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를 쭈욱 걸었으니 망정이지, 낮은 산이 사람 잡는다. 어디 산이 높이로만 난이도가 결정되는가? 더위가 상당한 작용을 하는 것.
<산길샘>
네비엔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산164-6'을 입력하여 20번 도로의...
안내판이 있는 살고개에 버스를 댄다.
중앙분리대가 있는 널따란 20번 도로를 살짝 벗어나면...
옛길인 듯 방치된 길에서 식별불가한 안내판 뒤로 산속으로 숨어든다.
곧 무덤을 지나고...
다소 가파른 등로에...
왠 쇠말뚝. 아항~ 오래전에 나무계단이 있었나 보다.
예사롭지 않은 氣가 느껴지는 암봉.
사람들이 머문 흔적이 있다.
조금 더 위엔 철탑이 있어...
들여다 보니 KBS진주방송국 중개소 시설이다.
그 뒤에 오래된 삼각점.
곧 망해봉 정상에 닿지만 망해(望海)는 희망사항.
여러 산꾼들 시그널 옆에 望海峰이라 적은 표식기를 걸었다.
그리고 내려서는 길은 서남쪽 반듯한 길(도평 방향)을 버리고 우측 북쪽으로 꺾어 도로(동방실로)를 걷기로 했기 때문.
(반듯한 서남쪽으로 가다가 서쪽 내리막으로 내려서는 사람들도 있다.)
꺾어드는 지점에는 이렇다할 지형지물은 없지만 표식기 두어개가 펄럭인다.
무난한 산길.
무덤을 지나고...
대숲을 지나면...
파묘.
곧 길은 잡목에 숨어버려 우측 작은 계곡으로 방향을 꺾는다.
작은 계곡으로 난 길은 그리 험하지 않아.
곧 포장도로에 내려서서...
포장도로를 걷는다.
이쪽으로 내려오는 길이 있었을 텐데...
좌측 야산 능선으로 접근하고 싶지만 의미가 없어 도로를 따르기로 하였다. 임도가 발달하면 신길은 묵기 마련이니.
길가에 잘 생긴 소나무가 있어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우와~ 만지송(萬枝松)이다. 임자를 만나면 몇 억은 받겠다.
우측으로 이송목장을 지나고...
배롱나무가 그 자태를 뽐내는 곳은...
'행복한 나무'. 유독 나무를 가꾸는 농가가 많다.
노거수가 버티고 선 덕산동 마을 입구. 아스팔트에서 벗어나는 갈림길은 여기서 약 150m 전방으로...
좌측으로...
포장임도를 따르는 것.
곧 만나는 임도 갈림길에선 우측 오르막.
포장은 끝이나고 고개로 올라서는...
너른 산길로 변한다.
우측에 가족묘지인 듯.
그래서 비석을 당겨 보았다. 밀양 박씨와 순흥 안씨, 또다른 밀양 박씨와 성산 이씨다.
고개(고도 약 180m)에 올라서서 잠시 배낭을 벗고 수분도 보충하였다.
망해봉 서쪽으로 내려서서 작은 능선을 고수한 일행들은 이쪽으로 오게 되는 것.
무덤을 지나고...
다시 무덤을 만나 한덤 님은 비석의 글귀를 확인한다.
어떤 독지가 세웠다면 참 고맙기는하나 너무 추상적이다. 어느 방향의 등산로인가?
소괴산을 올라와 삼각점을 확인하는 데는 조금 살펴야 한다. 등로에서 살짝 숨은 숲속에 선답자들의 흔적이 나부낀다.
그 한켠에 '消怪山' 리본을 걸었다.
오래된 돌담이 쳐진 무덤에 내려서며...
돌담을 유심히 살펴본다.
연륜이 쌓여 이끼가 낀 모습이 마치 고성(古城)을 닮았다.
고도가 낮아지며 정면에 작은 둔덕같은 봉우리가 보인다. 이구산이다.
소괴산과 이구산을 구분짓는 임도를 따라...
파란색 물탱크에 접근하면...
이정표가 세워져 있어...
우리는 쉴 겸 요기도 할 겸 이정표가 가리키는 전망대 방향으로 가기로 하였다.
이 임도급 전망대 가는 길이 갑자기 고도가 낮아지는 게 아닌가? 그래서 되돌아나와...
이구산으로 향한다.
니구산성 안내판. 한문을 그대로 옮겨 적으면 '니구산성'이겠으나 '이구산성'으로 써야 맞는 것.
이구산 도드라진 바위 위에 올라 기념사진.
尼丘山이라 쓴 리본을 걸었다.
이구산성 안내판 뒤로 살짝 비켜 돌아서니 간간이 성곽의 흔적이 보이고...
'추락주의' 금줄을 넘으니 도드라진 바위에 이른다.
바위에선 남사예담촌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전경을 당겨 보았다.
그리고 여사교에 대기하고 있는 우리 버스도.
이 바위를 '범바위'라 불렀을까? 이 아래의 다리 이름이 호암교(虎岩橋)이니 하는 말이다.
감나무밭을 지나니...
사각정자가 세워져 있다. 이 정자를 이정표에서 '전망대'라 표기하고 있는 것.
에어먼지털이가 있는 지점에 거꾸로 올라온 우리 일행들이 쉼을 하고 있다.
그곳은 작은 내가 흐르는 곳.
농로를 따라 마을을 접어들어...
팔각정자에서 좌로 꺾어돈다.
정자 이름은 '사상정(泗上亭)'
우리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지점엔...
백의종군로 안내판이 있는...
여사교(餘沙橋).
여사교 건너 곡각지점에 무슨 비각이 있어...
가까이 다가 갔더니 효자각이다.
이 효자각은 아버지를 해치려는 화적의 칼을 자신의 몸으로 막아낸 이윤현의 효심을 높이 사 1706년 나라에서 세웠는데, 중간에 불이 나 타버린 것을
1958년 이씨 문중에서 지금 위치에 다시 세웠다.
'효자통덕랑이윤현지려(孝子通德郞李胤玄之閭)'라 새겨져 있다.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서 태어난 이윤현(李胤玄)은 자(字)는 시로(時老) 호(號)는 영모당(永慕堂)이다.
마을 안쪽에 있는 사효재(思孝齋)는 1706년 (숙종32년) 피접 (避接)중인 아버지를 헤치려는 화적의 칼을 자신의 몸으로 막아낸 이윤현을 추모하기 위한 것.
당시 온몸에 부상을 입고 병을 얻어 8년을 견디다 끝내 운명한 효자로 많은 이들에게 모범이 된 인물이다.
산자락 밑 도로변에 민가 한 채가 있고, 그 우측 계단 위로 정자가 보인다.
견공이 짖어대는 집 마당을 통하는 것은 썩 내키지 않는 발걸음.
한덤 님이 집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있고, 집주인은 밝은 얼굴로 허락을 한다.
정자의 현판은 삼백헌(三白軒).
'정자에 걸린 '삼백헌기(三白軒記)'를 카메라에 담는다.
다음은 기문의 일부분이다.
“박진사 찬여(瓚汝)가 사는 곳은 사월리다. 앞의 시내에는 깨끗한 모래가 펼쳐져 있고 찬 달이 밝게 비쳐 마을의 이름을 이로써 했다. 찬여의 집은 자그마한데 흙 계단에는 갈대가 소슬하고 냉랭하다. 그러나 시렁에는 경사(經史)가 있어 이로 더불어 아침저녁으로 옛 선현들의 가르침을 익히며 개울에 나가 몸을 씻고 달을 대하여 시를 읊으며 가슴에는 한 점의 티끌이 없는 듯 고결하였다.”
고종 임금의 부름에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나라의 광복과 도학 부흥을 위해 평생을 보낸 면우 곽종석이 ‘박진사’란 사람을 위해 지은 것이다.
면우가 삼백헌(三白軒)이라고 한 것은 모래도 희고 달도 희고 그 사람도 희다는 의미다.
그러면 면우가 ‘가슴에는 한 점 티끌이 없는 듯 고결하였다’고 평가한 박진사는 누구인가.
후세 사람들이 ‘남사마을 박진사’라면 굳이 이름이 필요 없었던 사촌(沙村) 박규호(朴圭浩)란 사람으로 ‘찬여(瓚汝)’는 그의 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