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1: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 여기서 '실족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스칸달리스데는 '길 가는 도중에 만나게 된것에 부딪쳐 넘어지다', 또는 '그것에 걸려 비틀거리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세례 요한을 위시한 유대인들은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그리고 급격한 변화와 심판을 동반한 가시적인 해방을 가져다 주는 구속자를 대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오신 그리스도는 비천한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현격히 다른 메시야 사역을 행하고 계셨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쉽게 거부했던 것이며 그 결과 그들은 예수께서 보인신 참 메시야관에 부딪혀 걸려 넘어지게 되었고 또한 결국에 그를 통한 구원의 혜택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런 시대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이런 점을 주의시키기 위해 자신을 인해 실족치 말 것을 당부하신 것이다. 실로 계시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며, 계시의 발전 과정이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것이라면 적어도 제한적 사고와 인식을 할수밖에 없는 인간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이고 초역사적인 계시의 한 과정에 걸려 실족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의 조명이나 그분의 능동적인 배려가 없이는 인간은 결단코 진리의 빛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복이 있도다 - 이는 예수와 그의 사역을 믿으며 그를 참메시야로 받아들이는 자는 영원한 생명과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약속에 찬 말씀이다.
그러나 불쌍히도 유대인들은 그릇된 메시야관으로 인해 참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고답적인 사고를 초월한 복음 사역과 그의 천한 모습과 겸손한 태도에 걸려 실족함으로써 그들이 누려야 할 복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나 에수의 약하고 볼품없는 모습과 그의 탈(脫)유대적 인간 관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씀과 능력으로 인해 그를 오실 메시야로 믿고 따르른 자는 그분의 나라에 속한 참으로 행복한 자인 것이다. 실로 예수는 믿어도 되고, 믿지 않아도 되는 세상 진리의 한 측면이 아니라, 안 믿으면 영원한 심판과 형벌, 믿으면 영원한 생명과 복락이 보장되는 진리요 생존의 근거가 된다
[마 11:7]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저희가 떠나매 - 현재형 독립 속격 분사 구문으로서 '저물어 막 떠나가고 있을때'라는 뜻이다. 이는 요한의 제자들의 뒷모습을 아직 바라볼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 있을때로 보는 것이 좋다. 예수께서...말씀하시되 - 이를 직역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시기 시작했다'가 된다.
즉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물러가고 있을 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던진 질문으로 인해 손상된 세례 요한의 권위를 회복시키기 위해 말씀을 꺼내셨던 것이다. 한편 혹자 이때의 메시지가 바로 세례 요한을 위한 장례사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요한에 대하여 -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던진 질문을 기회로 삼아 요한의 참된 사명에 관하여 무리들에게 가르치신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가 그가 외치는 말씀을 들었으며 특이한 그의 외양과 가르침에 상당히 감동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중에서 일부는 또한 그저 호기심에서 그를 보러 나갔던 것 같다.
아마 지금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무리들도 요한에게 나아갔던 그런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예수께서는 이 기회를 잘 활용하여 그들이 과연 요한에게 나아가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질문하신다.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 여기서 먼저 '광야'란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던 유대 광야를 가리킨다
실로 그 당시 세례 요한의 우뢰와 같은 메시지 앞에 유대 군중들은 구름떼처럼 그곳 광야로 몰려들었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일시적이요 충동적이었을 뿐 더 깊은 영적 진리에로 이르지는 못했다. 한편 본문에서 예수께서 이 같이 질문하시게 된 또 하나의 의도는 그들이 세례 요한을 신(神)적 권위를 입은 선생으로 인정하면서도 그가 안내한 바 있는 그리스도는 믿지 않는 불신앙을 깨우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 먼저 여기 나오는 '갈대'(칼라몬)는 집합적인 단수로서 커다란 줄기를 가진 식물을 의미하며 요단강 하류 쪽에 많이 자라고 있다. 이 갈대는 가볍고 길어 글씨를 쓴 도구, 지휘대 측량자 등으로 많이 사용 되었다. 한편 이 '갈대'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정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이리저리 휩쓸리고 방황하는 유대민족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으나 오히려 세례 요한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
즉 갈대란 오늘은 이것을 믿고 이렇게 말하다가 내일은 저것을 믿고 저렇게 말하는 불안정하고 변덕이 심한 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너희가 과연 요한을 그렇게 주관이 뚜렷하지 못한 자로 이해하고 있었더냐'는 것이다. 실제로 요한은 수차에 걸쳐 예수가 메시야란 사실을 증언하였으며 자신의 증언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갈대처럼 흔들리지 않았고 일단 받아들인 진리를 계속해서 믿고 선포했던 것이다.
[마 11: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부드러운 옷 - 여기 '부드러운'이란 부드럽다는 뜻 외에 '사치스러운', '방탕한', '나약한'이란 의미도 들어 있다. 따라서 예수가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분명 풍자적인 의미에서였을 것이다. 한편 '부드러운 옷'은 왕실이나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들이 주로 입던 가볍고 얇은 장식용 의류를 말한다.
이 옷은 올이 가는 린넨 실로 만들어진 고가품이었다. 입은 사람이냐 - 요한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띤 검소한 옷차림을 하였다. 따라서 예수께서 말씀한 이 질문은, 그들이 광야에 요한을 보러나간 이유는 훌륭한 옷이나 외모를 보러나간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말이다.
여기서 예수는 점층법적인 수사법을 쓰면서 마지막에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왕궁에 있느니라 - 이는 헤롯 궁정을 뜻한다. 즉 부드러운 옷 입은 자를 만날 곳은 헤롯 안디바스의 궁정 같은 곳이지 요한이 있던 광야는 아닌것이다. 이런 옷은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예수는 요한이 이 같은 부귀와 영화를 대변하는 인물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즉 요한 역시 예수와 마찬가지로 야생의 투박하고 천한 생활을 하였으며 고난을 겪었지만 확고한 도덕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고난 당하는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자격을 갖춘 것이다.
[마 11: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어찌하여 나갔더냐 - 사람들이 광야로 나갔던 이유는 세상의 부귀 영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를 보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의 핵심은 예수의 메시야 되심이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과연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고 있는가? 선지자를 보려더냐 -
사실 그 당시는 말라기 이후 약 400년 동안 하늘 음성이 단절된 침묵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때로서 모든 백성들은 마음에 선지자를 대망하고 있었다. 그런점에서 사람들은 분명히 광야에서 권위에 찬 메시지를 전하는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의 인정이 정당했음을 지적하셨다.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에 대해 무리들에게 세가지 질문절을 던지시고 또한 스스로 답변을 제시하셨다. 이는 10, 11절의 진리를 확실히 제시하시기 위해서 취한 문답식 강론이었다. 특히 예수는 당신의 독자적 권위로써 말씀하신 것이다.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 - 여기서 '나은 자'에 해당하는 원어 '페리쏘테론' 은 남성형이라기 보다 중성형 단어로서 '넘치는', '능가하는'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이 단어는 그 자체가 비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까닭에 그 뜻을 더욱 강조해 주고 있다. 즉 '페리소테론'이란 '무엇보다 더욱 탁월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구약의 최후 선지자이자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선구자란 점에서 그 이전에 왔던 다른 선지자들보다 더 크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그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이사야는 문학적으로 탁월한 예언서를 남겼다는 점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최고의 선지자란 인정을 받기에 충분하였으며,
더욱이 매우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이사야보다 나은 자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메시야와 같은 시대에 살았으며, 이사야보다 더 분명하게 그의 오심을 선포했고 또 메시야를 백성들 앞에 소개하는 일을 했기 때문인 것이다.
[마 11:10]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기록된 바 -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의 탁월한 선지자적 성격에 대해 구약의 권위를 빌어 인준하신다.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 이는 말 3:1에 대한 히브리어 원문의 인용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어구는 말 3:1의 내용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하리라"와는 부분적으로 차이가 난다.
즉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하나님이 메시야, 곧 자기를 위해 사자를 보내 메시야 앞에서 메시야의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계신반면,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이 당신의 사자를 보내 당신 앞에서 길을 예비하게 할 것이며 또한 당신이 친히 이 땅에 임할 것이라고 에언하고 있다.
즉 말라기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한분으로 언급되고 있는 반면 본문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내용이 아니다. 즉 이 차이는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을 확증시켜 주는 것일 뿐이다.
사실 예언서에 의하면 성자 역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칭해졌던 것이다.. 여하튼 세례 요한은 여호와의 나라를 예비하는 선지 엘리야로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선구자인 것이다. 예비하리라- 원뜻은 '세우다'로서 어떤 일을 위해 미리 기반을 닦아두는 것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특히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세례 요한의 전사역을 의미한다. 실로 요한은 백성들의 마음에 주 예수를 영접하도록 준비시킨 도구였다. 아마도 그는 예수께서 공생애에 들어서자마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증거함으로써 이 일을 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