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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8장 1-8절)
이스라엘 백성이 나치 정권에 의해 600만 명 이상 학살당했습니다. 600만 명은 엄청난 인원입니다.
이스라엘의 야드 바셈에 가면 학살 기념관이 있습니다.
거기에 가면 앙상한 뼈만 남은 남자와 여자들이 나신으로 가스실에 끌려가 죽는 모습이 사진으로 나오고 비명소리도 들립니다.
그 옆에 있는 별관에 가면 칠흑같이 캄캄한데 별들만 꽉 차 있습니다. 그 별들은 나치에게 살육당한 유태인 아이들 150만 명을 상징합니다.
수많은 별들이 박혀 있는 그곳, 통로의 줄을 잡고 가야만 할 정도로 캄캄한 그곳에 무거운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낮고 또박또박한 음성이 들립니다. 그것은 나치에 의해 희생당한 어린이들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거기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새로운 결심이 서고 애국심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들이 왜 야드 바셈에 기념관을 세워 놓고 계속 수많은 학생들을 거기에서 교육 받게 합니까?
독일에 복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시는 어느 나라에든 무릎을 꿇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세상에 무릎 꿇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셔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자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마틴 루터는 기도는 호흡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숨을 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에게 호흡과 같은 기도를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죽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퇴보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기도를 소홀히 한 결과입니다
BC 760년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잘 살았고 풍년이 계속 되었으며 다른 나라로부터 침략의 위험이 없으니 상아 침대에 누워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고 어린 양과 송아지를 잡아먹으며 음악을 즐기면서 안일하고 편안하게 지냈습니다.
요셉의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요셉의 환난’은 하루아침에 팔려가고, 하루아침에 종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하루아침에 환난을 당할 수 있는데 그것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없이도 살 만하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하나님만 바라보는 ‘하나님 바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없어도 산다.’ 할 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붙어서, 긴장해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해야 될 줄 믿습니다.
이 비유는 한 도시의 재판관이 과부의 억울한 일을 풀어준 이야기인데,
재판관이 '왜' 그 과부를 도와주게 되었는지가 메시지의 핵심이다.
비유에 등장하는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였는데, 이 지역에 억울한 일을 당한 한 과부가 있었다.
그런데 이 과부가 재판관에게 자기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계속하여 요구했는데, 이 재판관이 처음에는 무시하다가 이 과부가 요청을 멈추지 않으니, 그것이 번거롭고 귀찮아서 들어주었다는 이야기이다.(누가복음 18장 1-8절)
이 비유의 시작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라는 설명으로 시작된다.
이 비유의 바로 앞(누가복음 17장)의 내용은 마지막 날에 대한 경고와 같은 가르침이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축복기도 없이 이 세상을 즐기는 자는 하나님을 훔치는 것과 같다
"법률용어 상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라 세상의 소유권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금지 명령은 아담에게 하나님의 소유권 개념을 가르쳐주기 위한 의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고 공급자 이실뿐만 아니라 소유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범죄는 절도죄에 해당합니다.
그는 그의 것이 아닌 것을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악은 하나님의 소유권을 부인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통제하고 거부할 권한이 그에게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특히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하면서 모든 규제들은 억압이고 해롭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유권은 하나님 앞에 인간은 겸손해야 하며 하나님이 모든 선물을 주셨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께서 이같은 말씀을 하시고 갑자기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하야 할 것을 당부하시면서 베푸신 비유가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이다.
이 비유에 대하여 "시대가 아무리 암울해보여도, 온 세계가 영원한 심판과 멸망을 향해 신속히 달려가는 것처럼 보여도 의로운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기도해야" 하는 것을 전하는 메시지라고 밝혔다.
그러니까 '노아의 때'(눅17:26)이나 '롯의 때'(눅17:28)때와 같이 "악한 시대를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신자들의 용기를 북돋아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신약시대 당시 이스라엘 최고의 종교법정은 71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였고, 이 재판관들은 구약 율법과 구전에 정통한 종교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억압적이었고 불의하였고, 어떤 면에서는 부패와 불의의 온상이었다.
예수를 향한 유대인들의 음모도 산헤드린 공회에서 이루어졌음을 상기했다. 산헤드린 밑에 또 다른 종교형태의 종교 법정이 있었는데, 이는 23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된 '작은 산헤드린'으로 알려진 기관이다.
이들 역시도 예루살렘의 그곳과 마찬가지로 바리새인들의 교리와 사두개인들의 권력 영향 아래 있었다.
이 재판관들도 자기 스스로를 바리새인들처럼 의롭게 여겼다고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종교 법정들과는 별도로 로마 제국 관할의 지역 행정관과 도시 재판관이 있었다.
이들은 로마 제국에 봉사하는 자들이었고, 대부분 이방인이고 불신자들이었다.
이 재판관들은 성전의 수입으로부터 많은 봉급을 받아,
유대인들은 이 재판관들을 세리를 경멸하듯 경멸하였다고 한다.
이들의 공식 직함은 '지역 판사'였으나 지역 사회 유대인들은 이들을 '강도 판사'로 불렀다고 한다.
예수의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에 등장하는 재판장은 로마인이 임명한 재판장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그가 스스로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산헤드린 소속의 재판장이면 그가 아무리 속으로 부패하고 불의하여도 겉으로 이같은 표현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재판장을 '불의한 재판장'으로 부르셨다.
한편 이 비유에 등장하는 여인은, "가난하고 힘없고 무력하고 비천하고 소외되고 박탈당하고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나타낸다
누가복음 17장 후반부에 등장하는 마지막 때와 같은 혼란스러운 때에, 남편 없이 빈궁한 과부는, 남자 중심의 당시 유대 사회에서 더더욱 힘든 현실을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문화에서 법정의 일은 남자들의 소관이었기에, 힘없는 과부가 처한 상황은 절망적이다.
그러나 이 과부에게 한 가지 희망이 되었던 것은, 구약 성서의 원리였을 것이다.
모세 율법은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귿르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라고 명시하였고,
이사야 선지자도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론하라"고 말한 바 있다. 유대 사화에서 과부는 고아와 같이 공동체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대상이었다.
이에 과부는 지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재판장에게 나아가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요청한다. 과부의 요청은 몇 번에 그치고 말 요청이 아니었던 듯하다. 재판장이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늘'은 헬라어 '에이스 텔로스'(eis-telos)인데, '끝까지' '끊임없이'를 뜻한다. 재판장이 과부의 끊임없는 요청에 시달렸던 듯 하다.
그래서 처음에는 과부를 돕지 않았던 재판장이 과부를 도와야 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그 마음을 먹은 결정적 계기는,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으면 그 과부가 끊임없이 나를 괴롭힐 것'이기 때문, 즉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였다.
재판장이 과부를 돕는 연유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재판장의 그 결심은 과부의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 비유를 마치시며 예수께서는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라고 말씀하신다. 불의한 재판관도 '귀찮아서라도' 타인의 억울함을 풀어주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이 밤낮으로 간구하면 그 기도를 과연 외면하시겠느냐는 것이다.
즉 세상 가운데 신자는 절망과 고통과 같은 힘듦을 짊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신자가 기도하여도 바로 그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은 상황이 허다하다. 그러나 신자가 이러한 상황에 처한다 하더라도 희망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이 이 비유를 해석하는 기본 입장이다.
어떤 친구는 공부가 안돤다고 하소연 합니다. 집중을 할수 없다.
다어어트해야지 -끓으면 되는데... 자꾸 실패 한다고 합니다. -하면 되지
자기의 삶을 자기가 하지 못하면서 세상을 어떻게 이기고 바꾸겠습니까?
자기 자는시간 다 자고ㅡ 먹는시간, 먹는 양을 건트롤하지 못하면서 세상을 어떻게 이기고 바꾸겠습니까?
내가 내 영역의 것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세상을 내편으로 만드겠습니까? 좀 결심 좀 해라[독해져라...]
이지영 스타강사 -고3때 3번 앰브라스에 실러간다.... 그래서 자신보다 더 많은 공주 열심있는 사람을 보면 박수 보내고 싶다...공부할 때 고통이 따르는데 서울 때 입학후 학교생활 하면서 자유함을 이루 말할수 없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서 5:17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한 말의 의미입니다. 구하지 않으면 받을줄 생각마라 ..
즉, 하루 종일 무릎을 꿇고 있으라는 뜻이 아니라 항상 기도하는 상태에 있으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길을 가면서도, 서재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수시로 기도로써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데 기도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 때마다 빠짐없이 반응해야 합니다.
책을 읽을 때든 본문과 씨름할 때든 기도하고 싶은 충동이 들 수 있습니다. 저의 절대법칙은 그런 충동에 항상 복종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충동은 어디에서 올까요?
성령의 역사에서 옵니다.
그러므로 그 충동을 거역하거나, 그 충동에 순종하기를 미루거나,
바쁘다는 이유로 밀쳐내지 마십시오.
그 충동에 온전히 자신을 바치고 맡기십시오.
그러면 그 기도한 시간 때문에 자신이 하던 일에 손해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크고 실제적인 유익이 생겼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라는 부르심을 주의를 분산시키는 일로 여기지 말고,
항상 즉각적으로 반응하십시오. 그리고 그런 충동이 자주 찾아올수록 하나님께 감사드리십시오.
문제에 실패하는 까닭은
그들이 항상 하나님을 앞질러 가려 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매사에 하나님을 날마다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하나님을 앞지르려고 해서는 안 된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은 쌍방향으로 이뤄지는데
하나는 말씀을 읽고 배우는 것,
다른 하나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고,
기도는 소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진실 되게 아뢰는 것입니다.
이때 응답을 받으려면 온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보통 기도할 때 사람들은 엎드리거나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레미야 애가>에서는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3:41)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탈무드는 ‘사람의 기도는 오로지 기도하는 자의 영혼을 그의 손바닥에 올려놓고 같이 들어 올려 드릴 때만 하나님께 상달된다.’라고 해석합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에 전적으로 몰입한 나머지 자신의 존재조차 망각할 정도가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의 기도가 속히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 대하여 "하나님이 정의를 속히 시행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무관심하고 냉담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때문이다"라고 밝힌다.
그럼에도 신자들은 낙심하고 절망하지 말고 "끝까지 흔들리지 말고 기도"하라는 권고가 이 비유의 핵심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신자들은 낙심하지 않고 소망 가운데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마지막 비유의 해설을 전하는 메시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자들이 기도하는 대상은 불의한 재판장과는 본질적으로 다르신,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