
“1886년 김정호가 지은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울두정(蔚斗頂)으로 표기돼 있는데, 이는 토박이 지명인 ‘울두목’을 한문을 빌려 쓴 이두식 표현으로 ‘울대’와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고 한다.”
또 “조선 선조 때 판중추부사 유두수가 진도를 가르켜 ‘가장 중요한 관방지역(最爲緊關之地)’이라 했고, ‘동국여지지’의‘ 해로 요해지지(海路 要害之地)’는 모두 울두목(咽喉之地)을 지칭하고 있다한다.”
“소용돌이치는 급류가 흐르면서 암초에 부딪혀 튕겨 나오는 울음소리가 20리 밖에까지 들려 바다가 운다고 해서 명량(鳴梁) 또는 울돌목이라고 불리고 있다.”
“사람의 울음틀 목청인 ‘울대(咽喉之地)’형상을 닮았다고 해서‘울두목’이라 한다.”
라고도 나와 있는데 이들 기록 모두가 모두가 우렁차게 나는 물소리와 관련된 말들이었으며 제가 어릴 때도 “울돌목”과 “울둘목”을 함께 사용했었습니다.
그리고
앞에 말씀드렸다시피 이곳이 임진왜란의 정유재란 때인 음력 1597년 9월 16일(양력 10월 25일)에 이순신 장군의 조선함대 13척이 133척의 일본 함대를 맞아 극적으로 승리한 세계 해전사에 전무후무한 기록 “명량대첩”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명량대첩에서 지금까지 이론이 많은 주요 쟁점 네 가지가 있는데
첫째, 명량해전 당시에 조선의 배가 12척이었느냐? 13척이었느냐? 이고
둘째, 그 가운데 거북선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이고
셋째, 일본 수군의 배가 333척이냐? 133척이냐? 와
넷째, 명량해전 당시에 울돌목에 쇠사슬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인데 이 네 번째 의문은 워낙 이론이 많은 부분이라 오늘 저는 이 문제는 추후로 미루기로 하고,
그 중 첫 번째 쟁점인 12척과 13척의 정답은 13척입니다.
하지만 우리 초등학교 <생활의 길잡이 2•2 -아름다운 우리나라>교과서에 보면 12척이라고 나와 있기도 합니다만,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명량대첩에 동원된 선박 숫자가 13척임이 확실합니다.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 1597년 선조 30년 정유년 11월 10일 자(음력)에 이충무공께서 직접 올린 장계 내용으로 분명히 ‘신(이순신 장군)이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김억추 등과 전선 13척, 초탐선(哨探船) 32척을 수습하여’라는 대목이 분명히 나옵니다.
近又據陪臣兼三道水軍統制使李舜臣馳啓, 閑山島潰敗以後, 兵船、器械散失殆盡。 臣與全羅右道水軍節度使金億秋等, 收拾戰船一十三隻, 哨探船三十二隻, 於海南縣海路, 要口把截, 而有戰船一百三十餘隻, 從梨津浦前洋向來, 臣督水使金億秋、助防將裵興立、巨濟縣令安衛等, 各整兵船, 於珍島碧波亭前洋, 與賊交鋒, 冒死力戰, 以大砲, 撞破賊船二十餘隻, 射殺甚多, 賊衆漂溺海中, 斬首八級。 賊船中有大船一隻, 建羽葆紅旗, 圍靑羅帳, 指揮諸賊, 圍把我船, 有鹿島萬戶宋汝宗、永登萬戶丁應斗, 繼至力戰, 又破賊船一十一隻, 賊大挫, 餘賊遠退。 有陣中投降倭, 指紅旗賊船, 認是安骨賊將馬多時。 獲賊物畫文衣、錦衣、漆函、漆木器、長(搶)〔槍〕二柄等因, 已經節次, 咨報査驗外。 今據前因照得, 自閑山陷敗之後, 迤南水路, 賊船縱橫, 衝突可虞, 卽目小邦水兵, 幸得少捷, 稍挫賊鋒, 因此賊船, 不得進入西海。
<<朝鮮王朝實錄 - 宣祖實錄 三十年(1597年), 三十年 十一月, 宣祖 30年 11月 10日>>
근래 또 배신 겸 삼도 수군 통제사(兼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치계에 의하면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 병선과 병기가 거의 다 유실되었다. 신이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 김억추(金億秋) 등과 전선 13척, 초탐선(哨探船)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海南縣) 해로의 요구(要口)를 차단하고 있었는데, 적의 전선 1백 30여 척이 이진포(梨津浦) 앞바다로 들어오기에 신이 수사(水使) 김억추, 조방장(助防將) 배흥립(裵興立), 거제 현령(巨濟縣令) 안위(安衛) 등과 함께 각기 병선을 정돈하여 진도(珍島) 벽파정(碧波亭) 앞바다에서 적을 맞아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운바, 대포로 적선 20여 척을 깨뜨리니 사살이 매우 많아 적들이 모두 바다속으로 가라 앉았으며, 머리를 벤 것도 8급이나 되었다. 적선 중 큰 배 한 척이 우보(羽葆)와 홍기(紅旗)를 세우고 청라장(靑羅帳)을 두르고서 여러 적선을 지휘하여 우리 전선을 에워싸는 것을 녹도 만호(鹿島萬戶) 송여종(宋汝宗)·영등 만호(永登萬戶) 정응두(丁應斗)가 잇따라 와서 힘껏 싸워 또 적선 11척을 깨뜨리자 적이 크게 꺾였고 나머지 적들도 멀리 물러갔는데, 진중(陣中)에 투항해온 왜적이 홍기의 적선을 가리켜 안골포(安骨浦)의 적장 마다시(馬多時)라고 하였다. 노획한 적의 물건은 화문의(畫文衣)·금의(錦衣)·칠함(漆函)·칠목기(漆木器)와 장창(長槍) 두 자루다.’ 하였는데, 이미 절차대로 자보(咨報)하고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지금 앞서의 연유에 따르면,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부터 남쪽의 수로(水路)에 적선이 종횡하여 충돌이 우려되었으나 현재 소방의 수군이 다행히 작은 승리를 거두어서 적봉(賊鋒)이 조금 좌절되었으니, 이로 인하여 적선이 서해에는 진입하지 못할 것입니다.<<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 30년 정유(1597년) 11월 10일(음력)>>
이렇게 충무공께서 조정에 직접 올리신 장계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듯이 정사의 기록이 확실한데도 왜 12척 이야기가 계속 나오느냐 하면 -
이순신 장군께서 명량대첩이 일어나기 전인 정유년 8월(음력)에 선조 임금께 올린 상소에 “신에게 12척의 배가 있으니…….”라고 적혀 있는 “상유12(尙有十二)”란 말이 워낙 유명해서인데, 상유십이 순신불사(尙有十二 舜臣不死)로도 알려진 그 원본 내용을 보자면
自壬辰至于五六年間。賊不敢直突於兩湖者。以舟師之扼其路也。今臣戰船尙有十二。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今若全廢舟師。則是賊之所以爲幸。而由湖右達於漢水。此臣之所恐也。戰船雖寡。微臣不死。則賊不敢侮我矣。<<李忠武公全書[조카인 정랑(正郞) 이분(李芬) 지음] 李忠武公全書卷之九 -附錄 -行錄과 李忠武公全書卷之十三 -附錄五○紀實 -上 >>
임진년부터 5~6년간 적은 감히 호남으로 곧바로 쳐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이는 수군이 그 길목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 죽기로 힘을 다해 싸운다면 오히려 해 볼만 합니다. 만약 수군을 폐한다면 이것은 적이 가장 기뻐하는 바로서, 호남을 거쳐 한강으로 올라올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비록 전선의 수가 적지만, 미진한 신(李微臣)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충무공의 조카인 정랑 이분이 지은 이충무공전서 제9권과 제13권 부록에 올라있는 상소문 내용>>
이 상소를 올릴 당시인 8월에는 12척이 있었고, 그 뒤에 판옥선 1척이 더 합류한 것이 확실합니다.
이는 지난 2009년 서울 광장의 이순신 동상 밑에 있는 12·23 광화문 분수의 이름에 대해 논란이 있을 때, ‘임진왜란 해전사"를 쓴 해군사관학교 이민웅 교수도 언론을 통해 “명량대첩 전투에 사용된 배는 13척이 맞다. 처음에 선조에게 상소문을 썼을 때는 12척이었지만 명량대첩 당시에 1척이 늘어나 13척으로 싸운 것이 사실”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상유 12 상소문> 이후에 추가된 1척은 어떤 배냐? 하는 의문이 남는데, 일설에는 전라 우수사 김억추가 1척을 가져 왔다고도 하고 또 한편에서는 녹도 만호 송여종이 1척을 가져왔다고도 하는 서로 다른 설들이 있습니다.
이에 저는 그래도 이충무공에 관한 사항은 현충사에서 가장 잘 알 것이라 생각이 되어 2011년 9월 21일과 22일 이틀에 걸쳐 제가 직접 전화 통화로 제가 소속한 협회의 책자에 나갈 것이니 자료를 찾아 확실한 고증을 해 달라고 부탁해서 확인한 바로 당시 현충사 관리사무소 기획운영과 과장 송대성 재무관(현충사 041-539-4602)의 대답은
* 13척은 정사인 선조실록의 충무공이 직접 올린 장계와 이항복이 지은 전라 좌수영 대첩비문으로도 확인할 수 있으므로 이론의 여지가 없겠고,
* 마지막 1척이 추가된 것은 지금까지 가장 믿을 만하게 고증되었다는 이형석장군 저서 임진전란사에서도 녹도 만호 송여종이 가져 온 것으로 확인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또, ‘경상 우수사 배설이 도망가면서 1척을 타고 도망갔으므로 다시 12척이다.’ 하는 얘기까지 있으나,
난중일기 의 初二日庚寅。晴。是曉。裵楔逃去。<亂中日記> 내용으로 배설이 배를 타고 도망을 간 것은 벽파진에 온 지 3일째이고 명량해전이 있기 14일 전인 9월 2일(음력)의 일인데,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과 이성령(李星齡)의 춘파일월록(春坡日月錄)을 보자면 “배설은 휘하 군사들을 버리고 성주의 본 집으로 갔다.”고 했으므로 배설이 타고 도망간 배는 협선으로 협선이라 하면 판옥선에 딸린 자선에 불과하니 군선이라 할 수 없는 그냥 지금의 연락용 보트 정도의 배입니다.
그 결과로 첫 번째 정답은 상유12 상소문 이후에 녹도 만호 송여종의 판옥선 1척이 추가되어 전선 13척이 명량해전에 참여 한 것은 확실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13척 전선은 모두가 판옥선으로 거북선(龜船)은 1척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둘째의 정답은 ‘명량해전 당시에 13척 중 거북선은 1척도 없었다.’입니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거북선이 존재했으나 이충무공이 모함에 빠져 옥에 갇히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해군을 맡아 전쟁을 치르는 동안의 패전 때에 모두 없어진 것으로 나옵니다.
그럼 세 번째 의문은?
첫댓글 비젼과 약속의 땅 珍島에서 태어남을 자랑으로 여기며 여기서 그치지 말고
내고향의 역사와 아름다움을 인지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사명감을 느낍니다.
내가 태어나 잔뼈가 굵은 어머니 품같은 고향이기 때문에.......
진도가
역사 속에 구국의 땅이로
항몽구국의 삼별초 때도
정유재란의 명량대첩 때도
우리 진도 선조덜께서넌
실로 몸바쳐온 구국에 백성덜이지라.
요새도 세월호로 인해 고통이 잔 있제만
인자 찰로 숭이 복되게 존 일 있으 껏입니다.
여기 명랑 해전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묘지는 있나요
왜군이나. 이 싸움에서 순직한 병사묘나 사망자 수~~^^
네 죄송합니다.
제가 과문한 탓에 위의 표에 나온 사상자 외에
알지 못하오나, 진도 백성들이 참전해서
그 중 부자가 함께 전장에 나갔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얘기와
강강술래로 군사가 많게 보이게 하고
산을 마람이로 둘러싸서 노적봉을 맨들고
백토물로 쌀뜨물 같이 보이게 했단 야그넌
울 함씨한테 구전이로 들었을 뿐 그 자료는 없습니다.
혹시 군청 쪽에 문의 해보시면 향토사학자들께
답변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또 떠밀려온 왜군의 시체들을 묻어주어 왜덕산이 댰다는
진도 고군면의 왜덕산은 진위 여부가 불분명하다는
엇갈린 주장들이 있는 줄로 압니다.
시원한 답변을 못 드려 죄송합니다
추후에 정리한 이 글을 보시면 좀 알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순절묘역(殉節墓域)과 왜덕산(倭德山)
http://cafe.daum.net/jindogoon/DvkD/276
거북선이 없다니...
본래 거북선은 몇 척이나 있었나요...
쇄사슬은 기록에도 나오는것 같은데 어디없나요...궁금
위 교과서의 내용은로는 거북선도 만들고 싸음도 잘해서 외국에까지 알려졌다(영국의 해독 낼슨제독, 포르투칼박물관에도 거북선전시...해적나라들의 제일 소유하고 싶었던 최첨단의배)... 그런데 위 내용은 거북선도 없이 13척으로 133척을 물리쳤다 이렇게 해석 해야 하나요...
뭔가 조금 답답한 느낌이 드네요 지금 울돌목에 가보면 거북선에서 전투하는 조형물들이 있는 데 말이죠...
네 아숩게도 명량대첩당시에는 거북선이
한 척도 남아있지 않았음이 확실합니다
임진왜란 초기에 구선(龜船, 거북선) 3척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충무공께서 모함에 빠져 백의종군 할 당시
원균이 칠천량전투에서 일본 수군에 패전함시로
그 때 거북선들을 모두 잃었고
충무공께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 임명 되었을 때는 거북선은 한 척도 없이
모 두 끌어 모아도 판옥선만 12척이었던 것으로
자료에 나오는 상유12란 말이 그 뜻인데
명량대첩 현장에는 없었지만
당시대에 거북선이 존재했던 사실은 있었기에
사실과는 좀 달라도 관광객에게 보이려는 마음이겄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