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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에서 미아리고개까지 1편
[박종평 기자의 서울탐방기] 동대문에서 미아리고개까지 1편
택우 ・ 2023. 11. 11. 18:45
[출처] [박종평 기자의 서울탐방기] 동대문에서 미아리고개까지 1편|작성자 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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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21] 동대문에서 미아리고개까지: 1편 - 일요서울i
[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동대문역에서 종로구 일대와 성북구 미아리고개까지 길을 걷는다. 조선 시대의 역사 현장과 근현대 인물의 흔적을 찾아간다. 관련된 큰길은 종로, 율곡로, 김상옥로, 대학로, 이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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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경인보청기 건물이 김수영의 종로 6가 집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동대문에서 미아리고개까지 1편
박종평 기자
동대문역에서 종로구 일대와 성북구 미아리고개까지 길을 걷는다. 조선 시대의 역사 현장과 근현대 인물의 흔적을 찾아간다. 관련된 큰길은 종로, 율곡로, 김상옥로, 대학로, 이화장길, 창경궁로, 동소문로 등이다. 이 구간은 3편에 걸쳐 소개한다. 1편은 동대문역에서 연건동 1925년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간행된 ‘매문사 터’까지다.
전체 거리는 2시간 정도 소요된다. 2편부터는 서울대 병원부터 혜화동로터리까지, 3편은 혜화동로터리에서 성북동, 미아리고개까지이다.
출발지는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10번 출구이다. 인터넷에 있는 어느 블로그에 올라있는 정보에 따르면, 동부학당(東部學堂) 터가 10번 출구 인근에 있다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구한말 각종 ‘학당’ 명칭의 유래가 된 조선시대 학당
5부 학당은 본래 고려 시대 개성에 있었던 국립 중등 유학 교육기관에서 유래했다. 수도 개성의 행정 구역을 5개 권역인 동서남북 및 중부로 나눠 각 부에 하나씩 5개의 학당을 설치해 운영했다. 조선도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아 서울로 수도를 이전한 뒤 서울에 5부학당을 설치했다. 세종 때는 북부 학당을 폐지해 4부 학당이 되었다.
학당에는 8세 이상의 아동이 입학하고, 15세가 되어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성균관에 진학할 수 있도록 했다. 동부학당 건물은 세종 때인 1438년에는 서울에 온 여진족이 머물 수 있는 건물인 북평관(北平舘)으로 바뀌고, 창선방(彰善坊)에 있던 유우소(乳牛所)가 동부학당의 건물로 되었다. 구한말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명칭에 들어있는 ‘학당’의 유래이기도 하다.
북평관 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인터넷에서 얻은 ‘동부학당 터’ 주소를 찾아갔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표석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다른 답사 지점으로 이동했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와 다시 확인해 보니, 인터넷에서 얻었던 표석 주소 정보는 예전에 설치되었다가 지금은 없어진 표석 주소였다. 위치 비정을 잘못해 엉뚱한 곳에 세워두었던 표석이 제자리를 찾아가면서 과거에 세운 표석이 없어졌다.
동부학당 표석은 지금은 동대문 옆 흥인지문공원(동대문성곽공원) 정자 앞 큰길 보도에 있다. 얼마 전까지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이 있다가 지금은 공원이 된 곳이다. 답사 다니다 보면, 간혹 그런 일이 있다. 분명히 존재했던 표석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 있다. 위치 오류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부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이미 없어진 표석 자리를 찾아 한참을 헤맸다. 그러나 그 덕분에 의외의 수확을 얻었다. 답사 때는 전혀 몰랐다가 이 답사기를 쓰는 과정에서 동부학당 표석을 찾아 헤맨 곳이 특별한 사연이 있는 곳임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특별한 사연이 있는 곳으로 간다.
종로6가에서 발견한 시인 김수영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김수영(金洙暎, 1921~1968)의 「푸른 하늘을」이라는 시다. 이번 답사에서 처음에 잘못 알고 찾아갔던 ‘동부학당 터’ 표석이 있었던 자리 근처가 그가 어렸을 때, 그리고 해방 후에 잠시 살았던 집이 있었던 곳이었다. 동부학당은 놓쳤으나, 그곳에서 김수영을 발견했다.
동대문역 10번 출구에서 약 40미터 정도 종로 쪽으로 올라가면 시골밥상이란 음식점과 경인의료기란 의료기 판매상이 있는 건물이 있다. 그곳이 동부학당이 있는 곳이라고 알고 갔었던 곳이다. 시골밥상이 있는 그 건물 일대가 김수영의 종로6가 옛집 터이다. 종로한의원 옆 골목으로 들어가 첫 번째 건물, 현재 은명빌딩 등이 있는 자리는 김수영의 고모 집이다.
그곳에는 김수영과 관련한 표석같은 흔적은 현재 없다.
김수영은 조선 후기 무반 가문의 후예이다. 의관(醫官)과 역관(譯官), 중인 상층 등의 거주지였던 관철동에서 태어났다. 그해에 집안이 몰락해 종로 6가, 바로 이곳으로 이사왔다. 그의 아버지는 이곳에서 종이를 파는 지전상을 했다.
최하림(『한국현대시인연구9:김수영』, 문학세계사, 1993년)에 따르면, 김수영은 인근 어의동공립보통학교(현재 효제초등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 때는 ‘공부벌레’라고 놀림을 당할 정도로 책만 읽었다. 그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놀림을 많이 받았다. 그때마다 당시 같은 학교를 다녔던 여장부 스타일의 이모 안소순이 다른 아이들의 괴롭힘에서 김수영을 보호해 줬다고 한다.
안소순은 훗날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불리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의 가수 차중락(車重樂, 1942~1968)의 어머니가 된다.
공교롭게도 김수영과 차중락은 모두 같은 해에 사망했다. 김수영은 교통사고, 차중락은 뇌막염이 원인이다. 차중락이 사망한 뒤 그를 기리며 가수들에게 주는 「낙엽상」이 제정되었는데, 첫해 수상자가 요즘 다시 「테스형!」으로 붐을 일으킨 나훈아와 「아카시아의 이별」의 이영숙(李英淑, 1949~2016)이다.
김수영의 뒷집은 고모집이다. 1932년 12살 때 김수영의 집은 다시 용두동으로 이사했고, 1937년에는 현저동으로 이사했다. 고모집은 계속 종로6가에 남아 있었다. 해방 직전에는 김수영 가족이 만주로 이사 갔다. 해방된 뒤에 돌아와 김수영은 고모집에 잠시 머물기도 했다. 김수영이 평생의 라이벌로 여기다시피 했던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의 시인 박인환(朴寅煥, 1926~1956)을 처음 만난 때도 해방 직후 종로6가 고모집에 머물 때이다.
또 김수영이 1946년 『예술부락』에 동대문 밖에 있던 관우 사당인 동묘와 관련해 쓴 시(詩),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했던 때도 고모집에서 살았다. 시는 용두동 살 때의 동묘 참배 추억을 담았으나, 쓰기는 고모집에서 썼다. 이 시로 인해 김수영은 박인환 등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본래부터 스타일과 성격 등이 정반대였던 사람들이었으나, 박인환의 비판은 그 두 사람을 결정적으로 맞수 또는 갈등 관계에 이르게 했다.
살다보면, 정말로 나와 전혀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 상상을 초월하리만큼 이질적인 사람들이 있다. 사회생활에서는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전혀 다르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부터는 가급적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의도치 않아도 필연적인 악연만 쌓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종로 6가 김수영 집터의 진실은?
김수영의 옛집에 대해 여러 문헌에서 그 주소가 조금씩 차이가 있다. 특히 신정선 기자가 쓴 「예술가들의 '옛집' 찾아가보니…」(조선일보, 2008.5.10.)에서는 김수영의 종로6가 집이 2004년 폭설로 주저앉았으며, 박건희문화재단에서 김수영의 집터 등을 매입해 ‘대안공간 건희’라는 전시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대안공간 건희’ 위치와 각종 김수영 관련 책에 실린 연보 속 옛집의 주소와 비교해 보면, ‘대안공간 건희’는 차이가 많이 난다. 다른 경우는 앞뒷집이 바뀐 경우이나.
2021년 2월 3일, 김수영문학관에 연락해 사실을 확인해 보았다. 문학관측은 김수영 시인의 동생과 통화해 주소를 확인해 주었다. 종로6가 116번지가 김수영의 옛집(시골밥상이 있는 건물 지역)이고, 117번지는 뒷집으로 김수영의 고모집(은명빌딩 건물 지역)이었다. 117번지를 김수영의 옛집이라고 하는 문헌들이 있으나 동생의 증언으로 김수영의 종로6가 집 주소는 정리되었다.
조선일보 기사 속 ‘대안공간 건희’가 매입했다던 김수영의 집터는 확실히 김수영의 집터는 아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그 일대가 소년 김수영이 놀았던 동네이고, 청년 김수영이 살면서 꿈을 키웠던 공간은 맞다.
지금은 김수영에 대한 흔적이 없지만, 김수영이 시인으로 등장한 공간인 이곳에 작은 표석이라도 하나라도 세워 놓았으면 좋을 듯하다.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표석을 통해 눈으로 보고 김수영을 직접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도록.
‘동부학당 터’ 주소에 대한 정보 오류로 인해 엉뚱하게 헤매다가 김수영 시인의 흔적을 만났다. 덕분에 그의 시, 「풀」도 다시 읽는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가끔씩 가다가 이렇게 뜻하지 않는 횡재가 있는 것이 답사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딱 맞는 말이다. 그곳에서 한순간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바보가 되었으나, 이제는 알았으니 다음에 그곳에 가면 다시 한번 살펴보며 김수영 시인의 가슴을 느낄 수 있을 듯하다.
여진족이 서울에서 머문 곳, 북평관
다음 코스는 ‘북평관(北平館) 터’이다. 김수영 옛집 터에서 다시 동대문 사거리로 간다. 사거리에서 혜화동 방향으로 110미터 정도 올라가면 대명빌딩이 나온다.
조선의 대외 정책인 사대교린(事大交隣) 중 여진족을 대상으로 한 교린 정책의 핵심 기지이다. 사대가 명나라를 대상으로 약소국의 입장에서 일시 몸을 굽히는 행동이라면, 교린은 변방을 소란케하는 여진족과 일본을 상국(上國)의 입장에서 회유하는 외교정책이다. 특히 북평관은 여진족 사신이나 서울에 온 여진족 추장 등을 머물게 하고 접대하기 위한 건물이다. 처음에는 ‘야인관(野人館)’이었다가 세종 때인 1438년에 ‘북평관’으로 개칭했다. 더불어 일본인들이 머물던 곳은 ‘왜관’이었다. 이 역시 같은 시기에 ‘동평관(東平館)’으로 이름이 바뀐다.
『세종실록』 세종21년(1439년)에 실린 북평관에서 보고한 여진족의 풍습을 보면, 여진족들의 문화가 낙후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여자 나이 17‧8세에 결혼을 하고, 아버지가 죽으면 그 첩에게 장가를 가고, 형이 죽으면 그 아내에게 장가를 간다고 한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것은 고구려의 형사취수(兄死娶嫂)와 비슷하다. 그러나 더 원시적이다. 아버지의 첩과도 결혼하기 때문이다. 또한 여진족은 우리나라의 매장 문화와 달리 화장 문화를 갖고 있다고 한다.
조선 정부는 여진족을 다양한 방법으로 회유했으나 언제나 북방의 골칫거리였다. 조선 시대 무과 급제자들의 초임 발령지가 대개 평안도와 함경도였던 이유도 그곳이 여진족의 침입을 방어하는 최전방이었기 때문이다. 청년 남이 장군이 공로를 세운 것도 여진족과의 전투였다.
이순신 장군도 무과에 급제한 뒤 첫 발령지는 함경도 동구비보(함경북도 삼수)였다. 그 뒤 함경도 남병사 이용의 군관, 함경도 건원보(함경북도 경원) 권관에 임명되어 여진족 울지내를 유인해 격퇴하기도 했다. 그 해에 여진족 니탕개가 침입하자 함경도 순찰사 정언신은 신립‧이순신‧원균‧이억기 등을 거느리고 격퇴했다.
1586년 이순신은 함경도 조산보(함경북도 경흥) 만호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에는 녹둔도 둔전관을 겸직하다가 여진족의 기습을 격퇴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일부 군사와 백성이 여진족에게 살해당하면서 패전 책임을 뒤집어 썼다.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상황을 보고받은 선조가 사형 대신 백의종군 처벌을 내렸다. 그의 삶에서 첫 번째 백의종군이다. 이순신은 함경도에서 백의종군 중이던 1588년 여진족 마을인 시전부락 공격 작전에 참전해 백의종군이 해제되었다.
그런 여진족이 임진왜란 이후에 청나라가 되어 전면적으로 침략한 것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다. 변방의 소수의 야만인 집단 같았던 그들이 순식간에 무섭게 성장해 역사를 바꾸었다. 반면에 조선은 얼마나 오래 자기 안에 갇혀 있고, 중국(명나라)만 바라보고 살았는지 확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어의궁 터에 자리잡은 예식장 엘가모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북벌을 꿈꾼 효종의 옛집, 유서 깊은 결혼식 공간
다음 답사 장소는 효제동에 있는 ‘어의궁(於義宮)과 조양루(朝陽樓) 터’이다. ‘북평관 터’에서 혜화동 쪽으로 올라가다가 김상옥로에서 김수영 시인이 다녔던 효제초등학교 쪽으로 간다. 대학로가 나오면 우측 이화사거리 방향으로 170미터 정도 올라간다. 가는 중에 길 건너편을 보면, 서양 중세 성(城)처럼 생긴 건물이 있다. 그 건물 일대가 어의궁과 조양루가 있었던 곳이다.
봉림대군(효종, 1619~1659)이 청나라에 끌려가 8년 동안 볼모로 붙잡혀 있다가 돌아와 머물렀던 곳, 형인 소현세자의 사망으로 세자로 책봉된 곳이다. 효종이 이 집에 살 때 왕이 되었기 때문에 ‘용이 일어난다’는 뜻의 ‘용흥궁(龍興宮)’이라는 별칭을 갖게 된다.
사직동에 있는 인조가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집이 인조가 왕이 된 뒤에 어의궁으로 불렸다. 효종의 어의궁으로 인해 사직동 어의궁은 상어의궁(上於義宮), 효제동 효종이 살던 이곳의 어의궁은 하어의궁(下於義宮)으로 불린다.
효종은 북벌을 추진했고, 친청파를 숙청했다. 표류해 온 네덜란드인 하멜(Hamel) 등을 훈련도감에 배속시켜 신무기를 개발케 했다. 또 연해주로 남하해 온 러시아 군대에 연패를 당하던 청나라의 요청으로 러시아 군대를 토벌했던 1‧2차 나선정벌(羅禪征伐)을 하게도 했다. 그러나 실질적 북벌은 추진하지 못했다.
어의궁 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한 연구에 따르면, 어의궁에서는 무려 16회의 왕실 혼례가 있었다고 한다. 어의궁은 혼례의 명소이다. 어의궁과 함께 ‘아침 햇볕이 잘 드는 누각’이란 뜻을 지닌 ‘조양루’도 곁에 있었다고 한다.
왕실 혼례의 명소라는 기운이 지금까지도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지금도 ‘엘가모아’란 대형 예식장이 들어서 있다. 어의궁 터 표석은 엘가모아 정면 우측에 있는 카페 가모스 앞 도로변에 있다. ‘북평관 터’에서 20분 거리다.
『종로의 표석 이야기』(종로문화원, 2017년)에 따르면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효묘잠저구기(孝廟潛邸舊基, 효종이 왕자 시절에 살던 옛 터)’라는 대리석 비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또 천연기념물 58호로 지정된 600살의 은행나무도 있었는데 그 역시 사라졌다고 한다. 격동기를 지나면서 부실하게 문화재를 관리했던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일이다.
남이장군 집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남이 장군과 실학자 박제가의 옛 집
다시 길을 간다. 이전에 용산 답사기를 썼을 때 용산에 있는 ‘남이장군사당’과 남이 장군을 소개했었다. 그 충무공 남이(南怡, 1441~1468) 장군이 살던 집터로 간다. ‘어의궁터’에서 혜화동 방향으로 350미터 약 10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연구혁신센터를 지나 몇 미터 더 올라가면 ‘빽다방’이 나온다. 그 다방 앞 큰 길가 보도에 ‘남이 장군 집터’표석이 있다.
본래 집 위치는 이규태(『이규태의 600년 서울』, 조선일보사, 1993년)에 따르면, 다방 옆 골목으로 들어가 두 번째 블록 서울대 의학연구혁신센터 쪽 4층 빌라 자리다. 그 주소는 김영상(『서울 600년 4:낙산기슭‧청계천변』, 대학당, 1996년)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두 곳 모두 바로 인접해 있다.
이규태든 김영상이든 수백 년 전 집터를 현재의 주소로 특정하는 것이 타당한지 모르겠다. 조선 시대 궁궐의 전모조차 다 파악하지 못하는 실정에 비춰볼 때 특정인의 집 위치를 꼭 찝어 비정하는 일은 쉽지 않을 듯하다.
어쨌든 그 일대가 남이 장군이 살았던 동네이다. 남이에 대해서는 「용산 1편」을 참고하시라.
이곳 남이 장군 집터에 주목했던 이유는 그곳이 남이 이후 몇 백 년 뒤 한 특별한 인물이 살았기 때문이다.
남이가 반역음모죄에 걸려 처형된 뒤 그의 가족은 노비가 되었고, 집은 폐가가 되었다가 다시 채소밭으로 변했다. 그런 공간이 조선 후기 언젠가부터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한 북학파 실학자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집이 되었다.
이는 박제가와 같은 실학파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의 아들 유본예(柳本藝, 1777~1842)가 저술한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나오는 내용이다. 유득공과 박제가,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서이수(徐理修, 1749~1802)는 모두 서얼들로 규장각 4검관(檢書)으로 이름이 높았고 함께 일했다. 그런 유득공의 아들 유본예가 저술한 내용이기에 신뢰할 수 있다.
남이의 죽음 이후 버려진 땅처럼 되었던 곳에 박제가가 살면서 북학파의 정신을 꽃을 피웠던 곳이 남이의 옛 집터이다.
또 『한경지략』에 따르면, 정조는 박제가의 집 위쪽 지역에 있는 현재 서울대학교 병원 안에 있는 경모궁(景慕宮, 사도세자와 그의 비 헌경왕후 사당)을 참배하고 오다가 우연히 이 집 뜰에 32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아주 큰 소나무를 보고 ‘어애송(御愛松, 임금이 사랑한 소나무)’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남이-박제가-정조로 이어지는 공간이다. 가난했던 박제가가 여기저기 이사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정착했던 곳이다. 박제가는 스승으로는 『열하일기』를 쓴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을 모셨고, 제자로는 「세한도」의 추사 김정희(1786~1856)를 두었다. 그는 또한 당대 최고의 무인이었던 백동수(白東修)와 사귀고, 백동수의 매부인 이덕무를 만나 평생의 벗으로 삼았다. 또 그는 이순신 장군의 5대손인 이관상(李觀祥)의 딸과 결혼했다.
북방 여진족을 평정하려 했던 남이의 기개는 청나라의 선진문화를 적극 수용하려는 박제가에게 이어졌다. 남이 때의 야만인 여진족은 청나라가 되었고, 낙후된 조선보다 선진문화를 일구었다. 박제가가 살던 시대의 조선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퇴보해 소중화(小中華) 사상에 갇혔다. 그런 때 박제가는 대부분의 양반 지식인과 달리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자신이 보고 들은 청나라의 모습에 비추어 조선의 정치경제, 사회문화에 대해 메스를 들이댔다. 그 책이 청나라를 다녀온 기록인 『북학의』이다.
그의 눈에 조선은 가난한 나라, 형식주의와 허위의식이 만연한 나라, 쇄국 및 폐쇄 사회인 나라였다. 그런 조선을 바꾸기를 고민하며 청나라에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조선의 현실과 비교해 쓴 책이 『북학의』이다.
박제가는 서문에서 자신은 어릴 때부터 고운 최치원(崔致遠, 857~?)과 중봉 조헌(趙憲, 1544~1592)을 사모해 그들의 말을 끄는 마부가 되어 모시고 싶다고 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와 신라의 풍속을 혁신하려 했고, 조헌은 명나라에 다녀와 명나라의 선진 문물을 보고 조선을 개혁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박제가의 『북학의』도 그런 목적을 갖고 어릴 때부터 꿈꾼 결과물이다.
『북학의』는 안대회 교수가 번역(돌베게, 2003)한 책, 박제가의 삶에 대해서는 임용한 박사의 『박제가, 욕망을 제거한 조선을 비웃다』(역사의 아침, 2012년)와 박성순 교수의 『박제가와 젊은 그들』(고즈윈, 2006)을 참고하면 좋다.
다시 답사 이야기로 돌아간다. 남이 장군 집터라고 언급된 두 곳과 시인 김소월과 관련된 출판사, 매문사가 있던 자리는 서로 이웃하고 있다. 어찌 보면 매문사가 있던 자리도 남이 장군 집터, 박제가의 집터라고도 할 수 있다. 바로 옆집이나 다름없는 매문사 자리로 간다.
작년 초와 지난 9월에 남이 장군 집터를 찾아갔을 때도, 김소월의 매문사는 보지 못했다. 바로 이웃 건물이나 다름없음에도 전혀 몰랐다. 무지와 편협한 시각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사실조차 보지 못하게 한다. 이번에야 김소월의 흔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가니, 거기가 벌써 몇 차례를 다녀왔던 곳이라는 데 깜짝 놀라고 또 눈 뜬 봉사나 다름없음에 부끄러움만 가득했다.
김소월 진달래꽃 간행한 매문사 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시집 역사상 가장 비싸게 팔린 『진달래 꽃』
얼마전 한 고서 경매장에서 시집 한 권이 1억3천500만원에 낙찰되었다. 1925년에 간행된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의 『진달래꽃』 초판본이다. 2015년 당시 한국 현대문학 시집 분야에서 최고액이다.
이 시집에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한번쯤 듣고, 읊어본 시들이 가득하다. 「진달래꽃」 · 「산유화」 · 「초혼」 · 「금잔디」 등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이 1925년 간행 초판본은 현재는 국가등록문화재이기도 하다.
이 시집을 낸 출판사는 ‘매문사(賣文社)’이다. ‘글을 파는 회사’다. 출판사 이름으로는 아주 거칠고 싸구려 이름이다. 시인 김억(金億, 1896~?)이 만든 출판사라고 알려져 있다. 멋진 이름을 짓지 않고, 그렇게 정한 것은 김억의 자유분방함에 따라 파격적인 역설의 의미로 이름을 지은 듯하다.
김억은 소월과는 사돈 관계이고 소월의 오산중학교 스승이다. 소월에게 시를 가르쳐 주었고, 소월이 시를 발표할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그가 보들레르 등의 시를 번역한 『오뇌의 무도』는 우리나라 최초의 번역시집이다. 그의 시집인 『해파리의 노래』(1923년)는 우리나라 근대 최초의 개인 시집이다.
김소월 매문사 표석 부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김용직 서울대 교수는 『김소월의 생애전집』(김용직 편저, 서울대출판부, 1996년)에서 “우리 모두에게 김소월은 고향 동산이며 온돌방 아랫목이요 모국어 그 자체다. …… 애초부터 그가 써서 발표한 시는 우리말의 결을 잘 살려서 쓴 서정시였다. 거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정서, 부드러운 가락이 포함되어 있다.”라고 평가했다. 소월의 시에 대한 가장 분명한 평가인 듯하다.
그런데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소장 『진달래꽃』이나 다른 초판본 표지와 판권지 사진 등을 보면, 특이한 점이 보인다.
첫째, 저작 겸 발행인이 김정식(金廷湜, 소월의 본명. 소월은 필명)이다. 김억 대신 소월이 매문사의 주인이 되어 있다. 표지에는 ‘김소월(金小月) 작(作)’으로 나온다. 판권지에서는 본명을 쓰고 있다. 같은 책에서 작가 김소월과 출판사 대표와도 같은 발행인 김정식을 구분하고 있다. 당시 그런 관행이 있었거나, 혹은 김억을 대신해 소월이 잠시 위탁경영의 책임을 지고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시집이 나올 때, 아마도 소월은 자신의 시집을 책임지고 판매하기 위한 흔적이 아닐까 한다.
둘째, 한겨레신문의 보도(「시집 진달래꽃 제3의 판본 있다」, 2019.06.26.)에 따르면, 같은 날 인쇄된 세 종류의 판본이 있다고 한다. 한성도서주식회사의 2종류 판본과 중앙서림이다. 같은 원고로 세 버전을 만들어 판매를 하는 것도 의아한 일이다. 매문사의 발행인 소월은 작가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이 버전 사이에는 차이가 발견된다고 한다.
「권영민의 문학콘서트 블로그」에 의하면, 이들 판본의 경우 일부 편집 형식에도 차이가 있고, 한성도서판에는 오자가 있으나, 중앙서림판에서는 오자가 수정되어 있다고 한다.
같은 날 발행된 세 버전의 책, 오타가 있는 책과 없는 책, 또 한성도서주식회사는 두 번전을 냈다. 총 3버전의 시집이 한 날 세상에 나왔다. 이 역시 일반적이지 않은 이상한 일이다.
소월이 발행인이라는 점에서 보면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 판매처들도 역시 같은 내용의 책을 독점이 아니라 경쟁하며 판매하는 것도 선 듯 납득이 되지 않는다. 어쨌든 시집은 출간될 때부터 3종류가 존재하는 특이한 사례이다.
셋째, 발행인 김정식(소월)의 주소와 출판사 매문사의 주소가 같다. “경성부 연건동 121번지”이다. 소월이 이 집에서 살았다고 볼 수 있는 근거이다. 그런데 소월이 실제 이곳에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또 이 연건동 121번지는 스승 김억의 주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소월과 무관하게 그냥 출판사 주소로도 사용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공간은 소월과 연결된 『진달래꽃』의 출생지나 다름 없다. 소월이 서울에 살 때 주소는 이상하리만치 알려져 있지 않다. 마치 투명인간처럼 보인다. 분명히 배재학당을 다녔음에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흐릿하다. 그 자신의 성격 탓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불분명하다. 그가 살았던 곳을 찾는다면, 그의 삶이 조금 더 밝혀질 수 있을 듯하다.
동아일보 1934년 12월 29일 김소월 별세 기사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소월의 미스테리한 죽음
소월은 평안북도 평안주군 곽산면 출신이다. 정주에 있던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를 졸업했다. 오산학교는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1938)의 연설에 감동받은 이승훈(李昇薰, 1864~1930)이 설립한 사립학교이다. 소월이 존경했고 사돈관계였던 김억은 선생, 조만식(曺晩植, 1883~1950)은 교장이었다.
그의 시작(詩作) 활동은 19세 때인 1920년 『창조』에 발표한 「낭인의 봄」부터 시작된다. 물론 시는 그 이전에 쓰기 시작했다. 활발한 발표는 1922년 김억의 주선으로 『개벽』에 「금잔디」 · 「엄마야 누나야」 · 「진달래꽃」 · 「강촌」 등을 발표하면서 부터이다. 1923년에는 여러 잡지에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접동」 , 「왕십리」 등을 발표했다. 이 해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 상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동경 대지진으로 그해 가을 돌아왔고 다시는 가지 못했다. 24세인 1925년에는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이 된 시집 『진달래꽃』을 펴냈다.
그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도 많다. 대학그룹사운드 송골매가 부른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진달래꽃」, 동요 「엄마야 누나야」 등 무수한 그의 시에 곡이 붙여져 노래로 불리고 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되어서 알아보랴?”
서영은이 작곡하고 유주용이 부른 노래이다. 연세 있는 분들은 다 아는 노래이다. 그러나 이 노래가 정작 소월의 「부모」란 시라는 것을 모르는 분들이 태반이다.
소월은 1934년 12월 24일, 불과 33세로 사망했다. 생전에는 지금처럼 유명하거나 시인으로 아주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생활고와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자살설이 다수설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뇌일혈에 따른 자연사, 수면제에 의한 사고사로 보는 사람도 있다.
동아일보 1926년 1월 8일 김소월 진달래꽃 출간 기사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자살설의 근거는 『김소월의 생애전집』에 따르면, 소월에게 많은 영향을 준 숙모 계희영의 소월에 대한 기록이다. 죽기 전에 세상을 몹시 비관했으며, 술이 과해서 자주 인사불성이 되었고, 그럴 때면 입버릇처럼 뜻과 같지 않은 세상이라 죽어야겠다고 말했다는 언급이 출발점이다. 또 죽기 전날 몸이 크게 불편하지도 않았는데 같은 잠자리에 든 아내가 깨어나 보니 소월이 죽어 있었다고 한다. 아프지 않았던 사람의 죽음이었기에 병사는 아니라는 것이고 그 관점에서 자살 가능성이 연결된다.
『김소월, 그 삶과 문학』(오세영, 서울대출판부, 2000년)에서는 자살설이 일반적인 견해이나 알콜중독에 따른 병사설도 있다고 했다. 오세영은 또 병사설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자살이고, “알콜중독과 그리하여 폐인으로 이르는 길이 그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데서 선택된 것으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자살설의 흐름에 합류했다.
오세영의 책에 언급된 숙모 계희영의 『내가 기른 소월』(장문각, 1969년) 인용문을 보면, 소월이 갑자기 장에 가서 아편을 구해 왔고 그것을 그날 밤 먹고 죽었다고 하는 내용이다. 또 “소월 죽음은 문중에서 부끄럽고 끔찍하다 하여 함구하고 말았다. 그래서 소월의 사인이나 그 후의 자세한 이야기는 세상에 나돌지 않았던 것이다.”라면서 소월의 자살설에 간접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아편과 관련한 새로운 증언이 2012년에 나왔다(동아일보, 2012.05.31.).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가 소월의 증손녀인 성악가 김상은 씨에게 들은 것이다. 김상은에 따르면, 소월이 생전에 심한 관절염에 시달려 통증을 잊고자 아편을 조금씩 먹었다고 한다.
관절염에 따른 통증과 통증 극복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아편으로 보면 소월의 죽음은 우연한 사고사라고 볼 수 있다. 의도된 자살로 보기 어렵다. 또 알콜중독에 따른 병사설도 명확한 근거는 없다.
소월의 시를 보면 슬픔, 탄식과 자조가 많다. 그러나 그의 시에 많은 곡이 붙여져 있듯 시 자체가 노래이다. 그의 시는 글자로는 시이나, 읽고 장단을 따라가면 그 자체로 노래가 된다. 글이 노래가 되고, 말이 노래가 되고, 활자에 박히면 시가 되는 그런 노래를 짓는 사람이 갑자기 부인과 자다가 자살을 한다는 것은 상상 밖의 일이다. 세상살이가 힘들다고, 실의에 빠졌다고, 내향적 성격이기에 연구자들은 자살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으나 이는 일반화의 오류이다. 소월 성격이나 비슷한 상황이라고 그런 사람들이 모두 자살하는 것도 아니다.
시골에서 도전하다 실패하고, 또 뭔가를 꿈꾸었던 사람이 불과 33세에 사망했다. 느닺없는 불행한 죽음이다. 그런 시인의 마지막을 명확한 근거 없이 ‘자살’로 추정해서는 안될 듯하다. 물론 ‘자살설’ 같은 주장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끄는데 좋은 소재이기는 하나, 소월의 자살설은 지나친 주장인 듯하다. 아름다운 민족의 민요 시인, 소월을 두 번 죽여서야 되겠나.
조선중앙일보 1935년 1월 24일 김소월의 자필 시 부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소월과 서울, 정지용
오늘날의 소월을 만들었던 서울살이는 의외로 짧았다. 서울에 산 기간은 정황으로 보면 1922년 배재고등보통학교 편입 때부터 1925년 『진달래꽃』을 출간할 때까지다. 1922년 21세 4월부터~1923년 3월 그리고 1923년 9월~1925년까지이다. 23년부터 25년 사이에는 할아버지를 돕기 위해 고향에 가 있기도 했다. 그의 서울살이는 실제로는 3년 미만으로 보인다. 그가 살았던 장소도 현재는 모호하다. 찰라와도 같은 서울살이는 수많은 시를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의 대표작은 모두 서울에 살던 시기에 발표되었다.
소월이 서울에 대해 쓴 시는 “붉은 전등./ 푸른 전등./ …… 서울 거리가 좋다고 해요./ 서울 밤이 좋다고 해요./ 붉은 전등./ 푸른 가슴의 속모를 곳의/ 푸른 전등은 고적합니다./ 붉은 전등은 고적합니다.”와 같은 「서울밤」과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닷새 왔으면 좋지.// ……/ 가도가도 왕십리 비가오네.”라는 「왕십리」, 또 “그대가 평양서 울고 있을 때/ 나는 서울 있어서 노래 불렀네/ 인생은 물과 구름 구름이라고/ 노래 노래 부르며 탄식하였네”고 한 「불칭추평(不稱錘枰)」이 있다.
그가 쓴 대략 250여 편의 시 중 서울과 관련된 시는 4편 정도에 불과하다. 소월에게 서울 외롭고, 끝이 보이지 않고, 허망한 도시였다. 오세영에 따르면 그는 여성적이었고, 내향적이었으며, 자기폐쇄적, 비사교적인 사람이었다. 친구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초등학교인 남산학교 시절 동급생이며 친숙간이었던 친구 김상섭의 죽음을 시로 썼다는 「초혼」에도 소월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같은 해에 출생한 외향적인 정지용(鄭芝溶, 1902~1950)과는 정반대였다.
소월과 정지용은 둘 다 1922년부터 시인으로서 활동을 시작했고, 1923년 소월이 배제고보를 졸업하고 자신의 성경이나 의지와 무관하게 집안의 요청에 따라 동경 상대에 입학했다면, 정지용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교토의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에 입학했고 자신의 길을 갔다. 소월은 정지용이 동경에 있을 때인 1925년에 첫 시집을 냈으나, 정지용은 소월이 사망한 이듬해인 1935년에야 첫 시집 『정지용 시집』을 출간했다.
그들의 삶을 상상해 비교해 보면 소월은 모든 사람의 심장을 두드렸던 번득이는 번갯불이었다. 정지용은 늦게 불붙으나 오래 타며 주위를 따뜻이 데우는 모닥불 같다.
「초혼」을 가만히 불러본다.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한마디는
끝끝내 마저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든 그 사람이여!
사랑하든 그 사람이여!”
소월의 사망 날짜가 자료에 따라 12월 23일 혹은 24일로 차이가 있다. 『동아일보』(1934년 12월 29일)에 실린 소월 사망 기사에 따르면 24일이 맞다. 12월 24일을 크리스마스 이브가 아니라, ‘김소월의 날’로 만들었으면 어떨까 한다. 김용직 교수가 표현했듯 우리들의 고향 동산인 소월이 하늘로 간 그날에 그에게 빚진 우리가 그를 영원히 기억하는 뜻에서.
* 동부학당 터 표석 : 종로6가 70. 정자 앞 율곡로 옆 보도
* 김수영 생가 터 표석 : 종로2가 56-17 YBM어학원 종로빌딩 횡단보도 앞
* 김수영 종로 6가 옛 집 : 종로6가 116. 그의 고모집은 117번지
* 대안공간 건희 : 종로6가 43-3, 43-4
* 북평관 터 표석 : 종로6가 20-2
* 어의궁 및 조양루 터 : 종로구 효제동 24-1
* 어의궁 터 표석 : 종로구 효제동 21-10 카페 가모스 앞 도로변 보도.
* 남이 장군‧박제가 집터 : 종로구 연건동 126
* 남이 장군‧박제가 집터 표석 : 종로구 연건동 72-24
* 김소월 『진달래 꽃』 출판한 매문사 터 : 종로구 연건동 121
박종평 기자
[출처] 일요서울 2021.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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