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1-10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2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3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4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5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6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7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8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임신부님 강론
연중 제31, 10월 30일, 루카, 19,1-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19,10)
+찬미예수님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고, 관계적 존재이기에 늘 누군가를 만납니다. 하루에도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 만남이 때로는 기쁨과 즐거움도 주지만 상처를 주고, 받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 좀 있고 싶다" 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때론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 아무도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고립감과 외로움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클 것입니다.
몇 년 전 모 방송사에서 의식주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상태로 펜션에서 홀로 지내는 것에 대한 실험을 방송한 바 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최소 일주일은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했지만 채 이틀이 지나지 않아 외로움을 토로하며, 때로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하고 이상한 행동을 보여 실험 참가자가 중도에서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먹고 입고 자는 것에 전혀 문제가 없지만 혼자 있는 것이 이만큼 힘든 것입니다.
2001년 톰 행크스가 주연한 영화 “캐스트 어웨이 Cast Away,”를 보면 무인도에 혼자 떨어져 사는 사람의 심리를 볼 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외로움 때문에 바닷가에서 주운 배구공 하나에 사람 얼굴을 그려놓고 윌슨이라고 부르면서 대화를 합니다. 섬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배구공 월슨을 떠나보내게 되자 “미안해 월슨”이라고 절규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교도소의 수감자들에게 가장 피하고 싶은 처벌은 독방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독방에서는 극단의 불안으로부터 오는 공포와 심지어는 환상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완전히 홀로 있다는 것은 가장 큰 형벌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창세 2,18)
사람은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인간다워지고, 변화 성숙이 됩니다.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감정의 공유가 생기고 정서를 발달시키기 때문입니다.
연준혁, 한상복이 쓴 “보이지 않는 차이”라는 책에서 말하길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남을 통해서 배우고 발전하며 행운을 부른다고 합니다. 내가 익숙하지 않은 것에 익숙하고 내가 관심이 없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내가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통해서, 그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적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관용의 만남이 우리에게 성숙과 행운을 가져다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합니다. 작은 체구와 키 때문에 군중에 가려져서 볼 수가 없자, 다른 사람을 앞서가서 돌 무화과나무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려고 합니다. 세리였던 그는 유대인들에게 손가락질받는 죄인이었습니다.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하고 사람들이 투덜거릴 정도입니다. 하지만 자캐오의 노력을 보시고 예수님은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19, 5)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캐오는 구원을 받았고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보입니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19,9)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19,9-10)
예수님은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죄인인 자캐오 조차 함부로 대하지 않고 소중히 여깁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께서는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 당신 불명의 영이 만물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지혜11,26.12,1)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만든 피조물들을 다 소중하게 여깁니다. 특히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존재이기에 더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사람을 구원하려고 당신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모두다 소중하게 대합니다. 그렇기에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감동받고 변화된 삶을 삽니다.
“가장 훌륭한 교육은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영성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박성만, 관계는 마음이다.)
예수님처럼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가슴 속에 품은 진실과 사랑의 따듯함에서 나옵니다. 자캐오를 감동시킨 예수님의 사랑처럼 따듯한 사랑으로 감동을 주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세상에 혼자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홀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만남을 통해 성장하고 변화되는 사람입니다. 만남은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을 가져옵니다. 참된 만남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과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의 문제는 자신과 같은 부류가 아니면 만남 자체를 거부합니다. 자기들보다 못한 이들을 가르치려고만 하며, 비난과 험담으로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합니다. 그들은 자케오를 죄인이라 비난하듯이 역시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그들에겐 만남의 기쁨과 구원의 기쁨이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관계를 통해서 정서의 공유와 공감을 통해서 변화 성숙 되듯이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참된 행복과 구원을 얻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삶을 바르게 살게 하고 참된 행복을 맛보며 영원한 생명을 보장합니다.
이 구원의 길에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초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집에도 “이 집에 오늘 구원이 내렸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함께하도록 기도합시다.
주님 사랑의 따듯함과 감동을 주는 그리스도인 삶을 삽시다. 아멘
무태성당 이민락 라우렌시오 신부
첫댓글 아멘 !!
참 정겨운 이름이 친구입니다.
그중 사랑이 많고 따뜻하고 늘 배려하고 늘 들어주는 친구는 생에 선물입니다.
아무말 안해주어도 눈빛 만으로도 옆에 함께 해 주는것 만으로도 용기가 되고 기쁨이 됩니다.
예수님은 내친구라는 노래가 떠 오릅니다.
친구같은 부모 친구같은 형제 친구같은 부부 친구같은 자녀 친구같은 할머니 친구같은 교형자매로
내 자신이 친구되고 싶습니다.
예수님처럼 넘치는 사랑으로 사람들에게
진실과 사랑의 따뜻함을 지녀 살게하소서.
만나는 모든이를 통해 성장하고 감동 주고 받으며 서로를 인정하고 포용과 사랑으로 다함께 하느님자녀로 존중 받게 하소서.
주님과 이웃에게
참된 만남을 가져 행복하게 하소서.
오늘 이집에 구원이 내렸다.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
+ 찬미예수님
아리스토텔레스 는
"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
라고 했습니다 .
태초에 천지 만물을 지으내신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당신 모습대로 아담을 빚어
만드시어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 창 2/7 )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아담의 갈빗대를
하나 뽑아 남자의 일을 거들
짝을 만들어 주시고 (2/19),
원조를 만들어 주신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서로
어울려 잘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처럼 되고 싶은 교만으로 하느님의 명을 어긴 원조들의 잘못이 죄의 뿌리가 되어 ,
선한것을 알기는 하지만 실천
하기를 어렵게 하는
악의 유혹으로 원죄가운데
살아 가느라 ,
인간의 한계는 항상 죄에
무리수를 두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조건이 돼버렸습니다.
오늘도 죄의 뿌리가 된 교만으로 혼자 잘난척 독뿔장군 처럼
설쳐 대다가는 끝내
내침 받게 되고, 나락에 떨어짐을 보게 됩니다.
특히, 믿는이 로서의 우리는 ,
영성은 머리로 하는것이 아닌 가슴으로 하는 것이니 ,
나와 다른것도 이해하고
받아 들일 줄 알아 어울려
살 줄 알므로서 좋은 것은 함께