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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이야기) 거뜬히 싸우고 사랑하며
혜조스님
“누구세요?”
밖에서 헛기침하며 노크하는 소리에 여인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아버지와 잘 아는 사이인데 잠시 할 말이 있어 찾아왔소.”
친정아버지와 잘 아는 분이 오셨다니 여인은 안심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이윽고 좁은 방문을 통해 들어온 그는 아버지뻘 되시는 보통 분이셨다. 하지만 텅 빈 네모반듯한 방 안쪽 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으신 그의 앉은 키는 천정까지 닿았다. 어머니는 마치 개미가 하늘을 쳐다보듯 우러러보게 되었다.
“당신네 밭에 고추를 하나 심을 터인데, 죽이지 말라고 부탁하러 왔소이다.
다음에 꼭 쓸 데가 있어서 그러니 잘 좀 키워주시오.”
마침 옮겨심기에 알맞게 자란 고추 모종 하나가 눈앞에 화면 펼쳐지듯 보여졌다.
그리고 나서 눈을 떴고 여인은 자신이 태몽을 꾸었음을 직감하였다.
아침밥을 먹으며 남편에게 ‘애가 들어선 거 같다’고 말하였다.
“아들딸이 이미 다섯이나 되는데 뭐하러 더 낳아? 당장 지워버려!”
남편의 불호령과 함께 여인은 어쩔 수 없이 낙태약을 복용하였다.
물론 예사롭지 않은 꿈 때문에 약간 망설여지긴 했지만 남편의 불같은 성미를 알기에, ‘설마 꿈이 맞겠어?’하는 심정으로 약을 삼켰다. 평소 대웅전 불상 옆에 모셔진 화엄성중 탱화가 그림으로만 존재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림 속의 무서운 금강저와 긴 칼을 든 신장님들이 그날 밤에 죄다 튀어나왔다. 그들은 큰 소리로 ‘그렇게 일렀는데도 말을 안 듣는다’ 외치며, 마치 죽이기라도 할 듯이 무시무시한 눈을 부라리며 여인을 쫓아왔다. 혼비백산한 채 정신없이 달리다 눈을 뜨니 여인의 등덜미는 식은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너무 놀라서 그 뒤로 아무리 꼼꼼하게 약을 챙겨주어도 절대 먹지 않고, 이웃의 혼자 살던 동네 할머니 집 울 너머로 몰래 던져버렸다. 그리하여 산달이 되어 출산하자 어린애 울음소리를 듣고, 옆집 할머니가 궁금하여 들여다보셨다.
“기껏 기집애 하나 낳으려고 우리집 담벼락에 맨날 약을 버린 거였어.”
이 말을 들은 남편은 여태까지 챙겨주었던 낙태약을 아내가 먹지 않고 출산한 걸 눈치채었다.
이렇게 나는 어렵사리 이 세상에 태어났다. 원치 않았던 자식이었지만 정작 막둥이딸을 낳자, 아버지는 누구보다 애지중지하여 당신 무릎 위에 앉혀놓고 밥을 떠먹여 주셨다. 어머니는 태몽을 통해 내심 부처님과 인연이 깊은 아이일 것이라 예상하셨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천방지축으로 뛰놀기만 하는 철없는 나를 위해 언제인가 한번 뒤에서 조용히 말씀하셨다.
“얘야, 네 발밑을 좀 잘 보고 다녀라. 부처님은 발밑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중생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신통력으로 땅에서 몇 치 떨어져 걸으시며 땅에는 발자국이 남도록 하셨다더라. 네 발밑에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있는지 다치지 않게 잘 살피며 걸어라.”
뛰어놀기에 바쁘기만 했던 나는 어머니 말씀을 들으면 약간의 반항심이 생겨서 더 내달리며 소리쳤다.
“그건 부처님이니까 그런거고, 내 알 바는 아니야.”
그렇지만 한 번이라도 들은 말이 있으면 언젠가 수면 위로 떠오를 때가 있다고 하지 않던가!
어머니 면전에서는 그렇게 어깃장을 부렸지만, 혼자서 나무나 하늘을 올려다보며 걷다가 문득 어머니 말씀이 떠올라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발밑에는 무수한 개미들이 바쁘게 무언가를 실어나르고 있었고, 특히 비 내린 다음 날에는 진흙탕 위로 달팽이와 지렁이들이 꾸물꾸물 많이 기어다녔다. 발밑의 생명을 보호하라는 어머니 말씀에 따라 개미나 지렁이들을 밟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하기를 며칠인가 지났을 무렵, 하루가 멀다하고 무릎이 깨져 늘 빨간약을 발라야 했는데 문득 무릎에 피가 나지 않음을 발견했다. 다만 작고 징그러워 보이는 벌레들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조심한 것뿐이었거늘, 남의 생명을 보호하려 하니 오히려 내 몸을 지키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간의 인상적인 체험에 불과했고, 또래 친구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뛰어놀기에만 바빴다. 그런데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지옥에 떨어진다’는 말을 듣고 성경에 빠지게 되었다. 우선 나 하나라도 열심히 하나님을 믿어서, 불교를 믿는 우리 식구들을 모두 구해내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탔다. 중학교에 진학했어도 학교 수업은 건성이었지만,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도중 여호와증인 자매님 집에 들러 성경공부에 몰입하였다. 식구들 몰래 비밀로 했는데 중학교 2학년이던 어느 날 아침, 아버지께서 갑자기 내게 물으셨다.
“네가 진짜 여호와증인이냐?”
거짓말을 할 수 없어서 ‘그렇다’고 대답하자, 아버지는 나를 달래기도 하고 호통도 치며 타이르셨다. 그러다 백번 양보해서 ‘정 하나님을 믿고 싶으면 여호와증인 말고, 차라리 교회를 다니든 성당을 다니라’고 설득하셨다. ‘그럴 수 없다’고 말하니, 아버지도 어쩔 수 없다며 마당에 멍석을 펴게 하셨다. 또 사춘기에 들어선 소녀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하면 빨리 항복할 것이라는 계산(?) 때문인지 ‘옷을 벗으라’고 큰소리치셨다. 내가 메리야스와 팬티 바람으로 멍석 한가운데에 무릎을 꿇자, 아버지는 비장한 표정으로 바지의 가죽혁띠를 끌러내셨다.
조용한 시골 마을의 일요일 아침 날, 난데없는 고함소리로 인해 동네 사람들이 웅성웅성 우리집 마당으로 들어와 걱정 어린 눈길로 아버지와 나를 쳐다보았다. 그때 심정에 하필 신라 시대 흰 피를 쏟으며 순교했던 이차돈이 떠올라 ‘나도 이 자리에서 죽으리라’ 결심하였다. 그랬더니 가죽혁띠가 아무리 등짝을 내리쳐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렇게 아침을 먹다 말고 시작된 교육불사(?)가 점심도 거른 채 오후까지 이어졌다. 두어 시간마다 화장실 때문에 잠깐 채찍을 내려놓고 내쉬던 아버지의 한숨소리가 지금도 선명하게 들린다.
“아이고 독한 년, 아프다는 신음소리 하나 없네!”
누구도 서슬 퍼런 아버지를 감히 나서서 말리지 못했으며, 얼마나 지났나 어느새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화장실을 가려는데 처음 나를 여호와증인이 되도록 이끌었던 아주머니가 ‘이럴 땐 방편으로 아무 종교도 믿지 않겠다’고 하라며 귀띔해주었다. 그래서 다시 멍석에 앉으려다 말고 내가 먼저 아버지께 제안을 했다.
“저는 앞으로 불교도 믿지 않고 성경도 믿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이에 아버지는 아예 각서를 쓰라고 명命하셔서, 얼른 종이를 가져다 ‘앞으로 무종교로 살겠다’ 쓰고 지장指章까지 찍었다. 이 임시거짓말로 인해서 아버지 노여움을 우선 잠재웠고, 지켜보던 동네 사람들도 비로소 되돌아갔다.
난생처음으로 아버지께 매질을 당했던 다음 날엔, 결국 일어나지 못해 학교를 결석하고 말았다. 하지만 다시 학교에 다니면서 여호와증인 자매집에 들러 성경공부를 계속 이어나갔다. 그러나 점차 문학서적이며 철학서적을 좋아하여 읽다 보니 성경 내용에 자연스레 회의감이 들었다. 특히 구약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맨 나중에 창조하여 다른 피조물들을 맘대로 지배해도 된다는 대목이 매우 의아스러웠고 너무 이기적으로 보였다. 또 예수님께서 광야설법 도중 모두 목마르고 지쳐서 멀리 보이는 큰 나무를 보고 열매를 따먹으러 갔는데, 그 나무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아 열매가 없는 걸 보고 예수님이 무성하게 자란 나무를 손바닥으로 치자 그 자리에서 고사枯死했다고 한다. 성경공부를 지도했던 선배 자매님은 예수님의 신통력이 이렇게나 대단하다 찬탄했고, 나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학교 수업 틈틈이 성경을 펴보다가 이 대목에서 문득 반감이 생겼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때가 되지 않아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가 왜 죄를 지은 것인가? 아무리 예수님이 사랑을 강조하며 복음을 전했으나, 기어다니는 벌레를 비롯한 뭇 생명을 소중하게 여겼던 부처님의 자비에 비하면 마치 큰 바다 가운데 한 바가지 정도의 물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헐벗고 소외되었던 ‘네 이웃을 사랑하라’ 외치신 예수님 말씀이 그르다는 뜻이 아니다. 이를테면 온 우주의 생명을 존중하고 아꼈던 부처님의 대자비大慈悲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성경책을 내려놓지 못했다.
‘이미 완전한 진리가 아니라고 판단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학교에서 시간날 적마다 매일 성경책을 보는 것일까?’
어느 날 냉정하게 스스로 자문自問해보았다. 그것은 최후의 심판날 죽지 않고 살고 싶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바르고 착하게 살았어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하늘의 유황불이 내려와 심판한다는 요한계시록의 예언이 무서워서 자꾸 매달리고 있었다. 이윽고 목숨 하나 연명하기 위해서 성경을 붙들고 있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비겁하게 여겨졌다. 마침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양심의 소리를 끝내 외면하지 못해 눈을 질끈 감은 채,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크게 부르짖었다.
‘하나님, 저는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굳이 아마겟돈 심판날까지 갈 것 없습니다.
어서 이 자리에서 하늘의 불칼로 내 두개골을 빠개 죽이세요!’
당시 고등학교 1학년 여름날이었다.
따가운 햇볕 아래 교장 선생님의 훈화를 듣는 지루한 조회시간에 친구들은 재잘재잘 떠들어댔지만, 내 안의 삶과 죽음을 판가름하는 어마무시한 결정 앞에서 외부 소리가 온전히 차단되었다. 진짜 죽으려는 자세로 눈을 감고 서서 머리통이 깨어지길 기다렸지만, 5분이 지나도록 하늘의 불칼은 내려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눈을 뜨며 자신에게 속삭였다. ‘이제부터 내 종교는 가장 휴머니즘적인 불교다!’ 아마 중등학생을 위한 법회가 있었더라면 열심히 불교를 공부했으련만, 유감스럽게도 시골 절에서는 청소년 법회가 아예 없었다. 나중에 대학생 불교연합회 동아리에 가입했지만, 불교 공부보다는 스님들에 대한 비방만 일삼았다. 핑계를 대자면 출가한 스님들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았기 때문에, 그에 부응치 못한 모습을 보면 남이 불교를 욕할까 싶어서 먼저 욕을 했던 거 같다.
그러다 졸업을 앞둔 겨울방학 때 어머니와 함께 쌀쌀한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미끄럽지도 않은 평지에서 느닷없이 어머니가 앞으로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셨다. 택시를 불러와 병원에 모시려 했지만, 어머니는 절대 택시를 타지 않겠다며 고집부리셨다. 이미 택시기사님은 밖에 나와 기다리시는데, 모친은 당신 몸에 손도 못대게 하시니 속이 답답할 지경이었다.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뼈에 금이 간 것이 분명한데, 무슨 까닭으로 병원에 안 가겠다는 것인지 이유라도 알자고 캐묻자 어머니가 답하셨다.
“어떤 스님과 백일기도 입재하기로 약속한 날이 내일모레다.
지금 병원 가면 깁스할 것이 뻔한데, 그러면 어떻게 절에 갈 수 있겠느냐?”
어머니는 스님과의 약속을 깨지 않기 위해서 부러진 다리를 질질 끌고서라도 산에 올라가겠다는 각오다.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기 위해 한시가 급한 내가 말씀드렸다.
“엄마, 그럼 스님과의 약속만 지키면 되는 거죠?
그렇다면 제가 대신 백일기도를 가고, 엄마는 병원 가면 어때요?”
그러자 내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대신 백일기도를 간다면 내가 병원에 가마.”
모친 말씀에 선뜻 그러겠다 약속하고 택시기사님 도움을 받아 병원에 모셨다. 무릎뼈에 금이 가서 한쪽 다리를 허벅지까지 깁스하신 모친을 남겨두고, 이틀 후 당신이 약속하신 절을 처음 찾아갔다. 법당에 들어가 참배한 다음 무심히 부처님을 보는데, 낡은 암자의 부처님 몸에는 미세한 먼지가 켜켜이 쌓여있었다. 순간 대불련 활동하며 비록 나쁜 의도는 아니었더라도, 스님들을 무수히 욕했던 것이 먼지가 되어 부처님 어깨에 소복히 내려앉은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 그 자리에 엎드려 울며 한참 동안 용서를 빌고 나와 스님을 뵙고 다른 신도님들과 같이 밤새도록 염불을 했다. 그렇게 백일간 매주 토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새벽까지 철야 정진을 하되, 평일에는 집에서 염불 숙제하며 기도를 이어갔다.
그 백일기도 첫날 밤새 철야정진을 마치고 아침죽을 얻어먹은 뒤, 날이 채 밝지 않은 산길을 후레쉬 불빛만으로 조심조심 더듬대며 내려왔다. 춥고 어둑한 새벽빛 속에서 버스가 도착해 자리에 앉아 밖을 내다보니, 거리의 가로등 빛과 마을 집의 불빛들이 성에가 잔뜩 낀 차창 너머로 띄엄띄엄 보였다. 이윽고 덜컹거리며 버스가 출발하자 크고 작은 불빛들이 이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순간 뒤통수를 크게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영원할 것만 같은 내 젊음과 청춘도 지금 저 불빛들처럼 불현듯 사라질 수 있겠구나!’
너무 급한 나머지 모른 결에 꽁꽁 쟁여있던 마음속의 외침이 의식의 표면 위로 튀어 올라왔다.
‘부처님, 공부 좀 하게 해주세요!’
엉겁결에 「발원」이라는 졸시를 한 편 끄적였다.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올바르고 정직한 눈으로//세상을 바라보고/실천해나갈 수 있도록//…(중략)…/거뜬히 싸우고 사랑하며/살아가게 해주소서!//”
그렇게 버스 안에서 간절하게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날 밤부터 날마다 삭발하고 가사 장삼을 수垂한 어떤 스님이 꿈속에 보이는데 바로 내 모습이었다.
어느 때는 천수경을 외우며 목탁을 치고, 또 어느 날은 고요히 합장하고 서 있는 모습이 보이며, 어떤 날은 천상에서 하얀 손이 황금으로 된 한문 금강경을 내려주어 그걸 받아서 막힘없이 줄줄 읽다가 깨어나기도 했다. 꿈이었음을 알고는 언제 내 한문 실력이 그렇게나 좋았던가 싶었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면 긴 머리의 아가씨인데, 어느 것이 진짜 현실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머리 긴 아가씨보다 꿈속의 머리 깎은 스님이 훨씬 멋져 보였으나, 내심 절에서 자란 고아나 아주 특별한 사람만이 스님이 된다는 잘못된 고정관념을 떨쳐내지 못하고 고민만 깊어갔다. 매일 모친을 간병하며 그날 꾼 꿈에 대해서 얘기해드렸는데 백일기도가 끝날 무렵, 이 일련의 꿈들이 나도 스님이 될 수 있음을 예시하는 것이라면 정말 스님이 되고 싶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하거라.
부처님께서도 늙은 나보다는 젊은 네가 더 필요하신가 보다.”
모친께서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당신의 오랜 바램, 즉 막내가 대학 졸업하기만 하면 바로 입산해 공부하겠다던 삶의 유일한 꿈을 포기하시고 나의 출가를 허락하신 것이다.
“엄마, 첫 월급 타서 속내의 한 벌 사드리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죄송해요.”
어머니께서는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석달간 나를 간병한 것으로 은혜는 이미 다 갚은 것이다.
아무 염려하지 말고 가서 열심히 공부하거라.”
출가 결심을 하고 나자 신기하게도 매일 밤 꿈속에 나오던 멋진(?) 스님이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식구들에게 졸업식 마치고 정확히 일주일 후에 출가하겠다 알리니, 아버지를 비롯한 두 오빠의 극심한 반대와 부딪혔는데 이것 역시도 어머니께서 전부 막아주셨다.
“집안에 스님이 한 분 나오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그걸 막느냐?”
졸업식 날엔 그동안 아껴주신 교수님과 친구들에게 따로 이러구러 말할 분위기도 아니었으며 또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세속에서의 관계도 소중한지라 그 인연을 끊고 출가할 때, 좀 섭섭하고 아픈 마음은 나 역시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보다 높고 큰 희망을 위해 ‘십 년 안에 도사가 되어 돌아오겠다’던 약속을 아직도 지키지 못해 송구할 따름이다.
다시 한번 출가의 깊은 인연에 마음 깊이 감사드리며, 이렇게 수행의 길을 가는데 크고 작은 도움을 주신 부모님을 포함한 여러 은혜를 잊지 않고 새롭게 정진의 끈을 다잡는다.
첫댓글 어찌 안올리시나 기다렸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이렇게 올려주셨어 출가이야기를 잘 보았습니다.
항상 건강지키시고 많은이를 제도하심에 근면하십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나이들어가니
어머님께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가?
한번씩 뒤돌아봅니다.
며칠전 여동생과 고향의 어머님 산소에서도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_()_나무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
@여여월 저도 그렇습니다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佛法僧 三寶님께 歸依합니다.
거룩하시고 慈悲하신 부처님의 加被와 慈悲光明이 비춰주시길 至極한 마음으로 祈禱드립니다. 感謝합니다.
成佛하십시요.
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I return to Buddha, Law, and Seung Sambo.
I pray with utmost heart that the holy and holy Buddha's robe and mercy light will shine on it. Thank you.
Holy Father.
Avalokitesvara Bodhisattva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가시는 길마다 꽃길이시길 두손모음니다.
감사합니다.
_()_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
항상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아름답고 귀한 글 봅니다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