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에서 한 여인을 만나 대화를 하신다. 그 여인은 벌써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사는 남편도 자기 남편이 아닌 여인이었다. 그 여인의 잘못으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아니면 남성위주 사회의 희생으로 그런 일이 발생한 것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여인은 분명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니는 사람이었고(6-7절. 대낮에 물을 길으러 감), 또한 내적인 갈급함이 있는 사람이었다(15절.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이 여인과 대화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어떤 이는 전도, 어떤 이는 대화의 기술, 어떤 이는 치유라는 측면에서 이 대화를 주목한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 중에 하나는 바로 예배에 대한 것이다. 대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참된 예배에 대해 주제가 좁혀진다. 사실 예수님은 예배라는 주제가 나올 때까지 대화를 계속 이어가다가 그 주제가 나오자 일종의 강설을 베푸신다(21-24절).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참된 예배자와 참된 예배, 바로 그것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가능해졌다. 이것이 이 본문의 참주제이다.
그렇게 본다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23-24절이고, 그 중에서도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리는 것에 대한 말씀이 핵심이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다”라는 말이 두 번이나 반복하여 사용된 것을 보더라도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구절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아래의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참된 예배는 “영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고 예배드리는 것이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의 의미를 알기 위해 우선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1)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한다(요 4:24). “영”이라는 말은 “빛”(요일 1:5)이나 “사랑”(요일 4:8, 16)과 마찬가지로 사도 요한이 하나님을 한 마디로 설명하는 중요한 단어이다.
이 구절에서 “영”이라는 말은 설명하기 힘든 용어이다. 그것이 “인간의 영”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성령”과 동일시 할 수도 없다. 분명히 성령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이 성령이다.”라고 성경은 표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영”을 부정신학의 방법으로, 즉 “무엇무엇이 아니다”라는 방식으로 설명하곤 했다. “영”은 물질이 아니며, 복합물이 아니며, 보이지 않으며, 육체가 아니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보자면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말은 사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영”은 몇 가지 분명한 의미를 지닌다. “영”은 인간과 대비되며(요 3:6), 생명을 주는 분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분이시다(요 1:18). “영”은 바람처럼 보이지 않으나 소리는 들리며 그 효과는 확실하다(요 3:8). “영”의 가장 중요한 작용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며, 새 생명의 원리에 따라 살도록 하는 사역이다(요 3:5, 7:38-39).
따라서 “하나님이 영이시다”라는 말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일하시는 분이시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런 분이심을 분명히 알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참된 예배의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2)
둘째로, 참된 예배는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이다.
“영과 진리 안에서”라는 말도 역시 설명하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많은 신학자들은 “진리 안에서”라는 말이 “영 안에서”라는 말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본다.3)
참된 예배는 성령의 은사로 가능하다. 그렇기에 “영 안에서” 드리는 예배이다. 참된 예배는 육신이 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진리를 알 때에 가능하다. 그렇기에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이다. 이 두 가지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렇기에 성경은 종종 “진리의 성령”이라는 표현을 쓴다(요 14:17; 15:26; 16:13; 그리고, 요일 4:6; 5:6; 살후 2:13 참조).4)
참된 예배는 사마리아 여인이 오해했듯이 예배 장소나 예배 방식에 그 본질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 참된 예배의 본질이 분명해졌다. 그것은 바로 중심의 문제이며,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이다.5)
셋째로, 이러한 참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삼위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다.
참된 예배는 삼위일체적이다. 참된 예배란 그 대상이 영이신 하나님이시며, 그 시작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교제에 있고, 그 성격은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것으로 특징 지워지는 예배이다.6)
이렇게 참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거듭나게 되며 새 생명의 활동을 경험하게 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사모하며, 그 진리를 들을 때에 기뻐한다. 그들은 성령의 활동적인 역사를 그 영혼 속에서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요한복음 4:23-24에서 말하는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삼위일체적인 예배이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과의 만남,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는 예배이다.
이런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서 가능해졌다(요 4:25-26).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예배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복이 되는 것이 바로 그런 까닭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러한 특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공예배에서 가정예배에서 개인예배에서 그런 특권을 감사히 누려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런 성도들을 간절히 찾고 계신다(요 4:23).
1)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The Pillar New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Eerdmans, 1991), 225.
2)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225.
3) 이것을 “설명적 용법(epexegetical usage)”라고 한다. Andreas J. Köstenberger, John, Baker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04), 156.
4)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225-26; Köstenberger, John, 157.
5) Köstenberger, John, 157.
6) M. W. G. Stibbe, John. Readings: A New Biblical Commentary (Sheffield: JSOT Press, 1993), 64. Köstenberger, John, 157에서 재인용.
첫댓글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