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 26(연중8주일)/ 이사49:8-16, 1고린3:18-4:5, 마태6:22-34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처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우선순위에 따라서 삶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우선순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사람을 먼저 보는 일입니다.
사람을 먼저 보는 사람은 삶 속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교사는 학생을 보아야 하고, 정치가는 백성을 보아야하고, 의사는 환자를 보아야합니다. 그리고 남편을 아내를 보아야 하고, 부모는 자녀를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보는 사람은 관계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보다 그가 가진 능력이나 이익, 그리고 이해관계가 보이기 시작하면 거기서부터 병들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삶의 우선순위를 갖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요? 이런 것들은 우리게는 필요 없고 이방인들에게만 필요한 것일까요? 먹는 것, 재물입니다. 그리고 입는 것은 권세입니다. 옛 부터 입는 옷으로 그 신분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마시는 것은 쾌락과 즐거움을 찾는 행위입니다. 인간은 살면서 즐거움을 누리며 살고 싶어합니다. 이런 욕구가 문화와 예술을 발전시킨 것입니다.
어떤가요. 우리는 이런 것들은 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없어서는 안 될 정말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는 약속은 바로 이런 축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것이 많이 주어지면 행복할까요? 지금 우리는 예전에 비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이런 것들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행복한가요? OECD국가 중에 행복지수가 꼴찌입니다. 왜 그럴까요? 삶의 우선순위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노아에게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땅에서 나는 열매와 그것을 가공할 수 있는 기술을 주신 것입니다. 노아는 하느님이 주신 이 축복으로 많은 결실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공해서 포도주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노아는 포도주를 너무 마셔서 취해 자식들 앞에서 보여서는 안 될 추태를 보이고 맙니다.
노아가 술에 취했다는 말은 정복당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선순위를 잃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많이 배워도, 좋은 인격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우선순위를 잃게 되면 추하게 됩니다. 이게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주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은 다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전혀 달라집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면 아름답게 쓰여지고, 추한 마음을 가지면 추하게 쓰여집니다. 오늘 말씀은 어떻게 해야 우리가 아름다운 마음을 가질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라”하십니다. 여기서 먼저라는 말이 정말 중요한 말입니다. 이것은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라는 것입니다. 영어 수학도 중요하고, 출세하는 것도 중요하고, 먹고 입고 즐기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먼저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는 마음이 우리의 마음을 아름답게 합니다.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축복의 선물로 주신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들을 통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흥부와 놀부 이야기 후편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흥부는 양식을 구하기 위해 대신 매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몇 푼의 돈을 받아들고 처량하게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이들이 뛰어 오면서
“아빠, 큰일 났어요. 뱀이 처마 밑에 있는 제비새끼를 잡아먹으려고 해요!”
흥부는 매를 맞아서 아파 죽을 지경입니다. 뱀이 제비새끼를 잡아먹든 제비가 뱀을 잡아먹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데 흥부는 아픈 몸을 이끌고 급히 집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큰 장대로 뱀을 쫓았습니다. 궁지에 몰린 이웃을 나 몰라라 하지 않고 돕는 마음, 이것을 성서는 하느님의 정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밑바닥을 보니 떨어진 제비새끼가 다리가 부러져 퍼덕 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흥부는 헝겊을 가져오게 해서 정성을 다해 다리를 싸매 주었습니다. 이렇게 상처 입은 제비를 정성스럽게 싸매주는 행위를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게 우리가 간직해야할 삶의 우선순위입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제비는 떠나고 다시 봄이 왔습니다. 그런데 제비 한 마리가 날아 왔습니다. 다리에 헝겊이 매어 있는 것을 보니 작년에 다리가 부러졌던 제비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제비가 뭔가를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가서 주어 보니 박 씨였습니다. 아니 주려면 황금덩어리를 주던지 박 씨가 뭡니까? 다른 사람 같았으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흥부는 그것을 감사히 여기고, 심고 정성스럽게 가꾸었습니다. 이처럼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게 진리입니다.
사람들은 뭔가 대박이 터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불행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저는 지금 우리 사회의 겪고 있는 불행은 바로 대박문화입니다. 씨를 심어서 잘 가꾸어 부자가 되기보다는 뭔가 한탕해서 부자가 되려고 합니다. 최순실 사건도 바로 이런 한탕주위가 부른 비극입니다.
박이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흥부는 박을 타서 내다 팔기도 하고, 먹을 요령으로 박을 따서는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박속에서 온갖 보물이 쏟아진 것입니다.
그런데 놀부는 어떤가요? 놀부도 흥부처럼 제비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제비가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장대로 제비를 떨어뜨렸습니다. 그런데 다른 때는 잘도 부러지던 다리가 이번에는 부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이번에는 다리를 분질러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리를 싸매주고는 제비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다음에 돌아올 때는 흥부보다 더 많은 박 씨를 달라”고 말입니다.
이듬해 봄이 되어 제비는 박 씨를 물고 왔습니다. 놀부도 그 씨를 정성스럽게 심었지요. 그리고 박이 열리자 흥분이 되어 박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원일입니까? 지옥의 천사들이 나와서 놀부가 갖고 있던 모든 재산을 다 떨어가고 놀부는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왜 놀부에게는 흥부가 받았던 복을 받지 못했을까요? 뭐가 바뀌었나요. 우선 순위가 바뀌었습니다. 놀부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 앞섰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런 것들은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흥부처럼 삶의 우선순위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다 아십니다.
때문에 이런 것들을 축복의 선물로 주십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처럼 이런 것들을 주인으로 여기지는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것들을 주인으로 여기는 순간 우리의 마음을 어두운 곳으로 끌고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재물이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대를 잇기 위해 이스마엘과 이삭을 모두 택할 수 없었던 것처럼, 한 편을 택하면 한 편은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분명히 약속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들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흥부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일들, 뺨을 때리던 형수를 용서하고, 제비를 구해주고 다리를 싸매주던 일, 그리고 박 씨를 정성스럽게 심었던 그 일을 통해 축복을 받은 것처럼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먼저 생각하고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로의 말씀처럼 세상에 대하여 “바보”(1고린4:19)가 되야합니다. 그래야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이 쓴 “부활을 살라”라는 책을 보면 왜 우리가 바보가 되어야하는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숙은 우리 문화의 특징이 아니다. ‘획득하고 소비하는’ 데 집착하는 태도가 우리 문화의 특징이다. ... 많은 사람들이, 성숙해지지 못한 채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알려주는 지도를 사려고 한다. 재정적 안정성, 성적 만족, 승리, 더 좋은 차, 더 좋은 직업, 더 좋은 휴가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는 지도,
하지만 이런 지도는 절대로 우리가 원한 곳으로 데려다 주지 못한다. 더 많이 얻고 더 많이 행할수록 우리의 존재는 더 작아질 뿐이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찾는 것을 성공이고 축복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더 작아지게 하는 유혹이었습니다. 때문에 바울로는 이런 것을 찾는 데에는 바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세상 이치로 보면 어리석습니다. 바보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생명으로, 축복으로 인도하는 참된 지혜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함께 나누며, 지금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마음, 참된 믿음의 길, 축복의 길입니다. 오늘 이사야의 말씀처럼 이렇게 될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우리를 구원의 길,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이 길을 선택할 줄 아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