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 신작시 이언
크리스탈 나흐트* 외
-수정의 밤
내시경으로 들여다보았대요
환하게 불을 켠 고화질 대물렌즈로
그녀의 오래되고 어두운 방을 습격했어요
거기서 발각된 말이랍니다
말이 씨가 된다
그녀가 자주 중얼거리던 말이었어요
그리고 말들을 말속에 말아 깊이 숨겨왔어요
씨가 될까봐 혼잣말로 중얼거린 말들이
그녀 몰래 기어코 씨앗을 떨어뜨렸나 봐요
씨가 될까 봐 내뱉지 못한 말들
소문도 없이 싹이 터서 잎이 자라고
다른 방으로 뻗어가 유리처럼 박히는 동안에도
그녀는 씨가 될까봐 속으로만 웅얼거렸어요
속으로만 굴려서 까맣게 씨가 되어 웅크린 말들
오늘 밤, 내시경의 습격으로 깨진 말들
손 쓰기엔 이미 늦어버린 말들에 대해
쉿, 그래도 발설하면 안되요
그 말이 또 다시 나쁜 말의 씨가 될테니까요
*Kristallnacht 독일어로 ‘수정의 밤’.
1938년 11월9일~10일, 독일 전역에서 나치가 유대인을 집중공격한 대규모 폭력사태,
깨진 유리창 조각이 거리 곳곳에 흩어져 있어 ‘수정의 밤’ 이라 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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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찻물을 따르면 수몰되는 마을이 있다
누군가 찻잔을 기울이면
찻잔 속으로 잠기는 성벽과 마을
뜨거운 찻물을 끓이면
마차가 지나는 아치형 돌다리 아래
언 강물이 녹아 흐르고
김 서린 창에 찻물이 듣는 소리가 들려
벽난로에 장작이 타는 소리
촛불을 밝힌 식탁 아래
찻잔이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
모슬린 치마자락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
슬리퍼 끄는 소리가 들렸어
어디서 그릇 부시는 소리
말갛게 헹궈낸 마을을
시렁 위에 포개서 엎어 놓으면
목초지를 지나 오솔길을 따라
유약을 발라 구운 박공지붕 아래로
차곡차곡 밤새워 고이는 빗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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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2024년 문학뉴스&시산맥 신춘문예로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